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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엘라 영화음악 (Cruella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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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엘라 영화음악 (Cruella OST)

Florence + The Machine, Nina Simone, Ohio Players, Ike & Tina Turner, Blondie 노래 외 6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Walt Disney Records | 2021년 06월 18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2,052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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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엘라 영화음악 (Cruella OST)

이 상품의 시리즈 (2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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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21년 06월 18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카테고리 분류

이 상품의 이벤트 (1개)

음반소개

디스크

Disc
  • 01 Florence & The Machine - Call Me Cruella
  • 02 Supertramp - Bloody Well Right (Remastered 2010)
  • 03 Bee Gees - Whisper Whisper
  • 04 The Doors - Five To One
  • 05 Nina Simone - Feeling Good
  • 06 Ohio Players - Fire
  • 07 Ike & Tina Turner - Whole Lotta Love (2002 Remaster)
  • 08 Electric Light Orchestra - Livin' Thing (2012 Version)
  • 09 Queen - Stone Cold Crazy (Remastered 2011)
  • 10 Blondie - One Way Or Another
  • 11 The Clash - Should I Stay Or Should I Go
  • 12 Georgia Gibbs - I Love Paris
  • 13 Ken Dodd - Love Is Like A Violin
  • 14 John Mccrea - I Wanna Be Your Dog
  • 15 Ike & Tina Turner - Come Together (Remastered 1994)

아티스트 소개 (11명)

노래 : Florence + The Machine (플로렌스 앤 더 머신)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다. 통한과 슬픔, 분노와 격정 그리고 발산하고 싶어도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어 떠도는 영혼들에게 그녀는 구원의 손짓을 보낸다. 어둡고 습한 곳에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말고 잘못된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라고. 화를 내고, 하고 싶은 소리를 외치라고. 이제 너의 주장을 펴고 권리를 찾을 때라고. 속삭이듯 한탄하듯 때론 비단처럼 윤기 나게 때론 벨벳처럼 부드럽게 노래에 실어 전언한다. 본명은 유니스 웨이몬(Eunice Waymon), 가수 니나 시몬(Nina Siomone)으로 대중음악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트라이온에서 가난한 집안의 여섯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피아노신동으로 불린 그는 ‘유니스 웨이몬 기금’(Eunice Waymon Fund)을 설립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음악선생님의 도움으로 음악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고 뉴욕 소재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가정을 지탱하기위해, 그는 피아노반주자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1954년 여름 그는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있는 아일랜드 바의 연주자로 직업을 잡았는데, 바 주인은 그에게 노래도 잘하길 요구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을 해왔던 유니스 웨이몬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연예사업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름을 니나(리틀 원)시몬으로 바꿨다.(1950년대 할리우드의 쟁쟁한 여배우들과 어깨를 겨룬 프랑스의 여배우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의 이름을 차용) 1950년대 후반, 니나 시몬은 베들레헴 레이블에서 최초의 트랙들을 녹음했다. 