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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red Cortot 알프레드 코르토가 연주하는 쇼팽 (Plays Cho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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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Alfred Cortot 알프레드 코르토가 연주하는 쇼팽 (Plays Chopin)

[ 2CD ]
Frederic Chopin 작곡/Alfred Cortot 연주 | MONO POLY | 2000년 03월 01일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 판매지수 36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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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red Cortot 알프레드 코르토가 연주하는 쇼팽 (Plays Chopin)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00년 03월 01일
시간, 무게, 크기 229g

관련분류

카테고리 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CD 1
  • 01 12 Etudes Op.10
  • 02 12 Etudes Op.25
CD 2
  • 01 24 Prelludes Op.28
  • 02 4 Ballades

아티스트 소개 (2명)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ederic Francois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랑쑤아 쇼뺑,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ederic Francois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랑쑤아 쇼뺑,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펜(폴란드어: Fryderyk Franciszek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란찌쉐끄 쇼뺑)이다. ch는 폴란드어에서는 'h' 발음이 나지만, Chopin은 프랑스계 성씨이기 때문에 '쇼팽'이라고 발음한다. 폴란드어에서는 '쇼팽의'는 'Chopina'로 격변화하게 되는데, 이를 '쇼페나'라고 발음한다. 폴란드어에서는 'Szopen'(쇼펜)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쇼팽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바르샤바 공국으로부터 서쪽으로 46km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인 젤라조바볼라에서 태어났다. 교구의 세례 기록에는 그의 생일을 1810년 2월 22일로, 이름을 라틴어로 프리데리쿠스 프란치스쿠스(라틴어: Fridericus Franciscus)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폴란드어로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가 된다. 그러나 쇼팽과 그의 가족들은 생일을 3월 1일로 기록하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이 날짜를 진짜 생일로 인정한다.

프리데리크 쇼팽의 아버지인 니콜라 쇼팽(영어:Nicolas Chopin)은 프랑스 로렌 출신으로, 16세가 되던 1787년에 폴란드로 이주해왔다. 니콜라는 폴란드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고, 1806년에는 그가 가르쳤던 가문 중 하나인 스카르벡(Skarbek)의 가난한 친척인 테클라 유스티나 크리자노프스카(폴란드어: Tekla Justyna Krzyzanowska)와 결혼했다. 프리데리크 쇼팽은 부모가 결혼식을 올린 브로후프(Brochow)에 있는 교회에서 1810년 4월 23일,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았다. 이 때 니콜라 쇼팽의 18살짜리 제자인 프리데리크 스카르벡을 대부로 삼았는데, 프리데리크라는 이름도 그에게서 따온 것이다. 프리데리크 쇼팽은 둘째이자 외아들로, 누나인 루드비카(Ludwika, 1807~1855), 여동생 이자벨라(Izabela, 1811~1881)와 에밀리아(Emilia, 1812~1827)가 있었다. 니콜라는 폴란드에 헌신했으며, 가정에서도 폴란드어를 주로 사용하게 했다.

프리데리크가 태어나고 6개월이 지난 1810년 10월, 니콜라가 바르샤바 고등학교 (대학 전단계 학교, 1804~1831에 존재했음)(영어:폴란드어: Liceum Warszawskie)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됨에 따라 바르샤바에 있는 작센 궁정(영어:Saxon Palace) 1층으로 이사한다. 니콜라는 거기서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어머니는 하숙집 소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프리데리크의 체격은 왜소했으며, 어린 시절에 병에 자주 걸렸다.

그의 누이인 루드비카는 피아노를 배웠는데 종종 자신의 동생 프레데리크에게 놀이처럼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루드비카는 프레데리크의 재능을 눈치채었고, 결국 그들의 부모는 프레데리크가 공식적인 레슨을 받도록 한다. 공식적인 레슨을 처음 받게 된 것은 체코 음악가 보이치에흐 지브니(영어:폴란드어 Wojciech ?ywny)에게 1816년부터 1821년까지 교습을 받으면서 부터다. 누나 루드비카도 지브니에게 레슨을 받으며 프리데리크 등 남동생들과 가끔 듀엣을 하기도 했다. 쇼팽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7살 무렵에는 공개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고, 사단조, 내림나장조의 두 폴로네이즈를 작곡했다. 1821년에는 내림가장조 폴로네이즈를 작곡해 지브니에게 헌정하는데, 그 원고는 아직까지 남아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쇼팽 원고가 된다. 12세 때부터 엘스너에게 작곡 레슨을 받았으며 나중에 엘스너가 세운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들어가게 된다.

