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정체성의 공유가 일어나는
모순과 역설의 드라마
- 이명호(옮긴이)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
이 책은 로버트 C. 솔로몬의 《About Love: Reinventing Romance for Our Times》을 완역한 것이다. 로버트 솔로몬은 미국 텍사스대학교에서 실존주의철학과 감정철학, 그리고 철학과 경영의 관계에 대해 사유하고 가르친 철학자이다. 솔로몬은 2007년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던 중 폐동맥 출혈이 일어나는 바람에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 캐슬린이 옆에 있었지만,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사실 솔로몬은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구멍이 뚫려 있는” 희귀 질환을 앓고 있었다. 살아서 어른이 되지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언이 그의 어린 시절을 짓눌렀고, 예상보다 늦게 닥치긴 했지만 결국 이 예언이 그의 삶을 급작스럽게 중단시켰다. 다른 사람들보다 짧은 인생을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솔로몬은 유난히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데 열정적이었다. 그는 미시간대학교 의과대학을 다니다가 우연히 프리스조프 버그만 교수의 니체철학 수업을 청강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전공을 철학으로 바꾸는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1967년 같은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제도권 대학의 학위를 취득했지만, 그는 대학에 교수로 자리 잡는 통상적 경로를 택하지 않고 세계 유수 대학을 유랑하며 1~2년짜리 단기 강좌를 맡는 강의 투어에 나선다. 미국의 오클랜드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펜실베이니아대학교, UCLA를 거쳐 호주의 멜버른대학교와 퀸스칼리지에서 강의했고, 1972년 텍사스대학교로 오게 된다. 그는 강의 투어의 중간 기착지 정도로 생각했던 오스틴에 정착하여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연구하는 교수로 살았다. 그는 그 도시와 그 대학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평생의 반려자가 될 캐슬린을 만났다. 솔로몬은 2005년 한 일간지에 쓴 글에서 당시 자신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당시 나는 젊고 모험적이었다. 나는 세상을 보고 싶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 1~2년짜리 단기 일자리를 수도 없이 선택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의 일이긴 하지만 솔로몬이 내린 결정은 그가 우리에게 익숙한 철학 교수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활동을 하리라는 것을 예견하게 한다. 이후 철학자로서 그의 행적은 젊은 시절 그가 내린 결정이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철학도의 치기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그에게 철학은 더 좋은 삶, 더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한 ‘삶의 기예’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니체의 주문은 애초에 그를 철학으로 이끈 영감의 원천이었을 뿐 아니라 이후 그의 철학을 안내하는 나침반 가운데 하나였다. 솔로몬은 분석철학이 지배적 흐름을 이루고 있는 영미철학계에서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같은 유럽대륙의 현상학적, 실존주의적 철학에 적극적으로 공명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맹위를 떨치던 시절에도 그는 현상학과 실존주의철학의 의의를 포기하지 않았다. 현상학 및 실존주의와 더불어 솔로몬의 철학적 탐구를 이끌었던 두 영역이 감정철학과 비즈니스윤리학에 관한 것이었다.
솔로몬은 감정, 정동, 느낌, 감성 등등 감정 관련 어휘들과 그것들이 포괄하는 영역이 인문학과 사회과학, 심리학과 뇌과학과 생물학을 관통하는 통합적 화두가 되고, 정치와 사회, 예술과 문화와 매체를 포괄하는 우리 시대의 키워드로 떠오르기 한참 전에 감정에 관심을 두고 철학적 해명을 시도했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일찍이 1976년에 그는 『열정: 감정과 삶의 의미』라는 저서를 집필했고, 이후 감정 일반과 개별 감정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시도하는 다수의 저서를 출판했다. 감정론의 계보에서 보자면 그는 감정에 대해 구성주의적이고 인지주의적 관점을 취하면서, 철학적으로는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에 맞서 감정이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의의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다. 관조적 삶에 필요한 정신의 기율로 ‘아파테이아’를 옹호해왔던 오랜 철학적 전통에 맞서 그는 감정적 반응과 표현과 성찰에 정당한 위치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에게 감정이 배제된 삶이란 깨어 있는 맑은 정신의 삶이 아니라 메마르고 불완전한 불구의 삶이다. 이 책의 어느 대목에서 솔로몬이 인용하고 있는 파스칼의 언어를 빌자면, 우리의 감정에는 “이성이 너무 어리석거나 오만해서 인정하지 못하는 나름의 합리가 있다.”
