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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작품 전집 (BEETHOVEN - The New Complete Essential Edition)

[ 95CD / 박스 세트 / 한정반 ]
Ludwig van Beethoven 작곡/Anna Tomowa-Sintow, Agnes Baltsa, Peter Schreier, Jose van Dam 노래 외 113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Deutsche Grammophon | 2021년 10월 22일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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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작품 전집 (BEETHOVEN - The New Complete Essential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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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21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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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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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소개 (118명)

작곡 : Ludwig van Beethoven (루드비히 판 베토벤)
1770년 12월 17일 세례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 1770년 12월 17일 세례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등이 있다.

베토벤의 조부는 21세의 나이에 브라반트 오스트리아 공국(현재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메헬렌 마을에서 본으로 이주한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12-1773)이었다. 루트비히는 쾰른 선제후국,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의 궁정에서 베이스 가수로 고용되었고, 결국 1761년에 카펠마이스터가 되었으며 본에서 저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그의 생애 말기에 그가 위임한 초상화는 그의 음악적 유산의 부적으로 그의 손자의 방에 남아 있었다. 루트비히에게는 같은 음악 기관에서 테너로 일하면서 그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키보드와 바이올린 레슨을 한 외아들 요한(Johann van Beethoven, 1740-1792)이 있었다.

요한은 1767년에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 1746-1787)와 결혼했다. 그녀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 1701-1759)의 딸이었다. 베토벤은 현재 본, 본가세 20번지의 베토벤 하우스 박물관에 해당하는 건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생년월일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770년 12월 17일에 성 레미기우스 가톨릭 교구에서의 그의 세례 기록은 존속하고 있다. 당시 이 지역의 관습은 출생 후 24시간 이내에 세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그의 생년월일이 12월 16일이라는 합의(베토벤 자신이 동의 한 바 있음)가 있지만, 이에 대한 문서로 된 증거는 없다.

요한 판 베토벤에게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두 번째로 태어난 루트비히와 두 명의 남동생 만이 유아기에서 살아 남았다. 첫째 동생인 카스파 안톤 카를 베토벤(Kaspar Anton Karl van Beethoven, 1774-1815)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형의 비서 역할을 맡으며 출판을 도왔다. 하지만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카스파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우스 요한(Nikolaus Johann van Beethoven, 1776-1848) 역시 베토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다.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된 그는 상당한 돈을 모은 후 형에게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할 때에도 형의 반대를 꺾고 결혼한 뒤부터는 더 멀어졌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첫 번째 음악 교사는 그의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 악기 앞에 세워놓았고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되는데, 이는 그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음악학자이자 음악평론가인 조지 그로브(Sir George Grove, 1820-1900)의 그로브 음악과 음악인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요한은 혹독했을지 모르지만 아들의 두드러진 재능을 인식하고 베토벤에 대한 음악 교육을 같은 궁정의 동료들을 포함한 다른 유능한 교사들에게 재빨리 양도했다. 베토벤은 후에 궁정 오르간 연주자인 질 판 덴 에덴(Gilles van den Eeden, 1708-1782), 건반 수업을 한 가족의 후원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 1751-1805),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를 지도한 그의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Franz Rovantini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한 한 궁정의 악장인 프란츠 안톤 리스Franz Anton Ries 등 다른 지역 교사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그의 수업료는 5년차에 시작되었다. 체제는 엄하고 철두철미해서 종종 그는 눈물을 흘렸다. 불면증 환자 파이퍼의 개입으로 젊은 베토벤이 침대에서 건반으로 끌려가는 비정기적인 심야 세션이 있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어린 나이에 분명했다. 요한은 이 지역에서의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성공을 알고(아들 볼프강, 딸 나넬과 함께) 1778년 3월의 첫 공개 연주회 포스터에 베토벤이 여섯 살(그는 일곱 살이었다)이라고 주장하며 아들을 "신동"으로 선전하려고 했다. 여하튼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 "신동"으로 불린 건 사실이며 그 후 개인 연주회를 포함하여 많은 소규모 공연이 이어졌다. 평소 수줍음이 많았던 베토벤은 음악이 자신감을 높여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80년 또는 1781년에 베토벤은 본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인 크리스티안 고틀로브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와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켐니츠 출신의 작곡가로서 많은 재능을 갖고 있었던 네페는 베토벤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그에게 작곡을 가르쳤다; 1783년 3월 베토벤의 첫 번째 출판 작품인 피아노 변주곡,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WoO 63》이 등장했다. 베토벤은 곧 네페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무급(1782년)으로 일했고, 그 다음에는 궁정 예배당의 유급(1784년)의 직원으로 일했다. 그의 첫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WoO 47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Maximilian Friedrich von Konigsegg-Rothenfels, 1708-1784)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Kurfurst ("선제후")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1783년에 출판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인정받았는데, 이 세 개의 소나타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은 물론 그의 대담성을 일찌감치 엿볼 수 있게 한다. 같은 해에 베토벤에 대한 최초의 인쇄된 언급이 Magazin der Musik ("음악잡지")에 실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 11살 소년으로 가장 유망한 재능있는 소년이다. 그는 피아노를 매우 능숙하게 연주하고, 파워풀하게 연주하며, 책을 아주 잘 읽는다... 그가 연주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은 스승 네페가 손에 쥐여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다 ..."

본의 선제후로서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후계자는 막시밀리안 프란츠(Maximilian Franz Xaver Joseph Johann Anton de Paula Wenzel, 1756-1801)였다. 그는 베토벤에게 약간의 지원을 하며 1784년 그를 두번째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영구 임명하였고, 1792년 빈 방문을 위해 돈을 지불했다. 베토벤은 또한 궁정 예배당에서 하프시코디스트와 비올리스트로서 일했다.

베토벤은 몇 년 동안 그의 인생에서 중요해진 몇몇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교양 있는 폰 브로우닝von Breuning 가문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였고 몇몇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미망인이 된 폰 브로우닝로부터 어머니와 같은 우정을 제공받았다.

여기서 그는 그의 평생의 친구가 되었고 폰 브로우닝의 딸들 중 한 명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던 젊은 의대생 프란츠 게르하르트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를 만났다. 폰 브로이닝의 가족 환경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그의 가정 생활에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문의 또 다른 단골은 페르디난드 폰 발트슈타인(Ferdinand von Waldstein, 1762-1823) 백작이었는데, 그는 베토벤의 본 시대 동안 친구이자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발트슈타인은 1791년에 베토벤의 무대를 위한 첫 번째 작품인 발레 음악, 《기사 발레를 위한 음악, WoO 1》을 의뢰했다.

하이든, 발트슈타인의 도움으로 베토벤은 빈 귀족들의 살롱에서 연주자와 즉흥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디터스도르프를 주제로 한 일련의 피아노 변주곡, WoO 66(디터스도르프의 오페라 《빨간 모자》 중 아리아 "옛날 한 노인이" 주제에 의한 열세 개의 변주곡 A 장조)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793년까지 그는 빈에서 피아노 거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그는 작품의 최종적인 모습이 더 큰 영향을 미치도록 작품 출판을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첫 번째 빈 연주회는 1795년 3월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를 연주했다. 이 공연 직후, 그는 Op.를 부여한 첫 번째 작품(세 개의 피아노 삼중주 1-3번, Op. 1)의 출판을 위해 편곡 작업을 했다. 이 작품들은 그의 후원자인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되었고, 재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베토벤의 수익은 1년 동안 그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거의 충분했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의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모차르트의 연주여행에도 동행했던 리히노브스키 공작도 함께 하였다.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연주회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 1?2번, Op. 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헌정하였다. 그것들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하고 있으며 비르투오소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것으로 유명하다. 왕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게 되었다.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고 그해 11월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의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Johann Andreas Streicher, 1761-1833)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1799년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전 후원자인 라이문트 베츨라어 남작의 집에서 악명높은 피아노 "결투"에 참가, 거장 요제프 뵐플(Joseph Johann Baptist Wolfl, 1773-1812)에 대항하여 승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모리츠 폰 프리스(Moritz Christian Johann Reichsgraf von Fries, 1777-1826) 백작의 살롱에서 다니엘 슈타이벨트(Daniel Gottlieb Steibelt, 1765-1823)를 상대로 비슷한 승리를 거두었다. 1799년 출판된 베토벤의 여덟번째 피아노 소나타 "비창", Op. 13은 음악학자 배리 쿠퍼(Barry Cooper, 1949?)에 의해 "성격의 강인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의 수준, 동기와 음조의 창의력 면에서 그의 이전 어느 작품들 보다도 능가하고 있다"고 묘사되었다.

1813년, 베토벤은 영국 피아니스트 찰스 네이트(Charles Neate, 1806-1879)에게 1798년 경 한 가수와의 다툼으로 인한 발작이 원인이 되어 청력 상실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의 청력은 점진적으로 감소하면서 심각한 형태의 이명(耳鳴) 때문에 더욱 방해를 받았다. 일찍이 1801년에 그는 프란츠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와 또 다른 친구인 카를 아멘다(Carl Friedrich Amenda, 1771-1836)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증상과 그것들이 직업적, 사회적 환경 모두에서 일으킨 어려움들을 기술했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들 중 일부는 이미 문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원인은 아마 귀경화증이었을 것이며, 아마도 청각 신경의 퇴화를 동반했을 것이다.

베토벤은 주치의의 충고에 따라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빈의 바로 외곽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주하여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현재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로 알려진 문서를 썼는데, 이 문서는 그의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그의 청각 장애로 인한 자살에 대한 생각과, 그의 예술을 통해 계속해서 살겠다는 결심을 기록하고 있다. 이 편지는 결코 보내지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후 그의 서류에서 발견되었다. 베겔러와 아멘다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았다; 그 편지들 속에서 베토벤은 또한 그 시기에 진행 중이던 그의 직업적, 재정적 성공에 대해서 언급했고, 베겔러에게 말했다 시피 "운명의 멱살을 잡으십시오. 그것은 확실히 나를 완전히 짓밟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그의 결단에 대해서 언급했다. 1806년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 스케치 중 하나에서 "당신의 귀먹음이 더 이상 비밀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 예술에서 조차."라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청력 손실은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의 삶의 이러한 단계에서 중요한 수입원인 연주회에서의 연주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사회적 탈퇴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도 여전히 언어와 음악을 정상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베토벤은 결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말년에도 그는 여전히 낮은 음색과 갑작스러운 큰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빈으로 돌아온 것은 음악적 양식의 변화로 표시되었으며, 현재는 대규모로 작곡된 많은 창작품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중기 또는 "영웅적" 시기의 시작으로 지정되는 경우가 많다. 카를 체르니에 따르면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해 온 작업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길을 택할 것이다." 이 새로운 양식을 사용한 초기 주요 작품은 1803-04년에 작곡된 교향곡 3번 "영웅"이다. 나폴레옹의 경력을 바탕으로 한 교향곡을 만들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1798년에 베르나도트 백작(칼 14세 요한)에 의해 베토벤에게 제안이 되었을 수 있다. 영웅적 혁명 지도자의 이상에 동조하는 베토벤은 원래 교향곡에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부여했지만 1804년에 나폴레옹이 자신을 "황제"라고 선언한 것에 환멸을 느꼈고 원고의 제목 페이지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을 긁어내었다. 교향곡은 1806년에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un grand'uomo"이라는 부제와 현재의 제목인 "영웅 교향곡"으로 출판된다. "영웅"은 이전 교향곡보다 더 길고 더 거대했다. 1805년 초에 초연되었을 때 그것은 엇갈린 반응을 받았다. 어떤 청취자들은 그 길이에 반대하거나 그 구조를 오해했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걸작으로 보았다.

