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아트월드를 통하여 서양화가이며 미술작가인 조영규는 이미 2013년에 발간한 『 The Ten, 미국의 인상주의 거장들, 전2권 』을 이번에 다시 합본하여 『 The Ten, 미국의 인상주의 거장화가들 』단행본을 출판하였다.
과거 PDF파일의 e-Book 발간에 있어 도서 유통사에서는 초기에 파일 용량의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유통 환경의 개선으로 업로드 파일의 용량 증가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현재는 단행본을 200MB까지 업로드 할 수 있어 독자들이 더욱 편리하게 되었다.
미술 분야의 e-Book은 그림파일이 많기 때문에 자연히 용량이 커 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특히 아트월드의 PDF 시리즈 책은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e-Book의 개별 파일보다 두 배 이상의 크기로 싣고 있다.
즉 독자가 휴대하여 볼 수 있는 기기 중에서 큰 편인 태블릿 정도의 크기에서도 확대하여 보거나 나아가 인터넷 TV와 대형 PC모니터 등에서 독서와 그림파일을 감상할 경우에도 큰 화면에서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근간에 2013년에 발간된『 모네와 지베르니아이츠, 전2권 』도 합본하여 단행본으로 새로 발간하였다.
세계적인 e-Book 환경에서 주목할 사항들이 새로 등장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이며 시애틀에 본사를 둔 Amazon이 삼성과의 협력을 확대하려는 동향이 뉴스에 나오고 있다. 공동으로 안드로이드 기반의 Kindle e-Book 앱을 개발하면서 독자들에게 연간 최대 12권까지 무료로 Amazon의 e-Book을 제공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실행되면 전 세계 90여 개 국가에서 서비스 이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Amazon이 곧 한국지사를 40번째로 설치하여 유통망을 넓힌다고 한다. 따라서 Amazon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사용자들에게 Kindle e-Book 판매를 확대시킬 것이다.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19%(2013기준)를 점유하는 삼성도 e-Book 독자들을 유인할 수 있는 통로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 출판 시장의 경우 신간 도서 중에서 e-Book이 차지하는 비율은 30%이다. 우리나라는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Amazon은 e-Book 단말기 Kindle을 가진 위력이 작용했다.
우리가 e-Book을 알고자 하면 먼저 Amazon을 알아야 한다. Amazon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e-Book 시장의 65%를 차지하고 있다. 킨들의 초기 개발자였던 제이슨 머코스키(Jason Merkoski)는 지난해 9월 방한했을 때 "2년 후 한국 인구의 절반은 e-Book 단말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하나의 e-Book 환경의 변화는 소셜리딩(Social Reading)이다. 이는 콘텐츠를 중심으로 지식과 정보 및 정서까지 독자가 거의 동시에 서로 교류하면서 읽는 상당히 획기적이면서 새로운 방식이다. 즉 텍스트에 그어진 밑줄과 책의 빈 공간에 다른 사람들이 써놓은 메모를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디지털 세대는 종이보다는 컴퓨터,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한 읽기에 더 잘 적응하고 있다. 오늘날 스마트한 독자들은 늘 콘텐츠에 목말라 있다. e-Book은 종이책의 적(敵)이 아니라 동반자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전자책에 대한 거부감을 줄일 수 있다. 아트월드 출판사는 국내 미술서적에서 목말라 하는 것을 미리 알고 전혀 열리지 않는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인상주의 미술에 있어 미국의 Impressionism은 미개척 분야이다.
서양화가이며 3년 동안 이제 20권의 미술도서를 출판한 조영규 작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벌써 관심과 기대를 상당히 받고 있다. 특히 미술을 공부하려는 젊은 청. 장년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고 있다. 미래의 미술시장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프랑스에서 꽃을 피우다가 그만둔 초기 인상주의를 계승하여 미국에서 번성시킨 <미국의 인상주의>에 찾을 수 있다. 왜 이런 세계적인 동향과 흐름을 주목하지 못하였을까? 바로 아트월드가 발행한 전자책 속에 해답이 실려 있다.
