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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는 어떻게 서양문명을 세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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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는 어떻게 서양문명을 세웠나

토마스 우즈 주니어 | 우물이있는집 | 2008년 04월 30일 리뷰 총점8.0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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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는 어떻게 서양문명을 세웠나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8년 04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52쪽 | 463g | 153*224*30mm
ISBN13 9788989824503
ISBN10 8989824508

관련분류

책소개

목차

저자 소개 (1명)

미국 루드비히 폰 미제스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치적 불편함을 무릅쓴 미국 역사의 해석 The Politically Incorrect GuideTM to American History』『미국 역사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는 33개의 질문33 Questions About American History You're Not Supposed to Ask』 등을 ... 미국 루드비히 폰 미제스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치적 불편함을 무릅쓴 미국 역사의 해석 The Politically Incorrect GuideTM to American History』『미국 역사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는 33개의 질문33 Questions About American History You're Not Supposed to Ask』 등을 집필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2006년 템플턴 엔터프라이즈 상을 수상했다.

「자유의지론 연구저널Journal of Libertarian Studies」의 편집자이기도 한 그는 10여 개의 신문잡지에 기명칼럼을 연재해왔으며, FOX 뉴스채널 등에서 경제비평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토머스 우즈 주니어는 경제학자임과 동시에 역사학자로서 정치, 경제, 종교를 아우르는 날카로운 분석과 비판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그의 전작 『정치적 불편함을 무릅쓴 미국 역사의 해석』은 국민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정부기관인 연방준비제도와 정치인들이 인위적인 과열붕괴순환을 일으키고 있음을 고발하여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2009년 2월, 우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뉴딜을 외쳐대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시의적절한 교훈을 제시한다.

『케인스가 죽어야 경제가 산다(원제 Meltdown)』는 1930년대 대공황이 그처럼 오래 지속된 이유는 익히 알려진 바와 달리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 때문이며, 실제로 케인스식 부양 프로그램은 천문학적 지출에 비해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폭로한다. 이 책은 규제완화와 과도한 리스크가 경제를 좌초시켰다는 정부와 주류경제학자의 공세를 정면으로 반박, 부동산 및 주식시장 붕괴의 진정한 원인을 파헤친다. 더불어 ‘쏟아붓기식’ 일시적 충격요법에 몰두하고 있는 오바마노믹스를 통렬히 비판하여 출간 즉시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특히 뉴욕타임스에서는 10주 동안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다.
역자 : 김정희
이화여자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 주립대에서 석사학위를, 전북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전담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주기전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강의전담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성서 속의 음식』, 『사랑과 음식』, 역서로는 『어떻게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까』, 『음식과 몸의 인류학』, 『3천년을 향한 변화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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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책의 내용

