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의 언어를 옮기던 번역가,
사물에 깃든 이야기를 옮기다
여기 ‘fleur de lis(플뢰르 드 리스)’라는 단어가 있다. 저자는 소설 《셜로키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호텔 방 벽을 묘사하는 용도로 서술된 이 단어와 마주쳤다. 소설의 줄거리는 물론이고 어떤 복선과도 무관한 단어였기에, 저자는 ‘옮긴이 주’로 별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고 ‘백합 문양 벽지’로 번역했다. 하지만 이 선택은 저자에게 후회로 남는다. 플뢰르 드 리스가 현지의 언중에게 주는 느낌과 인상을 한국어판으로 ‘옮기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세계관을 지키려는 셜로키언들의 집회에서 끝내 살인이 일어나던 밤, 첫 번째 단서를 찾는 주인공의 돋보기가 무심코 스쳐 간 곳. 그곳의 낡은 벽지 속에 흐릿하게 떠 있던 문양. 그걸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소설 속 주인공도, 번역한 나도.
― 201p. 〈플뢰르 드 리스 - 결사와 음모의 미학〉
그렇게 다시 들여다본 ‘플뢰르 드 리스’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비밀과 음모 그리고 피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 중세 십자군 전쟁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온 플뢰르 드 리스는 프랑스 왕조와 수도회 기사단의 심벌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백합 문양을 가진 두 세력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가톨릭교회를 등에 업은 프랑스가 이단의 죄를 씌워 기사단을 토벌한 것이다. 그 이후로도 플뢰르 드 리스는 종교와 왕조, 프리메이슨과 보이스카우트, 군대 등의 상징으로 사용되며 널리 퍼져나갔다.
흔히 번역가를 ‘옮긴이’라고 부른다. 번역은 저곳의 언어(출발어)를 이곳의 언어(도착어)로 ‘옮기는’ 작업이다. 이때, 단순히 언어만을 일차원적으로 옮기는 경우는 드물다. 번역가는 언어를 옮기면서 “언어 너머의 문화”와 “행간에 누운 정서와 태도”를 함께 나른다. 그래야만 더욱 정확하면서도 풍성한 번역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설레는 오브제》는 저자가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마주친 낯선 사물들에 다는 뒤늦은 ‘옮긴이 주’다. 또한 보다 나은 번역을 위해 사물 뒤편에 쌓인 사연과 궁리들을 탐색하다 저도 모르게 설레어버린 것들에게 바치는 연서(戀書)이기도 하다.
오브제 센티멘털리즘, 조금 특별한 사물 감상법
― 궁리하고 음미하며 접붙이기
그렇다고 이 책이 번역에 관한 이야기만 담고 있거나, 생소하고 이국적인 사물들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저자는 우리네 일상과 맞닿아 있는 흔한 사물들에게도 눈길을 준다. 책갈피, 갈색 종이봉지, 텀블러, 화장거울 같은 것들 말이다. 《설레는 오브제》의 글들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번역의 과정에서든 일상생활에서든 우연히 마주쳐 마음이 머문 하나의 사물을 지적 탐색과 감성적 몰입의 대상으로 삼아 깊이 궁리하고 음미해보는 저자의 태도와 관점 때문이다.
한편, 입구를 구겨서 닫아놓은 종이봉지는 묘한 긴장감을 낸다. 가볍지만 묵직한 미스터리를 자아낸다. 그래서 조심스레 풀어보게 한다. 갈색 봉지에 든 물건은 선물과 장물의 분위기를 동시에 풍긴다. 음모와 폭로를 동시에 상상하게 한다. (…)
종이봉지 센티멘털리즘이란 게 있다, 세상에는.
― 55~56p. 〈갈색 봉지 - 소박한 걸작, 삶의 조각들을 담다〉
그렇게 하나의 사물에서 길어낸 이야기를 저자는 때론 자신의 일상과 적극적으로 접붙인다. 《설레는 오브제》의 독특한 점은 다루는 사물들을 저자가 직접 사용해보거나 소장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조금 특별한 수집기(蒐集記)이기도 하다. 저자는 사물의 물성을 소유하는 대신 사물에 담긴 이야기를 자신의 일상과 접붙여냄으로서 사물의 감성을 수집한다.
오래전 크리스마스 무렵 선배언니와의 만남에 대한 기억은 ‘컴퍼스 로즈’에, X세대로 불리며 캐주얼 패션을 소비했던 대학생 시절은 ‘무지개 파라솔’에, 수성동계곡을 넘어 윤동주 문학관까지 갔던 한여름날의 산책은 ‘트래블러 태그’에 접붙였다.
