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독일 시민사회가 괴테라는 문호를 갖고 있다면 21세기의 한국 시민사회 는 연암이라는 문호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연암 박지원은 한국 문학사상(文學史上) 굴지의 대문호다. 그동안 실학(實學)과 빼어난 산문 작품을 중심으로 연암의 생애를 조명하고 그의 작품성을 평가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
올해는 연암 서거 200주년이다. 이제는 좀더 깊이 ‘인간 연암’에 대해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연암은 21세기의 우리와는 판연히 다른 사회와 시대를 산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생각과 고심(苦心)과 그가 추구한 가치들, 그가 그려 보여준 이 세계의 깊이와 아름다움, 그토록 심절한 반성력과 자기 응시, 그가 남 긴 말들과 그가 이룩한 미학적 성취들은 장차 우리가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사회를 위해 소중한 자산이 된다.
연암 문학의 원천 ―다정다감한 가족애
이 책에 수록된 연암의 편지글들은 연암의 가족애를 잘 보여준다. 가족에 대한 연 암의 지극한 사랑은 남달랐는데, 이 점은 『연암집』 속의 글들, 이를테면 「큰누이 묘지명」이라든가 「큰형수 묘지명」 같은 글을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 실이다. 하지만 이 책의 편지글은 연암의 이런 면모를 한층 직접적이고 자세히 보 여준다.
편지글에서 드러나는, 연암이 자식들에게 보이는 깊고도 자상한 부정(父情)이라든가 병약한 손자에 대한 애정과 염려, 시집간 누이의 병에 대한 걱정, 며느리의 산 후 조리에 대한 근심 등등은 종종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초사흗날 관아의 하인이 돌아올 때 기쁜 소식을 갖고 왔더구나. ‘응애 응애’우는 소리가 편지 종이에 가득한 듯하거늘 이 세상 즐거운 일이 이보다 더한 게 어디 있겠느냐? 육순 노인이 이제부터 손자를 데리고 놀뿐 달리 무엇을 구하겠니? 또한 초이튿날 보낸 편지를 보니 산부(産婦)의 산후 여러 증세가 아직도 몹시 심 하다고 하거늘 퍽 걱정이 된다. 산후 복통에는 모름지기 생강나무를 달여 먹여야 하니, 두 번 복용하면 즉시 낫는다. 이는 네가 태어날 때 쓴 방법으로 노의(老醫) 채응우(蔡應祐)의 처방인데 신효(神效)가 있으므로 말해 준다.”
―다섯번째 편지 「큰아이에게」 중에서
연암은 51세의 나이에 상처(喪妻)하고 이후 재혼을 하지 않았다. 편지의 대부분은 아들들, 특히 큰아들에게 보낸 것들인데, 안의 현감의 직을 제수 받고 멀리 임지 에 있으면서 아이들 걱정에 이런저런 사소한 것까지 걱정하고 챙겨 보내는 따뜻한 아버지의 정이 절절이 넘친다. 손수 담근 고추장을 보내주며 맛있는지 맛없는지 대답 없는 아들들을 무람없다며 나무라는 편지는 참 재미있으면서도 가슴 뭉클하 게 한다.
이 편지글이 보여주는 연암의 지극한 가족애를 통해 연암이 아주 정이 많고 다감(多感)한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다정다감함’과 대상에 쏟는 ‘사랑’의 마음은 연암 문학의 정서적·심미적 원천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간 연암 ―유머 속의 처연함 그리고 애민적 면모
이 책의 편지글을 통해 연암이 퍽 꼼꼼하고 주도면밀한 성격의 인간임을 알 수 있 다. 자식들을 챙겨 주는 데서건 공사간(公私間)의 일을 처리하는 데서건 공히 그 런 점이 확인된다. 세세하고 주도면밀한 성격이 글쓰기에서 용의주도한 결구(結構)와 고도의 미학적 정련(精練)을 낳은 건 아닐까?
처남 이재성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글을 지어줄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다거나 문생인 박제가와 유득공에게 정조가 특별이 지어줄 것을 요청한 「이방익전」의 초고를 부탁하는 편지가 바로 그것인데, 이는 선작(先作)을 토대로 자신이 손을 좀 보아 완성하려 한 것이다. 편지글들을 통해 연암이 아무 때나 붓만 들면 글을 줄줄 써 내는 이태백 형(型)의 문인이 아니라 심사숙고하고 고심하여 글을 짓는 두보 형(型)의 작가임을 확인할 수 있다.
편지글 속에서 연암의 유머러스한 면모를 읽어낼 수 있다. 연암의 산문들은 종종 해학적인 표현을 보여주고 있지만 유머러스하다고 해서 마냥 웃기만 해서는 연암 에게 속아 넘어가고 만다. 유머 속에 처연함이나 슬픔, 연민, 반어, 자기 성찰, 예리한 현실 비판 등을 담고 있기 일쑤인바, 정작 연암이 내심 말하고 싶어 한 건 이런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편지들에서 간간이 발견되는 해학미 역시 이런 점에 유의해 가며 읽을 필요가 있다.