“암흑기”의 파괴를 막고 발전시킨 수호자는 바로 가톨릭교회다
로마제국의 멸망을 가져온 반달족, 훈족, 고트족, 게르만족, 프랑크족 등 다양한 바바리안들이 유럽을 지배하는 동안, 가톨릭 주교, 성직자, 신도들은 문명을 재건하며 바바리안들을 개종시키고 문명을 전파하였다. 특히 그중에서 프랑크족은 가톨릭의 도움으로 메로빙거왕조에서 카롤링거왕조로의 변화를 겪었다. 이 왕조는 발전을 거듭해 샤를마뉴대제 때에 이르러 중세 유럽 왕국형성의 발판을 만들었다. 이 시기는 “카롤링거르네상스”라고 불리며 고전문화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육과 예술이 장려되어 고대문학과 다양한 학문이 계승되었으며, 그 결과 “카롤링거 소문자”를 개발되었다. 이는 지식의 소멸을 막음과 동시에 배움과 문화의 빛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수사들은 어떻게 서양문명을 지켜냈을까?
3세기 중엽부터 4세기 중엽 사이, 소규모 은둔생활로부터 시작한 수도회는 성 바실리우스의 견해에 따라 공동체 생활을 하는 형태의 수도원으로 발전한다. 이후 영적 지배와 검소한 삶을 추구한 베네딕투스 수도회는 많은 교황, 추기경, 대주교를 배출하였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발전한 수도원제는 중세 서양문명을 이끄는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 실용기술
수도원과 수도사들이 실용기술을 발전시킨 가장 큰 예는 농업이다. 수도 생활의 핵심인 직접 손으로 하는 노동을 통해 수도사들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농업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들은 늪지와 황무지, 숲을 개간하였다. 이들의 노력은 유럽 지역 중 일부 지형을 변형시킬 정도였다. 또한 그들은 농법, 가축사육법, 작물재배법, 치즈 제조법, 맥주양조법 등을 개발하고 보급하였다. 심지어 포도주를 자체적으로 양조할 수 있었던 수도원은 샴페인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시토 수도회는 수력을 이용한 기계를 사용하였는데 수도회의 긴밀한 네트워크 덕으로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동일한 기술 수준을 성취하고 있었다.
-. 기술고문인 수사
수도원이 유럽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수사들은 다양한 기술 보급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수사들은 야금기술을 보급하였는데, 실제로 소금, 납, 철, 명반, 석고의 채광 야금술을 전파하였다. 칼과 유리를 제조해 파는 가게를 운영하고 벽난로 뒤의 철판 등을 제조하는 데에도 수사들의 상상력을 제공되었다. 수사들의 업적 중에는 신기한 것부터 사소한 것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는데. 11세기 초 아일머라는 수사는 글라이더를 이용하여 600피트 이상을 비행한 기록이 있으며, 몇 세기 후 예수회의 성직자 프란체스코 라나 데 테르지는 체계적으로 이 비행실험을 하여 ?비행기술의 안내서?라는 책을 써 비행의 기하학과 물리학을 설명한 첫 책을 내기도 했다. 수사들은 여러 가지 시계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그중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계 중의 하나도 있다.
-. 자선활동
‘베네딕투스의 규율’은 “오는 모든 사람은 마치 그들이 예수님인 것처럼 대접받아야한다”고 하여 수사들에게 자선과 친절을 베풀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수도원은 여행자와 순례자, 길 잃은 사람들의 비상 쉼터 역할을 하였다. 수도원 수사들은 깊은 숲에서 길 잃은 사람들을 위해 종을 달고, 난파한 선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암초에 종을 다는 등의 활동과 다리, 도로를 건설하는 데에도 공헌하였다.
-. 필사된 글
6세기 중엽 비바리움 수도원(6세기의 유일한 도서관으로 알려져 있음)을 세운 카시오도루스는 필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고대 라틴문화의 수혜를 현재까지 누리고 있는 것은 비바리움 수도원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책 때문이 아니라 다른 수도원의 도서관과 필사실 덕분이다. 이렇게 필사된 작품들은 대성당과 관련된 도서관과 학교 덕택에 보존될 수 있었다. 가톨릭교회의 여러 교황과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플라톤 등의 작품을 읽었으며 그들의 저서에도 언급하였다. 이는 교회가 고대의 작품을 소중히 여겨 보존하고 연구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대의 작품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서를 필사본으로 만들고 보존한 것이다. 수사들이 성서를 필사하고 보존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바바리안의 침략과 습격으로부터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교회와 대학
흔히 중세는 지적 억압 시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양문명에 위대한 지적 공헌을 한 대학 시스템이 탄생한 것은 중세 교회의 덕이다. 파리, 볼로냐, 옥스퍼드 대학이 언제 생겼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그들 대학은 초기에 가톨릭 학교에서 출발하여 교수와 학생의 비공식적 모임의 형태로 진화했다. 이런 중세학교에는 필수과목이 있었고, 교수가 강의를 했으며 잘 짜여진 일정과 학업 프로그램이 있었고 학위도 수여했다. 교황은 대학을 세우고 학업을 장려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종교개혁 시기에 81개 대학이 있었는데 그중 33개가 교황산하기관이고, 15개가 왕정 소속, 20개가 양쪽 모두에 속했으며, 13개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 시민과 대학 관계자
중세의 대학과 지역관료는 갈등관계에 있었다. 대학이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었지만, 학생들은 제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대학생들에게 성직자와 같은 특전을 주었다. 교황도 대학과 관련된 여러 사건에서 항상 대학생의 편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교서 ?학문의 아버지?를 통해 파리 대학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별도의 교황사법권을 부여해 대학과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특권을 주었다. 중세의 대학은 건물과 캠퍼스가 부족해 특정장소가 아닌 교수와 학생이 대학 자체였다. 그래서 강의실이 아닌 성당이나 개인적인 장소에서 수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생들은 신입생 때 시민법, 교회법, 자연철학, 산학과 7가지 교양과목을 공부했는데, 12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동안의 변역에 들인 엄청난 노력 덕에 더욱 다양한 고대의 학문들을 공부할 수 있었다.
-. 학문적 삶
초기 대학에서 학생들은 강의를 들으며 토론에 참여했다. 교수들은 고전 해석으로 수업을 했는데 논리적 논증으로 문제를 푸는 포함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해결방식이 고전해석을 완전히 대신하였다. 이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보이는 학문적 논쟁 문답법의 기원이다. 학생들이 학위를 받기까지는 보통 4-5년이 걸렸다. 학위 취득 후에는 직업을 갖거나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으면 대학에서 가르칠 자격을 갖게 되었다. 교사자격증과 석사학위를 받기위해서 엄청난 양의 독서와 연구가 필요했다.
-. 스콜라철학의 시대
중세의 논리학 연구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자연적으로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랐다. 학자들은 직접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책은 12세기에 쓰인 요하네스 21세의 ?논리학 총론?으로 17세기까지 166차례나 개정판이 나왔다. 이런 논리학에 대한 열정은 이해와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경향을 만들었고, 이것이 스콜라철학의 시대를 만들었다.
초기의 학자들로는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중명하려한 스콜라철학의 창시자 안셀무스, 초기 교회 신부들과 성서를 인용해 명백한 모순을 정리한 ?예와 아니오Sic et non?를 써 후세 사람들이 답을 찾도록 만든 아벨라르 등이 있다. 스콜라 철학자 중 가장 뛰어났던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신학과 철학에 관한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였다.