이 곡들에서 피아니스트, 가수, 편곡과 작곡가로서 그의 비범한 재능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Plain gold ring’, ’Don’t smoke in bed’, ’Little girl blue’와 같은 노래들은 곧 그의 상연목록에서 스탠더드가 되었다. 오페라 (Porgy and Bess)의 곡 중 하나인 ‘I love you, Porgy’가 타운 홀, 카네기 홀 그리고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불리고 히트를 기록하면서 나이트클럽 가수였던 그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재즈스탠더드, 가스펠, 흑인영가, 클래식음악, 유래가 다양한 포크음악, 블루스, 팝, 뮤지컬과 오페라 송, 아프리카의 영창 게다가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까지, 이미 음악활동의 시작부터 창대했던 그는 준비된 스타였다. 기회는 당연한 만찬이었다. 클래식의 대위법, 재즈의 즉흥연주, 블루스의 변조 등 다방면의 음악요소를 결합해내는 시몬의 재능은 더 이상 무시될 수 없는 발군의 실력이었다. 독자적인 타이밍, 고요함의 음악적 극대화, 몇몇 코드로만 곡을 진행시키는 피아노연주 등의 방식으로 절제미가 돋보이는 자신만의 공연분위기를 주조해내는 실력은 가히 범접을 불허할 정도로 특징적이었으며 그의 여러 작품들에 녹아들었다. 때로 그의 목소리는 어둡고 가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것에서부터 부드럽고 달콤한 것까지 변화무쌍한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잠시의 휴지와 반복 속에 그의 목소리는 외치고 속삭이고 또 한탄했다. 가끔은 피아노, 노래 소리, 몸짓이 따로 노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의 결정체로 모아졌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는 청중들에게 주문을 걸었다. 여러 가지 주문 중 하나에만 걸려도 니나 시몬이 비교불허의 아티스트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에 청중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1963년 버밍햄의 교회에서 터진 폭파사건으로 네 명의 흑인아이들이 사망하자, 니나는 미국에서 동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비통함과 격노를 금치 못했고 곧 규탄의 의미를 담은 ‘Mississippi Goddam’(빌어먹을 미시시피)을 썼다. 이 노래의 강력한 호소력과 필립스 레코드에서 처음 녹음 발표한 < Nina Simone in Concert >에 실린 노래들은 그녀의 또 다른 예술적 지평을 보여주었다. 예술적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자신만의 음색과 세심한 피아노연주에 심혈을 기울인 그는 사랑, 증오, 슬픔, 기쁨, 외로움 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노래에 실어 분명하게 전해주었다. 한때 커트 웨일(Kurt Weill)과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가 작곡한 노래 ‘Pirate Jenny’를 부르며 여배우로서 대극장을 순회하기도 했던 그는 프랑스에서 자끄 브렐(Jacques Brel)의 연약한 사랑노래 ’날 떠나지 말아요’(Ne me quitte pas)를 부르기로 했다. 니나는 ‘소울의 여대사제’로 불리며 팬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신비로운 인물로 존경받음과 동시에 거의 종교계인사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했다. 1966년 흑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시선을 네 명의 흑인여성들의 비애로 써낸 ‘네 여인들’(Four women)을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흑인들에게 모욕적이라는 이유로 필라델피아와 뉴욕 라디오방송에서 금지되었다. 여대사제는 말씀전파에 적당한 음악을 찾기 위해 다른 길을 걸어갔다. RCA레이블로 옮겨 발표한 첫 앨범 < Nina Simone Sings The Blues >에 실린 ‘I want a little sugar in my bowl’, ’Do I move you?’, ’My man’s gone now’ 그리고 랭스톤 휴스(Langston Hughes)가 그녀를 위해 써준 시를 토대로 한 저항가요 ‘Backlash blues’를 포함해 더 많은 공민권운동가요를 불러 자신의 노선을 확증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의 비극을 노래한 ‘Why?(The King of Love is Dead)’을 위시해 ’Brown baby’, ’Images’(워링 쿠니의 시에 근거한), ‘Go limp’, ’Old Jim Crow’, ’To be Young, Gifted and Black’ 등의 노래들은 미국에서 흑인국민적인 찬가가 되었다. 그녀는 홀로 외롭게 노래하고 연주한 앨범 < Nina Simone and Piano ! >(1970)로 열성적인 팬들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환생, 죽음, 고독 그리고 사랑에 대한 내성적인 노래들로 채운 모음집은 그녀의 녹음경력에 변함없는 하이라이트였다. 노래들에 새롭고 더 깊은 차원의 선물을 담아냈다. ‘Ain’t got no/I got life’(뮤지컬 “헤어”에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Suzanne’, ‘To love somebody’와 같은 비지스의 노래들, 봉고연주로 두 배의 속도감을 붙인 클래식 ’My way’, ‘Just like Thumb’s blues’ 그리고 네 곡의 밥 딜런의 노래들의 주목할 만한 버전들에는 더 새롭고 깊은 차원의 재능을 담아냈다. < Emergency Ward >는 절정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조지 해리슨이 쓴 두 곡 ’My sweet lord’와 ‘Isn’t it a pity’의 긴 버전을 연주하면서 환각과 도피성을 배제한 분위기로 꾸몄다. 