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리학자가 한국의 아파트를?
이 책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저자이다. 발레리 줄레조(Valerie Gelezeau) 교수!
그녀는 프랑스에서 한국 사회를 연구하는 대표적인 젊은 연구자이다. 1967년생이니까 이제 40세. 이른바 수재들만 다닌다는 프랑스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erieure)에서 지리학을 전공했다. 서울의 아파트단지에 대한 연구로 파리4(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현재까지 마른-라-발레대학교 지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 한국학을 전공하는 프랑스 학자 중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람은 그녀와 함께 알랑 델리상(Alan Delissen)이 있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한국의 건축학과 현대성: 김수근의 건축언어”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63년생. 델리상 역시 고등사범학교 출신. 이 두 천재적 연구자들이 과거 미국 학자가 주도했던 한국학 연구의 아성에 도전하면서 이미 국제학계에서 큰 명성을 얻고 있다.
한국을 연구 대상 지역으로 삼고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프랑스 국립동양어연구원의 문을 두드렸을 때 느꼈던 설렘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처음 그녀가 한국을 연구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은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분단되어 있는 상태에서 빠르게 발전했고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경험하는 등 거시적 사회 변화를 겪은 나라인데도 프랑스에서는 별로 연구된 바 없는 지역이므로 분명 중요한 연구 주제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상식과 편견에 맞선 연구
서울을 처음 방문했던 1993년, 그녀는 거대한 아파트단지에 놀랐다. 그 뒤 프랑스에 돌아가 동료 도시계획가에게 서울의 5천분의 1 축적 지번약도를 보여 준 적이 있다고 한다. 그 동료는 “한강변의 군사기지 규모는 정말 대단하군!”이라 했다. 바로 반포의 아파트단지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한국의 아파트를 연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동료 도시계획가에게 서울 5천분의 1 지번약도를 보여 주었더니,
“한강변의 군사기지 규모는 정말 대단하군!”이라 했다. 바로 반포의 아파트단지였다.
그러나 이후 그녀는 동료 연구자들 사이에서 “왜 한국의 아파트냐”, 아파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프랑스에서 충분히 연구되었는데 뭘 더 새로울 것이 있겠느냐, 그게 비교연구의 주제가 되겠느냐, 한국을 연구하는 건 좋은데 한국처럼 빠른 발전을 하는 나라를 주제로 왜 빈민 문제를 연구하려 하느냐 하는 회의적인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동료 연구자들은 아파트 문제가 곧 빈민 문제, 도시 문제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한국의 아파트 문제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도시 중산층, 즉 상층의 중간계급에 대한 문제라는 것을 수십 번 설명했지만 잘 납득하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조사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왜 아파트냐는 질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땅은 좁고 인구는 많은 데, 당연할 걸 왜 이해 못하느냐는 핀잔을 자주 들었다. 아파트 현상을 의문의 여지없이 받아들여 온 한국인들에게 그녀는 당연한 것을 이해 못 하는 순진한 외국인으로 취급되기 일쑤였고 자주 마음의 상처를 입어야 했다.
이 책의 결론에서 그녀는 “면접조사를 진행하면서 솔직히 내심으로는 아파트단지 주민들과 끈끈한 정을 나누는 일이 전혀 편치 않았다”며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아파트 경비원이나 무뚝뚝한 단지 주민들에게 자주 면박을 당할 때면 이렇게 해서 학위 논문 연구를 마칠 수 있을까 걱정하고 낙담하기도 했단다. 그러나 그녀는, 지리학자는 그 어떤 결정론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기억하며 오랫동안 조사와 인터뷰를 계속해 연구를 마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의 평가
상식과 편견에 도전하여 마침내 이뤄낸 연구는 성공적이었다. 한국의 아파트를 다룬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은 2003년 프랑스에서 책(Seoul, ville geante, cites radieuses)으로 출간되었다.