1817년 작센 궁전은 바르샤바의 러시아 총독에 의해 군사용으로 징발되었고, 바르샤바 강당은 오늘날 바르샤바 대학교의 총장 집무실인 카지미에슈 궁정(영어:Kazimierz Palace)에 다시 세워졌다. 쇼팽가는 카지미에슈 궁정에 인접한 건물로 이사한다다. 이 기간 동안, 프리데리크는 폴란드 입헌왕국의 통치자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초대받아 그 아들과 종종 놀았는데, 거기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파블로비치 대공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했다. 율리안 우르신 니엠체비치(영어:Julian Ursyn Niemcewicz)는 그의 극적 에클로그 《우리들의 담론Nasze Przebiegi"(1818년)》에서 "꼬마 쇼팽"의 인기를 증언하고 있다.

1822년 스승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쇼팽은 바르샤바 콘소바토리의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빌헬름 뷔르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4세 때 바르샤바 중학교에 입학하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연극에도 흥미를 가지고 희곡을 써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1826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1829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발표하고 빈에서 연주회를 열어 이름을 떨치자, 유럽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가 빈에 도착하였을 때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폴란드가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1831년 파리에 도착하여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연습곡을 작곡하였다. 1832년 파리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열어 성공함으로써, 그 후 파리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으나 그는 늘 조국과 친구와 가족을 걱정하며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즉흥 연주에도 뛰어났으며, 침착한 성품으로 그의 전주곡이나 연습곡은 예술적 수준이 높은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1830년대 초중반의 파리는 작곡가를 위한 시기였다. 쇼팽이 유명한 작품들을 남긴 것이 이 때이다. 1838년경에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해졌다. 그의 친구로 프란츠 리스트, 빈첸초 벨리니, 외젠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쇼팽은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도 친했는데, 그들의 음악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1836년에 쇼팽은 17살의 폴란드 소녀인 마리아 보진스카와 비밀 약혼을 했고 나중에 취소했다. 같은 해에, 마리 다굴 백작 부인이 연 파티에서 쇼팽은 소설가이자 애인인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쇼팽과 상드의 연애관계는 18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애정 관계는 9년간 지속되었고, 쇼팽의 건강 악화와 상드의 자녀들 문제로 헤어졌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의 버려진 가톨릭교회 수도원인 발데모사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1838년 ~ 1839년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닥쳤다. 쇼팽은 파리에서 먼 길을 거쳐 피아노를 가져와서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쇼팽은 그 절박한 시간의 기분을 스물 네 개의 전주곡(작품번호 28)에 담았다. 그 작품의 대부분은 마요르카에서 쓰여진 것이다. 추위는 쇼팽의 건강과 폐병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조르주 상드의 관계가 불륜으로 의심받아 비난과 푸대접을 받았다. 결국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쇼팽은 그 일 이후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1840년대에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와 상드는 노앙을 포함한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1849년 쇼팽은 모든 작품을 완성하고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러시아의 폴란드 혁명진압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하였다. 그의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 바 단조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를 생각하면서 지은 민족주의적인 곡이다.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그의 친지가 부검한 결과가 이전 검진결과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낭포성 섬유증이나 폐기종 같은 다른 질병을 앓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로마 가톨릭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리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을 연주하기로 했다. 레퀴엠에는 여자 성악가의 역할이 크지만 마들렌 교회에서는 합창단에 여자 가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마찰 때문에 장례식이 2주 동안 연기되었고, 결국 교회 측에서 쇼팽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양보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 Pere Lachaise에 안장되었다. 그의 심장은 누나 루드비카 옝제예비치(Ludwika Jedrzejewicz)가 전달 받아 폴란드로 가져간 뒤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있는 기념비 밑에 안치되었다.

21세기에 들어 보존된 그의 심장이 담긴 병을 열지 않고 관찰한 결과 심낭염으로 사망했다는 소견이 나왔다. 쇼팽이 앓았던 결핵은 심낭염의 일종인 결핵성 심낭염의 원인이다.

쇼팽은 필드가 창시한 살롱음악인 녹턴을 깊고 세련된 장르로 승화시켰으며, 일반적인 춤곡인 폴란드의 마주르카나 빈의 왈츠의 선율과 표현의 폭을 넓혔다. 또한 전주곡을 독립적인 장르로 만든 장본인이다.