저자 특유의 사물 감상법으로 마련한 컬렉션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욕심이 날지도 모른다. 나도 나만의 ‘설레는 오브제’를 갖고 싶다는. ‘설레는 오브제’를 수집하는 데에는 돈이나 공간이 들지 않는다. 약간의 지적 호기심과 사물을 감상하고 생각할 여유가 필요할 뿐. 책장을 덮은 뒤에 시도해보자. 내가 무심코 지나친 사물들 가운데 내밀한 매력을 간직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이리저리 궁리해보며 나의 일상과 접붙여보는 것이다. 그럼 느끼게 될 것이다. 소유하지 않고도 누리는 만족이란 귀하고 설레는 일임을.
언어와 심리, 문학과 역사, 음악과 디자인……
풍성한 인문적 사유와 지식이 교차하는 매개물
《설레는 오브제》는 나아가 언어와 역사, 예술과 문화 등 인문의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며, 그로부터 가볍지만은 않은 사유를 이끌어낸다.
책을 여는 첫 글인 〈팔러 체어 - 환대의 공간에서 혐오의 상징까지〉는 묵언수행을 원칙으로 하는 수도원에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지정된 방의 이름이었던 ‘parloir’가 응접실이나 담소용 공간을 뜻하는 말로 확산되고, 물 건너간 미국에서는 계급의식과 인종혐오가 담긴 말로 변질되는 양상을 톺아간다.
우리가 아는 ‘팔러 체어’는 응접실에 놓인 의자를 뜻한다. 팔러 체어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의자의 뼈대를 가리고 쿠션감을 주기 위해 충전재를 넣은 다음 화려한 직물로 마감한 것이 특징이다. 팔러 체어는 단순히 응접실에 놓이는 부속품이 아니라 ‘환대의 공간’을 상징하는 오브제가 됐다. 이러한 ‘팔러’가 미국에서는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를 취급하는 비즈니스 영역으로 퍼져 아이스크림 가게(icecream parlor)와 피자 가게(pizza parlor)에서 안마시술소(massage parlor)를 이르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팔러’에 얽힌 어두운 과거가 있다. 노예제가 아직 살아 있던 시절의 미국 사회에서는 ‘팔러’가 백인 우월주의와 계급의식을 상징하는 단어로 쓰였던 것이다. 이 팔러의 흑역사가 현대 미국 사회에서 다시금 되살아난 사건이 있다. 2021년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계정을 차단한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 ‘팔러(Parler)’라는 우파 성향의 SNS로 대거 갈아탄 것이다.
속세와 거리가 먼 수행의 공간에 속한 단어였던 ‘팔러’가 세상 밖으로 나와 상류층의 환대와 과시 풍조를 대변했고, 대서양을 건너서는 인종주의와 특권의식의 꼬리표를 달았으며, 21세기 들어서는 급기야 혐오와 편견의 언어를 내뱉는 온라인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이러니한 ‘팔러’의 여정을 다룬 이 글에서는 언어를 다루고 추적하며 관련한 지식을 엮어내고 사유를 이어가는 저자 특유의 글맛을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는 갈색 봉지 이야기나 메리제인 슈즈의 어원에 담긴 이중성 같은 글은 평범한 사물 너머에 담긴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는 즐거움을 안긴다. 꽃시계라는 발상에 담긴 자연의 사물화 관점을 지적하는 글이나 비연호와 연관된 두 인물로 상이한 ‘기쁨’의 양상을 다룬 글은 진한 여운과 생각거리를 남기기도 한다.
사물의 뒤를 캐다 보면 고전부터 대중문화까지 인문의 다양한 분야가 두루 소환된다. 사물을 매개로 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지식과 감상이 얽힌다. 범주화가 없는 대신 교차점들로 가득하다.
― 8p. 〈머리말 - 번역가의 물체주머니〉
하나의 사물을 매개로 교차하는 이야기들이 풀려날 때, 그것은 비로소 ‘설레는 오브제’가 된다. 그래서 오브제는 “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지식과 감상이 얽히는” 교차로다. 그리고 그곳에 문학, 역사, 심리, 언어, 음악,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가 두루 소환된다. 그 풍성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섬세하게 풀어내는 저자의 글들을 따라가다 보면 신선한 지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