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석 제9당을 4년 만에 230석 제1당으로 만들기까지
2.6% 지지율을 8년 만에 98.8%로 끌어올리기까지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추락하기까지
히틀러 연설 전문에서 찾아낸
그 열광의 진실
히틀러가 세상을 뜬 지 70년. 아직도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어떻게 히틀러라는 독재자가 탄생했을까?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홀로코스터라는 지옥을 만들어낸 악마가 나왔을까? 히틀러는 어떻게 사람들을 선동하여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까?
답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다양한 답을 내놓았다. 누구는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히틀러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고, 또 누구는 히틀러 현상을 우연한 정치적 사건들의 총합이라 규정짓기도 한다. 누구는 군중심리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하고, 또 다른 누구는 히틀러의 개인 성향과 정신 분석에서 이유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 명쾌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이 책 역시 그 답을 찾아가는 노력 중 하나다. 이번엔 히틀러의 ‘말’이다. 저자는 1919년 10월 히틀러가 뮌헨의 맥주홀에서 100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한 첫 번째 연설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지하 방공호에서 녹음한 최후의 라디오 연설까지, 25년간의 연설 전문, 약 150만 단어 전체를 분석하여 특정 시기 가장 많이 쓰인 말을 찾고 수사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 말이 어떤 음조와 목소리의 질로, 또 어떤 속도로 발화되는지를 조사하고, 그때 히틀러가 어떤 몸짓으로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말했는지 등 언어적인 면의 모든 것을 분석한다. 그리고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효과를 지녔는지를 정치적·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핀다.
히틀러의 연설이 청중을 열광시켰다면, 그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연설문 표현의 어디에 어떤 언어적인 장치가 있었으며, 어떠한 음조로 말하고, 어느 부분에서 어떠한 제스처를 보였기 때문일까? 정권을 잡기까지 히틀러가 한 연설은 정말로 청중을 열광시켰고, 정권에 있을 때 히틀러가 한 연설은 정말로 독일 국민의 사기를 드높였을까? 연설하는 히틀러에게 설득력과 카리스마를 새겨 넣기 위해 사용된 도구는 시대와 함께 어떻게 ‘진화’했을까?
저자 다카다 히로유키는 말한다. “시간 축을 더듬어가다 보면 히틀러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연설의 역할이나 기능의 변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언급되는 일은 많아도 분석되는 일은 적었던 히틀러 연설의 진실을 드러내 보이고 싶다.” 한편, 이 책은 일본 화제의 신간에 주는 상인 2014 신서대상 베스트 10에 꼽혔다.
연설을 통해 어떻게 표를 모을 수 있을까
정치인 히틀러가 터득한 연설의 법칙
히틀러는 정치가로서 전설적인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1928년 2.6%를 득표해 12석 제9당이었던 나치당을 1932년에 230석 제1당으로 만들었고, 1936년 투표에서는 98.8%로 끌어올렸다. 각각 4년과 8년이 걸려 권력을 완벽하게 장악한 셈이다. 나치당이 이렇게 힘을 얻고, 히틀러가 독일 최고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 데까지 히틀러의 연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군중의 마음을 휘어잡았을까?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프로파간다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념이란 “대중의 힘없이는” 실현할 수 없는 것이므로, 지식인이 아닌 “대중만을 영구히 목표로 해야” 한다고. 따라서 “그 지적 수준은 프로파간다가 대상으로 하는 사람 중에서 가장 머리가 나쁜 사람의 이해력에 맞추어야” 하며, “민중은 냉정한 숙고보다는 감정적인 지각으로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므로 논리를 따지기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중의 수용능력은 매우 한정적이며 이해력은 낮”으므로 천천히 자기 생각을 구성”해나갈 수 있도록 하여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히틀러는 효율적으로 프로파간다를 펼치면 천국을 지옥이라 믿게 만들고, 반대로 지옥을 천국이라 만들 수도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나치당에서는 ‘기업가’를 ‘종업원의 지도자’로, ‘독재’를 ‘더 높은 차원의 민주주의’로, ‘전쟁 준비’를 ‘평화 확보’로 바꿔 부르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다카다 히로유키는 1925년 신생 나치당 집회가 열렸을 당시, 히틀러 연설이 이론 면에서나 실천 면에서 완성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말한다. 1924년 뮌헨 폭동으로 9개월간 교도소 안에 있으면서 연설에 대한 이론적인 완성도를 높인 이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그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말재주에 더해, 청중 앞에서의 경험을 통해 노하우를 축적해가며 빠르게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말은 재앙을 없애지 못한다”
히틀러 연설의 한계
히틀러 연설은 이렇듯 이른 시기에 완성되었지만, 청중에 미치는 큰 영향력과 깊은 침투력을 획득하기에는 몇 가지 도구가 아직 결정적으로 빠져 있었다. 먼저 마이크와 스피커다. 히틀러가 연설회장에서 마이크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28년 11월 베를린의 스포츠 궁전에서였다. 2년간의 공개 연설 금지령 때문에 공적인 자리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히틀러가 금지령이 풀린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특대홀 맨 마지막 줄에 있는 청중도 열광시키게 된 것이다.
1933년 정권을 장악하고 얼마 뒤에 히틀러는 라디오와 영화라는 재생과 복제가 가능한 장치를 수중에 넣었다. 이제 연설회장에서 히틀러가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라디오 전파를 타고 작은 시골 마을에까지 일제히 전파되었다. 또한 필름에 생생한 표정과 동작을 새기며 히틀러의 카리스마는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히틀러 연설에 대한 이미지와 가장 크게 어긋나는 점이 생긴다. 정권을 획득한 지 1년 반이 지나 사람들이 히틀러 연설에 싫증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히틀러의 연설을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청취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1936년 라인란트에 진주할지 말지를 묻는 국민 투표에서 98.8%의 지지를 얻었지만, 그만큼의 사람들이 히틀러의 정책을 지지하거나 관심을 둔 것은 아니었다.
연설의 구성과 표현법에 아무리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잠재력이 있다 해도, 또 그 목소리와 제스처를 많은 청자에게 전파할 수 있는 미디어가 있다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듣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잠재력은 발현하지 못하며 듣는 이를 뜨겁게 만들지도 못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 히틀러 연설은 전쟁이 언제 끝날지를 연설 행간에서 읽고 싶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관심만을 받았다. 전쟁의 상황이 나빠짐에 따라 히틀러는 국민에게 목소리를 드러내고, 모습을 보이는 일을 극히 피하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국민에게 말을 건네는 기회 자체가 급격히 줄었고, 그 목소리는 설득력을 잃었다.
“국민을 고무할 수 없는 히틀러 연설, 국민이 이의를 제기하는 히틀러 연설, 그리고 히틀러 자신이 의욕을 잃은 히틀러 연설. 이 같은 히틀러 연설의 진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히틀러 연설에 대한 이미지와 모순된다면, 이는 8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히틀러를 카리스마로서 그리는 나치 독일의 프로파간다에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정치가의 연설을 보고 들을 때는 부풀린 ‘빵의 꿈’에 놀아나서 열광하고 있지는 않은지, 역사에서 배우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하겠다.” ―275쪽, 에필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