다른 중기의 작품들은, 베토벤이 물려받은 음악 언어와 같은 극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라주모프스키 현악 사중주, 그리고 발트슈타인과 열정 피아노 소나타는 교향곡 3번 등의 영웅적인 정신을 공유한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4번부터 8번까지의 교향곡과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오페라 피델리오,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있다. 1810년에 작가이자 작곡가인 E. T. A 호프만의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일반음악신문")에서의 영향력 있는 리뷰에서 베토벤은 "낭만주의 음악"의 작곡가 세 명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송되었다; 호프만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 관하여 드라마틱한 필치로 '깊은 밤의 장막을 뚫어내는 것'에 비유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는 열정과 함성을 모두 쏟아낼 수 있고, 꿋꿋이 살아남아 영혼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천재의 광상곡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내적인 것과 연관성이 있고, 심중하고 친절하게 듣는 이들을 끝없는 정신세계로 끌어들인다"라며 칭찬했다.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의 수입은 자신의 작품 출판, 그것들의 공연, 그리고 출판 전 독점 기간 동안 후원자들에게 그들이 의뢰한 개인 공연과 작품의 사본을 제공했던 것으로부터 나왔다. 로브코비츠 공작과 리히노브스키 공작을 포함한 그의 초기 후원자들 중 일부는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하는 것 외에도 연간 급여를 제공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1803년, 또는 1804년에 그와 함께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한 황제 레오폴드 2세의 막내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일 것이다. 그들은 친구가되었고 그들의 만남은 1824년까지 계속되었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개의 작곡을 바쳤다. 여기에는 대공 삼중주, Op. 97 (1811년) 및 장엄미사, Op. 123 (1823년)도 포함된다.

안 데르 빈 극장에서의 그의 지위는 1804년 초에 극장이 경영을 변경하면서 종료되었고, 친구인 스테판 폰 브로우닝(Stephan von Breuning, 1774-1827)과 함께 일시적으로 빈의 교외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레오노레(그의 오페라 원제)에 대한 작업이 잠시 주춤해졌다. 오스트리아의 검열관에 의해 다시 연기되었고, 마침내 1805년 11월에 현재의 피델리오라는 호칭으로 프랑스의 도시 점령으로 거의 비어 있던 집들에서 초연되었다. 이 피델리오 판은 재정적인 실패일 뿐만 아니라 중대한 실패작이기도 하였고, 베토벤은 그것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계속해서 인정을 받았다. 1807년에 음악가 겸 출판인인 무치오 클레멘티(Muzio Filippo Vincenzo Francesco Saverio Clementi, 1752-1832)가 영국에서 그의 작품을 출판할 권리를 확보했고, 하이든의 전 후원자 에스테르하지 왕자는 아내의 명일을 위해 미사곡(미사곡 다장조, Op. 86)을 의뢰했다.

1811년 봄, 베토벤은 두통과 고열을 겪으며 중병에 걸렸다. 그의 주치의 요한 말파티(Johann Baptist Malfatti von Monteregio, 1775-1859)는 테플리츠(현 체코의 테플리체) 온천에서 치료제를 복용할 것을 권유했다. 테플리츠에서 그는 코체부의 극에 사용할 서곡을 포함한 부수 음악 2개-슈테판왕, Op. 117과 아테네의 폐허, Op. 113을 썼다. 다음 해에도 테플리츠를 다시 방문하라는 조언을 받은 베토벤은 그곳에서 괴테를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다양한 귀족, 군주들과 함께 재능있는 작가 베티나 브렌타노도 있었다. 이러한 만남을 추진한 것은 바로 베티나였다. 베티나는 베토벤과 괴테, 모두를 존경하고 있었다. 얼마후 괴테는 카를 프리드리히 젤터(Carl Friedrich Zelter, 1758-1832)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그(베토벤)의 재능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성격입니다. 그가 세상을 혐오스럽게 여기는 것이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러한 그의 태도는 자신이나 타인을 더 이상 즐겁게 하지 못합니다." 베토벤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에 "괴테는 시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궁정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 후에 그는 괴테의 한 쌍의 시를 기반으로 1815년에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조용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Op. 112를 작곡하게 된다. 이것은 1822년에 시인에게 헌정되며 출판되었고,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젊었을 때 이미 소중히 여겼던 유일한 불멸의 괴테를 위해 간직하고 있던, 감탄과 사랑과 존경이 지속되었습니다." 음악적 취향과 같은 괴테의 사회적 태도는 보다 형식적인 시대에 형성되었다. 스물 한 살 후배인 베토벤에게 있어서 진정한 귀족은 예술가 뿐이었다. 20년 후 베티나가 보고한 것 처럼, 신화에 대한 그의 환멸은 거리에서 왕족을 만났을 때 괴테의 행동에 의해 결정되었다. 베토벤이 괴테에게 말했다. "귀족들도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길을 양보할 것이니 계속 걸으십시오." 그러나 괴테는 길가로 비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들의 행렬을 바로 통과했다. 그리고 괴테를 기다리며 베토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의 작품을 존경하기 때문에 당신을 기다렸지만 당신은 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존경심을 보였습니다."

1812년, 그가 테플리츠에 있는 동안 그는 그의 "불멸의 연인"에게 10 페이지 분량의 러브레터를 썼는데, 그는 이 편지를 그 수취인에게 보내지 않았다. 음악학자 메이너드 솔로몬이 의도한 수신자가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 1780-1869)인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된 수신자의 신원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모든 것들은 베토벤이 빈에서의 첫 10년 동안 가능한 소울메이트로 여겨져 왔다. 귀차르디(Julie Guicciardi, 1784-1856)는 베토벤과 바람을 피웠지만 그에게 진지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1803년 11월에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했다(베토벤은 후대의 비서 겸 전기작가인 안톤 쉰들러에게 "(귀차르디가) 나를 찾았고 울었지만, 나는 그녀를 경멸했다"고 주장했다. 요제피네(Josephine Brunsvik or Countess Josephine Deym, 1779-1821)는 베토벤이 그녀로 인해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귀족, 그리고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노인 백작 요제프 다임(Joseph von Deym, 1752-1804)과 결혼했다. 요제프 다임은 1804년에 사망했다. 베토벤은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열정적인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요제피네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녀가 부다페스트로 이주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 마침내 1807년에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당신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 여전히 나타나길 바라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파티(Therese Malfatti von Rohrenbach zu Dezza, 1792-1851)는 베토벤의 주치의의 조카딸로 1810년에 그녀에게 청혼했었다. 그는 40세, 그녀는 19세였다. 그 제안은 거절당했다. 그녀는 이제 피아노 바가텔 엘리제를 위하여, WoO 59의 수령자로 기억된다.

823년에는 세 개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 완성되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몇 년 동안 베토벤을 점령하고 있던 것들로서 장엄미사, 교향곡 9번, 디아벨리 변주곡이 바로 그것들이다. 베토벤은 마침내 완성된 미사곡 사본을 3월 19일(대공이 대주교로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때)에 루돌프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그는 작품의 원고를 독일과 유럽의 여러 법원에 각각 50 듀카트로 수익성 있게 판매 할 수 있다는 개념을 세웠기 때문에 출판이나 공연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소수 중 한 명은 베토벤에게 무거운 금메달을 보냈던 프랑스의 루이 13세였다. 교향곡과 변주곡은 나머지 베토벤 작업 연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디아벨리는 두 작품을 모두 출판하기를 원했지만 미사곡의 잠재적 인상은 슐레진저와 피터스를 포함한 다른 많은 출판사들이 베토벤에게 로비를 하게 했다. 그리고 결국 쇼트(Schott Music)에 의해 획득되었다.

베토벤은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친을 위해 현악 사중주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들 중 첫 번째의 사중주 12번 E♭ 장조, Op. 127은 1825년 3월에 슈판치히 사중주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825년 4월, 사중주 A 단조 15번, Op. 132를 쓰다가 갑작스런 병에 걸렸다. 바덴에서 회복하면서 그는 "건강을 회복한 자가 신에게 감사하는 신성한 노래, 리디안 선법을 따름"이라고 불리는 느린 악장을 착수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완성된 것은 사중주 13번 B♭ 장조, Op. 130이었다. 6악장에서 마지막 대위법의 악장은 1826년 3월의 초연에서 연주자와 관객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것으로 증명되었다. 베토벤은 출판사 아르타리아에 의해 추가 요금을 받으며 새로운 피날레를 쓰고 마지막 악장을 별도의 작품(대푸가, Op. 133)으로 발행하도록 설득되었다. 베토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사중주 14번 C# 단조, Op. 131이며 베토벤은 이것을 가장 완벽한 단일 작품으로 평가했다.