아시아의 경우의 전자책 상황을 살펴본다면, e-Book은 일본과 중국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은 상당히 뒤쳐져 있다. 이는 Amazon이 이미 두 곳에 진출하였기 때문으로 그 영향이 크다고 분석하고 있다. 일본은 Amazon 킨들이 진출한 지 2년, 중국은 1년이 지났다. Amazon 진출을 계기로 두 나라의 출판사와 독자 및 장비 개발회사 등 이해관계자들의 인식이 바꿨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독자들이 호응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주목하여야 한다. 우리나라는 IT환경에서 특히 한글이라는 우수한 이용매체를 가지고 있다. 스마트폰에서 문자를 보낼 때 한글은 바로 입력하나 일본어와 중국어는 영어를 통하여 한 단계 거쳐야 가능하다. 우리는 세종대왕에게 더없이 감사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재편되는 시장에서 전자책의 주도권을 한국이 우수한 IT환경을 가지고서도 뺏기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독자가 많아져야 한다. 또한 국가나 사회전반이 e-Book의 세계적인 환경변화를 빠르게 이해하면서 협조하고 준비해야 한다.
e-Book은 기존 출판과 정보통신 기술 두 가지가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복합체이다. 즉 복합형태의 콘텐츠 서비스이자 플랫폼 사업인 것이다. 따라서 e-Book 시장은 콘텐츠(C)-플랫폼(P)-네트워크(N)-디바이스(D)의 관계를 독자들도 유기적,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 국가발전과 장차 개인의 발전에도 박자를 맞출 수 있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이러한 미국 인상주의 시리즈와 The Ten이라는 전자책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발간하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비록 1914~1918년의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00년 동안 거대국가로 발전된 미국이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과 더불어 문화예술의 측면에서 바탕의 하나가 된 인상주의 미술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있는가를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는 미술뿐만 아니라 건축 음악 문학 디자인 등의 분야에서 깊이 연관되어 있다.
[에필로그]
미국 인상주의의 변혁자(Change Agent)로서 The Ten
The Ten은 오늘날 미국을 위시하여 전 세계에서 인상주의 화가로 모두 존경받는 거장(巨匠)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은 한마디로 116년 전인 1898년에 미국에서 중진화가 10명으로 모여 인상주의를 표방한 변혁자(Change Agent) 들이었다. 이 책은 The Ten의 11명 화가들 작품과 미술교육 등의 활동 및 현대미술에의 역할을 살펴 본 것이다.
프랑스는 일찍이 140년 전인 1874년에 클로드 모네가 주동이 되어 30명의 화가를 모아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화풍의 혁명을 일으킨 변혁자(Change Agent)였다. 그러나 오랜 전통을 지닌 아카데믹의 화풍을 추구하던 정부나 파리살롱의 배심을 맡았던 교수 및 비평가들은 일제히 새로운 스타일의 인상주의에 거센 반대를 했다. 30명의 예술가가 165점으로 파리에서 처음 선보인 인상파 작품은 일반대중에게 분명하게 알려졌으나 심한 비평을 받았다. 그리고 1888년까지 제8회의 전시로 이어지다가 막(幕)을 내렸다. 더 이상 인상파들의 전시회는 개최되지 않았다.
인상파를 주동하던 모네는 43세의 나이인 제7회 전시를 끝낸 후인 1883년에 지베르니에 정착했다.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80km지점의 시골구석에 그가 평생 염원하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43년간을 살았다. 그의 일생에 많은 작품은 여기에서 제작되어 무려 8,000점이나 되었다. 프랑스의 거대 화상(巨大 畵商)인 뒤랑 뤼엘은 1870년대부터 인상파에 주목하고 그들의 후원자가 되었는데 그는 모네의 작품 약 2,000점을 구매하고 1,000점은 거의 미국에 팔았다. 이것이 미국의 인상주의가 꽃필 수 있게 한 귀중한 씨앗의 하나가 되었다.