“밤비가 마치 부견(?堅)이 강물을 채찍으로 내리치는 것처럼 후드득 후드득 집을 흔들어 대는 바람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사외다. 게다가 수많은 이[蝨]들이 들끓어서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발광할 뻔했거늘, 알지 못하겠사외다, 그대는 이런 우환을 면했는지? 편지를 보내며 한번 웃사외다.”
-열아홉번째 편지 「어떤 벗에게」
이 책에서 확인되듯 연암은 격조 있는 해학을 즐기는 성격이었던바, 이런 성격적 특질이 그의 산문미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연 암의 성격을, 그리고 연암의 산문을, 온통 ‘해학’으로만 재단해서는(혹은 해학 위주로만 봐서는) 그 또한 곤란하다. 인간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어떤 인간이든 인간은 그리 간단치 않으며, 퍽 다면적이다. 한 면만을 갖고 ‘이게 바로 그 인간이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연암처 럼 사유 수준이 높고 그 요량(料量)이 노회한 작가의 경우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책은 연암의 강직한 성격, 연암의 애민적 면모의 일단을 보여준다. 임기가 끝 나 돌아올 처지이면서도 그곳 백성들의 농사일을 몹시 걱정한다든가, 고을원에 부 임하자마자 아전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부당하게 돈을 걷지 못하게 한다든가, 아 전들이 서울의 어떤 벼슬아치에게 뇌물성 돈을 주려 하자 그걸 못하게 한다든가 하는 등등에서 그런 점이 잘 확인된다.
보이지 않는 텍스트의 이면 ―북학파 주변 인물들과의 교유
이 책의 편지글들은 연암이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해 품고 있던 속내를 보여준다.
연암의 문생인 박제가를 “무상무도하다”라고 평한다든가, 백선(伯善)을 “아둔 하고 게으르다”고 평한 데서 그런 점이 확인된다.
“재선(在先: 박제가의 字)의 집에 있는, 우리나라에 들여온 요즘 중국인의 시필(詩筆) 서너 첩(帖)을 만일 빌려 볼 수만 있다면 의당 이 며칠 사이의 불안정한 마 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겠건만, 그 사람이 무상무도(無狀無道)하니 지보(至寶)라고 하여 잠시라도 손에서 내놓겠느냐? 그렇지만 모름지기 한번 빌려 보렴.”
―세번째 편지 「큰아이에게」 중에서
연암은 평소 박제가의 재주를 인정했으며 좋은 사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문학관을 갖고, 북학(北學)에 대한 인식을 공유했으며, 인간적으로도 서로 깊은 교감을 나눈 사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책의 편지를 통해 박제가 에 대해 연암이 부정적인 평가를 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을 어떻게 해 석해야 할까? 연암이 박제가의 재능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 이다. 문제는 박제가의 ‘인격’이 아닌가 한다. 아마도 연암은 박제가의 문예적 재능은 인정하였지만, 그 인간성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표현은 같은 문생인 이덕무에 대한 연암의 평가와도 대조적이다. 연암은 이덕무가 죽었을 때 “무관(=이덕무)이 죽다니! 꼭 나를 잃은 것 같아” 라고 말 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의식적으로 언표(言表)된 것들에 내재되어 있는 한계,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재구성된 이미지 내지 담론이 갖는 허구성에 대해 생각해 보 게 되며, 이 세계의 모든 텍스트에 대해 좀더 긴장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리 눈에 좀처럼 보이지 않는 텍스트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말이다.
이 책의 원전 《연암선생 서간첩》(燕岩先生書簡帖)에 대해
《연암선생 서간첩》은 서울대 박물관에 소장 자료로, 아직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연암의 새로운 글이다. 이 서간첩은 원래 연암의 형 박희원의 현손(玄孫) 되 는 박기양(朴綺陽, 1876∼1941)이 소장하던 것으로, 박영철(朴榮喆, 1879∼1939) 이 넘겨받아 수장하고 있다가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함으로써 현재 서울대 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박영철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연암집』을 간행한 인물이다. 박기양은 박영철이 선조의 문집을 간행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이 서간첩을 보내준 것이다.
박영철은 일제 시대에 고위 관직을 역임한 유명한 친일파였지만, 연암을 존숭하여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그 문집을 간행했으며, 그 유묵을 잘 단장하여 후세에 전했 다. 역사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박영철은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 로 당시 우리나라의 서화(書畵)를 대대적으로 수집했으며, 이후 박영철의 수집 소 장품은 모두 경성제국대학에 기증되었고, 지금 서울대 박물관에 간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