베토벤과 그의 조카 카를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격렬했다. 베토벤이 그에게 보낸 편지는 요구가 지나쳤고 꾸짖는 방식이었다. 8월 베토벤의 뜻에 반하여 어머니를 다시 만난 카를은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살아 남았고 퇴원 후 베토벤과 그의 삼촌 요한과 함께 그나이젠도르프로 요양하러 갔다. 그곳에 있는 동안 베토벤은 추가로 사중주(F 장조 16번, Op. 135)를 완료하여 슐레진저에게 보냈다.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에서 도입부의 느린 화음 아래에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문구를 붙였다; 그 응답의 문구는 이 악장의 더 빠른 제1주제 위에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라고 적혀 있다. 악장 전체는 제목처럼 "어려운 결정"("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을 향하고 있다. 11월에 베토벤은 최종 작품인 사중주 13번 B♭ 장조, Op. 130의 대체 피날레를 완성했다. 이때 베토벤은 이미 병이 들어 우울해 있었다; 그는 요한과 다투기 시작했고, 요한은 그의 아내보다 우선권으로 카를을 상속자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베토벤은 종종 30세 무렵부터 질병에 시달렸다. 설사, 복통, 산통, 열병, 또는 염증과 같은 다양한 증상에 대한 설명이 있다. 한편으로는 급성 질환이 원인으로 간주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 이상의 만성 질환이 주요 원인으로 명명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납 중독, 브루셀라증 및 잦은 음주 등이 의심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베토벤의 건강 문제가 한 가지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 다른 원인으로 인한 것인지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베토벤의 전기 작가들은 예술가가 값비싼 사탕 수수 설탕 대신 납 설탕으로 달게 했던 값싼 화이트 와인을 정기적으로 마셨다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뼈와 머리카락에는 거의 측정되지 않은 농도의 납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질병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했다. 1821년 여름, 심한 황달이 간경변을 예고했다. 베토벤은 목욕과 란트 체류에 대한 불만에서 구제를 구했고, 1826년 9월 29일 그의 조카와 함께 그나익센도르프에 있는 그의 형제 요한의 집으로 옮겨 석달동안 머물렀다. 12월 초, 춥고 습한 날씨에 열린 차를 타고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베토벤은 폐렴에 걸렸다. 회복 직후 다리와 복부의 수분 저류 및 황달과 함께 심각한 간경변 증상이 나타나 베토벤은 더 이상 병상을 떠날 수 없었다. 카를은 12월 동안 베토벤의 침대 옆에 머물렀다. 하지만, 다음 해 1월 초에 이흘라바에 입대하기 위해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토벤에게 편지를 썼다ː "사랑하는 아버지... 나는 만족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당신과 헤어지게 된 것 만은 후회합니다." 하지만 카를은 삼촌을 다시 보지 못했다. 카를이 떠난 직후 베토벤은 그의 조카를 유일한 상속자로 만드는 유언장을 썼다.

1월 말에는 베토벤의 병 치료를 위해 말파티 박사가 참석했다. 그의 치료는 주로 알코올에 집중되었다. 베토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디아벨리, 슈판치히, 리히노프스키, 쉰들러, 훔멜과 그의 제자 페르디난트 힐러를 포함한 많은 오랜 친구들이 방문했다.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에서 온 백 파운드, 쇼츠에서 온 값비싼 와인을 포함하여 많은 조공과 선물도 보내졌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은 때때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용감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전히 병상에 누워 있었다. 3월 24일, 그는 쉰들러와 다른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게, 친구들, 희극은 끝났네."라고 말했다. 그날 늦게, 쇼트에서 온 와인이 도착했을 때, 그는 속삭였다. "애석하군, 너무 늦었네."

여러 의사들에 의한 몇 차례의 천공과 실패한 치료 시도 끝에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의사는 안드레아스 이그나츠 바브루흐였다. 베토벤의 임종시, 안젤름 휘텐브렌너와 요한나 판 베토벤 만이 참석했다. 바르부흐에 따르면, 오후 5시 경에 번개와 천둥 소리가 들렸다ː "베토벤은 눈을 뜨고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 몇 초 동안 올려다 보았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고, 심장박동도 뛰지 않았다." 많은 방문객이 임종을 보러왔다.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 일부는 휘텐브렌너와 힐러에 의해 보관되었다. 부검 결과 베토벤은 과도한 알코올 섭취와 청각 및 기타 관련 신경의 상당한 확장으로 인해 심각한 간 손상을 입었다.

3월 29일 배링 지역 공동 묘지의 매장은 빈 인구의 큰 공감으로 이루어졌다. 약 2만명이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쓴 장례식 연설은 배우 하인리히 안쉬츠가 연설했다. 불과 1년 후 베토벤을 따라 무덤까지 가야했던 프란츠 슈베르트는 훔멜, 체르니, 그릴파르처, 마이세더, 슈판치히, 카스텔리, 베른하르트, 피링거, 하슬링거, 뵘, 슈트라이허, 슈타이너, 홀츠, 볼프마이어, 링케와 함께 36명의 성화 운반자 중 한 명으로서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의 시신은 두 번 발굴되었다. 1863년에 뼈를 측정하고 두개골을 촬영했다. 1888년에 그의 유골은 다시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빈 중앙묘지의 명예 묘역으로 옮겨졌다.
노래 : Anna Tomowa-Sintow (안나 토모와-신토우)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노래 : Agnes Baltsa (아그네스 발차 )
그리스 태생의 메조소프라노. 그리스 태생의 메조소프라노.
노래 : Peter Schreier (페터 슈라이어)
테너, 지휘자 테너, 지휘자
성악가 (베이스 바리톤) 성악가 (베이스 바리톤)
노래 : Pilar Lorengar (필라르 로렌가르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테너) 성악가 (테너)
성악가 (베이스) 성악가 (베이스)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노래 : Dietrich Fischer-Dieskau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성악가 (바리톤) 성악가 (바리톤)
노래 : Sylvia McNair (실비아 맥네어)
노래 : Christiane Oelze (크리스티아네 욀체)
독일 쾰른에서 1963년 태어난 크리스티안네 욀체는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의 마스터 클라스에 참가했고 계속하여 에르나 베스텐버거(Erna Westenberger)에게서 지도를 받은 유망주 소프라노이다. 그는 오페라보다 리트(Lied)에 뛰어났다. 1987년 휴고 볼프(Hugo Wolf)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그러한 배경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었다. 풍부한 성량과 뛰어난 작품 해석으로 찬사를 받고 있는 욀... 독일 쾰른에서 1963년 태어난 크리스티안네 욀체는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의 마스터 클라스에 참가했고 계속하여 에르나 베스텐버거(Erna Westenberger)에게서 지도를 받은 유망주 소프라노이다. 그는 오페라보다 리트(Lied)에 뛰어났다. 1987년 휴고 볼프(Hugo Wolf)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그러한 배경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었다. 풍부한 성량과 뛰어난 작품 해석으로 찬사를 받고 있는 욀체는 유럽, 미국, 남미, 일본등지에서 콘서트를 가져 세계적인 소프라노로서 명성을 떨쳤다. 1990-91년 시즌에 욀체는 오페라에 참여하여 뛰어난 무대 매너와 노래로서 관중들을 사로잡았다. 첫 출연은 오타와에서의 데스피나(여자는 다 그래)였고 이어 잘츠부르크와 취리히에서 콘스탄체(후궁에서의 도피), 라이프치히에서 예후디 메뉴힌(Yehudi Menuhin)의 지휘로 파미나를 맡았다. 그는 풍부한 성량과 아름다운 음성으로 앞날이 기대되는 최고의 디바이다.
성악가 (테너) 성악가 (테너)
노래 : Franz Hawlata (프란츠 하블라타)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노래 : Christoph Strehl (크리스토프 스트렐)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노래 : Christof Fischesser (크리스토프 피셰저)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노래 : Matthias Goerne (마티아스 괴르네)
성악가 (바리톤) 성악가 (바리톤)
노래 : Thomas Allen (토마스 알렌,Sir Thomas Boaz Allen)
성악가 (바리톤) 성악가 (바리톤)
연주 : Ronald Brautigam (로날트 브라우티함 )
피아노, 포르테피아노 연주자 피아노, 포르테피아노 연주자
연주 : Martha Argerich (마르타 아르헤리치)
1941년 6월 5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세 살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으며, 음악을 기억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빼어나 신동 소리를 들었다. 열한 살에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극장 테아트로 콜론에 데뷔했다. 1955년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해 프리드리히 굴다의 제자가 되었고, 1957년 부조니 콩쿠르와 제네바 콩쿠르에서 모두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1960... 1941년 6월 5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세 살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으며, 음악을 기억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빼어나 신동 소리를 들었다. 열한 살에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극장 테아트로 콜론에 데뷔했다. 1955년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해 프리드리히 굴다의 제자가 되었고, 1957년 부조니 콩쿠르와 제네바 콩쿠르에서 모두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1960년 연주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슬럼프를 겪던 아르헤리치는 1965년 제7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녀의 연주는 쇼팽 해석을 혁신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음반과 공연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가며 숱한 명반과 명연을 남겼다. 현란한 테크닉과 파워풀한 타건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그녀는 〈BBC 매거진〉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9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그녀는 독주 무대 대신 실내악 협연 위주로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다니엘 바렌보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등과 협연을 이어오고 있다. 또 루가노 페스티벌, 벳푸 아르헤리치 페스티벌 등을 조직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친구들’이라는 이름의 공연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그녀에게는 성姓이 다른 세 딸, 1964년 중국 출신 지휘자 첸량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리다 첸, 1970년 두 번째 남편이었던 지휘자 샤를 뒤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니 뒤투아, 1975년 연인이었던 피아니스트 스티븐 코바세비치와의 사이에서 낳은 스테파니 아르헤리치가 있다. 엄마로서 아르헤리치의 모습은 스테파니가 감독한 다큐멘터리영화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세 딸들Bloody daughter〉에 담겨 있다.