교회와 과학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종교재판 일화는 가톨릭이 과학과 적대적 관계라는 생각을 심어줬다. 하지만 갈릴레오의 재판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교회는 갈릴레오의 연구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로마로 초청해 연구발표를 하기도 했고, 그에게 연구를 맡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동설이 성서와 위배되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가설로만 인정했다. 가설로 인정하고 연구를 하는 것에는 교회도 반대하지는 않는 상황이었지만 갈릴레오는 정설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교회와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갈릴레오의 재판이 있은 후에도 많은 신부와 교회 과학자들이 가설로 지동설을 연구하는 것에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 신은 분량, 수, 무게로 모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스도교에서 신을 포함한 그의 창조물은 이성적이고 정돈된 것을 생각해왔다. 성서 도처에는 자연현상의 규칙성이 신의 선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질서의 반영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신이 창조한 질서의 원리를 탐구라는 지적 노력으로서의 과학이 가톨릭 환경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가톨릭의 과학은 범신론이나 비과학적 입장에서 자연을 탐구하지 않고 자연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였다. 뉴턴의 관성 법칙이 나오기 전인 14세기, 뷔리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는 영원하다는 이론에 반대하며 관성에 관한 아이디어를 냈다. 이런 뷔리당의 이론은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가톨릭적 믿음이 바탕이 되었다.
-. 샤르트르 대성당 학교
11세기 풀베르투스 주교의 노력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이 학교는 티에리의 총장 재임 때부터 산술, 기하, 음악, 천문의 4과와 문법, 수사학, 논리학의 3학의 교양과목으로 채워졌다. 12세기 자연철학의 특징 중 하나는 자율적이고 이성에 의해 분별할 수 있는 불변의 법칙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샤르트르는 이점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는데, 자연의 인과관계를 토대로 설명하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11세기 말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를 정복하게 되자 라틴어 번역이 그리스 출신의 사람들에 의해 직접 이루어졌다. 그 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천체에 관하여? 등 주요 물리학 저서들도 번역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영원성, 진공의 불가능 등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신의 능력을 부정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이런 배경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죽음 이후 219개 명제에 대해 정죄한 ‘1277년의 대단죄’가 일어났다. 이 사건은 그동안 아리스토텔레스에 지나치리만큼 의존적이던 사고에서 탈피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안티-아리스토텔레스적인 논쟁은 17세기 과학혁명의 시작을 통해 유럽지식의 역사에 영향을 주었다.
-. 과학자-성직자
과학자로서 이름이 알려진 많은 사람 중에는 가톨릭 성직자가 상당히 많다. 이는 교회와 과학이 적대적이거나 의심의 관계가 아닌 우호적 관계라는 것을 어떤 이론적 논증보다 잘 보여주는 예이다. 특히 13세기의 과학자들 몇몇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 현대적 과학방법의 선두주자이며 실험과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베이컨은 수학과 광학의 연구로 존경받고 있다.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진 성 알베르투스는 자연과학자로 엄청난 양의 기록을 남겨 물리학, 논리학, 형이상학, 생물학, 심리학, 지구과학 등에 영향을 주었다. 옥스퍼드의 총장과 주교를 봉직한 그로스테스테는 과학적 실험방법의 완벽한 단계를 적은 첫 번째 사람으로 불린다. 과학에서 일부 가톨릭교도는 이름이 부당하게 알려져 있는데, ?자연의 작용으로 고체 속에 밀폐된 고형체에 관한 니콜라우스 스테노의 논문 서론?으로 현대 지질학 원리의 대부분을 세운 공로자로 인정받는 스테노 신부가 대표적이다.
-. 예수회 수사들의 과학적 업적
과학에 영향을 끼친 가톨릭 성직자를 가장 많이 배출 한 곳이 16세기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설립한 예수회이다. 예수회 수사들은 다양한 과학 분야에 공로를 세웠는데, 그중 많은 수학자들 자랑한다. 수학역사가인 샤를 보쉬가 기원전 900년부터 서기 1800년까지의 유명한 수학자 303명의 명단을 만들었는데 그중 16명이 예수회 수사들이었다. 또한 달에 있는 분화구 중 35개가 예수회 과학자와 수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또한 예수회는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지에서 과학의 전파와 해당지역의 과학 연구에 힘썼다. 예수회원 중에는 리치올리 신부와 그리말디 신부, 보슈코비치 등 천문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이들이 있다. 또한 오덴바흐와 매클웨인 신부 등은 현대 지진학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교회와 예술, 건축
서양 예술의 계승은 가톨릭의 이미지와 동일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 예술에서 가톨릭은 단순히 주제를 제공한 것 이상의 역할을 해왔다. 우리가 많은 예술품을 볼 수 있는 것은 가톨릭이 그것들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8~9세기는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시작된 성상파괴주의가 한창이던 시기였다. 이 시기 성 요한St. John of Damascus은 ?성상에 관한 3개 논문?을 발표하여 이를 반박하였고, 그의 추종자들은 가톨릭의 공식적인 반대 입장을 이끌어냈다. 중세의 성당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예술작품으로 가톨릭의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중세 고딕풍 성당의 예술적 가치는 수학을 신성시 여기는 가톨릭의 전통과 가톨릭이 추구하는 세계를 바탕으로 세워졌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은 세속적인 부분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종교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많았다. 또한 이 시기에 탄생한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의 위대한 예술품들이 가톨릭의 후원을 받아 탄생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국제법의 기원
현대적 국제법의 시초를 다진 것은 16세기 에스파냐 신학자들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상호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는 일반원칙을 찾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국가간의 관계를 통제하는 법이 명확하고 논리 있게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사건의 첫 신호는 스페인의 식민지정책을 비판하는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 몬테시노스의 “나는 황야에서 울고 있는 목소리입니다”라는 제목의 히스파뇰라 섬에의 연설이었다. 식민지 원주민들의 인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이 연설은 페르디난도 국왕에게 전해졌고 왕은 신학자와 법학자들에게 스페인 관리와 원주민들의 관계를 통제하는 법을 만들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부르고스 법과 바야돌리드 법이 탄생되었으며, 1542년의 신법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초기의 비판은 16세기 신학적 법학자들이 더욱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작업을 하는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사상가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국제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비토리아 신부가 있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신세계에서의 스페인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원주민들도 자연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고유한 소유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은 국제법, 즉 국가간의 행동을 규제하는 기준의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비판을 주도한 사람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오늘날까지 라틴 아메리카에서 성인처럼 추앙받는 라스 카사스일 것이다. 그는 원주민에 대한 무력사용을 찬성한 세풀베다와의 논쟁으로 유명하고, 원주민 학대를 버젓이 행하는 엥코미엔다 시스템에 반대하면서 반세기를 바쳤다. 16세기 스페인 신학자들은 자연권에 따라 세상 모든 사람은 동등하고 이교도 국가도 유럽 국가들이 서로 대하는 것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철학적 이상을 제시하였고 이것을 규명하고 실현하려는 서양문명의 또 다른 기둥을 만들게 해주었다.

