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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들판의 꿈

[ 개정판 ]
홍은전 | 봄날의책 | 2016년 04월 08일 리뷰 총점9.0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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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16년 04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308쪽 | 426g | 140*220*30mm
ISBN13 9791186372050
ISBN10 118637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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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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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저자 소개

저자 : 홍은전
스물셋, 방황하던 대학 4학년 시절 노들야학을 처음 만났다. 매일매일 절망과 희망을 오가며 그 진폭을 에너지 삼아 교육을 하고 투쟁을 하는 노들야학에 홀딱 반해버렸다. 취미도 특기도 노들야학으로, ‘노들에 최적화된 인간형’으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내가 노들인지 노들이 나인지 헷갈려서 어디까지가 노들이고 어디부터가 나인지 구분하기 위해 노들야학 20년사 쓰기를 시작했다. 노들과 함께 서른여덟이 되었다. 함께 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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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 p.293

출판사 리뷰

‘노들’(노들장애인야학)은 대학로에 있는 장애 성인들의 교육 공간으로, 차별과 억압이 아니라 협력과 연대, 인간 존엄성과 평등이 넘쳐나는 노란들판을 꿈꿉니다. 배움에 답이 있고 투쟁만이 살 길임을 믿기에 적응보다 저항을 공부합니다. “밑불이 되고 불씨가 되자”를 교훈(校訓)으로 삼고 장애인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들의 배움, 그들의 투쟁, 그들의 일상에 대한 정직한 기록입니다.


“야학 활동의 마지막 해, 나는 노들의 20년 역사를 정리하기로 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 남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고픈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그 일은 나에게 예상치 못했던 떨림을 선물했는데, 말하자면 저항하는 자들의 경이에 눈뜬 것이었다.”
- 홍은전의 말 1

“우리가 이루어낸 것들은 실로 거대한 혁명이었으나 그것을 가능케 한 비밀은 그저 수많은 하루하루였다. 떨림과 다짐과 믿음과 약속을 공유하는 관계를 따라 불씨가 지켜지고 불꽃으로 터져 나오며, 다시 한 사람 한 사람의 불길로 들불처럼 번져가는 것이다. 야학의 20년사 정리가 마무리되었을 때, 나는 이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마치 어느 봄 여린 새싹이 언 땅을 뚫고 나오는 경이에 눈뜬 후 자연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너무 흔해서 귀한 줄 몰랐던 ‘싸우는 자’들의 비밀을 보게 된 나는 이 세계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 홍은전의 말 2

여섯 장면을 통해 본 [노란들판의 꿈]

# 장면 1
잠시 후 다음 지하철이 도착한다는 신호음이 역내에 울려 퍼졌다. 지켜보던 이들의 심장은 세차게 벌렁거렸고, 누군가는 벌써 울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이 점거한 곳은 열차가 평상시에 정차하는 곳보다 조금 앞선 지점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열차에 치일 염려는 없었다. 그리고 점거가 시작되었을 때 한 사람이 역무실로 달려가 이 사실을 전달했기 때문에 다음 지하철의 기관사도 이미 이 상황을 알고 있었다.
곧이어 열차가 역사 안으로 진입했다. 열차는 경적을 울리며 선로 위에 버티고 있는 사람들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두운 선로에 드러누워 있는 그들을 비추자 지켜보던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플랫폼 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선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날 지하철 1호선이 30분간 운행을 멈추었고 32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리고 …… 30년 동안 방구석에 갇혀 있던 장애인들의 분노와 절망도 세상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마치 낮달 같은 존재들이었다. 존재하고 있으나 보이지 않았던 삶. 뒷방에 밀쳐지고 산골짜기에 버려졌던 사람들. 차가운 레일 위에 누워 자신들이 멈춰 세운 지하철을 바라보는 그들의 머릿속에는 지난 시절의 서러웠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엄마 등에 업혀 찾아간 학교에서 입학을 거부당하고 돌아오던 길, 동생들이 모두 학교에 간 후 혼자 남았던 무수한 아침, 정규방송이 끝났음을 알리는 TV의 소음으로 시작되었던 유년의 오후, 가족에게 짐이 되기 싫어 스스로 들어간 시설에서 숨죽여 울었던 밤, 초대받지 못한 언니의 결혼식 …… 손을 뻗어 닿는 곳에 죽음이 있었다면 미련 없이 놓아버렸을 형벌 같은 삶이었다. 그들이 목놓아 외쳤다.
“장애인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이 사건은 이후 장애인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야만적 속도에 제동을 걸어 사회를 보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바꾸어낸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결정적 불씨가 되었다.
TV에서 ‘불쌍한’ 장애인을 보면서는 혀를 차고 지갑을 열던 사람들이 눈앞에서 자신의 길을 막고 그 길을 함께 가자고 외치는 장애인들에게는 ‘병신’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때 박경석 교장은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30년 동안 집구석에서 갇혀 지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주더니, 자신들이 당장 30분 늦으니까 저렇게 욕을 하는군요. 이제 그 병신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시다. 당당한 병신으로 살아봅시다!”

