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존재 증명에 필요한 전제,
“사랑은 오해에서 시작된다”
이승우 작가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한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좌절된 사랑의 고통을 그린 『식물들의 사생활』, 지하와 지상,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랑에 대한 실존적 열망을 그린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에서 발아된 사랑은, 『욕조가 놓인 방』에 이르러서는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보다 본격화된다. 이후 『사랑의 생애』, 『사랑이 한 일』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 세계는 사랑의 시원(始原)과 속성, 그 본질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욕조가 놓인 방』은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리고 어디를 향해서 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사랑의 시작과 완성, 즉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다가 사랑이 과연 증명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증명을 하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전제이며, 소설에서 제시하는 전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랑은 오해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소설의 시간은 그녀를 처음 만난 때로 되돌려진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져 있다는 오해, 즉 환상”이 작동된 시기다. ‘당신’이라는 2인칭으로 지칭되는 주인공은 종합상사에 근무 중인 남자로, 멕시코 출장 중 카페에서 관광가이드인 한 여자를 만난다. 그는 고대 마야문명의 유적지에서 다시 그녀와 조우하는데, 그곳에서 그녀와 나눈 키스의 강렬함에 사로잡힌다. 한편 그녀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몸 안에 드리운 채 의미 없는 나날을 지내왔다. 이후 한국에 다시 돌아온 그는 어느 날, 지방의 H시로 발령을 받게 된다. 그곳은 공교롭게도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였고, 옛 첫사랑과 만나는 중인 아내는 그와의 동행을 거절한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의 동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대개의 사랑이 오해(고전적인 장르의 예술에서 흔히 환상이라고 돌려서 말해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지 못한다. 아니, 당신의 무지는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 사랑에 빠져 있다는 오해, 즉 환상이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인 오해의 정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_본문 중에서
함량 미달의 열정을 가진 한 남자와
매일 밤 욕조에 잠기는 한 여자의 이야기
『욕조가 놓인 방』은 자신의 감정 하나하나를 스스로 검열하고 명분을 세운 후에야 가까스로 행동의 문턱에 다다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함량 미달의 열정”을 가진 그에게는 “생각으로 걷는 길이 발로 걷는 길보다 힘들다.” 그런 그가 낯선 이국땅에서 한 여자를 만나 매혹을 느끼고, ‘사랑’일지도 모를 어떤 감정에 휩싸인다. 그러나 마야문명이 있는 신화적 공간에서 일상의 시공간으로 되돌아왔을 때 그는 그녀의 고독과 상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남편과 아들을 비행기 사고로 잃은 후 여자의 삶은 불완전해졌으며 그녀는 물에 집착하고 있다. 바다의 투명한 물빛을 바라보며 “수장(水葬)이야말로 가장 정결한 죽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녀의 방에는 가구 하나 없고 단지 한가운데 욕조가 있을 뿐이다. 물이 담긴 욕조가 그녀에게는 침대처럼 더없이 아늑하고 편안하다. 매일 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몸을 씻으며 욕조 속에 잠긴다. 그는 그런 그녀가 점점 힘들어지고 불편해진다. 그녀와의 동거는 결국 한 달 만에 끝이 난다.
사랑은 세상을 축소시키는 기술이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의 세계는 두 사람만 존재하는, 아주 좁은, 이제 막 태어난 세상이다. 자기를 제외하면 그, 그녀만이 유일한 인류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시들해지면 세상이 조금씩 넓어지고,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점점 더 잘 보이고, 그리고 결국 한때 유이한 인류였던 그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된다. _본문 중에서
“이해할 수도,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남자는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그러다 액자와 면도기를 가져가라는 그녀에게서 온 문자메시지로 “자기 합리화 혹은 자기기만의 그럴 듯한 명분”을 얻은 뒤에 여자의 집을 찾는다. 그러나 둘의 만남은 “의식의 세계에 갇힌 남자와 무의식의 세계에 갇힌 여자의 엇갈림”(박혜진 평론가)이기도 하다. “물 위를 걷고 싶은 남자”와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여자”의 만남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의 집에서 그녀 대신 그녀의 욕조를 만난다. 그렇게 소설에서 사랑은 있음이 아닌 없음, 즉 부재로써 그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그녀의 부재를 겪으며 어쩌면 “아내마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화자의 진술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맞닥뜨리게 한다.
사랑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타인에게 스며드는 법을 알기 시작하는 남자. “사랑은 어쩌면 타인과의 마주침이기 이전에, ‘나’ 자신과 무방비상태로 만나는 것이 아닐까”(정여울 평론가)라는 물음처럼, 남자는 언젠가 여자가 누웠던 욕조 안에 자신의 몸을 포개어 누인다. 사랑에 대한 존재 증명이라는 짧고도 긴 여정 끝에,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꿨다는 최초의 진실된 고백에 마주하게 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타인을 만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진정으로 마주한다는 것, 이 소설은 “지금과는 다른 삶”이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물을 매듭지을 수 없다. 사랑도 물과 같아서 언제 스며들었는지 모르게 스며든다. 그들에게 사랑은 알 수 없는 것,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사랑의 시작과 완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있지만 구원파적으로 있지 않고, 없지만 무신론자처럼 없지 않다. _본문 중에서
우리는 왜, 또다시, 사랑에 빠지는가
연애하는 ‘인간’에 대한 정교하고 치밀한 해부
남자와 여자가 이별한 시점에서 시작된 소설은 둘의 사랑이 시작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다시 사랑이 끝난 시점으로 돌아온다. 그 끝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은 과연 있기나 한 걸까?”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왜, 또다시, 사랑에 빠지는가. 아니, 사랑은 왜 우리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하는 걸까? 사랑에 관한 수많은 정의는 곧 사랑을 정의할 수 없다는 증명에 다름 아닌지도 모른다. 사랑에 대해 계속 묻고 답하며, 또 그 답에 대해 다시 치밀하게 묻고 있는 『욕조가 놓인 방』은 사랑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계속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류의 환상” 또는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한 욕망을 해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