지베르니를 찾은 미국화가들 지베르니아이츠와 The Ten
모네가 살던 은둔(隱遁)의 지베르니는 그가 초청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미국 화가들이 찾아왔다. 30년 동안 무려 300명이 방문하고 정착하여 자연히 화가마을이 형성되었다. 즉 모네가 정착한지 2년 후인 1885년도에 윌러드 L. 메트캐프 등 미국화가 3명이 처음으로 방문한 것이다. 다른 이는 유명한 초상화가인 존 싱어 서전트와 미국 인상주의의 선구자(先驅者)인 시어도어 로빈슨이었다. 이러한 지베르니에서 생활한 화가 즉 지베르니아이츠(Givernyites)는 1885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프랑스가 전쟁의 중심지가 된 1914년까지 30년간 전 세계 18개국에서 350명이 방문하고 정착했다.
그 중에 미국 화가들은 300명으로 사실 지베르니는 미국 화가들의 예술가부락(Art Colony or Artists Colony) 즉 화가마을로 형성되고 결국 인상주의의 메카가 되었다. 시어도어 E. 버틀러는 모네의 의붓딸을 맞아 모네의 사위가 되었으며 41년간을 정착하면서 미국 화가들의 연계역할을 했다. 모네의 외손자(外孫子)이며 버틀러의 아들인 자크 장 필립 버틀러(1893~1976)도 화가가 되어 프랑스와 뉴욕에서 활동했다. 위와 같이 파리에서 체재했거나 본국에서 직행한 미국 화가들은 지베르니에서 새로운 인상주의의 기법과 이론체계를 정립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미국 화가들은 모네가 볼 때 다른 점(點)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들은 프랑스의 저명한 미술학교를 입학하여 거장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파리살롱의 배심에 통과하여 지속적으로 전시를 하였으며 심지어 영예의 금상(金賞)까지 수상한 화가가 많았다. 나아가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하여 전시는 물론이고 영예의 수상을 한 미국 화가들이었다. 이러한 점은 모네가 가지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모네를 우상(偶像)으로 여기고 찾아와서 기꺼이 멘토를 받았다.
결국 그들은 귀국하여 모네가 추구한 인상주의 스타일의 작품 속에 미국적 스타일을 가미하여 ‘미국적 인상주의’라는 정체성(正體性)을 지닌 화파를 이루고 르네상스의 길을 열었다. 이에 비하여 프랑스 화가 중에서 지베르니를 방문하고 모네와 함께 생활하면서 지베르니아이츠가 된 화가는 피에르 보나르, 막스밀리안 뤼스, 알베르 루브르, 의젠 바일 및 로베르 A. 파숑 등이 있었으나 숫적으로 적었다. 프랑스 화가로서 인상파가 파리에서 박해를 당하고 거센 핍박을 받았던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The Ten의 미술혁명은 시대적으로 옳았던 것이 증명되었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전시는 모네가 주동이 되어 1874년부터 1888년까지 12년 동안 8회에 걸쳐 열었다. 그러나 새롭고 혁명적인 전위예술(前衛藝術 Avant Garde) 즉 아방가르드에 대하여 초기부터 반대와 냉대 및 핍박이 크게 따랐다. 미국의 The Ten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인상주의가 미국에 전파되어 The Ten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변혁을 시도한 것이 24년이라는 갭이 있었다. 당시 The Ten이 결성된 원인은 미국에서 가장 전통적이며 권위 있는 ‘미국화가협회(美國畵家協會)’가 미국에서 인상주의가 널리 보급된 마당에 인상주의에 비교하여 보수적이며 아카데믹한 전통미술을 옹호하는 보수성(保守性)과 상업주의(商業主義)에 반대하는 일종의 개혁의 천명(闡明)이었다.
