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아이』『애도하는 사람』을 거쳐 덴도 문학은 여기까지 진화했다
제67회 마이니치출판문화상 문학ㆍ예술 부문 수상작
거액의 빚을 진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어머니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의식불명 상태로 자리보전하게 된다. 비좁고 악취 풍기는 공통주택에 남겨진 세 아이는 어른들에게 외면당한 채 열악한 환경에서 빚을 갚으며 하루하루 버텨 나간다.
일본 문단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발하며, 현대사회의 병리 현상과 현대인의 정신적 어둠을 주로 다루어 온 작가 덴도 아라타의 신작은 앞이 보이지 않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고 하는 아이들을 그렸다. 문예지 『파피루스』 29호(2010년 4월)에서 44호(2012년 10월)에 걸쳐 연재된 장편소설을 두 권의 단행본으로 묶은 『환희의 아이』(2012)가 현대문학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이는 제140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애도하는 사람』 이후 4년 만의 작품이다.
“이전의 『애도하는 사람』에서 사람의 죽음과 철저히 마주한 후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살아가는 것을 추구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살고자 하는데 삶을 배척하는 세계가 존재하고, 그럼에도 살아 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담아내자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있었습니다.”(『주간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환희의 아이』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그가 열여섯 살 때 노트에 적어 두었던 시나리오 소재가 원형이라고 한다. 스물다섯 살 때 이를 단편소설로 써서 『야세이지다이野性時代』 신인상에 응모했고, 당선되어 작가의 길로 들어섰으니 이를테면 이 이야기가 지금의 덴도 아라타를 있게 한 셈이다.
“학대와 죽음을 다룬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비슷한 일을 경험한 사람을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표현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전부 쏟아 내고자 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쌓아 온 소설의 기술도 문학적인 상상력도 모두 동원하여 써 내려갔습니다.”(『주간문춘』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작가로서의 중기中期의 시작’이라고 명명한 『환희의 아이』는 이전의 작품에서 현대인의 살아 나가는 고달픔을 응시하여 그들과 같은 위치에서 써 왔던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아가는 힘에 시선을 집중함으로써 새로운 덴도 문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한 해 동안의 우수한 출판물에 주어지는 마이니치출판문화상 문학ㆍ예술 부문에서 2013년 수상했다.
등단 이후로 줄곧 힘들고 슬프고 어두운 이야기를 써 온 그는 『환희의 아이』를 출간하면서 “살아 있으면 사람은 반드시 괴로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작가가 한 명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요? 저는 여러 권이나 쓸 수 있는 작가가 아니니 정말 중요한 것을 정말 소중히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쓰려고 결심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환희의 아이』가 유작이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차별, 배신, 빈곤, 테러, 전쟁……
이 잔혹한 세계에서 인류는 왜 멸종되지 않는 것일까?
열일곱 살 첫째 마토코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 노부미치가 진 거액의 빚을 갚아 나가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오전에는 청과물 시장에서, 오후에는 중화요리 전문 식당에서 일하고, 밤에는 각성제를 제조하는 부업을 하고 있다. 초등학생인 열두 살 둘째 쇼지는 자리보전하는 어머니 아이코의 수발을 들고 형을 도와 각성제를 제조하느라 자신의 일은 뒷전이어서 교사와 반 아이 모두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유치원생인 다섯 살 셋째 가오리는 아무도 없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때때로 몸이 부자유한 흉내를 내고, “구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런 세계에서 누군가를 믿을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라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절망은 깊다. 차도가 없는 어머니, 늘어만 가는 빚,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초래된 현실은 육체적인 결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코토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으나 지금은 음을 듣지 못하고, 쇼지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나 지금은 색을 보지 못한다. 가오리는 향기를 좋아했으나 지금은 오로지 악취만을 느낀다.
그러나 『환희의 아이』에서 고통에 허덕이는 이는 그들만이 아니다. 쇼지-마토코-가오리-노부미치ㆍ아이코의 순으로 한 장章씩 번갈아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는 시너를 팔면서 아버지가 진 빚을 갚는 얀즈, 전쟁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수용소에서 탈출하여 일본으로 건너온 아름다운 소년 루슬란, 어머니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소녀 가데나 등 단지 살아 있음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등장인물들이 압도적인 현실감을 띠고 생생하게 그려진다.
“……자신한테 돌아오거든. 자기가 당하기 싫은 일은 하는 게 아니야.”
마코토가 갈 곳을 잃은 발을 천천히 내리고 무릎을 치신없이 까부는 것처럼 몇 번 위아래로 움직였다.
“……정말 돌아올까?”
마코토가 말한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향해 숨을 내쉬며 말을 잇는다.
“돌아온다면 인간은 진작 멸종되지 않았을까? 개미나 동물에게만 그런 게 아니야. 인간끼리 서로 짓밟는 일을 한다거나 돈 때문에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기도 하고, 당하는 게 싫은 것만 흘러넘치고 있잖아. 그런데 왜 인간이 멸종되지 않는 건지 참 이상해.”
_ 2권 146~147쪽, 멀어지는 소원
이들은 차별, 배신, 빈곤, 테러, 전쟁 등이 횡행하는 잔인한 세계에서 인간이 왜 멸종되는 않는 것인지 저마다의 목소리로 묻는다. 이에 대한 덴도 아라타의 답은 바로 ‘무리’이다. 가오리는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마코토에게 치타가 왜 임팔라를 바로 덮치지 않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마코토는 떼로 모여 있기에 덮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얼마 후 임팔라 새끼 한 마리가 무리에서 뒤처지고 결국 치타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이 나온다. 가오리는 치타 앞의 임팔라 떼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흩어져서 도망치면 잡아먹히며, 그렇기에 늘 무리 지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덴도 아라타는 제목 ‘환희의 아이’에서 ‘아이’에 해당하는 단어로, 동물의 새끼를 가리키는 ‘仔’를 사용했다. 그는 동물의 새끼가 무리 지어 있어야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듯이 인간 역시 무리 짓지 않고서는 위기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며 약자는 서로 손을 맞잡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음을 강조한다.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채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세 아이가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의지를 다지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각자에게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 무리를 이루게 되고 나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혹한 현실은 또다시 사정없이 덮쳐 오며 이야기는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 상상하지 못한 결말을 향해 간다.
추천사
고된 삶을 짊어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손을 내미는 장편소설. _《아사히 신문》
어둠 속에 불을 밝히는 최강의 동화.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이전보다 훨씬 깊이 추구하고 아울러 새로운 단계에 도달했다는 느낌이 든다. _마쓰다 데쓰오(출판평론가)
테러나 폭동이 횡행하는 살벌한 세상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은지, 그 해답을 이 아이들이 가르쳐 주는 것 같다. 세계적 규모의 힘을 지닌 작품. _나카쓰지 리오(문예평론가)
무거운 작품이지만, 질주하는 주인공을 쫓아 같은 속도로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다. 그리고 달려 나간 끝에 펼쳐지는 아이들 앞의 풍경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는 결말. 그것은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희망의 빛이다. 틀림없이 황홀하리라. _《교도통신》
이들의 드라마를 현대 일본의 빈곤의 우화로 읽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인 독서이리라. 여기에는 아이들의 ‘비참함’이 단지 일본이라는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는 확고한 환기력이 있다. 『환희의 아이』의 작가는 이야기의 새로운 지평에 도달한 것 같다. _《니혼케이자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