교회와 경제
그간 중세와 후기 스콜라 철학자들이 서양의 경제사고 발전에 심오한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은 흔히 간과되어왔다. 20세기 경제학자 슘페터는 그의 저서 ?경제학사?에서 후기 스콜라학자들의 공헌에 경의를 표했다. 또 다른 20세기 경제학자 로스바드 역시 자신의 경제사상사에서 많은 부분을 후기 스콜라학지들의 통찰력 덕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 이전 초기 가톨릭 학자들의 기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파리대학 학장을 지낸 뷔리당은, 화폐는 국가가 개입해서 만든 산물이 아니라 시장에서 유용한 필수품이며 교환의 매개로 자유롭게 등장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의 제자 오렘은 저서 ?화폐의 기원, 성질, 법률 그리고 변천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화폐과학의 이정표를 세웠으며 화폐경제학의 창시자로 불렸다. 그는 후일 ‘그레셤의 법칙’으로 불리는 원리를 처음으로 발표했고 인플레이션 파괴적 효과, 화폐단위 가치저하가 미치는 악영향 등도 언급하였다. 마르틴 루터와 논쟁에서 그를 넘어뜨린 카예타누스 추기경도 현재 돈의 가치가 미래 시장의 기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기대이론을 창시하였다. 후기 스콜라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가장 중요한 경제원리는 주관가치설이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였던 올리비는 상품의 가치는 상품의 유용성과 호감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 평가라는 가치론을 제안하였다. 150여년 후 중세의 가장 훌륭한 경제학자 베르나르디누스는 올리비의 학설을 그대로 채택하였다. 이런 가톨릭 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이론들은 노동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던 마르크스, 프로테스탄트 경제학이 간과한 중요한 경제원리를 발전시켰다.