1992년 암(악성 흑색종)을 진단받은 그녀는 1997년 병이 재발했지만 회복해 완치되었다. 여든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연주 : Alfred Brendel (알프레드 브렌델)
알프레트 브렌델은 1931년 비젠베르크에서 태어나 6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자그레브와 그라츠음악원을 거쳐 에드윈 피셔에게 사사하였고 1948년(17세) 첫 리사이틀에서 호평을 받으며 데뷔했다. 다음 해인 1949년에 부조니상을 받은 이후부터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시작하여 빈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1963년에는 미국에서도 성공적으로 데뷔하였고 매년 남미, 오스트레일리아, 극동 등을 들... 알프레트 브렌델은 1931년 비젠베르크에서 태어나 6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자그레브와 그라츠음악원을 거쳐 에드윈 피셔에게 사사하였고 1948년(17세) 첫 리사이틀에서 호평을 받으며 데뷔했다. 다음 해인 1949년에 부조니상을 받은 이후부터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시작하여 빈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1963년에는 미국에서도 성공적으로 데뷔하였고 매년 남미, 오스트레일리아, 극동 등을 들러 연주 여행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뛰어난 기교와 아름다운 음색의 소유자로 슈베르트, 리스트, 쇤베르크, 베베른 등의 작품연주에서 탁월한 솜씨를 보이며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망한 연주 활동 사이에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런던과 빈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가르쳤다. 2008년에 피아니스트로서 은퇴한 후 현재는 런던에 살고 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일 뿐만 아니라 에세이와 시를 발표한 작가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한저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로는 『바로 나』(마르틴 마이어와의 대담, 2001), 『거울에 비친 상과 검은 유령』(2003), 『마지막 화음이 끝난 뒤』(질의와 응답, 2010)가 있다.
연주 : Krystian Zimerman (크리스티안 짐머만)
폴란드의 콘서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1975년에는 IX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Zimerman은 폴란드 자브제에서 태어나 카토비체에서 공부했다. 그의 국제적인 경력은 1975년 바르샤바 쇼팽 피아노 콩쿠르 에서 우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1976년 블롬슈테트가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연주했다. 그는 1979년 뉴욕 필하모닉과... 폴란드의 콘서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1975년에는 IX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Zimerman은 폴란드 자브제에서 태어나 카토비체에서 공부했다. 그의 국제적인 경력은 1975년 바르샤바 쇼팽 피아노 콩쿠르 에서 우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1976년 블롬슈테트가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연주했다. 그는 1979년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미국에서 데뷔했다. 그는 광범위하게 여행했으며 많은 녹음을 했다. 1996년부터 그는 스위스 바젤에 있는 음악 아카데미 에서 피아노를 가르쳤다. 1999년, 쇼팽의 서거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폴란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낭만주의 음악 에 대한 해석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다양한 클래식 작품을 연주했으며 현대 음악의 후원자이다. 루토스와프스키는 지메르만을 위해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녹음 중에는 레너드 번스타인과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쇼팽 의 피아노 협주곡,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 4, 5번, 라흐마니노프 의 첫 번째 및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 ; 오자와 세이지와의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피에르 불레즈와의 라벨 의 피아노 협주곡, 쇼팽, 리스트, 드뷔시, 슈베르트의 피아노 독주 작품 등이 있다.
클래식 바이올린 연주자 클래식 바이올린 연주자
1970년 후반 세계는 젊은 천재의 출현에 깜짝 놀랐다. 상큼한 미모의 소녀가 까다로운 황제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협연하여 악평으로 이름 높은 독일의 음악평론가들까지도 넉아웃시켰기 때문이었다. 카라얀은 그녀에 대해 단연코 세계 3대 여류 바이올리니스트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바 있다. 그녀는 베를린 필,빈 필,뉴욕 필 등 세계 3대 교향악단은 물론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들과 협연하였으며 카라... 1970년 후반 세계는 젊은 천재의 출현에 깜짝 놀랐다. 상큼한 미모의 소녀가 까다로운 황제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협연하여 악평으로 이름 높은 독일의 음악평론가들까지도 넉아웃시켰기 때문이었다. 카라얀은 그녀에 대해 단연코 세계 3대 여류 바이올리니스트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바 있다. 그녀는 베를린 필,빈 필,뉴욕 필 등 세계 3대 교향악단은 물론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들과 협연하였으며 카라얀,다니엘 바렌보임,클라우디오 아바도,주빈 메타,볼프강 자발리쉬 등 최정상의 지휘자들과 함께 공연하여 20대가 채 되기도 전에 전세계의 음악가가 우러러보는 명인의 반열에 올라버렸다. 바로 안네 소피 무터이다.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안네 소피 무터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 그리고 2008년 4월 24일 여성으로는 최초로 국제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수상했다. 20만 유로의 상금이 주어지는 지멘스 음악상은 음악가들이 가장 욕심내는 상 가운데 하나이다. 무터를 '세계를 위한 선물'이라 칭송한 음악비평가 요아힘 카이저(Joachim Kaiser)가 축사를 맡았다. 안네 소피 무터는 지휘자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 13세의 그녀를 발굴하면서부터 세계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44세의 안네-소피 무터는 그 이후로 30년이 넘게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고 있다. 심사위원들에 따르면 무터는 예술성과 자연스러움,뛰어난 기교와 감성을 하나로 어우를 수 있는 몇 안되는 음악인이라고 한다. 그녀의 연주의 특색은 따뜻하고 깊이있는 음색과 솔직한 감정표현을 열정적으로 연주하는데 있다. 무터는 언제나 열정과 충실한 작품해석 사이에서 예술적 기교를 발휘한다. 무터는 전통적인 대작들 외에도 관객들에게 언제나 새로운 작품들을 선보인다.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연주자 중에 그녀만큼 동시대음악에 열정을 쏟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평가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는 1963년 6월 29일 독일의 라인펠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5살 때에 피아노를 시작했으나 곧바로 바이올린으로 바꾸었다. 6살 때 Jugend Musiczier에서 처음으로 입상했고 칼 플레쉬(Carl Flesch,1873-1944)의 제자인 호니히베르거(Erna Honigberger)와 스위스의 Winterhur 음악학교 교수인 Aida Stucki로부터 사사받았다. 1976년에 있었던 루체른 페스티발(Lucerne Festival)에서 카라얀은 무터에게 깊은 음악적 애정을 갖게되었고,1977년 13세의 나이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발(Salzburg Easter Festival)에서 카라얀과 함께 데뷔공연을 가졌다. 그 다음해인 1978년에는 카라얀의 베를린필과 함께 그녀의 첫 레코딩을 했고 그 레코드는 Grand Prix Disque와 Deutsch Schallplatten Preis를 수상했다.

안네 소피 무터의 국제적 경력은 1977년 찰츠부르크 페스티발(Salzburg Whitsun Festival)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솔리스트 또는 챔버 뮤지션으로서 유럽,미국,카나다,일본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연주회를 가졌다. 그녀는 루토슬라브스키(Witold Lutoslawski,1913-1994),노르베르트 모레트(Norbert Moret,1921-1998),크시슈토프 펜데르츠키(Krzysztof Penderecki,1933- ),볼프강 림(Wolfgang Rihm,1952- )의 작품들을 주 레퍼토리로 연주하였고,많은 작곡가들은 특별히 그녀를 위한 곡들을 썼다. 뒤티외(Henri Dutilleux,1916- ),구바이둘리나(Sofia Gubaidulina,1931- ),그리고 전 남편 앙드레 프레빈(Andre Previn,1929) 등의 작곡가들은 특별히 무터를 위해 곡을 쓰기도 했다. 무터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많은 상을 받았다. 그리고 1985-1986년에는 런던에 있는 왕립음악학교는 그녀를 명예 회원(honorary fellow)으로 지명했다. 1979년에는 그해의 아티스트로 불려졌고 prestigious Deutscher Schallplattenpreis 를 받았다. 1983에는 옥스포드대학의 모짜르트협회의 명예회장이 되었고,1987년에는 독일공화국의 일등훈장을 받았다. 1996년에는 본에 있는 베토벤협회의 명회회원이 되었다.

카라얀 덕분에 그녀는 베를린 필과 베토벤,모짜르트,브라암스,멘델스존,브루흐 등의 협주곡을 출반하고 솔로앨범도 녹음하였는데,세계 최정상의 레이블인 도이치 그라모폰의 주요 베스트셀러들중의 하나로서 인기를 얻었다. 그 이면에는 20세기 들어 세계에 내놓을 만한 바이올리니스트를 갖지 못했던 독일 국민들의 소망- 독일인의 손으로 연주되는 베토벤을 위시한 독일 작곡가의 곡을 듣고 싶다는 소망 - 이 강도 높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그녀는 독일정부가 종신토록 대여해준 1703년 제작 에밀리아니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연주에 임하면 완전히 거기에 몰입하며 그 어떤 것도 들어갈 틈을 보여주지 않는 꽉찬 모습은 그녀의 놀랄만한 집중력을 보여준다. 그녀의 유연성과 순발력?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지켜나가며,음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표현해 내는 능력의 기초가 되어 완벽한 음악을 바라는 청중들의 기대를 만족시켜 준다.