The Ten은 1898년에 미국화가협회를 탈퇴하고 반기를 들면서 미국에서 처음으로 인상주의 그룹(Impressionism Group)을 만든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The Ten의 혁명(革命)적인 배반(背叛)이 시대적 흐름으로 보아 옳았다는 사실은 미국화가협회가 The Ten이 1898년에 결성된 이후 8년만인 1906년에 여러 가지 문제로 폐쇄(閉鎖)되고 뉴욕의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에 합병(合倂)된 사실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정통적인 모네의 인상주의를 추구한 The Ten 멤버와 지베르니아이츠의 활동
프랑스에서는 여덟 번의 인상파 전시를 마치고 나자 차츰 모네의 인상주의에서 탈바꿈하는 시도가 있었다. 즉 1880년대 말에 쇠라, 시냑크, 크로스, 앙그랑 등이 신인상주의(新印象主義)를 추구했다. 다시 고흐, 세잔느, 고갱이 후기 인상주의(後期 印象主義)와 인상파의 한 부류인 상징주의 등의 화파로 전이되는 탈 인상주의(脫 印象主義) 현상이 생겼다. 신인상주의가 영향을 미친 야수파(野獸派)와 표현주의(表現主義) 및 추상화(抽象畵)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일부 화가들이 신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및 상징주의 스타일을 따랐지만 대다수가 미국적인 특색을 가미하되 모네의 정통적인 인상주의를 추구하는 흐름이 이어졌다. 이것은 바로 모네와 같이 생활한 300명의 지베르니아이츠(Givernyites)와 The Ten의 성향으로 인해 지속된 것이다.
사실 당시 화가들이나 일반인들이 인상파의 작품을 볼 때 과거와 전혀 다른 매력(魅力)과 진가(眞價)가 있었다. 왜냐하면 인상주의 스타일은 보다 뚜렷한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전환기에 미국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The Ten의 멤버들을 포함하여 많은 유럽을 다녀온 유학파 화가들이었다. 그리고 300명의 지베르니아이츠가 있었다. 이들은 지베르니에 있으면서 자주 고국으로 돌아가서 전시를 하고 작품을 팔거나 보급하였다. 미국과 지베르니를 왕래하면서 최고로 오래 거주한 화가로서 모네의 사위인 시어도어 E. 버틀러는 41년간을 생활했다. 루이스 리트먼은 19년, 리처드 E. 밀러는 15년, 프레드릭 프리세크는 14년 등이었다. 또한 많은 화가들은 부부가, 자매, 형제, 부자, 모녀가 같이 생활하면서 지베르니에서 거의 중요한 일생을 보냈다.
20세기 전후, 미국에서 개최된 인상파 전시회
인상주의 미술에 대한 사회적 수용여부에 대하여 두 국가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생기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프랑스에서는 정도가 심하여 화가들의 등용문(登龍門)인 파리살롱의 배심(陪審)에서 배척을 당하고 전시될 수 없었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가 사회 전반적인 반대로 인하여 고전(苦戰)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화가들은 새로운 스타일의 시도를 통해 그림화풍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위와 같이 프랑스에서는 12년 동안 여덟 번의 전시가 억압되고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겨우 전개되었다. 반대로 미국에서는 이와 달리 일반인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아래와 같이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을 뉴욕이나 보스턴 등의 도시에 자주 전시를 했다. 유럽에 공부한 미국 화가들도 귀국전(歸國展)을 개최하거나 프랑스에 있으면서 수시로 고국으로 자주 건너와 인상파 스타일의 작품을 전시하고 팔았다.
1878년 이후 미국에서 개최한 주요한 인상파 전시는 아래와 같다.
? 1878 보스턴-미국에서 최초로 인상파 작품의 전시
? 1886 뉴욕-제1회 인상주의展 <아메리칸 아트 갤러리> 모네 등 유럽 인상파 작품 300점을 전시
? 1887 뉴욕-제2회 인상주의展 <뒤랑 뤼엘 갤러리>
? 1890 뉴욕-클로드 모네 1인展 <뒤랑 뤼엘 갤러리>
? 1890 보스턴-프랑스 인상파展 모네, 피사로, 시슬리
? 1892 보스턴-클로드 모네 1인展 <보톨프 클럽>
? 1893 뉴욕-위어, 트와치먼 展 (The Ten 형성 이전)
? 1893 뉴욕-클로드 모네 1인展 <미국화가협회> 주관
? 1893 시카고-만국박람회 장차 The Ten 멤버인 하삼, 타벨, 벤슨 3인과 로버트 보노 4인의 인상주의 작품이 가장 인기- 관람객 2,800만 명 (해당 그림 ?)
