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인생은 마음에 그리는 대로 이루어진다.
카르마는 업(業)이라고도 하며, 생각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즉, 인생은 마음에 그리는 대로 이루어지며, 강렬하게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생각을 한 사람에게는 좋은 인생이 펼쳐지며, 나쁜 생각을 한 사람의 인생이 결과적으로는 잘 될 리가 없다. 이러한 인과응보의 법칙은 저자가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경험한 절대법칙으로,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 운영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27새에 3000만 원으로 교세라를 창업,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키워낸 ‘경영의 달인’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의 경영원칙은 매우 단순했다. 바로 원리원칙에 충실하면 결과가 좋을 수밖에 없다는 순진한 믿음이며, 이 고지식한 경영원칙은 교세라를 90년대 버블붕괴 후의 장기복합불황까지 견뎌내고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키워낼 수 있게 해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책에서 원리원칙에 따른 경영의 한 예로, 일본 기업들이 한창 부동산 투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거품 경제 때 일화를 들려준다. 당시, 많은 일본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토지를 소유하고 전매하는 방식으로 자산 가치를 높이고 있었는데, 교세라에도 ‘돈이 있으면 부동산에 투자해보라.’라는 유혹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토지를 좌지우지하여 돈을 버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것은 위험하고도 헛된 이익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유혹을 거절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땀 흘리며 스스로 번 돈이 진짜 이익이다.’라는 원리원칙이 있었고, 그 원리원칙에 따른 결정은 일본에서 거품이 꺼진 후 수없이 많은 기업이 어려움을 겪는 데 반해, 교세라는 굳건하게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개인이나 기업이 쉽고 편안한 길을 버리고 ‘원리원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어쩌면 요령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하고, 세상을 위한’ 결정을 한다는 것은 때로는 ‘손해’를 보며 걷는 고난의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확고한 철학에 근거한 행동의 결과는 결코 손해가 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손해처럼 보여도 결국은 반드시 ‘이익’이 되어 돌아오며 크게 잘못되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순수하고 맑은 마음은 인간으로서 경영인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이다. 모두를 생각하는 이타심과 사랑의 마음으로 노력을 지속하면 멋진 인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결과에 노심초사할 이유는 없다. 원인과 결과는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명예회장은 누구인가
일본이 낳은 대표적인 성공기업가인 교세라그룹 명예회장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72)는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이자 ‘경영의 신’으로 불린다. 도덕경영?정도경영의 원조이자 일본 벤처업계의 선구자로 한국에도 명성이 높다. 교세라는 90년대 버블붕괴 후의 장기복합불황까지 견뎌내며 끊임없이 성장한 몇 안 되는 알짜배기 회사다.
이나모리 회장은 ‘경영의 달인’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마쓰시타 전기그룹 창업자), 혼다 쇼이치로(혼다자동차 창업자)와 더불어 ‘일본의 3대 기업가’ 중 한명으로 꼽힌다. 그는 ‘기업의 흥망성쇠는 결국 기업가의 사람됨에 달렸다’며 ‘당연히 이윤을 추구해야하지만, 그래도 바른 길을 걷겠다는 신념과 철학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업은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며, 이마에 땀 흘려가며 얻은 이익이 기업이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가 존경받는 이유는 투명경영의 원조라는 점이다. 깨끗한 회계를 강조하는 그의 신조 때문에 지금까지도 교세라 그룹은 담당회계사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완벽한 회계관리를 해오고 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경영기법보단 CEO경영론과 인격수양에 대해 거듭 강조한다. 분식회계?고객기만 등 일련의 기업위기야말로 리더의 인격부재로부터 비롯됐다는 얘기다. 그의 이름 앞에 철학자란 타이틀이 붙는 건 이 때문이다.