니나는 그러나 어쨌든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종당해 왔다고 느꼈고, 음반회사, 연예사업, 인종차별주의에 넌더리가 났다. 1974년 미국을 떠나 바바도스(Barbados)로 향한 그녀는 이듬해 리베리아, 스위스, 파리,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남부에 안착했다. 1978년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의 ‘My father’를 정확한 해석으로 다시 부른 버전과 최면술을 거는 ’Everything must change’가 실린 새 앨범 < Baltimore >을 오랜만에 내놓았다. 그리고 1982년 미국으로부터 자진 “망명”을 선언한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표시한 앨범 < Fodder On My Wings >을 파리에서 녹음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여느 때보다도 잘 담긴 앨범이었다. 니나는 곡을 쓰고 개작하고 편곡했다. 피아노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며 영어와 프랑스어로 노래했다. 이 앨범은 1988년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추억)하는 노래 ‘Alone again naturally’의 특별버전을 포함한 몇몇 보너스트랙이 더해져 CD로 재발매 되었다. 1984년, 런던의 로니 스콧(Ronnie Scott)에서 열린 그녀의 콘서트실황을 담은 필름이 매혹적인 비디오로 발매되었다. 드럼에 폴 로빈슨(Paul Robinson)이 찬조 출연한 이 비디오에는 그녀의 첫 레코드에서 발췌한 노래 ‘My baby just cares for me’가 포함돼 큰 인기를 누렸다. 다음 해 < Nina’s Back >(니나의 귀환)이란 제목의 새 앨범을 발표한 그녀는 전 세계를 누비는 콘서트에 나섰다. 1989년 그녀는 피트 타운젠트(Pete Townsend)의 뮤지컬 < The Iron Man >에 공헌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과 1991년 브라질 팝가수 마리아 베사니아(Maria Bethania)와 아프리카음악의 세계화에 앞장선 유명 여성보컬리스트 마리암 마케바(Mariam Makeba)와 함께 녹음했다. 1991년엔 또한 자서전 < I Put A Spell On You >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어 번역본으로도 출판되었다. 1993년 스튜디오에서 만든 새 앨범 < A Single Woman >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로드 맥퀸(Rod McKuen)의 노래들, 자신의 노래 ‘Marry me’, 프랑스의 스탠더드를 자기버전으로 부른 ’Il n’y a pas d’amour heureux’, 매우 감동적인 ‘Papa, can you hear me?’가 수록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영화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레퍼토리 중 5곡이 사운드트랙에 들어간 1993년 영화 (Point Of No Return, The Assassin, code name: Nina로도 불린다)를 위시해 (1996)에 사용된 ‘I wish I knew how it would feel to be free’, (1996)에 삽입된 ’My baby just cares for me’ 그리고 (1997)의 ‘Exactly like you’까지 그의 목소리는 영화와 함께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월은 흘러도 그녀의 음악은 변함없이 새롭고 젊은 청취자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Ain’t got no/I got life’는 1988년 네덜란드에서 대형히트를 기록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절친한 반주자들, 퍼커션의 레폴도 플레밍(Lepoldo Fleming), 베이스의 토니 존스(Tony Jones), 드럼의 폴 로빈슨(Paul Robinson), 키보드의 하비에르 콜라도스(Xavier Collados) 그리고 기타리스트 겸 그녀의 음악 감독 알 섀크만(Al Schackman)과 함께 세계 순회공연을 펼치며 청중들과 함께 여전히 흥분의 순간을 맛봤다. 1997년 런던에 바비칸(Barbican) 극장에서 그는 공민권운동, 형제애를 위해 미국의 첫 번째이자 주요한 리더들 중 한사람에게 헌정하는 의미의 노래 ’Every Time I Feel The Spirit’을 불렀다. ‘Reached down and got my soul’, ’The blood done changed my name’, ’When I see the blood’와 같이 더욱 영가(Spiritual)적이고 생명과 같은 노래들이 뒤를 이었다. 니나는 1997년 프랑스에서 열린 니스 재즈 페스티벌(Nice Jazz Festival), 1998년 그리스의 의 데살로니가 재즈 페스티벌(Thessalonica Jazz Festival)의 하이라이트였다. 