# 장면 2
“형은 뭐하고 싶어요?”
한 번도 흐드러지게 피어 보지 못한 청춘들이었으므로 그것은 씹어도씹어도 씹을 것이 나오는 그런 안주거리였다.
“나? 일하고 싶어.”
“음 …… 무슨 일이요”
“아무거나. 할 수 있는 거……”
술자리는 금세 “나도! 나도!”를 외치는 학생들의 호응으로 소란스러워졌지만 그걸 듣는 교사들은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술자리는 무겁게 가라앉곤 했다.
상근 활동가 이알찬은 학생들의 이런 고민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턱턱 막혔다. 그는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려 일하는 기쁨을 최고로 치는 사람이었다. 학생들의 욕구가 자신의 것보다 가벼울 리 없는데 그들에게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쓸모없는 인간’ 혹은 ‘가족의 짐’이라는 자괴감에 빠져 살고 있는 학생들을 접할 때마다 그는 꼭 자기가 그렇게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미안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환경만 갖추어진다면 당장이라도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학생들이 야학을 졸업하고도 이후의 삶을 꿈꿀 수 있는 공간, 노동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장애인 노동자를 조직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자립 공장을 만들고 싶었다. (……)
이알찬과 퇴임한 교사들, 그리고 야학 학생 몇 명이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사와 학생으로 만나 배움을 주고받던 관계와 직장 동료가 되어 함께 일을 하는 관계는 몹시 달랐다. 수업은 쉬웠지만 함께 일하기는 어려웠다. 현수막 주문을 받기로 한 노동자 J는 길이를 재는 단위인 미터(m)와 센티미터(cm)를 변환할 줄 몰랐다. 출력기를 다루어야 하는 노동자 Y는 기계가 표시하는 영어를 읽지 못했다. 버려지는 현수막이 속출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학교가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고 야학이 그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을! 작업 지시서를 앞에 두고 즉석에서 수학 수업이 벌어지고 출력기 옆에서 알파벳 특강이 이루어졌다. 배움의 속도는 마음과 달리 속 터지게 더뎠다. (……)
‘이알찬들’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빴다. “장애인의 속도를 인정하고 노동권을 보장하라”고 외쳤던 그들이었지만 정작 자신들은 기계가 되고 총알이 되어야 했던 나날이었다. 늦은 밤 현수막을 ‘디자인’해서 ‘출력’을 걸어놓은 후, 기계 아래서 아무렇게나 누워 잠을 자다가, 출력이 끝나면 그것을 ‘마감’하여, 새벽이 되면 사다리를 들고 ‘시공’을 하러 나갔다.
수업 마치고 소주잔을 부딪치며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실천하기 위해서. ‘장애인도 일하고 싶다’는 정당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은 경쟁과 효율의 논리가 아니라 협력과 연대의 정신으로도 살 수 있고, 또 살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노란들판은 살아남았다.