쇼팽의 곡은 독특한 선율로 많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만들어낸다. 그중에는 《혁명 연습곡》과 《강아지 왈츠》가 있다. 《장송 행진곡,전주곡 제 4번》은 지금까지도 슬픔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곡으로 쓰이고 있다. 《즉흥환상곡》 은 쇼팽 시절의 오페라 선율을 모방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반음계를 구사한 곡이다. 쇼팽은 노래하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 피아노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이 도니제티와 빈첸초 벨리니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쇼팽의 작품과 재능은 다른 작곡가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슈만은 쇼팽의 선율을 따서 작곡한 그의 《사육제》를 쇼팽에게 헌정했다. 프란츠 리스트는 그의 《Harmonies Poetiques et Religieuses》 가운데 한 악장인 〈Funerailles〉를 쇼팽에게 헌정했고 그 때가 의미심장하게도 1849년 10월이었다. 그 곡의 중간 부분은 쇼팽의 유명한 폴로네이즈 53번의 옥타브 트리오를 연상케 한다.

전주곡과 연습곡을 포함한 많은 쇼팽의 곡들이 그만의 고유한 기교를 띠고 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이 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양 고전음악에서 쇼팽의 음악은 낭만주의 시대에 속한다. 하지만 쇼팽 자신은 낭만주의 조류에 관심이 없었거나 싫어했고 자기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쇼팽의 작품을 전형적인 낭만주의 음악으로 보고있다.

약 200곡에 달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다수가 피아노를 위한 것이였고 오로지 몇몇만이 다른 악기를 위한 곡이였다. 실내악에 관하여서는 바이올린보다 주로 첼로와 피아노에 대해 썼고, 이조차도 모두 네 곡 밖에 되지 않는다.

바르샤바에 살 때 쇼팽은 부흐홀츠의 피아노를 사용했다. 나중에 파리에서 사는 동안에는 플라이에에서 악기를 구입했습니다. 그는 플라이에(Pleyel et Cie)의 피아노를 '그 이상은 없다'는 뜻의 "비 플러스 울트라"로 평가한다. 리스트는 파리에서 쇼팽과 친구가되었고 쇼팽의 플라이에 피아노의 소리를 "수정과 물의 결합"으로 묘사한다. 런던에서 쇼팽은 "나는 3대의 피아노, 플라이에, 브로드우드 및 에라르드가 놓인 대형 응접실이 있다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다.

2018 년 폴 맥널티가 만든 쇼팽의 부흐홀츠 피아노는 폴란드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바르샤바 쇼팽 연구소에서 최초의 시대 악기 국제 쇼팽 콩쿠르에 사용되었다.
연주 : Alfred Cortot (알프레드 코르토)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스위스 니옹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누나들에게 피아노와 음악의 기초를 배웠다. 열한 살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 에밀 데콩브와 루이 디에메를 사사했다. 1896년 파리 음악원을 수석 졸업하고 이듬해 콩세르 콜론에 정식 데뷔했다. 동문 피아니스트인 에두아르 리슬러의 영향과 바이로이트 체류 경험을 계기로 바그너 악극에 심취, 지휘자로 활동하며 1902년 〈신들의 황혼Gotte...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스위스 니옹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누나들에게 피아노와 음악의 기초를 배웠다. 열한 살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 에밀 데콩브와 루이 디에메를 사사했다. 1896년 파리 음악원을 수석 졸업하고 이듬해 콩세르 콜론에 정식 데뷔했다. 동문 피아니스트인 에두아르 리슬러의 영향과 바이로이트 체류 경험을 계기로 바그너 악극에 심취, 지휘자로 활동하며 1902년 〈신들의 황혼Gotterdammerung〉 파리 초연을 통해 바그너의 작품을 프랑스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1905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와 삼중주단을 결성하여 실내악 연주자로 이름을 떨쳤다. 1907년부터 1923년까지 파리 음악원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했고, 1919년에는 에콜 노르말 드 뮈지크를 설립, 교장으로 취임해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세기 낭만파 피아노 음악의 정신을 계승하여 특히 쇼팽과 슈만, 드뷔시의 작품 해석에 정평이 나 있었고 이들의 악보를 편집해 출판했다. 《쇼팽을 찾아서Aspects de Chopin》 외에 《프랑스 피아노 음악La musique francaise de piano》 등의 저서가 있으며, 은퇴할 때까지 수많은 녹음을 남긴 레코딩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1962년 스위스 로잔에서 생을 마감했다.