1999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기네스 블루스 페스티벌에서는 그녀의 딸 리사 첼레스테(Lisa Celeste)와 함께 몇몇 곡을 듀엣으로 합창해 모녀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몬은 라틴 수퍼스타 라파엘(Rafael)과 함께 노래하고 두 번의 디즈니 연극 워크숍에 참여, 의 타이틀 역과 의 날라 역을 맡아 공연하면서 세계 투어를 했다. 1998년 7월 24일, 니나 시몬은 넬슨 만델라의 80회 생일파티에 특별손님으로 초대됐다. 1999년 10월 7일 그녀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음악시상식에서 평생업적을 기리는 공로상을 품에 안았다. 2000년에 들어 그녀는 5월 26일 애틀랜타 명예 시민권을 수여받았다. 6월 9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협회로부터 다이아몬드 상을 수상한데 이어 8월 7일에는 프랑스에서 명예로운 총사상을 수상했다. 닥터. 시몬은 2003년 4월 21일 프랑스 남부 까리-르-루에에 그녀의 별장에서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소망대로 유해는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 뿌려졌다. 매사추세츠대학으로부터 음악과 인류애에 대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바로 최후의 전승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역사적 지위를 얻었다. 최고의 여류시인, 우리시대의 음악작가로 그는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노래 : Ohio Players (오하이오 플레이어스)
1970년대 중반을 가장 바쁘게 보낸 7인조 소울, 펑크(Funk) 그룹 오하이오 플레이어스(Ohio Players)는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 신세대 팝 애호가들로부터 집중된 관심을 받았다. 1997년 초에 발표된 화끈 무식한 만화 커플 듀엣 비비스 & 버트헤드의 영화 출연작 < 비비스 & 버트헤드 두 아메리카 >의 사운드트랙에서 얼터너티브 메탈의 효시 격인 ''차력사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부른... 1970년대 중반을 가장 바쁘게 보낸 7인조 소울, 펑크(Funk) 그룹 오하이오 플레이어스(Ohio Players)는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 신세대 팝 애호가들로부터 집중된 관심을 받았다. 1997년 초에 발표된 화끈 무식한 만화 커플 듀엣 비비스 & 버트헤드의 영화 출연작 < 비비스 & 버트헤드 두 아메리카 >의 사운드트랙에서 얼터너티브 메탈의 효시 격인 ''차력사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부른 ''Love rollercoaster''의 주인공이 바로 오하이오 플레이어스였기 때문이다. 오리지널도 훌륭하지만 후배들의 커버 버전도 원곡의 금자탑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펑키(Funky)한 능력을 120% 발휘한 수작으로 매운 고추 맛을 보여줬다. 1970년대 전성기를 맞이한 오하이오 출신의 선수들은 훨씬 이전인 1959년에 밴드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베이스 주자 마샬 "록" 존스(Marshall "Rock" Jones)와 트럼펫 주자 랄프 "피위" 미들브룩(Ralph "Pee Wee" Middlebrook)이 그 디자이너였다. 소울 펑크(Funk)의 시초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과 실질적인 펑크(Funk)의 전도사 슬라이 &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을 모델로 삼은 이들은 1970년대 이전에는 자신들의 사운드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가 1970년대 들어서자 육중한 베이스 펑키 리듬과 혼섹션을 트레이드마크로 한 그들만의 소리를 찾아냈다. ''머큐리'' 음반사로 이적한 1974년에 발표한 < Skin Tight >부터는 그것을 증명했고 이쯤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선정적인 앨범 커버가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했다. < Skin Tight >에서 이들의 첫 번째 1위 곡 ''Fire'' 외에도 ''Jive turkey(47위)'', 사회 비판적인 메스를 가한 ''I want to be free(44위)''등이 주목을 받았고 이듬해 말에 나온 음반 < Honey >에선 20여년 후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커버한 ''Love rollercoaster''가 재집권에 성공했다. 연이어 발표된 싱글 ''Sweet sticky thing(33위)'', ''Fopp(30위)'' 등으로 애버리지 화이트 밴드(Average White Band), 어스 윈드 & 파이어(Earth Wind & Fire),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 브라더스 존슨(Brothers Johnson) 등과 함께 펑크(Funk)의 대중화에 이바지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1970년대 후반 펑크(Funk)를 모태로 한 디스코에 밀려 오하이오 선수들의 팬 층은 급격히 얇아지기 시작했다. 펑크의 박자는 디스코의 그것에 비해 박자의 분절이 심하기 때문에 춤을 추기엔 매우 어렵다. 그래서 펑크(Funk)의 비트를 순화시킨 디스코 리듬은 백인뿐 아니라 동양인에게도 쉽게 어필해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었다. 디스코에 눌린 오하이오 플래이어스는 1980년대가 되어서도 후보 선수 활동을 면치 못했고 1997년 밴드의 설립자 랄프 "피위" 미들브룩이 사망하면서 은퇴했다.