솔로몬에게 감정은 생각이나 상상, 욕망, 판단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동물적 에너지이거나 생물학적 충동이 아니며, 단순히 신체적 느낌도 아니다. 물론 느낌도 감정의 일부를 이루기는 하지만 보다 중요하게 감정은 세계에 대한 인지와 판단과 평가이다. 감정은 무언가에 대해 혹은 무언가에 반응하여 보이는 지향적 활동이지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이 아니다. 아무리 어리석고 고통스럽게 보일지라도 모든 감정에는 나름의 목적과 목표가 있다. 실존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솔로몬은 판단이나 평가라는 표현이 주는 주지주의적 인상을 피하기 위해 나중에는 ‘관여’와 ‘대결’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관여와 대결이 인지와 판단을 포괄하는 보다 광의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랑의 감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서 솔로몬은 사랑을 단순히 성적 충동이나 신체적 반응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생각’과 ‘관념’으로, 특히 사회 역사적으로 구성된 생각과 관념으로 바라보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국 지식사회에 많이 소개되고 있는 감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과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철학에 더 깊이 경도되어 있고 감정을 법과 연결시키는 작업에 더 적극적인 누스바움과 달리, 솔로몬은 실존주의와 현상학에 더 쏠려 있고 비즈니스 영역과의 결합에 보다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랑, 그중에서도 낭만적 사랑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학술적 저서가 아니다. 초판본 서문에서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에세이로서 학술적 연구나 과학적 탐구가 아니라 개인적 시도”이다. 이 책에서 솔로몬은 그에게 익숙한 철학적 개념이나 이론적 지지대 없이 “벌거벗은” 상태에서 사랑에 대한 “개인적 에세이”를 쓰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이 작업을 하기까지 “엄청난 지성과 경험과 감정과 잘못된 판단을 소모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고백한다. 나는 이 한 문장이 솔로몬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책의 성격과 지향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에서부터 스피노자, 프로이트, 니체, 그리고 레비나스와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사랑에 관한 수많은 철학적 담론들을 설명하고 논박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사실 이런 난해하고 고상한 담론들은 사랑에 관해 유용한 통찰을 주긴 하지만, 우리가 관계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사랑의 실상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더욱이 사랑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파탄났다는 진단이 곳곳에서 내려지는 우리 시대에 “사랑의 재발명”을 이야기하고 “사랑의 규칙”을 다시 세우려면 철학의 언어가 사랑이라는 이 복잡다단한 감정의 현실로 내려와야 한다. 이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저자가 서문에서 “궤변론자”와 “조력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사랑을 이해 불가능한 미스터리로 만들거나, 사랑 따윈 없고 관계의 혹은 섹스의 테크닉만 계발하면 된다는 냉소적 기능주의로 흐른다.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어려움을 직면해야 한다. 그러나 궤변론자들의 허황된 언사처럼 사랑의 어려움을 과장해서 사랑하는 일을 성인이 되는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제한된 이해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확장하려는 개별적 존재로서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사랑의 경험, 그 과정에서 만나는 환희와 기쁨뿐 아니라 갈등과 모순과 파괴성을 해명할 수 있는 사랑의 이론을 원한다.
솔로몬은 그런 사랑의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사랑을 자아가 없는 이타적 경험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무엇보다 ‘자아’의 이론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이 되는가’를 말해주는 이론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솔로몬의 사랑 개념은 자아 혹은 주체에 대한 관심을 비워둔 채 타자 혹은 타자성에 대한 존중과 헌신으로 사랑을 바라보는 입장이나 자아를 넘어 보편적이고 무조건적 사랑을 주장하는 입장과 다르며, 자본주의적 변화에 따라 낭만적 사랑이 소비사회에 편입되어버렸다는 사회학적 입장이나 사랑을 성욕으로 환원하는 수많은 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 입장과도 다르다. 자아의 변형, 특히 사적 영역에서 친밀한 타자와의 공유를 통해 일어나는 자아의 변형과 재구성을 사랑의 핵심으로 바라보는 것이 솔로몬의 독특한 시각이다. 그러나 이타적이지 않다는 것이 이기적이라는 뜻은 아니며, 자아의 주장이 흔히 말하는 나르시시즘에 떨어지는 것이라는 뜻도 아니다.
이기심과 나르시시즘을 넘어서는 자아의 이론, 자아와 타자의 존재론적 의존에 기초하여 자아의 변형과 재구성을 해명하는 이론이 솔로몬이 생각하는 사랑의 이론이다. 이를 위해 솔로몬이 기대는 사상적 원천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야기, 플라톤의 『향연』에서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지어낸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이다. 사실 이 책은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적 우화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솔로몬은 디오티마라는 가상의 지혜로운 여성의 입으로 대신 말해지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사랑담론이 아니라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에서 사랑을 이해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이 책에서 사유하고 싶은 이론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서 적어도 플라톤과 그의 동시대 친구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사랑을 두 영혼의 “융합” 혹은 “결합”으로 보는 형이상학적 관점이다. 이 생각은 기독교와 낭만주의 철학에 상당히 스며들다. 그러나 이 견해를 보여주는 고전적 진술은 플라톤의 위대한 대화록 『향연』에 등장하는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대화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이란 공유된 자아?정체성, 우리 각자가 자신의 나머지 반쪽을 찾으려는 절절한 필생의 노력이라고 제안한다. 희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런 생각을 희극적으로 말한다. 즉 우리 모두는 한때 두 겹으로 된 존재였는데, 너무 오만해서 제우스가 우리를 “사과처럼” 둘로 싹둑 잘랐다는 것이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완전한 존재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파네스가 내린 결론이다. 이 이야기의 내용은 터무니없지만, 그 결론은 심오하다. 이 책의 목적이 바로 이 결론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책은 두 영혼의 결합을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축자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사랑에서 새로운 의미를 끌어내고자 한다. (32-33면)
솔로몬은 잃어버린 반쪽을 되찾아 온전한 전체가 된다는 생각, 원초적 합일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버리고 아리스토파네스의 견해를 새롭게 읽어낸다면 사랑의 본성에 접근할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랑에서 타자를 통한 정체성의 공유 과정이라는 생각을 살려내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은 에로스적 사랑의 근대적 형태로서 서구적 근대의 발명품이다. 그것은 특정한 한 사람, 나와는 ‘별개’로 존재하고 ‘자율성’을 지닌 ‘평등한’ 다른 한 개체적 존재에 대한 유사?육체적 감정이다. 사랑에서 성욕으로 나타나는 것은 실제로는 성욕 이상을 담고 있다. 문제는 그 이상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는 것인데, 아리스토파네스는 ‘존재의 공유’라는 아이디어를 던져주었다. 공유란 한때 내 것이었지만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지닌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구축하는 창조행위이다. 그것은 기존의 자신으로부터의 분리와 이탈, 차이를 지닌 타자와의 교섭을 통해 자아의 변형과 확장과 재구축을 시도하는 행위이다.