전문가 리뷰

Alfred Cortot Plays Chopin
이성일(음악평론가)
흔하지만 잘 연주해야하는 음악 “쇼팽은 아무렇게나 연주하면 안된다.” 쇼팽을 많이 연구했거나 쇼팽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청중 앞에서 미스 터치를 줄줄이 내며 엉망으로 연주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아무렇게나 연주하면 안된다는 측면 즉, 연주가로서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할 성실성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연주가는 어떤 식으로든 항상 진지해야 함은 물론이다. “아무렇게나 연주하면 안된다”는 말은 쇼팽음악을 해석하는 방법의 독특함을 암시하며, 섬세한 통찰력이 배제되고 연주자 자신의 자의적인 상상력이 발동해 달콤하게만 연주되는 행태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얘기하는 것이다. 흔히 피아노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가장 쉽게 대하는 것이 모차르트 음악이요, 고급과정으로 가면 자주 만나는 음악이 쇼팽의 음악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음악을 많이 공부한 대가급 피아니스트들이 ‘모차르트의 음악이나 쇼팽의 음악이 어렵다’고 하는 말을 종종 들었을 것이다. 조금만 공부하면 누구나 쉽게 칠 수 있는 이러한 음악들을 대가들이 어렵다고 할 때는 물론 쳐내기 어렵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음악들이 표상하는 맑고 순수한 세계와 논리, 음의 절묘한 절제와 조화 등 매우 고차원적인 표현을 이뤄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쇼팽의 음악은 모차르트의 음악과 많이 닮았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쇼팽의 음악은 모차르트의 음악만큼이나 가장 대중적인 음악에 속한다. 피아니스트라면 쇼팽음악을 단번에 못쳐낼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쇼팽은 아무렇게나 연주하면 안된다“는 말은 여전히 쇼팽의 음악이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쇼팽의 음악이 그렇게 조심스러워야 하는가? 이제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쇼팽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의 음악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한 파악이 전제되어야 한다. 쇼팽에 대한 올바른 인식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다” 주지하듯이 안톤 루빈스타인이 한 말이다. 굳이 루빈스타인이 그렇게 낭만적인 표현으로 격찬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쇼팽이 비할데 없이 독특한 피아니즘으로 인간의 감성을 극히 섬세하게 그려낸 낭만적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는 도대체 얼마나 낭만적인 사람이었을까? 슈만 아니, 바그너 만큼 낭만적이었을까? 아니 그보다 더 낭만적인 사람이었을까? 그러나 쇼팽에 대한 믿을 만한 전기를 읽어 보면, 그는 오히려 흔히 이해되고 있는 이미지와는 상이한 면을 많이 보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쇼팽은 그 누구의 것과도 닮지 않은 지극히 낭만적인 감성의 소유자였지만, 정작 그는 ‘낭만주의’라는 말을 싫어했다. 그러므로 그의 주위의 낭만주의를 표방하는 웬만한 작곡가는 대개 그의 부정적 비평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쇼팽은 베를리오즈의 음악을 아주 수준 낮은 것으로 보고 멸시했는가 하면, 종종 자주 비교되는 리스트의 음악에 대해서는 지루하고 공허한 것이라고 비판하기 일쑤였다. 또, 슈만의 작품 '카르나발(Carnaval)'에 대해서는 “그건 음악도 아니다”라고 일축해 버렸고, 멘델스존의 작품은 아예 무시해 버렸다. 슈베르트에게는 관심도 없었고, 심지어 위대한 악성 베토벤 마저도 자신의 음악세계를 방해하는 존재 정도로 생각했었다. 물론 안하무인격의 독선을 휘두른 쇼팽의 이러한 견해에 편승해 덩달아 그런 위대한 음악가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대신 그가 왜 그런 태도를 그토록 신경질적으로 보이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는 있다. 사실, 그의 이러한 독선적 모습의 이면에는 항상 그의 음악관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숨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많은 낭만주의 음악가들을 비판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그러면 그 기준이란 무엇인가? 쇼팽의 낭만적 서정에 휘청거릴 정도로 빠져있는 애호가들은 상당히 아이러니컬하게 느끼겠지만, 그토록 풍부한 낭만적 감성의 소유자 쇼팽이 가장 신봉한 작곡가는 바흐와 모차르트였다. 바흐와 모짜르트는 쇼팽에게 있어서 좋은 음악과 그렇지 못한 음악을 구분하는 하나의 시금석이었다. 다시말해 어떤 음악이 훌륭한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점은 바흐와 모차르트의 고전적 형식에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는 이 위대한 두 작곡가의 고전적 형식을 존중했다. 쇼팽과 고전주의는 일견 양립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음악이 고전적 형식을 운운하기에는 너무도 로맨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팽은 모든 낭만주의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사람인 동시에 가장 고전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구사하는 형식은 항상 완벽한 고전적 기초 위에 세워졌고, 그의 작업은 매우 정교했다. 