? 1895 뉴욕-카셋, 로빈슨, 보노 미국 인상파 귀국展 <뒤랑 뤼엘 갤러리>
? 1898 뉴욕-The Ten 제1회 전시회 <뒤랑 뤼엘 갤러리>
? 1900 뉴욕-The Ten 정기전 <몬트로스 갤러리로 이전(移轉)>
? 1910 뉴욕-[지베르니 그룹展] 장식적 인상주의(Decorative Impressionism)
6인展 <뉴욕 메디슨 갤러리>
-지베르니아이츠인 6명 화가 -가이 로즈(지베르니 11년), 리처드 밀러(15년), 로턴 파커(12 년), 프레드릭 프리세크(14년), 에드먼드 그리슨(3년), 칼 앤드슨 (2년)
? 1913 뉴욕-<아모리 쇼>에도 The Ten 그룹 3인과 지베르니아이츠 참가 전시,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등의 프랑스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큰 호응
? 1917 뉴욕-The Ten 제32회 정례전<코코란 갤러리> 최종 전시
? 1917~1918 겨울, 워싱턴 D.C.-The Ten 회고전(回顧展) <코코란 갤러리>
이와 같이 프랑스의 인상주의는 오랜 산고(産苦) 끝에 영광의 빛을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미국의 사회여건은 의욕적인 화가들과 새로운 혁신에 대하여 수용하며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들은 인상주의의 제2세대 즉 많은 제자들과 힘을 모아 ‘미국적 인상주의’라는 현대미술로 가꾸어 나갔다. 오늘날 세계미술의 중심지가 된 미국에서는 인상주의가 불멸(不滅)의 화파(畵派)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특히 미국의 여류화가인 메리 카셋은 에드가 드가의 권유로 제4회 인상파 전시부터 참여하여 널리 미국 화가들에게 귀감(龜鑑)이 되었다. 그녀는 특히 모네, 르누아르, 드가, 마네 등 주위의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미국의 공립미술관이나 갤러리가 구매하도록 권유하였으며 미국 최대의 철도회사 사장을 역임한 친오빠인 알렉산더 카셋 (1839~1906)등 미술수집가들에게 적극 홍보했다. 나아가 인상파 작품을 공공기관이나 개인들이 구매하도록 권유하고 성과를 거두었다. 카셋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뢰종 도뇌르Legion of Honor 훈장까지 받았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인상주의에 대한 교육과 후진양성 비교
프랑스에서 공립(公立)으로 최고권위의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를 나온 미국 화가는 The Ten 그룹에 줄리언 A. 위어와 에드워드 E. 심먼스가 있다. 또한 지베르니아이츠 중에는 존 싱어 서전트를 포함하여 18명이 있었다. 이 학교는 입학이 까다로웠고 특히 초기에 여성은 입학되지 않았다. 또한 사립(私立)의 줄리앙 아카데미에는 비교적 입학이 자유스러웠으며 여성도 입학이 허용되었다. 모네를 찾아간 300명의 지베르니아이츠 113명 중에 이 학교 출신은 82명으로 대부분이 이곳을 거쳤다. The Ten 그룹 11명 중에 줄리앙 아카데미를 나온 화가는 나머지 8명이었다. 그리고 1808년에 설립된 독일의 뮌헨 왕립 아카데미를 나온 화가들도 다시 파리에 와서 이곳 학교를 마친 화가는 존 H. 트와치먼이 있다. 이들은 모두 1874년부터 1886년까지 12년간 파리에서 전시된 인상파 전의 작품을 눈여겨보았다.