멤버 : 아이크 터너(Ike Turner), 티나 터너(Tina Turner) 멤버 : 아이크 터너(Ike Turner), 티나 터너(Tina Turner)
블론디는 1970년대 말 움트기 시작한 역사적 트렌드 뉴 웨이브와 펑크 시대의 선구자격 밴드이자, 그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던 그룹이다. 그들의 앨범 판매고 만큼이나 찬란하게 빛났던 데비 해리(Debbie Harry)의 금발머리는 당시 팝 음악계에 ‘섹슈얼리티’ 지향적 현상을 만들어 현재의 마돈나에 이르고 있으며, 펑크(Punk)와 훵크(Funk), 디스코를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를 록에 혼합한... 블론디는 1970년대 말 움트기 시작한 역사적 트렌드 뉴 웨이브와 펑크 시대의 선구자격 밴드이자, 그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던 그룹이다. 그들의 앨범 판매고 만큼이나 찬란하게 빛났던 데비 해리(Debbie Harry)의 금발머리는 당시 팝 음악계에 ‘섹슈얼리티’ 지향적 현상을 만들어 현재의 마돈나에 이르고 있으며, 펑크(Punk)와 훵크(Funk), 디스코를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를 록에 혼합한 ‘블론디식의 팝 만들기’는 근래 당시 뉴 웨이브 음악계의 커다란 팽창을 가져왔다. 이들의 역사적인 시작은 1974년 뉴욕에서였다. 당시 유명 클럽 맥스 캔서스 시티(Max Cansas City)의 웨이트리스이자 플레이보이 모델이기도 했던 데비 해리(본명은 데보라 해리)는 윈드 인 더 윌로스(Wind in the Willows)라는 포크 록밴드에서 활동하던 중 스틸레토(The Stilettos) 출신의 기타리스트 크리스 스타인(Chris Stein)을 만나면서 새로운 밴드를 만들 결심을 굳히게 된다. 베이스 프레드 스미스(Fred Smith)와 드럼 빌리 오코너(Billy O’Connor)가 들어오면서 그룹은 라인업을 완성되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블론디라는 그룹 이름은 트럭운전사가 길거리를 지나가는 데비를 향해 소리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1975년은 유난히도 라인업의 변화가 많았다. 특히 프레드 스미스가 펑크 밴드 텔레비전(Television)으로 이적한 후엔 밴드가 와해될 위기에 처할 정도로 상당한 침체기를 맞는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드러머 클렘 버크(Clem Burke)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열정이 그들에게 힘이 되었고, 이후에 베이스 개리 발렌타인(Gary Valentine)과 키보드 지미 데스트리(Jimmy Destri)가 들어오면서 그룹은 다시 안정을 찾았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 블론디는 1976년 프라이비트(Private) 레코드사를 통해 첫 싱글 ‘X-offender’를 발표한 뒤 이어서 대망의 첫 앨범 < Blondie >를 발표한다. 그룹은 이기 팝과 데이비드 보위의 공연의 오프닝에 나서면서 미국과 유럽에서 소규모 투어를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프라이비트 레코드사에서 이적하여 메이저 레이블인 크리살리스(Chrysalis)와 계약을 맺는 행운을 얻게 된다. 베이스 나이겔 해리슨(Nigel Harrison)을 맞이하면서 6인조의 완전한 라인업으로 진화한 블론디는 1977년 두 번째 앨범 < Plastic Letters >를 발표, 첫 싱글 ‘Denis’ 와 ‘(I’m always touched by your) Presence, dear’가 연속으로 영국차트 Top10 에 오르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앞으로의 광채를 예고했다. 성공으로 인한 기나긴 투어와 빡빡한 일정으로 지친 가운데서도 1978년, 블론디는 그들의 역사적인 세 번째 앨범 < Parallel Lines >를 발표한다. 당시 디스코 붐을 타고 가장 잘 나가는 프로듀서의 한 사람이 된 마이크 채프먼(Mike Chapman)의 지휘와 함께 디스코 성향으로 거듭난 블론디의 변신은 미국 뉴욕 펑크의 메카인 시비지비(CBGB)클럽 출신의 펑크 록밴드치고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의외의 전향이었지만 대중들은 폭발적인 반응으로 화답, 앨범은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앨범의 싱글 ‘Hanging on the telephone’과 ‘Picture This’는 영국 차트에서 각각 5위, 12위를 차지하였고, 공전의 히트곡 ‘Heart Of Glass’는 영국과 미국 양쪽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대서양 양안 정복의 개가를 일궈냈다. 