# 장면 3
보통 ‘일상’이라는 말은 ‘흘러가는 시간 속의 그렇고 그런 날들 중 하루’를 뜻하지만 노들에서 말하는 일상은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중증장애인에게 일상이란 가져본 적 없는 어떤 하루들, 그러니까 그들의 빼앗긴 인생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외출을 하고 학교를 다니고 친구를 사귀는 일이 그저 평범한 일상이지만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제 몸을 던져 싸워야 겨우 얻을까 말까 한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일들이었다. 노들의 가장 중요한 투쟁은 바로 이 일상을 만들고 지키는 일이었다. 이 작고 사소한 일상이 우리들의 인생을 이끌고 나간다.
노들의 일상을 이끌었던 것은 바로 수업이었다. 수업이 우리를 만나게 했고 거기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수업이 아니었다면 30년간 서울 노유동의 작은 방과 창동 작은 집이 각자의 우주 전체였던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장애 문제라면 한 사람에게 기역니은을 가르치기 위해 때로는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필요하다. 명왕성만큼이나 멀리 있는 것으로 알았던 나 같은 사람이 그들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차산 기슭 작은 교실에서 만난 우리는 아득하게 달랐고 서로에게 모두 처음인 존재들이었다. 2003년 한글 기초반에서 만난 우리들의 수업은 사투와 같았다. 우리는 사용하는 언어조차 달랐다. 어떤 이는 손을 쓰지 못했고 어떤 이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교사들은 말하고 쓰는 것 외에 어떤 의사소통 방법도 배운 적이 없었다.
우리들은 몰랐다. 우리가 얼마나 긴 레이스의 시작점에 서 있는지. 1년이 지나도 크게 진전되지 않는 학생들을 보며 가슴을 칠 때에도 교사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한 사람이 기역니은을 배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이 필요한지를. 상대방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로도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를. J는 그 뒤로도 몇 명의 교사를 더 거친 후에야 비로소 동네 이발소의 간판을 읽게 되었다.

“어느 날 이발소 옆을 지나가는데 “이……발……소…… 이.발.소? 어! 이발소다, 이발소! 내가 아는 거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몇 년을 그 앞을 지나며 늘 보던 글자였는데 그 뜻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재미있고 신나고 기특했다. 처음에는 글을 배우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해도 해도 도무지 늘지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끝내 한글을 못 읽을 줄 알았다. 몇 해 전에는 슬럼프도 심하게 찾아와서 다 때려치우고 싶었는데 그때 포기하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었다.”

J의 한글이 늘어가는 속도는 J의 우주가 확장되는 속도보다 결코 빠를 수 없었다. 자음과 모음을 충실히 익혀야만 ‘이발소’를 읽을 수 있듯이 J의 좁은 우주를 넓히기 위해서는 경험과 관계가 차곡차곡 쌓아 올려져야만 했다. 그것은 J의 말처럼 ‘다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들을 무수히 겪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다. 교사가 학생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다만 그 시간을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주는 것이었으리라. J의 한글 실력이 천천히 그러나 틀림없이 늘어갔던 것처럼 교사들도 천천히 그러나 진실하게 J를 배워 나갔다.