그의 청춘은 수많은 우여곡절로 점철돼 있다. 되레 실패의 연속이었다는 게 더 타당하다. 중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결핵을 앓았으며, 전쟁으로 삶을 움켜쥘 희망조차 없었다. 집은 가난했다. 6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모두 한가하게 공부할 형편이 아니었다. 취직도 뜻대로 안됐다. 일자리가 필요했지만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그래도 길은 있었다. 우연치 않은 기회에 초자회사인 쇼후공업에 입사하게 된다. 그때가 1955년. 첫 직장은 일본최초로 고압초자를 만든, 한때는 우량회사였다. 하지만 직장운은 그게 다였다. 이미 법정관리나 다름없을 만큼 경영상태가 악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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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동료는 떠나갔고, 월급도 밀리기 시작했다. 의지할 데라곤 연구실뿐이었다. 외롭고 고독했지만 업무에 재미를 붙여갔다. 고진감래라 했던가. TV 수요가 늘면서 그의 연구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입사 2년 후 결국 개발팀의 지휘를 맡게 됐다. 쇼후의 세라믹 수요는 납기를 대기 힘들 만큼 급증했다. 그런데 문제는 또 터졌다. 회사가 대규모 춘투에 휘말릴 상황이 됐다. 이때 유명한 일화가 생겨난다. 그의 부서만은 공멸(共滅)을 이유로 춘투에 참가하지 않고 공장에 남아 납기를 지켰다. 이 결과 그의 명성과 기술력은 나날이 높아갔다. 그만큼 패기와 열정도 커졌다. 결국 지인들의 권유와 출자로 58년 ‘쿄토세라믹’을 창립한다.
교토세라믹은 창업 초기 마쓰시타전기로부터 수주를 받아 사업했다. 하지만 성장을 위해서는 시장확대가 불가피했다. 동시에 무명의 교토세라믹에는 진입장벽도 실로 대단했다. 돌파구는 해외진출이었고, 온갖 노력 끝에 64년 미국 시장공략에 성공했다. 66년에는 어렵기로 소문난 IBM 표준에 합격해 글로벌 경쟁사를 제치고 IC용 집적회로용기판 2,500만개를 수주했다. IBM과의 거래를 계기로 수출은 급증했다. 때마침 미국에서는 반도체산업이 활황기를 맞았다. 각고의 노력 결과 내놓은 신제품의 반응도 뜨거웠다. 71년에는 거래소 상장까지 끝냈다. 하지만 호사다마였다. 오일쇼크는 수주격감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 교세라의 대가족주의는 지켜졌다. 임금동결은 있었지만 감원은 없었다. 위기는 곧 극복됐으며, 이를 계기로 이나모리 회장은 사업다각화에 나선다.
창립 20주년인 79년은 교세라의 일대 전환기다. 정보통신기기사업의 기술 토대가 되는 트라이텐트사와 사이버네트공업을 인수했기 때문이다. 82년에는 교토세라믹에서 교세라로 사명을 바꾼다. 이듬해에는 세계 최초로 일렉트로닉스 카메라를 만든 야시카까지 합병했다. 84년 새로운 기회가 다가왔다. 전기통신사업의 민영화가 허용되면서 DDI(第2電電)를 설립했다. 87년 결국 시외전화 서비스 개시에 성공했다. 경쟁 3사 중 1위에 올라섰다. 이동통신에도 도전장을 냈다. 89년에는 세계적인 종합전자부품 메이커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의 엘코그룹과 90년에는 AVX를 인수했다. 이 여세를 몰아 2000년 국내 2위의 종합전기통신회사인 KDDI를 탄생시켰다. 이로써 오늘의 교세라그룹은 완성됐다.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책임감은 그를 다양한 활동가로 이끈다. 국경을 넘은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지원이 필요한 사회사업(학술ㆍ문화ㆍ지역사회 등)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이나모리재단이 발족돼 과학자·예술가를 대상으로 한 ‘교토상’을 만들고, 박지성이 뛴 J리그의 교토퍼플상가를 지원한 게 대표적이다. 1998년에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아시아인 중 최초로 수상했다. 경영철학 전수를 이유로 80년 시작된 조그만 연구회 ‘세이와주쿠(盛和塾)’는 전세계{ 55개국에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이곳 출신의 대표적인 경영자로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 시게다 야쓰미쓰 히카리통신 사장등이 있다. 97년 그는 출가를 감행해 세간의 화제로 떠오른다. 