무터는 세계적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에이즈 퇴치와 암으로 고생하는 어린이를 위한 자선 콘서트를 가졌다. 그녀는 현재 뮌헨에서 살고 있으며, 음악 후진 양성 외에도 자선연주회 등을 통해 사회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플루트 연주자, 지휘자 플루트 연주자, 지휘자
연주 : Rudolf Buchbinder (루돌프 부흐빈더)
1946년에 태어난 루돌프 부흐빈더는 불과 5살의 나이로 빈 음악원에 최연소로 입학했던 전형적인 신동연주자였다. 이후 실내악 분야에서 캐리어를 충실히 쌓았으며, 독주자로서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고정출연하였고, 베를린 필, 빈 필, 콘체르트헤보우 등의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등등 빈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쌓아왔다. 1946년에 태어난 루돌프 부흐빈더는 불과 5살의 나이로 빈 음악원에 최연소로 입학했던 전형적인 신동연주자였다. 이후 실내악 분야에서 캐리어를 충실히 쌓았으며, 독주자로서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고정출연하였고, 베를린 필, 빈 필, 콘체르트헤보우 등의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등등 빈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쌓아왔다.
연주 : Friedrich Gulda (프리드리히 굴다)
재즈/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재즈/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연주 : Sviatoslav Richter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연주 : Claudio Arrau (클라우디오 아라우)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칠레의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루돌프 제르킨과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3대 피아니스트로 일컬어진다. 유년시절 신동이라고 불렸을만큼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는 산티아고 음악원을 거쳐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으로 진학하였다. 그리고 1927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그가 즐겨 연주하는 것은 쇼팽, 베토벤, 리스트 등의 작품 연주...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칠레의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루돌프 제르킨과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3대 피아니스트로 일컬어진다. 유년시절 신동이라고 불렸을만큼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는 산티아고 음악원을 거쳐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으로 진학하였다. 그리고 1927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그가 즐겨 연주하는 것은 쇼팽, 베토벤, 리스트 등의 작품 연주인데, 현대 중남미의 음악 작품도 즐겨 소개했다. 특히 그의 리스트 연주는 우아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연주 : Maurizio Pollini (마우리치오 폴리니)
1942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열살 때 첫 콘서트를 열었다. 특히 1960년 18살의 어린 나이에 국제 쇼팽 콩쿨에서 우승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때 심사위원장이었던 A.루빈스타인이 폴리니를 가리켜 "기교상으로는 우리들보다 훨씬 낫다"라고 극찬할 만큼 현란한 기교를 과시하면서 그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바 있다. 그러나 폴리니는 그로부터 10년간을 연주일선에 나타나지 않고 침묵을 지... 1942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열살 때 첫 콘서트를 열었다. 특히 1960년 18살의 어린 나이에 국제 쇼팽 콩쿨에서 우승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때 심사위원장이었던 A.루빈스타인이 폴리니를 가리켜 "기교상으로는 우리들보다 훨씬 낫다"라고 극찬할 만큼 현란한 기교를 과시하면서 그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바 있다. 그러나 폴리니는 그로부터 10년간을 연주일선에 나타나지 않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내적인 성숙을 기다려 왔다. 그런 후 73년도부터 레코딩에 들어가 쇼팽을 필두로 녹음을 진행시켜 가면서 무르익은 피아니즘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중이다. 폴리니는 쇼팽 위주의 연주에서 벗어나 현대곡까지를 레퍼터리로 확보해가면서 폭넓은 비약을 꾀한다. 그러나 아루트르 루빈스타인이 타계한 지금, 폴리니야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쇼팽 연주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독일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자. 유럽과 남아메리카 등지를 순회공연하였으며 슈투트가르트음악원 원장을 지냈고 포츠담의 마르모어궁에서 하계 피아노 강좌를 맡았다. 독일 고전파음악 및 낭만파음악과 쇼팽의 음악연주로 유명했다. 독일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자. 유럽과 남아메리카 등지를 순회공연하였으며 슈투트가르트음악원 원장을 지냈고 포츠담의 마르모어궁에서 하계 피아노 강좌를 맡았다. 독일 고전파음악 및 낭만파음악과 쇼팽의 음악연주로 유명했다.
연주 : Daniel Barenboim (다니엘 바렌보임)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은 1942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50년 8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식적으로 데뷔 연주회를 가지며 신동 아티스트로 유명세를 떨쳤다. 1952년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이고르 마르케비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나디아 불랑제 등을 사사했다. 1965년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본격적인 지휘자로 데뷔했으며, 198...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은 1942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50년 8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식적으로 데뷔 연주회를 가지며 신동 아티스트로 유명세를 떨쳤다. 1952년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이고르 마르케비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나디아 불랑제 등을 사사했다. 1965년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본격적인 지휘자로 데뷔했으며, 1981년 이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파르지팔> 등을 지휘하며 대표적인 바그너 지휘자로 급부상했다. 1991년부터 15년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또한 1992년부터 도이치 슈타츠오퍼 베를린의 음악감독 겸 이 극장의 상주 악단인 슈타츠카펠레 베를린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창단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다. 현재 UN 평화대사로 활동 중이다.
발트 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 리가에서 태어났다. 조부이자 바이올린의 대가였던 카를 브뤼크너(1893-1963)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양부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일곱 살에 리가 음악 학교에 들어갔고, 열여덟 살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전설적 연주자인 다비트 오이스트라흐(1908-1974)를 사사하며 본격적으로 연주자의 길을 걷는다. 1967년, 브뤼셀에서 열린 퀸... 발트 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 리가에서 태어났다. 조부이자 바이올린의 대가였던 카를 브뤼크너(1893-1963)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양부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일곱 살에 리가 음악 학교에 들어갔고, 열여덟 살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전설적 연주자인 다비트 오이스트라흐(1908-1974)를 사사하며 본격적으로 연주자의 길을 걷는다. 1967년, 브뤼셀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3위로 입상했고, 1969년 몬트리올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2위에 올랐다가 마침내 같은 해 열린 파가니니 콩쿠르와 1970년 차이콥스 키 콩쿠르에서 우승 트로피를 차지한다. 1975년 독일 안스바흐의 바흐주간 페스티벌과 베를린 필하모니를 통해 데뷔 무대를 가졌고, 1980년에는 소련을 떠나 독일에 정착했다. 다음 해, 오스트리아 로켄하우스에서 실내악 페스티벌(후에 ‘크레메라타 무지카’로 명칭 변경)을 창설해 새롭고 독특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2011년까지 장장 30년 동안 예술감독을 지냈다. 1997년에는 발트 해 지역 젊은 연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인 크레메라타 발티카를 만들어 지금도 전 세계로 활발히 초청 공연을 다니고 있다. 2002년에는 이 실내악단과 함께 논서치에서 발매한 음반 〈애프터 모차르트After
Mozart〉로 그래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2016년 영국 음악전문지 〈BBC 뮤직 매거진〉이 백 명의 현역 바이올리니스트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자로 첫손에 꼽히기도 했으며, 현대 음악의 저변과 바이올린 음악 레퍼토리를 넓히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이 책을 비롯하여 《유년기의
파편Kindheitssplitter》 등 네 권의 음악 관련 서적을 썼다.
연주 : Rudolf Serkin (루돌프 제르킨)
피아노 연주자 피아노 연주자
연주 : Stephen Kovacevich (스티븐 코바세비치)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뉴욕타임즈가 “클래식계에서 가장 뛰어난 아티스트”로 찬사를 받고 있는 랑랑은 파워풀하고 화려한 연주로 세계 청중을 사로잡고 있다. 1982년 중국 선양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섯 살 때에는 선양 피아노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첫 독주회를 가졌다. 또 열세 살 때에는 차이코프스키 영 뮤지션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다. 랑랑은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그리고 미국... 뉴욕타임즈가 “클래식계에서 가장 뛰어난 아티스트”로 찬사를 받고 있는 랑랑은 파워풀하고 화려한 연주로 세계 청중을 사로잡고 있다. 1982년 중국 선양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섯 살 때에는 선양 피아노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첫 독주회를 가졌다. 또 열세 살 때에는 차이코프스키 영 뮤지션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다.

랑랑은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그리고 미국의 빅 파이브라 불리는 모든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최초의 중국 피아니스트이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클래식 음악가로는 이례적으로 연주를 해 스타 파워를 증명했다. 그리고 2008년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지휘로 한국에서 라 스칼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도 하였다.

한편 랑랑은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잊지 않고,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아프리카의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는 많은 어린이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보냈으며, 2008년 중국 쓰촨성에 지진이 났을 때에는 자신의 피아노를 경매에 붙여 피해자들을 돕기도 했다. 현재 랑랑은 자신의 힘든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랑랑 국제 음악 재단’을 설립하여, 재능은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음악 할 기회가 주어지지 못한 세계의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피아노 연주자 피아노 연주자
연주 : Vladimir Ashkenazy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피아니스트, 지휘자 피아니스트, 지휘자
연주 : Murray Perahia (머레이 페라이어)
피아니스트, 지휘자 피아니스트, 지휘자
프랑스의 클래식 피아니스트이자 뉴욕 사우스 세일럼에있는 Wolf Conservation Center의 설립자. 엘렌 그리모는 고향인 액상 프로방스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고 마르세이유 음악원에서 삐에르 발비제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12살에 파리 콩세르바트와 국립 음악원에서는 자끄 뤼비에르, 레온 플라이셔, 죄르지 산도르에게 사사했다. 1987년은 그녀의 음악 생활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엘렌은 ... 프랑스의 클래식 피아니스트이자 뉴욕 사우스 세일럼에있는 Wolf Conservation Center의 설립자.

엘렌 그리모는 고향인 액상 프로방스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고 마르세이유 음악원에서 삐에르 발비제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12살에 파리 콩세르바트와 국립 음악원에서는 자끄 뤼비에르, 레온 플라이셔, 죄르지 산도르에게 사사했다.

1987년은 그녀의 음악 생활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엘렌은 깐느 미뎀 (MIDEM : 국제 음반 박람회)클래식상을 수상했고 , 그 연주의 라이브 방송을 들은 다니엘 바렌보임은 즉시 그녀에게 오디션을 제의했다. 이후 파리 오케스트라의 협연 초청과 라로끄 당떼롱 피아노 페스티벌에서의 초연을 포함한 높은 수준의 공연 요청이 이어졌고, 도쿄에서도 연주 데뷔를 하게 되었다. 이후 엘렌 그리모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NHK 심포니, 그리고 뮌헨 필하모닉 등 손꼽히는 오케스트라와 연주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동부에서 서부에 이르기까지 뉴욕 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워싱턴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했다.

음악 생활 초기부터 그리모는 샤이, 게르기에프, 하이팅크, 아쉬케나지, 살로넨, 테미르카노프, 진만 등 수준 높은 지휘자와 함께 했다. 2008년 10월 BBC 프롬스의 마지막 날 연주에서 그녀는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에서 함께 투어 했던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가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다니엘 하딩이 지휘하는 말러 체임버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연주했고, 필립 조단이 지휘하는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와 연주했다. 2009년 봄에 그녀는 바흐의 피아노 콘체르토 D 단조와 실베스트로프의 소품으로 바이에른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유럽 투어를 했다. 열정적인 실내악 음악가이자 독주 연주자로서 엘렌은 토마스 크바스토프와 외르크 비트만, 크리스틴 쉐퍼, 르노 카푸숑 등과 함께 일류의 음악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음악의 중심지에서 연주하게 된다.

2002년 엘렌 그리모는 독일 그라모폰 레이블과 독점적인 음반 계약을 맺고, 바흐 음악과 솔로작품들, 라이브 녹음음반, 그리고 D 마이너 콘체르토를 발매했고, 브레멘 도이치 캄머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키보드 작업을 디렉팅했다. DGG 이전의 음반으로는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가 지휘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와 협연한 베토벤 피아노 콘체르토 5번이 있었다. 이후 DGG에서 발매한 음반으로 요하네스 브람스와 로베르토, 클라라 슈만의 작품을 연주한 '리플렉션' 음반과 베토벤과 페르트의 작품을 에사 페카 살로넨이 지휘하는 스웨덴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한 '크레도' 와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독주 음반, 피에르 볼레즈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함께 녹음한 바르토크의 피아노 콘체르토 3번 등이 있다. 15세부터 음반을 발매한 연주자로서 그녀의 초기 작업들로는 리스트, 라벨, 라흐마니노프, 슈트라우스, 거쉬인 등이 있다.