우리말로 하면 제목은 “빛나는 도시, 서울”이 되겠지만 이 개념은 이른바 근대 건축운동을 주도했던 르 코르뷔지에의 이상을 상징하는 말이다. 집이란 “살기 위한 기계”일 뿐이라며 주거, 일, 여가, 교통을 아우르는 대규모 공동주택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이들의 진보적 접근은, 그러나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서구에서는 실패했다. 부르주아와 중간계급은 아파트를 떠나 단독주택을 향해 갔고, 대단지 아파트에는 하층계급과 이민자들이 들어서 이른바 도시 문제의 온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파트가 모든 계층이 선망하는 모델이자 이상이 되었다. 절대적인 비중에 있어서도 아파트가 압도한 지 오래고 신규 주택 공급의 절대적 비중을 아파트가 차지한다. 일견 르 코르뷔지에의 이상은 다름 아닌 이곳 한국에서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저자의 대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대단지 고층 아파트로 “빛나는 도시”가 된 한국 역시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프랑스와는 정반대로 ‘중산층’이라 불리는 상층 중간계급이 집단적 거주 형태로 자리 잡은 한국 아파트의 현실과 운명 역시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그래서 저자의 스승이자 파리4(소르본)대학교 총장으로 있는 장-로베르 피트(Jean-Roert Pitte)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한국의 도시를 비웃는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잔혹한 거울인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책은 건축가, 도시계획가, 지식인, 정책결정자들뿐 아니라 좀 더 인간적인 도시 공간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창조해 낸 대단지 아파트에 대해 몹시 껄끄러운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 말은 한국인들에게 프랑스의 아파트 문제 역시 자신들의 “잔혹한 거울”임을 암시한다.
이 책은 출간된 해 프랑스 지리학회가 수여하는 가르니에 상(Francis Garnier Prize)을 수상했다.
한국 독자를 위한 새로운 책
프랑스어로 나온 그녀의 책은 2004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한국의 아파트 연구』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출간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프랑스 독자를 대상으로 한 내용 그대로였고, 번역에도 상당한 오류가 있었다. 게다가 조사와 연구의 시점이 1990년대 중반까지로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책을 새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책을 위해 우선 저자는 원고를 새로 작성했다. 프랑스 독자만을 위한 내용은 모두 삭제했고, 한국 독자를 대상으로 내용을 추가하고 재구성했다. 문체나 스타일에프랑스에서는, 복잡한 도시 문제와 ‘도시 폭력’의 상징이 되고 있는 대단지 아파트가, 한국에서는 경제위기의 부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있어서도 수정된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번 책에서 중요한 사실은 2004년과 2005년에 걸쳐, 1990년대 중반 조사 대상이었던 동일한 아파트단지들을 재조사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는 이번 책에 반영되어 있다.
이때의 재조사는 한국 아파트단지가 1997년에서 9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의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좀 더 명확히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경제가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의 충격을 본격적으로 흡수하게 되면서 그에 따른 정치 사회적 변화는 아파트단지 내 시민들의 주거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프랑스에서는, 복잡한 도시 문제와 ‘도시 폭력’의 상징이 되고 있는 대단지 아파트가, 한국에서는 경제위기의 부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왜일까?
대단지 아파트는 도시의 분열을 조장하고 사회적 관계를 단절시키는 주거 형태인가? 프랑스와는 달리 한국의 대단지 아파트는 미래에도 여전히 성공의 모델로 남을 것인가? 저자는 이번 책을 통해 한국과 프랑스의 대단지 아파트에 대한 비교분석을 바탕으로 도시유형이 사회적 견고성에 대해 갖는 상관관계를 본격적으로 살펴보려 했다고 적고 있다.
그녀는 이번 책은 그 이전 프랑스에서 출간되고 한국에서 번역된 과거의 책과는 아주 다른, 매우 독창적인(original) 책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주요 내용과 특징
한국 사회가 온통 아파트의 나라가 되었는데도,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책은 없었다. 최근 몇 권의 책이 출간되었지만 기초적인 사실관계부터 제각각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최초의 아파트는 무슨 아파트일까? 1956년 지은 중앙아파트라 하기도 하고 62년의 마포아파트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인 줄레조 교수는 한국에서 아파트라는 주거형태의 기원은 1958년 완공된 종암아파트라 말한다.
중앙아파트는 사원주택용으로 지어졌고, 한 동짜리 12가구가 입주할 수 있는 공동주택이었다. 그야말로 아파트라는 말만 붙여졌을 뿐이란다. 종암아파트는 달랐다. 5층짜리 3개동에 152가구가 입주했다. 중요한 것은 규모만이 아니다. 핵심은 종암아파트의 경우 정부 주택정책의 결과로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사업을 주관한 것은 주택공사의 전신인 주택영단이다. 설계는 독일 기술자가 맡았다. 재정은 국제개발협력처를 통한 미국 자본의 지원과 상업은행의 융자로 이루어졌다. 시공은 중앙산업이 했지만 분양은 주택영단이 했다. 이 아파트가 건설되자 이승만 대통령도 참석해, 아파트의 현대성과 수세식 화장실의 편리함을 역설했다. 아파트라는 이름을 단 건물이 처음 언제 등장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이다.
