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철학의 출발점!
노자의 길을 갈 것인가, 장자의 길을 갈 것인가?
국가주의의 길을 갈 것이나 타자와의 소통의 길을 갈 것이냐
《노자 혹은 장자》는 철학자 강신주의 본령인 장자와 노자를 본격 탐구한 철학책이다. 현재 학계에서 벗어나 대중과 만나면서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강신주를 서양철학 전공자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그는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학위를 받은 동양철학 전공자였다. 그 뒤 동양철학에만 머무르지 않고 동서양 철학을 횡단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사랑과 자유의 철학’을 전파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그는 노자, 장자라는 텍스트에만 머무르지 않고 동서양 철학자들의 사상을 다양하게 끌어들여 노자, 장자 사상을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각이 상당히 독특하다. 기존 동양철학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아주 딴판이며 그래서 상당히 논쟁적이다. 거침이 없이 발언하는 그의 기질이 잘 반영되어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동양철학에서는 노자와 장자를 한 묶음으로 묶어 노장사상, 혹은 도가사상이라고 부른다. 흔히 동양철학계에서는 노자를 도가사상을 만든 철학자로 인식하고, 장자를 노자 철학을 계승한 후학 정도로 인식한다. 그러나 강신주는 이 시각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노자의 ‘도’와 장자의 ‘도’는 다르기 때문이다. 즉 노자의 사상과 장자의 사상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이 두 철학자를 한데 묶어서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도가사상’이라는 범주는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신주는 노자의 철학은 오직 군주에게만 통용될 수 있는 논리를 말하는 국가주의 철학이며, 장자의 철학은 개체의 단독적인 삶과 소통을 모색한 철학이라고 말한다. “어떤 철학자를 이해하려고 할 때 그가 지닌 고유한 문제의식이 망각되면, 그 철학자가 제공한 해법과 유의미성은 정당하게 평가될 수 없는 법이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노장사상’이라고 병칭하면서 생기게 된 문제는 사실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노자가 군주와 국가의 철학자였다면, 장자는 단독적인 개체와 삶의 철학자였다는 것이 망각된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노장사상이라는 애매한 범주에 포획된 노자의 사상은 그 고유성이 망각되어 다룰 수밖에 없고, 그것은 장자의 사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항상 도가사상은 노장사상이라고 불리게 되었는가?”
강신주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처음으로 노자와 장자를 ‘노장’으로 기록하면서 이들이 자연을 벗 삼아 정신적으로 향유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이후 후학들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왔다고 말한다. 그는 이 흐름에 정면 반박하면서 노자를 체계나 구조에 몸을 맡긴 반인문정신의 철학자로, 장자를 인간의 자유를 긍정하는 철학자로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곧 국가주의 또는 파시즘으로 향하는 길과, 개인의 자유와 사랑을 인정하고 타자와 소통하는 걸 긍정하는 길 사이에 노자와 장자의 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도가사상은 해체되어야 한다, 노자와 장자의 차이
특히 노자와 장자는 서로 관심을 두는 주제도 달랐다. 노자는 무엇보다 국가와 통치자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노자는 군주가 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역설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군주와 국가였고, 백성은 보이지 않았다. 반면 장자는 험난한 시대를 사는 개인들을 위한 철학,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철학을 전개했다.
또 노자는 81장의 철학시들(philosophical poems)로 이루어진 아주 간결한 텍스트로 자신의 사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노자는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전달한다. 반면 장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짧은 이야기들로 내용을 전달한다. 이는 노자가 문자를 잘 아는 통치자나 특정 계층을 위해 글을 썼다는 것을 의미하고, 장자는 일반 사람들을 위해 글을 썼다는 것을 말해준다. 곧 노자는 통치자나 국가의 처지에서 사유를 했고, 장자는 형벌로 다리를 잃은 사람, 목수, 백정 등 민중을 주인공으로 해서 사유를 했다. 노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등 계급 구분이 있지만, 장자는 이것이 통치자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일 뿐이기 때문에 꿈과 같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노자》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은 아직까지도 몇 구절을 빼고는 잘 인용되지 않는 반면, 《장자》 속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강신주는 ‘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아주 다르다고 주장한다. 노자는 “도가 만물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노자의 도는 무엇보다도 전체 세상의 법칙, 다시 말해 전체 세상으로부터 추상화된 법칙일 뿐이다. 따라서 ‘도’는 미리 존재하는 것이고, 이를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알게 된 ‘도’는 결국 집 바깥의 ‘도’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노자는 마치 순수한 사유를 통해서 자명하게 현시되는 것처럼 ‘도’를 과장해서 신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자의 도는 무엇보다 수탈과 재분배의 교환 논리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반면 장자는 “도는 걸어 다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고, 사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장자의 도는 우리가 꾸역꾸역 걸어가서 만들어지는 흔적과도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노자의 도처럼 사전에 이러저러하게 규정된 도가 있어 그것을 내가 학습하고 내면화함으로써 타자와 소통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장자에게 ‘도’와 ‘사물’은 결국 주체와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도’는 주체가 ‘걸어가기’ 때문에 사후에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사물’도 주체들이 공통적으로 어떤 것을 ‘일컫기’ 때문에 사후에 그렇게 구별되는 것이다. 이 말은 주체와 무관하게 설정된 ‘도’나 ‘사물’ 개념은 독단적인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렇듯 이 책은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세세하게 파고드는 논쟁적인 책이다. 각각 2003년과 2004년에 나온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두 권의 책을 한 권에 담은 책으로 강신주 철학의 출발점을 엿볼 수 있다.