이 곡은 밴드가 CBGB 클럽활동 시절인 1975년에 데비와 크리스가 쓴 곡이었으나 시류에 맞게 디스코로 업데이트했다. 지미 데스트리는 “우린 우리 자신을 패러디했다”며 자신들의 전향(?)에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팬들이 블론디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이 곡에서 비롯되었으며 록 분야의 사람들은 이 곡을 계기로 디스코열풍의 수용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히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아 ‘Sunday girl’이 영국차트 1위, 그들이 CBGB 출신임을 고지한 펑크 계열의 곡 ‘One way or another’는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무렵 데비 해리는 그 도발적 섹슈얼리티로 ‘제2의 마릴린 먼로’라는 수식어를 얻으면서 록 음악계의 넘버 원 ‘핀 업 걸’로 떠올랐다. 1979년에 발표한 4집 앨범 < Eat To The Beat >는 싱글 ‘Dreaming’ ‘Union City Blue’를 영국차트 상위권에 올려놓았고 이어 ‘Atomic’이 세 번째로 영국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등 성공행진은 계속되었다. 이후 영화 < 아메리칸 지골로 >(American Gigolo)에 삽입된 곡 ‘Call me’가 다시 한번 영국과 미국 차트 정상을 호령하여 그들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곧이어 발표한 다섯 번째 앨범 < Autoamerican >에서는 레게리듬을 도입한 차트1위 곡 ‘The tide is high’과 ‘Rapture’가 말해주듯 각각 레게 그리고 랩을 시도하여 밴드의 음악적 지평을 넓혔다. 하지만 정상을 질주하던 블론디에게 갑자기 여러 불운이 겹치기 시작하였다. 기타리스트 프랭크 인팬트(Frank Infante)가 그룹내의 음악적인 위치에 불만을 품고 법적인 소송을 제기하였고, 데비가 쿠 쿠(Koo Koo)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는 등 멤버들의 에너지 분산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발표된 6집 앨범 < The Hunter >는 ’Island of lost souls’가 영국차트 톱40 에 오르긴 했지만, 이전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결정적으로 그룹의 축인 크리스 스테인이 심각한 유전병에 걸리게 되면서 1982년에 결국 그룹은 해체되었다. 해체 이후, 데비는 필생의 연인인 크리스의 병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보살피면서 그 사이 영화와 연극에 출연, 솔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나 앨범은 참패를 거듭했고 지미 데스트리는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음악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병이 회복된 크리스는 뉴욕의 밴드들을 프로듀싱하며 음악활동을 재개했고 클렘 버크는 레코딩 작업을 꾸준히 하며 유명한 배우들과 함께 투어를 하기도 했다. 근래 들어 평단에서 뉴 웨이브와 1980년대 팝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해지고, 더불어 영화 < 트레인스포팅 >에 삽입되어 우리에게 익숙한 슬리퍼(Sleeper)의 ’Atomic’ 이 블론디 오리지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들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어갔다(이 곡은 1998년 국내 모 음료CF에 삽입되기도 했다). 그룹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의 성숙에 맞춰 마침내 1998년 말 멤버들은 15년 만에 재결합을 선언하고 일곱 번째가 된 앨범 < No Exit >을 선보였고 첫 싱글 ’Maria’가 발표되자마자 영국차트 1위에 올라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멤버 : 릭 데이비스(보컬, 키보드), 로저 호지슨(보컬, 기타, 베이스), 리차드 파머(보컬, 기타), 로버트 밀라(퍼커션) 멤버 : 릭 데이비스(보컬, 키보드), 로저 호지슨(보컬, 기타, 베이스), 리차드 파머(보컬, 기타), 로버트 밀라(퍼커션)