유럽에서 미술학교가 설립된 시기는 프랑스의 줄리앙 아카데미가 1860년에, 독일의 뮌헨 왕립아카데미는 1808년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들 학교는 인상주의 전후(前後)의 교육 스타일에는 큰 변화는 없었다. 미국은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가 1875년에 설립되고 1874년 프랑스 인상파 전시를 한 다음 해였다. 또한 뉴욕의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는 1863년에, 보스턴 미술 아카데미도 1876년에 설립되었다. 이들 학교들은 1648년에 설립된 프랑스의 에콜 데 보자르를 제외하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학교들이다.
그러나 미국의 미술학교에는 300명의 지베르니아이츠나 The Ten의 멤버들이 귀국하여 미술교사가 되어 제2세대의 인상파 화가를 길렀던 점이다. 이러한 제2세대에게 인상파의 미술을 가르친 교육환경이 프랑스와 크게 다른 점이었다. 윌리엄 M. 체이스는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20년 동안 4,000명의 제자를 길렀다. 또한 벤슨과 타벨 등도 이름난 미술교사였다. 유럽에는 처음부터 인상파에 대한 교육기관과 이론적인 체계가 없었다. 1886년을 마지막으로 인상파 전시가 끝났고 해산되어 버렸다. 해체된 인상주의 화가들의 모임은 그 이후에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은 위의 미술학교 외에도 전국에 화가마을이 생겼다. 즉 올드라임(Old Lyme) 등 여러 곳의 화가마을과 더불어 화가들이 세운 계절학교가 많았다. 즉 체이스가 세운 ‘시네코크 여름학교’에서는 체이스 뿐 아니라 하삼과 메트캐프 등의 인상파 거장들도 많은 제자를 길렀다. 또한 미국의 중부와 서부지역의 시카고 필라델피아 지역 등에서도 화가마을이 생기고 유럽파 출신의 화가들이 인상파를 전파하고 제자를 길렀다.
미국에서 후진의 양성의 현장으로 뉴욕 등의 동북부 도시를 중심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에 프랑스의 지베르니라고 일컫는 올드 라임 (Old Lyme) 등의 화가마을이 미국전역에 생겼다. 뉴욕 주의 시네코크, 뉴욕 케잎코드, 글루스터, 프로빈스 타운, 브라운 지방 등이다. 미국 동북부의 인상주의 화가마을은 다시 서부로 전파되어 곳곳에서 활발하게 생성되었다. 서부는 몬트레이, 카르멜, 산타바바라, 패서디나, 라구나 비치, 뉴포트 등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아르장퇴유, 에트르타, 트루빌, 옹펠뢰르 등이 있었으나 인상파 초기에 너무나 혹독한 비난으로 인하여 인상파 전시가 끝난 후에 활성화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미국 화가들은 1870년대 이후부터 약 20여 년간 미술학교에서 배운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상주의 스타일을 체험하면서 흥미를 가졌다. 파리에서 생활한 위와 같은 미국 화가들은 인상주의 미술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부득이 이를 충족키 위하여 80km 떨어진 지베르니의 모네를 찾았다. 그곳에서 모네와 함께 정통적이고 창의적인 인상파 작품을 제작하여 미국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전시를 통하여 일반대중의 호감과 반응을 살폈다
미국 인상주의의 장차 전망
미국의 인상주의가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불멸(不滅)의 화파(畵派)가 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인상주의의 세 가지 시너지 효과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그들은 그림의 소재(Motif)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종래 아카데믹한 미술의 주제는 주로 역사, 종교, 신화 등의 고전탐구였다. 그러나 인상파는 인간과 자연의 모습 및 모든 활동을 모두 그릴 수 있었다. 또한 인상주의 작품에는 눈에 보이는 사실성(事實性)과 마음의 추상성(抽象性)이 같이 내포되어 있어 신비스러운 점이 있었다. 이를 통틀어 관람자가 볼 때에 너무나 이색적이고 신선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화가들의 자유스런 개별성에 있다.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들은 파리에 체재하면서 비난을 듣는 전시회와 소장된 인상파 작품을 통하여 충격적인 영감을 받았다. 그들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를 마치고 파리와 뮌헨 등에서 세계 최고의 미술학교 및 거장화가들 밑에서 당시 미술계의 주류인 아카데믹 리얼리즘(Academic Realism)의 화풍을 배운 화가들이었으나 심미감에서 가장 발달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인상주의를 다시 선택했다.
