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가 되면 일본에서는 정당정치가 발전하고 정당의 영향력이 식민지 통치기관까지 확대했다. 그 때문에 내각과 제국의회에 발판이 없는 조선총독부는 내각으로부터 예산, 인사, 관제, 법률 면에서 간섭받게 되어 안정된 식민지 경영이 어렵게 되었다. 특히 긴축정책을 표방했던 호헌삼파 내각이 성립하자 조선총독부는 보조금 획득과 공채발행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 부임한 헌정회의 시모오카 주지 정무총감은 취임 초기부터 산업제일주의를 표방하고 산미증식계획 및 철도망의 완성을 최우선과제로 설정했다. 산미증식계획과 수송교통기관의 정비는 방대한 재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예산의 획득, 일본자본의 유치가 긴급한 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의회, 정부, 일본의 자본가들에게 조선의 ‘특수사정’을 알선·선전하는 기관의 설치가 절실한 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중앙조선협회는 이처럼 조선총독부가 직면하고 있던 내외의 통치환경이 악화되는 가운데 조선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 의해 북해도협회를 모델로 해서 조선개발·조선문제의 조사·연구·내선융화를 도모할 목적으로 1926년 동경에서 설립되었다.
초대회장에는 前정무총감이자 추밀고문관인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취임했지만 잦은 병치레로 협회 업무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1927년 9월 야마가타가 사망하자 고문이었던 사카타니 요시로가 취임해서 1941년까지 오랫동안 협회를 이끌었다. 사카타니는 시부사와 에이치의 사위로 경부철도 부설, 제1은행 설립 등 조선정책에 대장성 관료로서 관여하고 있었고,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미국선교사의 반일선전에 의해 구미에서 대일감정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평화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또 사이토 마코토가 총독으로 부임할 때 장문의 의견서를 보내어 조선통치정책을 건의하는 등 조선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협회의 재정은 회원의 회비나 식산은행, 조선은행, 동척, 만철, 조선총독부, 재계(초기에는 식산은행 관련 회사)로부터의 기부로 충당되었는데, 재정적인 곤란을 면하지 못했다. 1927년의 결산안을 살펴보면 수입 18,594엔 가운데, 거출금이 13,500엔, 통상회비가 2,338엔으로 재정적으로는 여느 단체와 마찬가지로 거출금에 의존하고 있었다.
협회의 중요사업으로는 회칙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조선에 관한 제반의 사항을 조사하고, 그 방책을 강구함으로써 조선의 건전한 발달을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식민지협회였다. 협회는 ‘조선의 개발’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먼저, 조선에 관한 제반을 조사하고 그것을 일본에 선전·보급하기 위해 활동했다. 협회는 회보와 『조선산미증식의 계획』을 비롯한 다수의 팜플렛을 발행하고 『조선사상통신』을 회원에게 배포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협회는 조선총독부를 원조하는 활동을 하였다. 협회는 내각과 의회에 발판이 없는 조선총독부의 이익을 대변해서 예산안과 법률안의 통과를 위해 진력하는 등 총독부의 조선통치를 ‘익찬’했다. 총독부도 협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면서 적극적으로 조선통치에 대한 협력을 의뢰했다. 또 동경에 건너온 조선총독부 간부도 협회에 총독부의 정책과 여산안·법률안을 설명하고 협회의 협조를 요청했다. 협회도 총독부 간부가 도일할 때 가능한 한 이사회 혹은 전문이사회에 출석하도록 하여 ‘조선개발’과 조선통치사정에 대한 설명을 구하고 상호 의견을 교환하였다.
중앙조선협회의 회보는 1926년 8월부터 1943년 7월까지 총 51호가 발간되었는데 두 차례의 중단을 거치면서 분량과 내용이 크게 바뀌었다. 즉 창간호부터 제19호(1930년 12월 발간)까지는 거의 2, 3개월에 1회 간격으로 발행되었는데 1931년부터 1933년까지 3년간 중단되었다가 제20호가 1934년 1월에 발간되었다. 제20호부터 제49호(49호는 현존하지 않음)까지는 제1기와는 달리 매달 발행되었는데, 회보에서 논문이 빠지는 대신에 다른 회원에게 회원의 동정을 알리는 엽신교환 코너가 마련되었다. 「조선의 소리」와 「조선시사요보」를 대신하여 「current topic」항이 신설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분량이 줄어들었다. 엽신교환 코너에는 회원들에게 기고를 요청하여 회원들의 의견(척무성 존폐문제, 중앙조선협회 사업에 관한 의견 등)이나 감상·소감(도한 때의 회고, 시정 25주년기념소감 등), 최근 근황을 실었다. 엽신교환 코너는 제43호(1937년 10월 발행)부터 회원들의 감상과 소식을 실은 지상담화실 코너로 개편된다. 회보의 실무를 담당한 나카지마는 1935년 1월 15일 “당 협회의 회보는 현재의 감상, 소식 등의 게재는 적절하지만, 나아가 「current topic」항을 충실히 해서 본 회보를 보면 조선의 최근 사정, 사상, 동향 등을 개괄적으로 알게 하고 동시에 시사를 줄 수 있도록 구비할 것”을 편집 방침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1) 매일의 조선 신문을 정독해서 보도에 필요한 기사를 물색하여 일지체로 기록할 것, 사실, 인사 그 밖을 조선시사요보 라고 제목붙이고 간단하게 게재할 것, 2) 조선에서 발행하는 신문 그 밖의 여론 중에서 필요한 것을 요약해서 게재할 것, 3) 공사의 잡지, 간행물 중 중요한 기사의 항목 및 저자, 게재지, 월, 호수 등을 별기해서 게재할 것(조선관계논문요목)을 통해서 기사의 충실을 기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후 회보는 4년간 중단되었다가 1942년 12월에 협회소식으로 제호가 바뀌고 1943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중단된다.
이처럼 중앙조선협회회보는 중앙조선협회의 사업과 활동뿐만 아니라 재조일본인들의 동향, 식민지 로비의 전개 등에 대한 풍부한 재료를 제공해 준다. 기사를 상세히 분석해 가면 지금까지 식민지지배정책사에서 결락된 중앙조선협회의 실태가 한층 부상하게 될 것이다.
중앙조선협회가 이제까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먼저, 식민지 정치사에 대한 관심의 부족에서 원인을 꼽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식민지 연구가 ‘지배와 저항’이라는 분석틀 속에서 주로 저항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지배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소홀이 다루어져왔다. 그로 인해 재조 일본인들의 로비단체로서 식민지 지배정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앙조선협회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는 사료의 부족이다. 협회가 발간하는 회보는 일본 학습원대학의 우방문고와 몇몇대학(고려대학, 교토대학, 오이타대학)에만 소장되어 있고, 우방문고를 제외하고는 결호가 많다. 소수의 연구기관만이 회보를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조선협회회보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연구자도 많다. 대함협회와는 달리 중앙조선협회는 협회사가 존재하지 않고, 협회가 발간하는 팜플렛을 제외하고는 협회의 실체를 알수 있는 자료가 아주 적었다.
따라서 회보는 중앙조선협회의 사업과 활동을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 회보에는 조선지배정책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조선총독부 관료, 국책은행의 간부, 재조일본인 유력자, 식민정책학자들의 글을 비롯해 이사회, 간화회, 간담회, 총회 등 협회의 활동이 실려 있다. 또한 조선에서 상경한 진정인과 청원인들과의 간담회 내용이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어 재조 일본인들이 본국 정부와 제국의회를 상대로 전개했던 정치활동의 전개양상을 엿볼 수 있어 재조일본인 연구에서도 귀중한 기록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