I. 노자의 철학-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노자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노자》를 치밀하게 분석한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노자 철학이 기본적으로 국가와 통치자의 입장에서 쓰인 책이라는 것을 일반 독자들에게 명확히 알려주고 싶었다. 만약 지금까지 논의가 타당하다면, 이제 독자들은 노자 철학으로부터 헛된 바람이나 구원의 희망을 갖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노자 철학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을 얻게 될 것이다. 둘째, 아직도 노자 철학을 신비화하는 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일조하고 있는 많은 연구자들을 위해서 이 글을 썼다.”(292쪽)
노자는 전국시대의 철학자이다. 이때는 어떤 제후도 천하 통일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언제까지 국가를 통치할지 장담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이때 노자는 국가를 오랫동안 통치하는 방법과 천하를 통일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혼란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안정된 국가가 반드시 필요하고, 이런 국가의 힘이 강해져야 질서가 잡힌다고 생각했다. 곧 노자는 당시의 통치자들이 했던 고민을 풀어주기 위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던 것이다.
《노자》의 고유성은 노자가 국가의 논리, 즉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교환의 논리를 발견했다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노자》 81장을 관통하는 원점이자 영점이다. 나머지 모든 《노자》의 논의들은 노자가 자신이 발견한 교환의 논리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제공한 철학적 근거나, 혹은 그 부연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노자에 따르면 국가란 하나의 교환 체계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라는 교환 논리에 따라 작동하는 기구다. 그러나 문제는 노자가 국가를 자명하게 주어진 전제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 말은 그가 국가를 발생의 입장에서 사유하지 못했고, 단지 결과의 입장에서만 사유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발생의 측면에서 보면 그림이 전혀 달라진다. 수탈과 재분배라는 교환 논리가 작동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는 원초적 폭력을 통해서 재분배할 수 있는 재화를 확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점에서 원초적 폭력은 상당히 중요한 통찰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원초적 폭력을 통해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근본적으로 분리되기 때문이다. 또한 원초적 폭력은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때 재분배가 커다란 힘을 지니면서 가지지 못한 자들을 피통치자로 만들어버리게 되면, 국가의 교환 체계는 이제 천천히 그 바퀴를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피통치자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신하가 아니면 안 된다고 믿게”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노자 철학은 분명 영원한 진리의 철학이다. 그가 영원하다고 본 것은 ‘국가’와 ‘천하’라는 정치 구조이다. 그리고 영원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개별 군주이다. 그의 철학의 한계도 이것이다. 그는 ‘국가’와 ‘통치자’라는 형식을 문제 삼지 못하고, 다만 올바른 국가와 올바른 통치자라는 내용만 문제 삼았다. 결국 노자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유해보지 않은 철학자이다.