그는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해 의미없는 장식을 추가하거나 삽입하는 일이 없었고, 작곡을 끝낸후에는 더 이상 추가할 악절도 여분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분출되는 영감들을 너저분하게 연결하는 대신, 가장 필요한 정수만 뽑아 절제와 균형으로 세밀하게 스케치하고, 남는 것은 없게 한다는 것이 그의 창작에서 항상 작용하던 굳은 신념이었다. 한 작품을 창작하면서 몇 개의 악절 조각을 남기고, 그것을 다른 작품에 멋있게 끼워넣는 일은 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작태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음악이라는 것이 짜맞춰 제작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어디선가 모르게 와닿는 영감을 그대로 옮겨적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 작곡가의 영감으로 흘러들어온 음악을 이후 다른 시간과 공간에 끌어 맞추는 것은 하나의 논리를 전혀 다른 논리에 끼워맞추는 것과 별로 다름이 없을 것이라는 것, 쇼팽은 아마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쇼팽의 독특한 템포 루바토 쇼팽의 해석에 있어서 흔히 거론되는 ‘루바토(rubato)'의 문제만 생각하더라도 그의 음악이 얼마나 세밀하게 작곡되었으며, 얼마나 철저한 균형과 절제에 의해 이뤄져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연주자로서도 마찬가지였다. 폴란드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타국의 연주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루바토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루바토에 관한 한, 특히 폴란드의 무곡 마주르카(Mazurka)를 연주할 때 이방의 연주자들과는 극명하게 구별되었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을 항상 어리둥절하게 했던 그의 루바토는 물론 민족성이 적은 음악을 연주할 때에는 보다 덜 사용되었다. 쇼팽은 루바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결코 남용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철저히 절제되어 사용될 때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쯤은 날카로운 판단력을 가진 천재가 본능적으로 깨우치고 있는 바였다. 그는 당시 무비(無比)의 비르투오소 리스트가 자신의 작품을 대단히 탁월하게 연주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어떤 작품은 리스트가 자기보다 더 잘 연주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주르카를 연주하는 리스트에 대해서는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의 지독할 정도로 세밀한 루바토 감각때문이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항상 영감이 막을 수 없이 분출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정신을 잃게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가 아무리 열정적인 연주를 보여준다고 해도 박자, 액센트 혹은 리듬은 정확하게 구사되었다. 쇼팽의 이러한 태도는 19세기의 수많은 연주자들이 루바토를 구사한다는 명분으로 상당히 격렬하고 거친 연주를 보여준 것과는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바흐나 모차르트, 즉 고전적인 경향이 일종의 구심점이었던 쇼팽에게 있어 감정이 앞선 나머지 형식을 흐트러뜨리며 함부로 연주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태도였다. “루바토는 필요한 부분에서 적절하게만 사용하고, 형식은 끝까지 고수한다”는 것은 연주가로서 꼭 지켜야 할 쇼팽의 철칙이었다. 쇼팽은 어렸을 때부터 엘스너 등 유명한 선생의 지도를 받았지만, 선생의 지시에 무조건 따르거나 과거 연주전통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떤 교수법이나 교재에도 없는 독창적인 연주법을 구사하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선생도 그의 창의적인 안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쇼팽이 얼마나 개성적인 음악가였는가 하는 점을 파악한다면, 요즘의 ‘진지하지 못한’ 많은 쇼팽연주들이 얼마나 쇼팽의 실제 모습과 의도를 왜곡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꼬르또 연주 왜 들어야 하는가 음악에서 우리는 무엇을 듣는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리를 듣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음악에서 소리로 조합된 논리를 듣는 것이다. 소리를 듣는다면 굳이 음악을 들을 필요는 없다. 주위의 어떤 물건이든 두들겨서 들으면 되지 않는가. 우리가 음악을 듣는다고 할 때, 멜로디나 화성 그리고 리듬이 아무리 단순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 안에서 논리를 듣는 것이다. 