사랑은 자신에 대한 관심에 토대를 두고 있으면서 타자에 대한 관심과 염려로 나아간다. 사랑은 타자를 자신을 되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준거점으로 삼는다. 내가 누구인가는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사랑은 자아를 재정의하는 작업이다. 사랑은 원래 하나였다가 분리된 반쪽이 신비롭게 맞춰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정해야 할 차이를 전제한다. 내가 결합하고자 하는 타자는 나의 의지와 욕망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이다. 그런 개별성을 지닌 존재에게 자신을 열고 접촉하고 결합하면서 정체성을 공유하려면 갈등과 모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정체성의 공유가 일어나는 사랑의 과정은 자율적 개인주의의 이상과 충돌한다. 사랑의 열정 이면에 소유욕과 적개심이 놓여 있으며, 사랑의 과정은 주도권을 쥐기 위한 권력다툼의 형태를 띠게 된다. 그러나 이 파괴적이고 소모적일 수 있는 과정을 겪어내면서 자아를 재정의하는 작업이 사랑이다. 솔로몬이 요즈음 자주 거론되는 ‘사건’이라는 개념보다는 ‘역동적 과정’으로 사랑을 바라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첫 만남에 몰입하는 젊은이들의 낭만적 사랑 이야기를 넘어 시간을 버텨내면서 자아를 재구축하는 어른의 사랑을 옹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 속에서 깊어지지 못하는 사랑이라면 과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을까.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이론을 제공해줄 뿐만이 아니라 역동적 과정으로서 사랑을 겪으면서 우리가 부딪칠 수밖에 없는 수많은 경험들, 환상과 낭만적 끌림과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 섹스의 공유만이 아니라 한 침대에서 같이 잠을 자는 문제, 친밀성과 염려, 평등과 권력투쟁과 싸움, 우정과 충실성의 문제 등등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사랑의 경험을 구성하는 이 모든 것들은 정체성의 공유 과정으로서 사랑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측면들이다. 이런 복잡다단한 사랑의 현상들을 이해하고 성찰하는 것이 철학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럴 때 철학은 삶의 현장으로 내려와 삶을 바꾸는 기예가 되고 혁명적 실천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사랑을 이해하기 위한 솔로몬의 철학적 작업에 가장 든든한 동반자가 문학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사랑을 정체성의 공유 작업으로 이해할 아이디어를 준 것도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였을 뿐 아니라, 이 책의 각 섹션 서두에 인용되어 있는 문장들도 대부분 문학 작품에서 가져온 것이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D. H. 로렌스의 『연애하는 여인들』은 솔로몬이 가장 핵심적으로 기대고 있는 작품이다. 『폭풍의 언덕』에서 여자 주인공 캐시가 했던 말,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있어.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라는 고백, 그리고 『연애하는 여인들』에서 남자 주인공 버킨이 했던 말, “왜? 왜 우리는 남자든 여자든 우리를 하나의 전체에서 부서져 내린 파편으로 여겨야 합니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뒤섞여 있는 것에서 순수하고 맑은 존재로 단독화되는 것입니다. 최상의 의미에서 섹스의 결합은 두 개의 별처럼 단독적인 두 존재가 별 무리를 이루며 초월하는 것입니다.”라는 발언은 존재의 뿌리를 ‘공유’하는 것이되 하나로 ‘합일’되지 않는 ‘결합’으로서 사랑의 성격을 압축해주고 있다.
나는 이 책이 사랑에 대해 철학적 해명을 시도하는 책이면서 또한 문학에서 영감을 끌어내는 책으로 읽히기를 원한다. 나는 독자들이 사랑에 어려움을 겪고 사랑 따윈 없다고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때 이 책으로 돌아와 가장 어려움을 겪는 대목을 조금씩 읽고 다시 사랑의 항해를 계속하기를 기대한다. 비록 그 항해가 매끄러운 순항이 아니라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고 때로 익사의 위험을 배제할 수 없는 험난한 여정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