마지막으로 화가마다 묘사 기법의 다양성(多樣性)을 들 수 있다. 화가는 그림을 무한정으로 다양하게 그릴 수 있다. 주로 캔버스에 유화를 통해 그린다면 붓터치와 붓놀림이 화가의 개성에 따라 달라지는 고유성이 있었다. 예를 들면 성악가의 소리는 목에서 울려 나오는 사람마다 다른 프리퀀시(frequency) 때문에 음색(音色)이 다른 것처럼 화가들도 붓터치로 인하여 그림의 분위기라고 하는 화색(畵色)이 달라진다.
미국 미술에 The Ten의 역할과 기여
미국의 The Ten의 멤버 11명은 1898년부터 20년 동안 ‘미국미술의 변화촉진자(變化促進者 Change Agents)’ 역할을 수행하여 유럽에서 발상(發祥)한 인상주의를 오히려 활기차게 이끌었다. 미국은 1913년에 뉴욕의 육군병기창에서 1,300점의 작품으로 약 한 달간 미국 최초의 국제 현대미술전(The Armory Show)을 열었다.
이 전시는 유럽의 사실주의와 전위예술(前衛藝術)인 인상주의 및 신인상주의, 또한 실험적인 스타일의 야수파 Cubism, 입체파 Cubism,, 미래파 Futurism 등의 작품도 모두 포함되었다. 따라서 유럽의 인상파는 물론이고 미국의 인상파 화가들도 참여하여 인기가 있었고 좋은 결과를 낳았다. 아모리 쇼에 The Ten 그룹의 참여 화가로는 하삼과 트와치먼 및 줄리언 A. 위어 세 명이었다.
전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에 대한 변천은 시대적으로 변화된 추세를 보이고 있다. 즉 18세기에서 19세기 초반까지는 영국의 런던과 이태리의 로마에서 꽃을 피웠다. 이런 현상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프랑스의 파리와 독일의 뮌헨 및 뒤셀도르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미국의 화가들은 유럽으로 건너와서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자기의 정체성(正體性)과 창조성(創造性)을 확립하는데 불을 붙였다. 현대미술의 혁명아(革命兒)인 프랑스의 인상주의는 20세기 전후(前後)의 세계적인 변화 속에 차츰 미국 쪽으로 옮겨 가기 시작하였다.
현대미술에 인상주의가 미친 영향은 지대하며 모든 예술 활동의 모태(母胎)가 되었다. 미국에서 이러한 동인(動因)을 제공한 화가들 중에서 The Ten이 중심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그들은 미국 최초로 인상주의 그룹을 형성하면서 최고 권위의 미국화가협회를 과감히 탈퇴한 개혁(改革)의 선봉자들이었다. 또한 유럽에서 천시당한 인상주의가 미국토양에 발아되는 지를 일반대중이 눈여겨보았다. 20세기 전환기부터 The Ten은 이런 주의 깊은 시선 속에서도 열심히 정통적인 인상주의를 창작하면서 세계적으로 미국이 지닌 고유의 심미감을 높여 나갔다. 따라서 미국적 인상주의를 창조하며 중심에 선 The Ten의 생애와 작품을 연구할 가치(價値)를 낳았다.
오늘날 국제화 시대에 먼저 고유의 문화예술을 창달하는 일이 우선이다. 더불어 외국의 문화예술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21세기 변환기에 고립주의를 버리고 세계주의를 표방하여 거대국가(巨大國家)가 된 미국의 역량에는 산업경제를 포함하여 문화예술이 뒷받침 되어 있다. 특히 미술과 디자인이 국제경쟁력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가고 있어 일반인의 관심까지 중요해 졌다. 오늘날 서양미술을 잘 살피는 일에는 미국적 인상주의와 The Ten의 역할을 다시 한 번 고찰해 볼 필요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