어떤 애호가가 요즘 연주자들에게서는 별 감동을 못 느낀다고 할 때, 그 말은 요즘 연주자들의 음악적 논리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우리가 음악에서 소리를 듣는 것이라면, 요즘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녹음된 음반만큼 감동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투명한 음질 속에서 탁함을 느낀다는 애호가의 말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음악은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사라질줄 모르는 옛 연주 애호 경향은 단순히 옛날에 대한 향수라기 보다는 오늘날 연주가들의 음악적 논리가 옛날에 비해 훨씬 더 불분명하고, 덜 진지하며, 몰개성적이라는데 그 이유가 있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꼬르또의 해석이 나온지 이미 몇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것이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는데는 바로 이러한 관점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꼬르또의 연주를 들으면, 오늘날 많은 쇼팽 연주가들과는 달리 우선 매우 개성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며, 그 느낌이 매우 강렬해서 논리가 분명하게 전해진다. 쇼팽의 시상(詩想)이 그 어느 누구의 연주에서 보다 화려하게 펼쳐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의 화려한 기교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기교가 탁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필자의 형편없는 판단으로 봐도 꼬르또는 결코 기교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연주는 결코 기교를 앞세운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그리는 그림은 매우 맑고 선명하고 화려하다. 오늘날 탁월한 기교를 지닌 많은 연주자들의 뛰어난 녹음이 그렇게까지 화려하지는 않다. 그것은 화려한 외적 기교가 반드시 화려한 그림을 현현(顯現)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요컨대, 꼬르또의 별반 좋지 못한 음질을 들으며 어느 누구의 연주 보다도 화려하고 진한 상상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꼬르또의 내면의 논리를 끌어내는 창조적인 힘이 강렬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저명한 비평가 해롤드 숀버그의 표현은 깊이 가슴에 와 닿는다. “꼬르또는 단순한 기교주의자로서의 인상은 주지 않으며, 화려한 비르투오소의 길은 당초에 포기했다. 그의 연주에는 극도의 우아함과 논리를 가지고 있으며, 여지껏 프랑스 피아니스트들이 보여준 것 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육체적, 정서적)을 지닌 '재창조적인 음악가(re-creative musician)'이다” 서정, 세밀, 고결, 순수, 유연, 그리고 내용의 힘 꼬르또의 연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그가 극도로 유연하고 세련된 테크닉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점은 그가 속한 프랑스학파의 성격을 파악함으로써 대충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꼬르또는 사실 모짜르트, 쇼팽, 프랑크 등에 놀라울 정도의 세련된 재능을 보이던 프랑스학파 피아니스트 푸뇨(Pugno)이후에 가장 주목할만하고, 가장 탁월한 피아니스트였다. 꼬르또의 연주가 지닌 유연성, 세련된 터치, 넘실거리는 서정 등은 바로 이러한 프랑스학파의 전통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꼬르또가 쇼팽의 제자였던 드꽁브에게 사사한 것도 주목할 일이다. 그의 연주가 지닌 서정적 세밀함, 고결함, 그리고 순수한 지성 등은 많은 부분이 그의 스승 드꽁브에게 힘입은 바 크다. 꼬르또의 연주를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없는 지금, 우리는 다만 그가 쇼팽을 얼마나 진지하게 연구했었는지 여러 저서와 음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자료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쇼팽처럼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로 연주해냈으며, 매우 날카롭고 명료한, 그리고 틀림없는 루바토를 구사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꼬르또는 항상 어떠한 상황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절제를 강조했으며, 항상 엄격한 우아함과 논리로 음악을 재창조하기를 원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쇼팽의 평소 지론을 충분히 견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가끔 우리는 참으로 구제하기 어려운 고집장이들을 만난다. “요즘 연주자들의 연주는 무조건 안 듣겠다”고 엄포를 놓는 소위 ‘히스토리컬 애호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여기서 그들의 다소 어설픈 독선까지도 모두 포함해 편을 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꼬르또의 저서, 그에 관한 서적, 그리고 그가 남긴 녹음들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는 애호가가 쌓아놓은 고집의 벽은 쉽게 허물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꼬르또의 음반은 보다 진지한 쇼팽애호가에게 거의 모든 것들이 수집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비록 오래된 녹음이라 다소 음질상의 약점을 갖고 있긴 해도, 쇼팽을 좀더 정확하게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보여주는 독특하고 고귀한 논리는 여전히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쇼팽음악들이 쇼팽 보다는 듣는 사람의 취향에 맞게 적절히 가공하고 있지만, 그러한 현상들을 목격할 때마다 먼지쌓인 꼬르또의 논리는 더욱더 소중하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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