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심할 것 없이 현대의 가장 뛰어난 남아메리카 작가 ─ 《뉴욕 헤럴드 트리뷴》
▶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소설가)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논픽션 전집이 민음사에서 전권 출간되었다. 1994년에 첫 출간된 보르헤스 전집이 픽션 모음집이었다면 이번 전집은 보르헤스가 발표했던 강의, 기사 등의 논픽션을 한데 모았다.
보르헤스는 생전에 수천 쪽에 달하는 에세이를 남겼다. 우리에게 픽션으로 잘 알려진 것과 달리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산문 작가로도 명성을 떨쳤으며 당대 작가의 전기, 철학 사상, 아르헨티나의 탱고, 민속학, 국가 정치 및 문화, 리뷰, 비평, 서문, 강의 등 다양한 주제와 형식의 산문을 남겼다. 전 세계에서 독립적이고 탁월한 작품으로 인정받은 그의 논픽션이 국내에 전집으로 완역되어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픽션이나 시의 장르와 달리 다양한 산문 속에서 또 다른 인간적인 매력을 발하는 보르헤스를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의 번역은 그동안 보르헤스를 대중에게 꾸준히 소개해 온, 스페인어에 정통한 여러 교수들이 나누어 맡아 철학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보르헤스의 원문을 충실히 살려 냈다. 표지에서는 미로와 거울, 무한한 반복 등 핵심 주제를 담으면서도 현대적인 가치를 드러내는 일러스트로 21세기에 만나는 새로운 보르헤스를 표현해 냈다.
이 논픽션 전집을 통해 보르헤스 문학의 시원을 찾아 지적 탐색을 떠나 보자. 전방위로 뻗어 나가는 그의 격렬한 호기심과 전 작품을 관통하는 방대한 지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 왜 지금 보르헤스 논픽션인가?
보르헤스는 1980년대 말 국내에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 소개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단편소설집 『픽션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혔지만, ‘어려운 작가’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었다. 2000년대 시작된 ‘인문학 다이제스트’ 열풍에서도 한 발짝 빗겨 서 있던 신비의 거장, 보르헤스. 그를 쉽게 읽고자 하는 독자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중심을 부정하는 보르헤스의 사유는 한 문장으로 수렴될 수 없었고 그의 언어에 주석을 달면 달수록 옥상옥(屋上屋)이 되는 현상을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일생을 표류하면서 살았고, 조언할 말은 한마디도 없다.’/
만년의 보르헤스에게 젊은이들을 위해 조언을 한마디 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시대의 멘토가 되기를 거부했던 자유경의 목소리는 어떻게 그의 작품을 읽어야 하는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힌트를 준다.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은 그런 의미에서 보르헤스를 만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유용한 지도가 될 것이다. 한 번쯤 『픽션들』, 『알레프』를 펼쳐 들었으나 복잡한 표식과 난해한 상징에 완독을 포기했던 독자들이라면, 먼저 논픽션을 만나 보자. 청년 보르헤스의 사유가 태동하는 시기부터 지적 자만심을 숨기지 못하는 패기만만한 장년기를 지나 자신만의 소우주를 탄생시키는 완숙기까지, 그의 모든 여정을 담았다. 이 사유의 지도를 통해, 픽션 속 모든 장애물은 보르헤스의 미학적 토대 위에 세워진 눈부신 랜드마크였음이 드러난다.