# 장면 4
K는 시설에서 나온 사람들 중 유일한 지적장애인이었다. 수업시간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힘들어 했다. 같은 반 학생들은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K를 은근히 무시했다. K는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는 등 거칠게 행동했다. 어떤 사람은 그녀와 싸웠고 어떤 사람은 그녀를 피했다. 작은 학급에 분란이 잦아졌다.
‘K의 자립은 시기상조가 아니었을까?’
‘K는 우리와 함께 살기 어려운 사람이 아닐까?’
교사들은 K를 시설에서 데리고 나와 야학에 ‘떠넘긴’ 활동가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활동가들이 ‘소환’되었다.
그들이 돌아가며 K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녀의 행동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개입이 필요한 때에 손을 지그시 잡거나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장기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교사 천성호가 K의 멘토가 되었다. 그는 K의 하루를 함께하며 그녀의 일상을 지켜본 후 그 하루 속에서 지나간 것들로 K만을 위한 교육을 짰다.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법, 설거지하는 법, 필요한 것을 부탁하는 법처럼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그는 K를 이해하기 위해 관련단체를 찾아가 경험을 청해 들었고, K의 가슴속 숙원이었던 엄마를 찾기 위해 경찰서와 방송국을 쫓아다녔다. 그리고 교사들은 그의 태도를 따라 K를 대하는 방법을 익혀 나갔다.
그러자 K의 변화는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후 시간이 얼마간 흘렀을 때에는 그녀의 자립을 의심했던 때가 있었음을 의심할 만큼 K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살게 되었다. 그녀는 단지 시설 안에서 필요했던 방식을 몸에 익혔던 것뿐이었으리라. K의 자립이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던 것은 일견 옳았을지 모른다. 노들은 그녀와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고맙게도 그녀가 찾아온 후에야 비로소 노들은 그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 장면 5
2013년 2월 J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스스로 준비한 죽음이라고 했다. 그의 몸으로 그게 가능한가. 나는 죽었다는 사람이 정말 J일까 의심했다. 빈소를 찾아가니 국화꽃 속에서 웃는 사람은 내가 한글을 가르쳤던 J가 맞았다. 빈소에서 만난 아버지는 아들이 답 없는 메일을 자꾸 보내는 것을 보고 하도 속상해서 더 이상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라고 화를 냈었다며 울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메일함에서 J의 이름을 검색했다. 첫 페이지에 뜬 스무 통의 편지 제목들이 모두 한결같았다.
‘꼭 읽어주세요.’
그제야 나는 J에게 ‘죽을 능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미안해서 눈물이 터졌다.
J는 전동휠체어가 고장이 났고 계단 없는 새 집이 필요하며 여자 친구가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고 썼다. 나는 답신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동휠체어는 신청기간이 아니었고 새 집이나 여자 친구에 대해서도 긴 설명이 필요했으므로. 겨울도 지났으니 언제든 아쉬우면 다시 나오겠지, 수시로 드나드는 감옥이니 이번에도 무사히 나오겠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사이에 아득한 절망으로 빠지는 크레바스가 있을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혼자서는 나갈 수 없는 3층 계단 집, 아들을 업을 수 없는 늙은 아버지, 고장 난 전동휠체어, 잘 연결되지 않는 활동보조인, 더 이상 오지 않는 봉고, 그리고 대답 없는 사람들. 다시, 계단, 늙은 아버지, 고장 난 휠체어…….
그 지독한 ‘불능’의 연쇄에 갇혀 J가 ‘폐만 끼치는 무능한’ 자신을 죽였다. 한 글자를 쓰기 위해 천천히 팔을 뻗어 손바닥 전체로 연필을 쥐고 안간힘을 쓰던 J. 개미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을 것 같던 그 손으로 그가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세상이 좋아진 건 분명해 보였다. 그에게는 비록 고장이 났지만 전동휠체어도 있었고, 활동보조서비스를 이용할 자격도 있었고, 지하철도 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손을 놓았다. 괜찮아요, 안 죽어요, 하면서. 그러자 J는 이내 1999년으로 돌아가 다시 집 안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계속해서 타전을 보냈으나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고, 그것마저 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 밤, J가 죽었다. 그 어떤 것도 그가 죽을힘을 다해 잡아당겼을 줄보다 가까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프다. 그가 유서를 쓸 만큼의 한글 실력도 가질 수 없었던 것이, 그래서 그가 표현할 수 없었던 절망이 슬프다. 내가 여전히 그의 마음을 잘 알아맞히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을 조금 넘었다.