세계적으로 무수한 수상 경력도 있는 엘렌 그리모는 고향인 프랑스에서도 높이 평가 되었다. 2002년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수여하는 예술문학훈장을 수상했고, 2008년에는 국가공로훈장 기사장을 수여했다. 2005년에는 에코 음악상의 ‘올해의 연주자’부문을 수상했다. 그리모는 '야생의 변주' 와 '특별 수업' 두 권의 책을 써서 로베르 라퐁에서 출판했다. '야생의 변주' 는 영어를 비롯해 각국으로 변역 출간되었다. 두 책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했고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지속적으로 늑대 보호운동을 해오던 엘렌 그리모는 1999년 늑대 보호센터를 설립하기도 했다.
연주 : Nelson Freire (넬슨 프레이레)
클래식 피아니스트 클래식 피아니스트
연주 : Evgeny Kissin (예프게니 키신 )
1971년 10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항공 우주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여섯 살의 나이에 모스크바 그네신 음악원 영재 학교에 입학하여 안나 파블로브나 칸토르에게 배웠으며 그녀는 그의 평생 유일한 스승으로 남아 있다. 1984년 열두 살의 나이에 드미트리 키타옌코의 지휘로 모스크바 음악원 대극장에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했으며 이 유명한 콘서트는 그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하고... 1971년 10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항공 우주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여섯 살의 나이에 모스크바 그네신 음악원 영재 학교에 입학하여 안나 파블로브나 칸토르에게 배웠으며 그녀는 그의 평생 유일한 스승으로 남아 있다. 1984년 열두 살의 나이에 드미트리 키타옌코의 지휘로 모스크바 음악원 대극장에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했으며 이 유명한 콘서트는 그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하고 인상적인 연주회로 기억된다. 그는 그날 저녁까지 사실상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고 다음날 아침 그는 이후 시작되는 전설의 주인공이 된다. 1985년 동유럽 무대 데뷔 후 1987년 베를린 페스티벌을 통해 서유럽 무대에 데뷔했고, 1988년 12월 신년 음악회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한 연주가 전 세계에 방영되면서 많은 이들의 기억에 각인된다. 1990년 런던의 BBC 프롬스 콘서트에 처음으로 출연했으며, 같은 해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하면서 북미 에 데뷔했다. 1997년 그는 러시아 공화국에서 수여하는 가장 높은 문화 훈장인 트리움프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BBC 프롬스 역사상 최초로 피아노 독주회를 가졌다. 1991년 러시아 시민 혁명 직후 뉴욕으로 이주했으며 2002년 영국 국적을, 2013년에는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했다. 자신도 신동으로 경력을 시작했던 피아니스트 레오폴트 고도프스키의 ‘놀라움이 사라지고 나면 어린 아이만 남을 뿐’이라는 경구를 무시하기라도 하듯 신동을 뛰어넘어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피아니스트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연주 : Alicia de Larrocha (알리시아 데 라로차)
클래식 피아니스트 클래식 피아니스트
연주 : Mikhail Pletnev (미하일 플레트네프)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지휘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지휘자.
연주 : Clifford Curzon (클리포드 커즌 )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연주 : Augustin Dumay (오귀스탱 뒤메이 )
바이올린 연주자 바이올린 연주자
연주 : Maria Joao Pires (마리아 주앙 피레스)
4세에 공개무대에서 연주하고 5세에 첫 리사이틀, 7세에 모차르트의 협주곡연주, 9세에 포르투갈의 ‘젊은 음악상’에 1등을 하는 등 일찍부터 천재성을 주목받았다. 1961년 17세 때 구르벤키안 재단의 장학금으로 뮌헨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엥겔과 슈미트를 사사하면서 그 재능을 본격적으로 꽃피웠다. 70년 브뤼셀에서 열린 베토벤 탄생 200주년 기념 콩쿠르의 우승을 계기로 국제 무대로의 길이 열렸다. 단정한 스타일,... 4세에 공개무대에서 연주하고 5세에 첫 리사이틀, 7세에 모차르트의 협주곡연주, 9세에 포르투갈의 ‘젊은 음악상’에 1등을 하는 등 일찍부터 천재성을 주목받았다. 1961년 17세 때 구르벤키안 재단의 장학금으로 뮌헨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엥겔과 슈미트를 사사하면서 그 재능을 본격적으로 꽃피웠다. 70년 브뤼셀에서 열린 베토벤 탄생 200주년 기념 콩쿠르의 우승을 계기로 국제 무대로의 길이 열렸다. 단정한 스타일, 명쾌한 터치에서 오는 투명한 울림, 치밀하고 청결한 감각 등은 특히 모차르트에서 십분 발휘되며, 일본 컬럼비아의 『모차르트/피아노 소나타 전집』 은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1960년 베를린 음악 콩쿠르 제2위
리스트 콘체르트상 제1위
1970년 베토벤 탄생 200주년 기념 콩쿠르 제1위
바이올리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연주 : Pierre Fournier (피에르 푸르니에)
첼리스트 첼리스트
연주 : Victoria Mullova (빅토리아 뮬로바 )
바이올린 연주자 바이올린 연주자
첼로 연주자 첼로 연주자
연주 : Mstislav Rostropovich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소련 아제르바이잔에서 태어난 러시아인 첼로 연주자이자 지휘자 소련 아제르바이잔에서 태어난 러시아인 첼로 연주자이자 지휘자
연주 : Christoph Eschenbach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독일의 피아노 주자이기도 하다.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령 브로츨라프)에서 태어났다. 출생 시에 모친을, 4세 때 음악가였던 부친도 잃게 되어 1946년 에센바흐 집안의 양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피아니스트였던 양모에게 음악의 초보를 배웠는데, 10세 때에 지휘자인 요훔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그의 권유로. 함부르크에서 명교사 엘리자 한젠 여사를 사사하였다. 일찍이 13세로 스타인웨이 콩쿠르에 입상하였다. 그리고 ... 독일의 피아노 주자이기도 하다.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령 브로츨라프)에서 태어났다. 출생 시에 모친을, 4세 때 음악가였던 부친도 잃게 되어 1946년 에센바흐 집안의 양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피아니스트였던 양모에게 음악의 초보를 배웠는데, 10세 때에 지휘자인 요훔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그의 권유로. 함부르크에서 명교사 엘리자 한젠 여사를 사사하였다. 일찍이 13세로 스타인웨이 콩쿠르에 입상하였다. 그리고 16세 때 아헨에 옳기고, 쾰른 음악원에서 H.슈미트 - 노이하우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졸업하던 해 1959년에 독일음악학교연맹 주최의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그 후 다시 함 부르크에서 한젠 여사를 사사하였고 동시에 바이올린과 지휘법을 배우고 21세 때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1962년에는 뮌헨 국제 콩쿠르에서 제1위 없는 제2위로 입상하고, 유럽 각지에 연주 여행을 하였다. 그리고 1965년의 제2회 클라라 하스킬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더욱 이목을 집중시켰다. 1967년에는 미국에도 데뷔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래 전후의 독일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서 활약하였고, 1973년 지휘자로서도 데뷔하여 각지의 오케스트라에 초청되었다.

1980년부터는 취리히 톤할레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고 있다.

에셴바흐는 반드시 기교파의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항상 작품에 대해 성실하고 예민하게 파고 들어가는 그 연주에서 청신한 감각이 상쾌하며, 로맨틱한 정감이 넘쳐 흐르고 있다. 데뷔 레코드인 슈만의 [어린이 정경](그라모폰) 외에 1960년대 후반에 녹음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집](그라모폰)은, 그러한 그의 작품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젊디젊은 서정이 표현된 아름다운 연주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의 에셴바흐는 그 성실한 음악성에다 깊이 작품의 내면에 파고드는 예민함으로 적극적인 표현을 가미하여, 더욱 정신적인 엄격함과 깊이를 더하고 있다. 그러한 이 시기의 그의 변화를 가장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베토벤의 [하머클라비어](그라모폰)이었다. 여기서 그는 놀랄 만한 집중력으로써 이 대작을 일순의 이완도 없이 연주하고 있으며 더욱이 내성적인 아름다운 정열과 노래가 넘치고 있다. 또 쇼팽의 [전주곡집](그라모폰)도 깊은 내면적인 노래와 서정을 음영도 아름답게 노래한 독특한 표현이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다.

피아노 협주곡에서는 카라얀과 협연한 베토벤의 [제1번], 헨체와 협연한 베토벤 [제3번], 오자와와 협연한 베토벤 [제5번(황제)](이상 그라모폰)의 3가지에서 각각 그의 개성이 훌륭히 발휘되어 있다. 최근 지휘와 솔로를 겸하고 녹음을 시작한 모차르트(에인절)에서는 이제까지 이상으로 섬세하게 닦여진 표현을 들려주고 있다.

그 밖에 실내악이나 리트 반주에도 뛰어난 연주가 많고, 피셔-디스카우와 협연한 [슈만 가곡 전집] 전 3권(그라모폰)에서 로맨틱한 정열을 간직한 예민하고 유연한 표현으로 그의 자질이 훌륭하게 발휘되고 있다.
연주 : Jorg Demus (외르크 데무스)
피아노 연주자 피아노 연주자
연주 : Walter Olbertz (발터 올베르츠)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연주 : Tobias Koch (토비아스 코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지휘 : Leonard Bernstein (레너드 번스타인)
레너드 번스타인은 1918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 출신이며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다. 어린시절부터 피아노 연주하기를 좋아했으며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다. 하버드대학교에 진학하여 작곡을 전공했고, 1937년 모더니즘 음악의 대가였던 디미트리 미트로폴로스(Dimitri Mitropolous)를 만나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하버드의 미학교수였던 데이비드 프롤(David Pral... 레너드 번스타인은 1918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 출신이며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다. 어린시절부터 피아노 연주하기를 좋아했으며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다. 하버드대학교에 진학하여 작곡을 전공했고, 1937년 모더니즘 음악의 대가였던 디미트리 미트로폴로스(Dimitri Mitropolous)를 만나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하버드의 미학교수였던 데이비드 프롤(David Prall)로 부터 예술을 이해하고 음악을 표현하는데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39년 그의 졸업논문은 '인종적 요소가 미국 음악에 끼친 영향'이라는 주제로 썼다.