■ 보르헤스의 안내를 통해 들여다보는
세계문학의 지평과 그 기원
이 논픽션 전집 6권인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6 세계문학 강의』는 말 그대로 세계문학사의 지평을 보르헤스의 친절한 안내를 통해 짚어보는 책이다. 보르헤스의 고향인 아르헨티나의 두 걸출한 작가 레오폴도 루고네스의 시들과 호세 에르난데스의 『마르틴 피에로』를 중심으로 남미 문학을 먼저 만나고, 그가 생전에 깊이 몰두하며 사랑했던 영국 문학을 그 기원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고 심도 깊게 들여다본다. 영문학의 기원을 다루고 있는 장에서는 영국이라는 나라를 형성한 앵글로 색슨족의 문학과 게르만, 스칸디나비아 문학의 근원도 엿볼 수 있다. 또한 보르헤스는 영국 문학에 뿌리를 두고 독자적으로 발전한 미국 문학도 그 기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1부 「레오폴도 루고네스」는 1874년에 스페인에서 태어나 19세기 말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1938년에 생을 마감한 아르헨티나의 시인 레오폴도 루고네스의 작품과 생애, 그를 둘러싼 이슈들을 기술하고 있다. 유럽에서 태어나 남미의 시인이 된 루고네스는 스페인의 문학적 전통을 바탕으로 아르헨티나의 드넓은 평원에 대해 노래하며 아르헨티나 문학, 혹은 남미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시인일 뿐 아니라 산문가, 역사가로서 신생 국가 아르헨티나의 문화 역사적 역량을 끌어올린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2부 「마르틴 피에로」는 아르헨티나의 일종의 민족 서사시이자 아르헨티나 고유의 시 장르인 ‘가우초 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호세 에르난데스의 시 「마르틴 피에로」에 관한 글이다. 가우초는 아르헨티나 팜파스의 목동을 일컫는 말로, 가우초 시는 가우초 중에서 시를 짓고 노래하던 파야도르들의 시다. 아르헨티나의 19세기 영토 전쟁으로 인해 많은 가우초들이 강제 징집 당하고, 그 중 일부는 범죄자가 되어 평원을 떠도는 방랑자 신세가 되었는데, 마르틴 피에로 역시 이 같은 인물이다. 보르헤스는 마르틴 피에로라는 인물과 그를 주인공으로 한 서사시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작품 해설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역사와 민족성에 대한 지식도 아울러 전한다.
3부는 좀 특별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불교란 무엇인가」이다. 제목 그대로 보르헤스는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아르헨티나 대중을 상대로 붓다의 탄생에서부터 대승 불교, 선불교, 라마교, 탄트라 불교 등 각 교단의 발전과 성격을 어렵지 않은 유연한 글로 정리했다. 또한 불교의 우주론, 불교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상, 윤회 등의 핵심 내용을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명쾌하게 기술했다.
4부 「고대 영국 시 선집」은 영문학의 기원이라 일컬어지는 작품 『베어울프』를 비롯, 「핀스부르흐 전투」 「데오르」 「바다 나그네」 등 고대 영국 문학의 원형이 된 작품들을 거론하고, 좀 더 자세한 내용은 6부인 중세 게르만 문학으로 이어진다. 영국 문학 형성의 근간이 된 앵글로색슨족, 게르만족과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서사시, 혹은 사가(saga)에 해당하는 『니벨룽의 노래』 『고(古)에다』 『스투를룽가 사가』 등 우리가 흔히 접하기 어려운 고대 북유럽 문학의 원형들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들과 기록이 등장하고, 이를 통해 영문학이 어떤 토양을 바탕으로 피어났는지 알 수 있다.
5부 「영국 문학의 이해」는 앵글로색슨 문학으로부터 출발하여 T. S.엘리엇, E. M. 포스터 같은 근현대 문학까지 전반적 영문학사를 아우르는 글이다. 가톨릭 교회 의식의 일부였던 종교극이 셰익스피어 시대의 대중적 연극으로 발전하는 과정, 종교와 철학의 각성이 반영된 17세기 문학, 새뮤얼 존슨으로 대표되는 18세기 신고전주의, 이어진 19세기의 낭만주의, 디킨스로 대표되는 장편소설의 부흥과 SF 문학의 탄생, 제임스 조이스로 정점에 치닫는 모더니즘과 2차 대전 직후까지의 영문학과 핵심 작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마치 한 학기 분량에 해당하는 영문학사 강의를 축소한 듯 알찬 내용이다. 마지막 7부 「미국 문학 입문」 역시 5부와 흡사한 전개를 택하고 있으며,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건너온 영국 문인들로부터 시작하여 아서 밀러에 이르기까지 미국 문학의 주요 지형을 세세히 그려낸다.
880쪽에 달하는 방대한 마지막 논픽션 선집에서 보르헤스는 자신이 알고 사랑해 온 세계문학의 계보를 우리에게 전한다. 이 책은 그의 방대한 지식과 문학 및 작가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고대 영국과 게르만 서사시 등 흔히 접하기 어렵고 사료적 가치가 높은 원문들로 가득하다. 읽는 이에겐 보르헤스의 지적 탐구를 총망라한 논픽션 전집의 마지막 권으로 손색없는 내용을 담은 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