한편 이 사업을 주관한 대한주택영단과 관련된 사실도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저자 줄레조 교수에 따르면, 대한주택영단은 1941년 조선총독부가 세운 조선주택영단이 해방 후 이름을 바꾼 것이며, 이미 1958년 종암아파트 건설사업을 주관한 국가기관이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아파트와 아파트가 아닌 것, 좀 더 정확히 말해 아파트단지를 정의하고 유형을 분류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어떤 책에서도 이를 질문하지 않으며, 공식적인 유형화의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아파트단지에 대한 프랑스에서의 정의와 유형화를 검토하고, 한국에서의 일반적 사용용례와 더불어 주택법과 주택법시행령, 국가로부터 인가받은 주택관리사 관련 조항을 바탕으로 정의를 내린다(최소 5층의 공동건물에 최소 300세대 이상이 입주할 수 있어야 하고 단지 내 관리사무소가 별도로 설치될 때).
어디 이것뿐이랴. 아파트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선호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파트가 대량으로 양산될 수 있었던 체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한국의 대단지 아파트가 기원을 두고 있는 건축이론 내지 도시계획 모델은 어디서 왔을까? 한국의 건축가들은 도시가 아파트로 획일화되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서구의 대단지 아파트 모델이 실패로 귀결된 반면 한국에서는 어떻게 모든 계층이 선호하는 이상적 주거 형태가 될 수 있었을까? 한국의 아파트 모델은 대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아무튼 우리는 우리보다 한국의 아파트를 더 잘 아는 먼 프랑스의 지리학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잠깐 소개했듯이 이 책이 제기하고 있는 질문은 하나같이 중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파트 대량 생산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국가-재벌-중산층의 이익연합에 대한 분석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저렴한 택지 공급과 급성장한 아파트 건설시장으로부터 막대한 혜택을 얻어 성장한 재벌 건설사의 다른 한편에, 중산층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주택의 대량 공급을 필요로 하고 이를 위해 재벌 건설사의 아파트 공급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가 있는 한 한국의 아파트 문제는 개선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 중산층의 현실안주적 경향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조 위에서 가능했다. 저자는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가 변하지 않고 있음을 강조한다. 아파트를 통해 한국에서의 근대화와 현대성의 문화적 양상을 분석한 대목도 매우 흥미롭고 독창적이다. 아파트 안에서 신발의 움직임, 상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저자가 얼마나 민감하게 관찰하고 있는가를 읽어 보라. 이 과정에서 저자가 스스로 질문을 제기하고 문제를 풀어가는 솜씨는 감탄스럽다. “주택이 유행인 나라”, 미학적 기준에 반하는 도시경관, 그나마도 매일매일 변하는 “하루살이 도시,” 그래서 결국 “지리학에 반하는 도시”가 된 한국의 아파트 공화국에 대해 이 책보다 더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녀의 최근 연구들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Mrs. APT(아파트 여사)”라고 불린다. 아파트에 대한 그녀의 연구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주제도 추가되었다. 특급 호텔을 통해 한국 중산층의 사회적 관계와 계층적 특징을 다룬 연구도 프랑스에서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 역시 후마니타스에서 번역 중에 있다. 최근에는 백령도와 같은 접경지역을 대상으로 남북한의 상호 인식을 조사해왔다. 그녀의 연구는 한국의 분단과 이데올로기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연구에 대한 줄레조 교수의 열정은 존경할 만하다. 한국의 거리체계와 공공장소 간의 상관관계는 석사논문을 쓸 때부터 간직하고 있는 연구 주제이며, 찜질방이나 노래방과 같이 일종의 ‘방’문화를 통해 한국인의 사회적 친교를 연구해 보고자 하는 계획도 갖고 있다. 줄레조 교수는 한국에 올 때마다 종암동의 한 찜질방을 가곤 하는데, 그곳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면 우리는 연구 대상으로 관찰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