가톨릭의 박애정신은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교회가 생기기 전 박애정신은 교회의 그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고대의 기부는 호의적이기보다는 타산적이어서, 기부자의 후원을 받은 건물에는 기부자의 이름을 눈에 띄게 표시하였다. 기원전부터 스토아학파는 선한 사람이란 모든 사람들과 형제애를 나눠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사람은 절아무리 비극적 상황이라 해도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여 자신이 돕는 사람의 슬픔을 나누거나 감정적 관계를 맺지 말고 사욕 없는 정신으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초기 스토아학파의 이런 냉정함이 그리스도교적 정신의 발전과 함께 누그러졌다. 가톨릭의 박애정신은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고무되었다. 초기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부 혹은 봉헌의 관례를 발달시켰고, 미망인과 고아 보호소를 설립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아주었다. 특히 유행병이 돌 때는 더욱 그러하였다. 3세기 카르타고와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한 페스트가 유행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들은 용감성으로 이교도들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았다.
-. 초기 병원과 성 요한네스 구호 기사단
진단, 치료, 처방을 하는 의사들이 근무하고 간호도 가능한 시설 세우는 데에 교회는 분명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이런 병원들은 본래 이방인들을 대접하였으나 결국에는 아픈 사람들, 미망인, 고아,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게 되었다. 당연히 수도회 역시 병자를 돌보았는데, 십자군 동안에 형성된 군사체제는 전 유럽에 있는 병원(구호소)을 돕도록 만들었다. 특히 성 요한네스 기사단은 유럽 병원역사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겼고 예루살렘에 광범위한 시설로 가장 유명하였다. 12세기가 지나면서 병원은 더욱 현대의 병원과 유사해지고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소로서의 기능은 축소되었다. 처음에 그리스도교만의 기관이었던 예루살렘의 성 요한네스 병원은 이슬람교도와 유대인들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이 병원은 환자에 대한 강한 서비스정신으로 유럽에 본보기 역할을 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유럽의 시설들이 작은 마을과 주요도시 모든 곳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13세기에 구호기사단은 아마도 20개의 구호소와 나병환자의 집을 직접 운영하였다.