부와 명예보다 선행을 원했던 결과다. 건강상의 이유로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수양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2005년 7월 퇴임을 하고 재 출가해 탁발승의 길을 걸어간다. 그는 한국농업 근대화의 아버지이자,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의 넷째사위로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약력: 1932년 가고시마 태생. 가고시마 대학 공학부 졸업. 59년 교토 세라믹 주식회사(현 교세라주식회사)설립. 사장, 회장을 거쳐 97년 명예 회장. 84년 DDI(현, KDDI) 설립. 2001년 KDDI 최고고문. 84년 이나모리 재단 설립‘교토상’ 창설. 매년 인류 사회의 진보와 발전에 공이 있는 사람들을 선정해 수여. CEO 양성 위한 ‘세이와주꾸’ 경영모임 을 만들어 경영자를 육성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 교세라는 어떤 기업인가
2003년 재무제표(정보통신계열사인 KDDI 실적은 제외)를 보면 자본금 1,157억엔에 매출액 1조1,408억엔?세전이익 1,000억엔을 거뒀다. 현재 159개 자회사에 약 5만7,870명의 종업원이 근무 중이다. 그룹 총매출은 4조엔에 달한다. 사실 이 정도 덩치의 회사는 찾아보면 많다. 한국기업 몇몇만 해도 교세라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하지만 겉보단 속이다. 외형보단 내실이 튼실해야 롱런이 가능하다. 교세라가 주목받는 건 이 때문이다. 2003년 교세라의 수익을 능가한 일본 제조업체는 19개사에 불과하다. 특히 영업이익률(10.1%)을 능가한 곳은 4개사뿐이다. 다케다(武田)약품공업?캐논?닛산(日産)자동차?도요타자동차 등이다.
교세라는 작년 창립 45주년을 맞았다. 그간 성장세는 놀라운 상승곡선의 연속이다. 58년 남의 회사 창고를 빌려 시작한 ‘교토세라믹’은 현재 세라믹부문 시장점유율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세계시장의 70%가 교세라산(産)이다. 45년 전 자본금 300만엔?매출 2,600만엔?종업원 28명의 평범한 벤처기업이 지금은 세계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막강파워로 성장했다. 연평균 이익률은 20% 전후를 기록하고 있다. 매출액은 연간 27%씩 증가했다. 특히 69년엔 42%의 놀라운 수익률을 달성했다. 96년에는 일본 국내기업 중 수익률 1위로 부상했다. 버블붕괴로 대형도산이 잇따르던 97년에도 13.4%의 매출액 경상이익률을 확보했을 만큼 탄탄한 재무구조를 지녔다.
교세라의 활동영역은 광범위하다. 세라믹을 비롯해 휴대폰?디카에 이르기까지 전자?통신부문을 총망라한다. 주력은 세라믹의 교세라와 정보통신의 KDDI로 양분된다. 전신은 58년 공업용도자기(파인세라믹)를 생산?판매하는 교토세라믹이다. 경쟁사에 비해 출발은 늦었지만, 성과는 빨랐다. IC패키지에 최초로 파인세라믹을 활용하면서 반도체산업과 더불어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했다. 시간이 갈수록 경쟁업체와의 격차를 벌렸다. 창사 이래 단 한 번의 적자도 없을 만큼 최고의 이익률을 유지했다.
또 다른 축은 KDDI로 요약되는 정보통신부문이다. 다각화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84년 정보통신사업의 자유화 조치에 따라 NTT에 도전하기 위해 세운 DDI(第2電電)가 본류다. DDI는 시외?자동차?휴대전화 등의 소프트웨어를 담당한다. 하드웨어는 모회사인 교세라가 맡는다. 초기 DDI 설립과 통신사업 진출은 돈키호테가 풍차를 상대하는 것처럼 묘사돼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이나모리 회장은 결국 공격?창의적인 방법으로 그 오해를 불식시켰다. 2000년 DDI를 포함한 4대 민간통신업체를 합병해 랭킹 2위의 종합전기통신회사인 KDDI를 낳았다. 시장점유율은 NTT에 이어 2위다. 이쪽까지 합하면 그룹의 총매출은 4조엔을 훌쩍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