자발적 복종으로 이르게 하는 길
“빼앗으려고 한다면 먼저 반드시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미묘한 밝음’이라고 한다. ……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이로운 도구를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백서본 80장)
노자는 국가 자체를 문제 삼지는 못했어도 국가의 작동 양식을 통찰했다. 노자는 이상적인 통치자인 ‘성인’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성인은 “남는 것이 있는데도 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부족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노자에게 이상적인 통치자는 ‘재분배’를 잘하는 사람이다. 이 ‘재분배’를 국가의 핵심적인 기능으로 보았다. 노자의 철학은 ‘남음이 있는’ 사람에게서 출발한다. 곧 ‘남음’과 ‘부족’이라는 위계성이 있어야 노자의 철학은 비로소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도대체 어떻게 남음이 있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강신주는 여기에서 노자의 철학이 ‘수탈’, 즉 근원적 착취와 폭력의 문제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세금에서 재분배로, 재분배에서 다시 세금으로 이어지는 순환 고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재분배를 통해서 수탈을 감추고, 이것을 피통치자에게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이다. 곧 노자는 국가를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교환 관계로 통찰했다고 말한다. 자본의 논리가 등가교환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부등가교환인 것처럼 국가도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부등가 교환이다. 피통치자는 국가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기능하기 때문에 세금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단계에 이른다. 이렇게 되어야 국가가 영속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노자 철학은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국가는 내적으로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게 되어, 통치자의 의지는 피통치자들의 의지와 동일한 것이 된다. 마치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 국민들이 자신을 ‘작은 히틀러’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Ⅱ. 장자의 철학-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장자, 타자와의 소통을 꿈꾸었던 철학자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장자》 이해란 하나의 이념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장자》를 읽기 전과 읽은 후 스스로 완전히 달라지게끔 독해해야 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또한 《장자》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318쪽)
장자의 철학은 어떤 통일된 공동체라는 토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의 철학은 전국시대라는 정치적 상황과 제자백가로 상징되는 사상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해 대화와 소통의 결여라는 상황 속에서 그의 철학은 탄생했다. 이런 갈등과 대립의 시대에 장자는 진정한 대화와 소통을 꿈꾸었던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진정으로 타자와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유아론적 꿈에서 깨어나야만(覺) 한다. 문제는 꿈과 깨어남이 주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스스로 깨어 있다고 자임해도 주체의 행동은 항상 꿈에 사로잡힌 행동에 불과할 여지가 많다. 따라서 ‘꿈꾸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깨어 있는 것이냐’의 문제는 주체로부터는 결정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꿈과 깨어남을 결정하는 기준은 주체라기보다는 타자라고 할 수 있다. 장자에게는 꿈이 ‘주체가 스스로에게 닫혀 있음’을 의미한다면, 깨어남은 ‘주체가 타자에게로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도 장자 철학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철학체계 속에서 타자를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장자에게 깨어남은 타자와 대화하기 또는 소통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깨어남은 주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뿐, 결코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소통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비록 깨어난 주체가 소통을 완수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결국 소통은 항상 좌절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소통의 성공 여부는 소통의 양 항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와 타자에 의해 동시적으로 결정되는 법이다. 결론적으로 장자의 철학이 아직도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그가 통찰해낸 타자에 대한 이런 현실적 감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장자의 철학은 철학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와 소통이란 주제에 대한 사색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타자와의 소통이 가능할 때 자유는 실현된다
장자 철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 개념이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의존하지 않음이라고 번역되는 무대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이 기존의 연구자들처럼 절대로 이해될 때, 결코 우리는 장자 철학의 핵심에 이를 수 없게 된다. 반면 무대라는 개념이 꿈과 같은 일체의 매개에 의존하지 않음이라고 이해될 때, 우리는 그가 모색했던 삶과 소통의 진실에 이르게 된다. 절대라는 개념 속에서는 주체와 타자는 원리적으로 소멸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반면 무대가 ‘매개에 의존하지 않음’으로 이해될 때, 주체와 타자는 실존적으로 긍정될 수 있다. 매개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비약을 수행해야만 한다.
소통은 우리가 새로운 주체로 생성되는 비인칭적 수준에서의 관계 맺음으로 정의해야 한다. 그래서 소요유라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대붕 이야기’도 곤이라는 물고기에서 대붕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자에게 주체의 자유는 주체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주체 형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주체 형식의 변화는 조우한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장자가 권고하는 자유는 우리가 타자와 소통함으로써 부단히 자신을 극복하고 새롭게 생성될 수 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자에게 소통은 자유라는 이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유한자라는 점에서, 인간의 자유는 철저하게 인간 자체 내에서만 존립될 수 없다. 오직 비인칭적인 마음으로 타자와의 소통이 가능했을 때, 자유는 실현될 수 있다. 물론 자유가 실현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주체가 새로운 타자와 소통해서 새로운 주체로 변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장자의 소요유는 절대적 주체의 정신적 자유나 심미적 자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자유는 절대적 자유가 아니라 제한적인 자유, 유한적인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한적 자유의 이념으로서 소요유의 주체는 엄밀하게 비인칭적인 마음을 가진 나를 가리킬 수 없다. 소요유의 주체는 이미 구체적인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구체적인 새로운 주체로 변화 또는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