졸업 후에는 F.라이너, S.쿠세비츠키에게 지휘법을, 톰프슨에게 관현악법을 배웠다. 1943년 뉴욕필하모니 음악감독이었던 아서 로진스키(Arthur rodzinski)의 인정을 받아 뉴욕필하모닉의 보조지휘자가 되었다. 그해 11월 14일 뉴욕필하모니의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급환으로 지휘를 못하게 되자, 그의 대신 뉴욕필하모니의 지휘를 맡았고 CBS방송을 통해 전국에 중계되었다. 번스타인은 이 한번의 기회로 유명세를 탔고 이름을 떨치게되었다. 1944년 피츠버그 교향악단을 지휘하였고 자신의 첫 교향곡 《예레미야 심포니 Jeremiah Symphony》을 연주했다.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2차세계대전은 러시아로 확전되었고 히틀러가 저지런 대량학살 소식이 미국 전해졌다. 부모가 러시아 출신인 번스타인은 러시아 난민을 돕자는 자선행사에 자주 초대되어 나갔으며 카네기홀 등에서 자선 연주회를 열었다. 번스타인은 음악뿐만아니라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진보당 창당에 관여하였고 진보적 단체의 단결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그는 FBI의 조사를 받았으며 그의 정치적 성향은 공산주의로 분류되었다. 그는 CBS 방송국 출입이 금지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그의 음악과 공연은 취소되었다. 번스타인은 정치적인 성향 때문에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마침내 미국의 유력지인 라이프 지에 50명의 대표적인 좌파 블랙리스트로 번스타인이 소개되었고 뉴욕필하모니 지위자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1953년 7월 미국 국무부는 번스타인의 여권 갱신을 거부하였고 항상 FBI의 감시를 받으며 고립되었다가 자신의 활동과 신념을 부정하는 진술서에 서명하고 나서야 여권을 받아 유럽으로 갈 수 있었다. 그해 8월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연주활동을 하였는데 음악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표면적으로 보수적 성향의 미국인임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 결과 컬럼비아 영화사의 승인을 얻어내 《워터프론트 Waterfront》(1954)라는 영화음악 제작을 맡을 수 있었다. 그후 포드 자동차의 의뢰를 받아 연주회를 열었고 CBS를 통해 방송되었다. 번스타인은 다시 뉴욕 필하모니로 복귀하게 되었으며 미국에서 지휘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57년 뉴욕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이듬해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였고 그가 연주하는 음악회는 최대의 흥행을 보증하게 되었다. 번스타인은 뮤지컬《웨스트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1957)의 음악을 담당하면서 가장 미국적인 뮤지컬의 창작하였다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진보적인 성향이 보수로 전향한 것은 아니었으며 미국내 민권투쟁과 인종차별 등 사회적인 문제에 적극 참여하였다. 1964년 번스타인은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민권운동에 가담하여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와 함께 앨라바마에서 열린 셀마 대행진에 참가하였다. 번스타인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닉슨 행정부가 일으킨 베트남 전쟁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종전을 주장하였고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시기에 자신의 사회사상을 표현한 교향곡《카디시 Kaddish》(1963)와《치체스터 시편 Chichester Psalms》(1965)을 발표하였다. 미국의 보수파인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자 미국내 진보세력의 몰락을 우려하였고 보수파가 추진하는 핵무기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과 다르게 변모하는 미국사회의 모습으로 번스타인은 상실감으로 실의에 빠져들었다. 20세기 미국을 표현하는 오페라를 구상하였으나 끝내 작곡을 완성하지 못했다. 1985년 세계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영국, 일본, 그리스, 헝가리 등지에서 연주했으며 이후에는 주로 유럽을 무대로 연주활동을 했다. 1990년 10월 14일 사망했다.
지휘 : Herbert von Karajan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 Claudio Abbado (클라우디오 아바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음악원에서 지휘, 피아노, 작곡을 배웠다. 이 음악원을 졸업한 다음 빈에서 한스 스바로프스키에게 지휘를 배웠다. 1958년에 미국의 탱글우드에서 쿠세비츠키 상(賞)을 받았다. 1960년에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열린 갤러콘서트에서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 데뷔했다. 1963년에 뉴욕에서 열린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지휘자 콩쿠르에서 ...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음악원에서 지휘, 피아노, 작곡을 배웠다. 이 음악원을 졸업한 다음 빈에서 한스 스바로프스키에게 지휘를 배웠다. 1958년에 미국의 탱글우드에서 쿠세비츠키 상(賞)을 받았다. 1960년에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열린 갤러콘서트에서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 데뷔했다. 1963년에 뉴욕에서 열린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65년 8월 14일에, 빈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데뷔했다. 그 때의 작품은 말러의 [교향곡 제2번]이었다. 1967년에 처음으로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시즌 최초의 공연을 지휘했다. 작품은 벨레니의 오페라 [카풀레티와 몬테키]였고, 1968년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랴의 이발사]를 지휘했다. 그 해에 스칼라 극장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70년에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를 스칼라 극장에서 지휘하였다. 이 작품은 그 뒤에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도 지휘하였다. 1971년에 빈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로 지명되었다. 뮌헨 음악제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베르디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하였다. 1972년에 베를린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첫날을 지휘하였다. 이해에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올림픽 기간 동안 뮌헨에서 스칼라 극장의 오케스트라와 코러스를 지휘하여 베르디의 [레퀴엠]과 오페라 [아이다]를 연주한 것도 1972년의 일이다. 1973년에 빈의 모차르트 협회에서 모차르트 메달을 그에게 주었다. 이해에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및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 함께 미국을 연주 여행하였고, 빈 필하모니와 함께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도 연주 여행하였다. 이때가 아바도의 첫 한국 방문이었다. 더욱이 이 해에는 런던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74년에는 아바도로서는 최초의 모차르트의 오페라인 [피가로의 결혼]을 스칼라 극장에서 지휘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바도는 착착 그 활동의 무대를 넓혀 온 셈인데 그 활동 무대 확대 방식은 용의주도하였다. 이것은 레퍼토리의 선택 방식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제까지(1981년 봄) 아바도는 이탈리아의 지휘자이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메카로 이름난 스칼라 극장의 음악 감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푸치니에 의해 대표되는 베르디 이후의, 일반적으로 베리스모 오페라라고 불리는 오페라를 조심성 있게 피해 왔다. 한편으로 프로코피예프나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표시하고, 더욱 루이지 노노의 신작 초연을 종종 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아바도의, 굳이 말한다면 지성파(知性派)라고 할 수도 있는 지휘자로서의 본연의 자세가 떠오를 것이 틀림없다. 사실 아바도의 연주는 열기에 가득 찼다든가 또는 정열적이라든가 하는 형용이 걸맞지 않으며, 오히려 지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하겠다. 그의 연주는 언제나 명쾌하고, 조금의 애매모호함도 없으며, 그 작품의 양식적인 아름다움을 뚜렷이 떠오르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휘자로서는 아직도 젊다고 할 수 있는 아바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마 그 정교하고 치밀함을 잃지 않으면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풍부한 표현일 것이다. 이제까지의 아바도는 문자 그대로의 수재 코스를 걸어 왔고 충분한 성과를 올렸다. 1989년 정식 상임 지휘자가 없는 빈 필하모니의 준상임 지휘자로 있었으며, 1989년 카라얀의 사망으로 그의 휘하였던 베를린 필의 제5대 음악 감독으로 취임해 세계적인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국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다. 리버풀에서 태어나 왕립음악원(RAM)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본머스 관현악단과 왕립 리버풀 필하모니 관현악단 부지휘자를 거쳐, 1980년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래틀은 버밍엄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을 영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로 발전시켰다. 특히 현대 음악과 ... 영국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다.

리버풀에서 태어나 왕립음악원(RAM)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본머스 관현악단과 왕립 리버풀 필하모니 관현악단 부지휘자를 거쳐, 1980년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래틀은 버밍엄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을 영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로 발전시켰다. 특히 현대 음악과 말러의 교향곡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눈길을 끌었다.

2002년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후임으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수석지휘자 임기를 시작하였으며, 2010년 투표를 통해 임기가 2018년까지 연장되었다. 현재 베를린 필 에서의 성공적인 임기를 마치고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로 활동 중이다. 2023년부터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임기를 마치고, 그 직후 5년간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로 부임할 예정이다.
지휘 : Seiji Ozawa (세이지 오자와)
지휘 : John Eliot Gardiner (존 엘리엇 가디너)
존 엘리엇 가디너는 바로크 음악뿐 아니라 모든 레퍼토리를 아우르는 세계적인 지휘자 중 한 명이다. 몬테베르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리용 오페라 오케스트라,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 그리고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세계 주요 오케스트라 대부분을 지휘했으며 주요 오페라 극장에도 여러 차례 초대받았다. 현재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짓는 영국 도시 농장에서 살고 있다. 존 엘리엇 가디너는 바로크 음악뿐 아니라 모든 레퍼토리를 아우르는 세계적인 지휘자 중 한 명이다. 몬테베르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리용 오페라 오케스트라,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 그리고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세계 주요 오케스트라 대부분을 지휘했으며 주요 오페라 극장에도 여러 차례 초대받았다. 현재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짓는 영국 도시 농장에서 살고 있다.
지휘 : Andre Previn (앙드레 프레빈)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으로 귀화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으로 귀화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밀라노 음악원에서 프랑코 카리치오로를 사사하여 작곡의 디플로마를 얻은 다음, 페루자에서 피에로 과리아노, 시에나의 키지 음악원에서 프랑코 페라라와 같은 명교사를 사사했다. 1968년, 15세 때 클라우디오 시모네에게 인정을 받아 파도바에서 이 솔리스티 베네티를 지휘하여 데뷔했고, 2년 뒤에는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추천으로 밀라노 스칼라 극장의 부지휘자로 발탁되었다. ... 리카르도 샤이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밀라노 음악원에서 프랑코 카리치오로를 사사하여 작곡의 디플로마를 얻은 다음, 페루자에서 피에로 과리아노, 시에나의 키지 음악원에서 프랑코 페라라와 같은 명교사를 사사했다. 1968년, 15세 때 클라우디오 시모네에게 인정을 받아 파도바에서 이 솔리스티 베네티를 지휘하여 데뷔했고, 2년 뒤에는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추천으로 밀라노 스칼라 극장의 부지휘자로 발탁되었다. 1972년 키지 음악원을 졸업한 샤이는 밀라노의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마스네의 [베르테르]를 공연하여 오페라 지휘자로 데뷔했다.

1974년에는 미국으로 진출, 시카코 리릭 오페라에서 [나비 부인]을 지휘했고, 1977년 시즌에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오프닝에서 [투란도트]를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베르디의 [군도]를 지휘, 국제적인 주목을 끌게 된다. 더욱이 1982년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데뷔했다. 그는 이미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 함부르크의 슈타츠오퍼에서도 호평을 받았고, 오페라 지휘자로서는 제일 젊으면서도 높은 인기를 누리는 주인공이 되었다. 다만 콘서트의 지휘 방면에는 아직도 충분한 캐리어를 쌓았다고 할 수 없지만 런던 교향악단이나 베를린 필하모니아, 뮌헨 필하모니, 로열 필하모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를 지휘, 차곡차곡 캐리어를 쌓고 있다. 1982년 시즌부터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에 취임하였다.

1986년에는 볼로냐 시립 오페라 극장 음악 감독으로도 취임했고, 콘서트와 오페라의 양쪽으로 자기의 본거지를 가질 수 있게 된 샤이는 점점 활약을 넓히고 있다. 또한 1988년부터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 수석 지휘자도 겸하게 되었다. 그 동안 1984년에는 로열 필하모니와 함께 한국에 와서 세종문화회관에서 지휘했다.