교회와 서양의 법
대부분의 서양국가에서, 어떤 사람이 살인으로 사형을 구형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사이에 정신이상을 보이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후 형을 집행한다. 그 이유는 완전히 신학적이다. 제정신일 때에야 제대로 된 참회를 하고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서양의 법 개념은 그 기원과 본질에서 신학적 개념, 속죄 혹은 성사(聖事)와 관련이 있다.
-. 교회와 국가의 분리
중세유럽의 첫 법체계인 교회법은 현재도 볼 수 있는 다양한 세속적 법체계의 모델이 되었다. 교회법 발전 전에는 서유럽 어디에도 현대적인 법체계와 유사한 것이 없었다. 12세기에 접어들어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교회법에 관한 주요 논문인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을 수사 그라티아누스가 1140년경에 발표했는데, 이것은 양적으로나 범위 면에서나 엄청난 업적이었으며 역사적 이정표가 되었다. 교회 학자들은 야만스러운 서양인들에게 여러 관습을 맞추고, 성문화하고, 수많은 출처를 밝혀 그것들로부터 일관성 있는 법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서유럽 신생국가들이 법체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12세기 법학자들은 교회법을 본보기로 삼았다. 법체제의 성문화와 전파를 통해 가톨릭의 성문법은 유럽 사람들의 일상적 관례로 번창하여갔다.
-. 자연권의 기원
오랫동안 학자들은 자연권, 즉 개인이 갖는 보편적인 도덕적 권리에 대한 생각이 17세기에 발생하였다고 여겼다. 그러나 17세기 철학자들이 자연권에 관한 이론을 발표했을 때, 그들은 12세기 가톨릭 학자들 사이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전통 위에 이론을 세운 것이다. 중세의 법학자들은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권리를 정부가 개인에게 주었다는 것을 부인하고, 그것은 보편적인 도덕률로부터 시작된 개인의 자연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생각은 점점 더 번져나가 개인은 인간이기에 갖는 특정한 주관적 힘, 즉 자연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이 널리 통용되었다. 1300년대 유럽의 법학자들은 자연법에서 비롯된 여러 권리용어를 발전시켰다. 1150년에서 1300년 사이에 그들은 재산, 자기방어, 비그리스도교, 결혼, 소송절차 등의 권리를 실정법이 아닌 자연법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규정하였다. 이런 권리들을 단호하게 자연법의 틀 안에 놓음으로써 법학자들은, 이런 권리들이 인간인 군주에 의해 빼앗길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군주는 자연법을 토대로 한 권리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양이 현대적인 법체계의 첫 본보기를 본 것은 교회법이었다. 그 본보기의 불빛 아래에서 현대 서양의 법 전통이 구체화되었다.

교회와 서양의 도덕성
서양 도덕전통의 가장 중요한 원칙의 대부분은 분명 인간생명은 신성하다는 가톨릭적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고대사회에서는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 병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예를 들어 플라톤만 해도 가난한 사람이 병이 들면 그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남겨두어 죽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기형적인 남자아기와 많은 여자아기들은 가부장사회에서 폐가 된다는 이유로 유기되었다. 그 결과 고대 로마에서는 남자의 수가 여자보다 30%정도 많았다.
가톨릭교회가 서양의 도덕성 개념을 구체화한 또 다른 중요한 일은 정당한 전쟁의 전통과 관련이 있다. 정해진 특정원칙에 따라 전쟁의 도덕적 옳고 그름을 조사하는 서양 지식전통의 발전은 가톨릭교회의 업적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비토리아 등 많은 가톨릭 학자들이 전쟁의 정당성과 부당성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고대 저서들은 역사상 교회가 출현할 때 성도덕의 타락이 극에 달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교회는 친밀한 관계는 부부 사이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교회에 따르면, 간통은 고대처럼 부인의 부정에 국한되지 않고 남편의 부정까지 확대되었다. 초기 여자 그리스도교 신자가 많았던 이유도 결혼을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결혼을 신성한 서약의 수준으로 올려놓고 이혼을 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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