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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일 | 2025년 09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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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용량 | EPUB(DRM) | 59.77MB 파일/용량 안내 |
| ISBN13 | 9791141613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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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능력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몸을 베고 찢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알아내고 싶은 진실이나 진심이란 게 있을까. 있다면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렸을 때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모로 자발적으로 사용하기는 쉽지 않아 보이는 능력이다.
『절창』의 주인공인 ‘아가씨’는 바로 이 능력 때문에 문오언과 얽힌다. ‘아가씨’의 능력을 알아챈 오언은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자신이 주도하는 불법적인 용무에 능력을 사용하도록 강제한다. 원하지 않는 일에 자신의 능력을 억지로 사용하느라 ‘아가씨’의 정신이 피폐해질 때 즈음, 이를 보다 못한 가사도우미 박실장의 제안으로 ‘아가씨’에게 가정교사가 붙는다. 소설은 ‘아가씨’의 가정교사로 고용된 ‘선생님’이 오언의 집으로 입성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구병모 작가가 4년 만에 출간한 장편소설 『절창』은 이야기에 대한 은유로 가득하다. 상처를 통해 타인의 마음을 ‘듣다’ ‘보다’ ‘만지다’ ‘접하다’ ‘느끼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음에도, 굳이 ‘읽다’를 선택한 것은 의도가 다분하다. 오언이 상황마다 대문호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는 점이나, ‘선생님’의 전담 분야가 독서 교육인 점 또한 이 작품이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임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소설이 서술되는 방식이다. 소설은 ‘선생님’과 ‘아가씨’라는 두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마지막 장을 제외하고 모든 부분이 구어체로 서술된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화자가 겪거나 전해 들은 이야기를 독자에게 생생히 전달할 뿐만 아니라, 화자가 의도적으로 내용을 모호하게 흐리거나 감추는 양상까지 자연스럽게 반영한다. 소설의 어느 대목에서는 말하기 싫으니 밝히지 않겠다며 화자가 대놓고 이야기를 숨기기도 한다.
이처럼 이야기란 화자가 자기의 입장과 감정에 따라 멋대로 가공하고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이야기에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인지적 편향이 반드시 담긴다. 심지어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들조차 “자기 감각과 인지라는 분광기를 통과한 해석의 문제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가 같은 현상을 두고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렇게 받아들인 각각의 사실을 저마다 왜곡된 형태로 발화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가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이야기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한단 말인가.
“무언가를, 또는 누구가를 비로소 이해하는 것은 그가 행하거나 그를 둘러싼 모든 사태가 끝장나기 시작할 때지. 그러니 우리는 불이해 혹은 오해를 이해인 양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게 고작이야. 이해란 자기만족에 불과할 수 있고, 나의 이해와 타인의 이해는 서로 달라서 둘의 이해가 충돌하게 마련이니까. (중략) 한 권의 책을 펼칠 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세상의 코어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 희망 내지 사랑만은 아니며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인간들과 혹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 자신과 필연적으로 상종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자 태초부터 운명지어진 비극이라는 사실이지. 그리고 그 비극을 견디는 게 인생의 거의 전부야.”(p.301)
소설은 인물들이 처한 입장과 그들의 서사를 통해 이야기의 존재 이유와 진정한 소통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을 서슴없이 밝힌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해가 아닌 오해로만 다가갈 수 있으며, 다른 입장을 짊어진 각각의 ‘나’가 다름에서 기인하는 고통을 견디는 게 “인생의 거의 전부”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렇듯 극단적인 태도는 오히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긍정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이야기를 하거나 읽는 행위에 이유를 찾을 수 없어도, 개인이 서로의 진심에 영원히 다가설 수 없어도 “무용하면 무용한 대로 다만 이어가는 것"에서 우리의 관계는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구병모 작가의 데뷔작 『위저드 베이커리』는 엉망진창인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삶을 살아내는 용기를 강조한다. 부정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끝내 긍정하는 자세는 ‘관계와 소통’을 다룬 『절창』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수많은 왜곡과 오해가 오갈 수 있음을 전제하고서라도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상처를 통해서 상대의 마음을 읽어야 했던 ‘아가씨’가 그랬듯이. 다른 입장에 놓인 ‘아가씨’를 끝내 이해하기로 한 ‘선생님’이 그랬듯이.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p.344)
제목인 절창(切創)은 ‘끊어질 절’, ‘다칠 창’이 조합된 말로 ‘베인 상처’를 뜻한다. 그러나 ‘다칠 창’(創)이라는 글자는 창작(創作), 창조(創造), 창시(創始) 등 ‘만들다’ ‘비롯하다’의 뜻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끊어지고 다친 곳에서만 만들어지는 관계. 인간이 인간에게 가닿는 기적은 그렇게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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