샤이는 위와 같은 경력에 비추어 보더라도 연령적으로는 아직도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수적으로는 적지만 시중에 팔리고 있는 레코드를 듣게 되면 소위 네거티브적인 의미의 젊음은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마스네의 [베르테르](그라모폰)에서는 도밍고, 오브라스초바와 같은 베테랑 가수를 구사하여 실로 전체를 멀리 내다보는 안정된 음악을 이끌어 낸 솜씨는 실로 경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멘델스존의 [교항곡 제2번(찬가)][교향곡 제3번(스코틀랜드)](필립스)에서도 다분히 젊음을 느낄 수가 있지만, 스케일의 크기를 본다면 도저히 20대의 젊은이의 음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특히 [찬가]의 경우 코러스의 컨트롤, 오케스트라와 솔로의 퍼스펙티브 등은 숙달된 기량이라고 표현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많다고 본다. 역시 샤이가 오페라의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익혔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이만큼 흥미롭게 곡을 들려 줄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라 하겠다. 샤이는 21세기의 1장이란 라이센스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인재라고 하겠다.
지휘 : Andris Nelsons (안드리스 넬슨스)
지휘 : Hans Schmidt-Isserstedt (한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
지휘 : Carlos Kleiber (카를로스 클라이버)
오스트리아의 법학자 출신 지휘자 오스트리아의 법학자 출신 지휘자
지휘 : Gabriel Chmura (가브리엘 슈무라)
지휘 : Kurt Masur (쿠르트 마주어)
지휘 : Riccardo Muti (리카르도 무티)
지휘 : 정명훈 (Myung-Whun Chung)
지휘 : Christian Thielemann (크리스티안 틸레만)
지휘 : Horst Stein (호르스트 슈타인)
독일의 지휘자 독일의 지휘자
지휘 : Colin Davis (콜린 데이비스)
영국의 지휘자이다. 왕립음악대학(RCM)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한 이후 지휘자의 길을 걸어 로열 오페라 코번트 가든, BBC 교향악단,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런던 교향악단 등의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특히 런던 교향악단에서의 활동으로 유명하다. 모차르트, 베를리오즈, 엘가, 시벨리우스, 스트라빈스키 등의 음악을 주요 레퍼토리로 하였으며, 헨델 등 바로크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왕립... 영국의 지휘자이다.

왕립음악대학(RCM)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한 이후 지휘자의 길을 걸어 로열 오페라 코번트 가든, BBC 교향악단,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런던 교향악단 등의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특히 런던 교향악단에서의 활동으로 유명하다.

모차르트, 베를리오즈, 엘가, 시벨리우스, 스트라빈스키 등의 음악을 주요 레퍼토리로 하였으며, 헨델 등 바로크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왕립음악원(RAM)의 교수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2002년 록 음악가 엘튼 존과 함께 명예 음악박사학위(hon DMus, honorary Doctorate of the University of London)를 받았다.
지휘 : Ferdinand Leitner (페르디난트 라이트너)
지휘 : Bernhard Klee (베른하르트 클레)
지휘 : Michael Tilson Thomas (마이클 틸슨 토마스)
오케스트라 : Berliner Philharmoniker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BPO)
오케스트라 : Wiener Philharmoniker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VPO),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Norrkoping Symphony Orchestra (노르셰핑 심포니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Mito Chamber Orchestra (미토 실내 관현악단)
오케스트라 : Orchestra della Svizzera Italiana (스비쩨라 이탈리아나 오케스트라 (스위스 이탈리안 오케스트라),OSI)
오케스트라 : New York Philharmonic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Philharmonic-Symphony Society of New York, w York Philharmonic Orchestra, New York Philharmonic-Symphony Orchestra / Philharmonic Symphony Orchestra o)
오케스트라 : Athens Philharmonia Orchestra (아테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Wiener Symphoniker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Vienna Symphony Orchestra)
오케스트라 : Staatskapelle Dresden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Sachsische Staatskapelle Dresden)
독일 동부의 드레스덴을 본거지로 하는 악단으로, 정식 명칭은 드레스덴 작센 국립 관현악단(Sachsische Staatskapelle Dresden)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관현악단 중 하나로 유명하다. 1548년 9월 22일에 설립된 작센 선제후 모리츠의 궁정 악단이 시초이며, 초대 악장(Kapellmeister)으로 요한 발터가 임명되었다. 발터 이후에는 르 메스트르, 스칸델로, 피넬리, 미하엘 등이... 독일 동부의 드레스덴을 본거지로 하는 악단으로, 정식 명칭은 드레스덴 작센 국립 관현악단(Sachsische Staatskapelle Dresden)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관현악단 중 하나로 유명하다.

1548년 9월 22일에 설립된 작센 선제후 모리츠의 궁정 악단이 시초이며, 초대 악장(Kapellmeister)으로 요한 발터가 임명되었다. 발터 이후에는 르 메스트르, 스칸델로, 피넬리, 미하엘 등이 카펠마이스터 직위를 계승했으며, 하인리히 쉬츠는 최초로 궁정악장(Hofkapellmeister)을 역임했다. 18세기를 거치면서 편성도 확대되었고, 종교 의식이나 궁정극장에서 상연되던 오페라 등 무대 작품 공연에도 동원되었다.

베버와 바그너도 궁정악장을 역임했으며, 1841년에는 고트프리트 젬퍼의 설계로 건립된 작센 국립오페라극장(통칭 젬퍼오퍼)의 상주 악단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율리우스 리츠나 프란츠 뷜너, 에른스트 폰 슈흐 등 근대 지휘법의 기초를 닦은 명사들이 활동했다. 슈흐의 후임으로는 프리츠 라이너와 프리츠 부슈, 칼 뵘 등이 활동했으며, 제3제국 시대에도 제국 관현악단의 일원으로 존속했다. 그러나 1944년에 괴벨스의 총동원령에 의해 활동이 정지되었으며, 1945년 미국과 영국 공군의 드레스덴 대공습으로 인해 상주 공연장이었던 국립오페라극장이 전소되었다.

종전 후 요제프 카일베르트를 카펠마이스터로 맞아들여 활동을 재개했으며, 이어 루돌프 켐페와 프란츠 콘비츠니, 로브로 폰 마타치치 등이 직위를 이어받았다. 1985년에 젬퍼오퍼의 복구 공사가 완료되자 상주 악단으로 다시 들어갔으며, 오페라 공연 때는 드레스덴 국립오페라극장 관현악단이라는 명칭으로 출연하고 있다. 2012년부터는 독일 출신의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카펠마이스터로 부임해 현재까지 재직 중이다.

역사가 굉장히 오래된 악단인 만큼, 독일 음악사에 끼친 영향도 대단히 크다. 초기에는 주로 이탈리아 출신 음악가들을 악장으로 초빙해 독일에 이탈리아 음악을 유입시키는 역할을 자주 수행했고, 19세기 초반에는 베버와 바그너에 의해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가 기틀을 닦는 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자신의 오페라와 교향시를 직접 지휘해 자주 공연했으며, 뵘과 켐페, 콘비츠니는 오페라 외에 콘서트 활동에 주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녹음 활동도 1930년대부터 활발하게 진행했으며, 전후 도이체 그라모폰과 EMI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관현악 작품을 중심으로 여러 장의 음반들을 발매했다. 냉전 시대에는 동독 국영 음반사인 도이체 샬플라텐에서 대부분의 녹음을 제작했으며, 특히 블롬슈테트가 남긴 베토벤 교향곡 전집과 브루크너 교향곡들이 유명하다. 시노폴리도 도이체 그라모폰에 로베르트 슈만과 브루크너, 슈트라우스 작품 등을 취입했으며, 루이시도 소니 클래시컬에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를 녹음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명훈이 일본 바이올리니스트 가시모토 다이신과 소니 클래시컬에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보수적인 악단이라 현대 작품의 공연은 많지 않지만, 독일 음악의 연주에 있어서는 가장 정통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는 사회주의 체제 때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지금도 어느 지휘자와 상관 없이 고풍스러운 음향을 유지하고 있다. 주로 중부독일 방송국(MDR)에서 연주회와 오페라 공연을 중계하고 있으며, 단원들의 실내악 연주회와 프라우엔 교회에서 진행하는 종교음악 연주회도 개최하고 있다.

1914년부터 임명된 상임 지휘자들은 공식적으로 카펠마이스터(kapellmeister)의 직함도 동시에 수여받고 있다. 이외에 정명훈이 2012년 이 악단 역사상 최초의 수석객원지휘자로 임명되어 말러 교향곡 사이클을 진행하고 유럽과 아시아 투어를 수행하는 등 틸레만의 업무를 분담하면서 성공적으로 직책을 수행하고 있으며, 현재도 그 직을 유지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 English Chamber Orchestra (잉글리쉬 챔버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London Symphony Orchestra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
오케스트라 : Orpheus Chamber Orchestra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s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오케스트라 : Bayerische Kammerphilharmonie (바이에른 체임버 필하모닉,Bavarian Chamber Philharmonic)
오케스트라 : Accademia di Santa Cecilia Orchestra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Orchestra dell'Accademia Nazionale di Santa Cecilia)
오케스트라 : Orchestre Revolutionnaire et Romantique (낭만과 혁명 오케스트라,ORR)
오케스트라 : Mahler Chamber Orchestra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MCO)
오케스트라 : Orchester der Deutschen Oper Berlin (베를린 도이체 오페라 오케스트라,The Orchestra of the Deutsche Oper Berlin)
실내악 : Emerson String Quartet (에머슨 현악 사중주단)
실내악 : Chung Trio (정 트리오)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
실내악 : Blaser der Berliner Philharmoniker (베를린 필하모닉 관악 앙상블,Winds of the Berliner Philharmoniker)
실내악 : Beaux Arts Trio (보자르 삼중주단)
실내악 : Takacs Quartet (타카치 현악 사중주단)
실내악 : Hagen Quartett (하겐 사중주단)
실내악 : Amadeus Quartet (아마데우스 현악 사중주단,Amadeus Quartett / Quatuor Amadeus)
합창 : Wiener Singverein (빈 악우협회 합창단,Singverein der Gesellschaft der Musikfreunde in Wien / Singverein de Vienne)
합창 : Wiener Staatsopernchor (빈 국립 오페라극장 합창단,Chor der Wiener Staatsoper / Konzertvereinigung Wiener Staatsopernchor / Chorus of Vienna State Opera Hause)
합창 : RIAS Kammerchor (리아스 실내 합창단,RIAS Chamber Cho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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