# 장면 6
‘신체를 경멸하는 사람들’을 읽은 날이었다. 고병권 선생님이 ‘내 안에 맹수 같은 게 살고 있어서, 내가 원치 않을 때도 불쑥 나타나 나를 괴롭힌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곧바로 수연과 재연이 소리를 질렀다. 재연은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켰고 호식은 ‘내가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그 맹수를 알고 있다”, “내 안에 맹수가 있다”를 말하려는 엄청난 반응이었다. 고병권 선생님은 이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맹수란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충동들, 정서들을 지칭하는 것인데요. 그때 학인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거나 손을 휘저었습니다. 그 맹수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 말이죠. ‘내 안의 맹수들’에 대해서 이토록 크게 반응하는 사람들, 그 맹수들의 존재를 이토록 절감하는 사람들을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불수레반 학인들이 느끼는 우울, 분노, 격정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가 정글에서 살아온 맹수들 같기도 했습니다.
이 맹수들이란 장애인들이 입은 상처이자 또한 장애인들이 가진 힘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습관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마음의 짐을 더는 수단으로 다짐을 이용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 고백과 다짐을 받아줄 착한 장애인은 없습니다. 쇼는 집어치워야 할 겁니다. 행사장 안에서 쇼를 보는 건 동원된 박수부대지만, 행사장 바깥에는 쇠우리에 가둘 수 없는, 갇혀 있기를 거부한 맹수들이 배회하고 있습니다. 저기 사랑을 습관적으로 고백하는 로맨티스트에게 이제야말로 우리가 맹수들임을, 우리는 꽤나 잔혹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임을, 우리는 할퀴고 물어뜯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들의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나에게서 시작하는 생각이 필요하다. ‘비정상’이라고 낙인찍힌 몸에게는 특히 ‘다르게 생각하는 법’이 중요하다. 골방에서 나온 이들이 모인, 시설에서 탈출한 이들이 모인, 타인의 말에 찌든 이들이 모인 노들에 그래서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르게 살기 위해서, 변신하기 위해서 기술이 필요하다.


추천의 글
글은 쓰거나 토하는 것이 아니라 캐거나 거두는 것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 글로 오는 일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폭발하고 터뜨리기보다 참아내고 기다려야 문자가 되는 일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노들을 이야기하는 홍은전 선생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차산 언덕을 한두 차례 올라보거나 거리에 부려진 노들을 지켜보기만 한 사람은 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그의 글 안에 있다고 말입니다. 시간을 태워 뿌리고 삶을 부숴 섞지 않으면 종이에 앉힐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기자인 저는 닿을 수 없는 언어들이 그의 문장을 이루고 있다고 말입니다.
[노란들판의 꿈]은 시간 속에서 캐내고 시간을 살며 거둔 이야기입니다. 재빠른 언어의 성글고 듬성한 그물엔 걸리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 시간을 구성해온 사람의 문자만이 붙들 수 있는 인간다움과 아름다움과 노들다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장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부하기 위해선 온 세계가 바뀌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차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장애인이어서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아서 장애인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운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무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편안한 일상이 비바람 치는 노란 들판을 밟고 구성돼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들판 밖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장 불편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이루어낸 세상의 편리가 저절로 주어진 것인 줄 알고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박탈당한 자신을 닦달해 박탈한 것들과 싸우며 꾸역꾸역 기어서라도 이 세상을 통과해야 하는 사람들, 나, 당신,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들을 캐내고 거두는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느닷없이 닥친 세기적 사건의 충격보다 끊어낼 수 없는 그저 그런 일상이 쌓아온 이야기의 전복성을 믿습니다. 그 이야기들이 세상을 흔든다고 믿습니다. 홍은전 선생님의 글에서 그 이야기들을 읽습니다.
- 이문영([한겨레21] 기자)

당신은 삶과 죽음, 인간과 짐승이 걸려 있는 배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평범하게 산다는 것, 이를테면 학교에 간다는 것이 철로에 제 몸을 묶을 정도의 과격한 실천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던 사람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한마디로 당신은 노들야학에 대해서 아는가. 학교로 이동하기 위해서라도 세상을 이동시켜야 했고, 단 하나의 지식을 깨치기 위해서라도 세상을 깨우쳐야 했던 사람들. 나는 노들야학의 지난 20년보다 아름답고 격렬한 배움의 시간과 장소를 알지 못한다.
- 고병권(철학자)

희망과 절망 사이, 시도와 패배 사이, 엇갈리는 오해들과 일치의 기억까지 끝없는 망망대해를 노 저어 가던 모든 과정이 노들의 수업이었다. 장작불 같은 학교, 먼저 붙은 토막이 불씨가 되었고, 빨리 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젖은 놈은 마른 놈 곁에 몸을 맞대어 활활 타올라 끝내 쇳덩이를 녹여 나가는 노들의 나날, 노들의 교육은 교육 바깥에서 희망이 되었다. 노들처럼 살고 투쟁하는 곳에 그 고색창연한 이름 ‘교육’이 있었다.
- 이계삼([오늘의교육]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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