천상의 하모니와 빛나는 멜로디로 세대통합을 일궈낸 깁(Gibb) 형제들 흐르는 세월은 막을 수가 없다.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적용된다. 특히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아티스트에게 있어서 바람처럼 흘러가는 세월은 독약이나 다름없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다가도 어느 순간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다. 변하는 시대상만큼이나 음악을 듣는 청각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음악가의 창작력 부재... 천상의 하모니와 빛나는 멜로디로 세대통합을 일궈낸 깁(Gibb) 형제들 흐르는 세월은 막을 수가 없다.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적용된다. 특히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아티스트에게 있어서 바람처럼 흘러가는 세월은 독약이나 다름없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다가도 어느 순간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다. 변하는 시대상만큼이나 음악을 듣는 청각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음악가의 창작력 부재도 한몫을 거든다. 그래서 시공을 초월한 아티스트의 장기 집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아, 물론 비틀즈라는 슈퍼 그룹이 지금까지도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그들은 이미 해체했다). 하지만 ‘형제 그룹’ 비지스는 1960년대 대중 앞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이후 1990년대까지 꾸준한 인기몰이를 하며 세월의 세찬 공격에 저항했다. 그리고 살아 남았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그들은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며 도약을 했고, 그들에게 애정을 쏟는 팬들 역시 골고루 분화(分化)되어 모든 세대를 아울렀다. 허나 비지스의 열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태세다. 그들은 이번에 신보 < This Is Where I Came In >을 발표하며 새 천년에도 거대한 인기의 물결을 몰고 오려 한다. 형제들 특유의 멜로디와 하모니는 여전하며, 자신감도 넘쳐난다. 40년이 넘는 시간의 프리즘은 그들에게 더 이상 장벽이 아니다. 보는 눈이 달라요 나이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비지스이지만, 오늘날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은 세대마다 다르다. 먼저 50대의 중년층들에게 깁 형제들은 ‘추억의 팝 그룹’이다. 1960년대 후반의 싱글 차트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Holiday'', ‘To love somebody'', ‘New york mining disaster 1941'' 등을 흥얼거리며 아련한 옛 기억을 떠올린다. 추억어린 시선으로 반추한다. 당시 국내에서도 비지스의 인기는 대단했는데 ‘Massachusetts'', ‘Don''t forget to remember'', ‘First of may'', ‘Words'' 등이 외국의 순위와 관계없이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리퀘스트 됐다. 386세대를 전후한 연배에서 비지스는 ‘신나는 디스코 밴드’이다. 1977년 존 트래볼타가 주연한 디스코 영화 <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 >의 사운드 트랙에 수록된 ‘Stayin'' alive'', ‘Night fever'', ‘How deep is your love'' 등이 엄청난 스매시 히트를 기록하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흥겨운 디스코 리듬에 열광적으로 몸을 맡겼다. 정규 앨범에 수록된 ‘Jive talkin'', ‘You should be dancing'', ‘Tragedy'' 등도 디스코 붐에 크게 기여한 곡들이다. 이를 계기로 트리오는 1970년대 최고의 디스코 그룹으로 거듭났다. 그들이 끼친 디스코의 영향력은 국내 음악계까지 잠식했는데, ‘가왕(歌王)’ 조용필의 영원한 클래식 ‘단발머리’가 대표적 사례이다. 그럼 비지스와는 너무나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요즘 신세대들은 어떠한가. 그룹과 직접적인 교류가 없는 그들은 ‘우회적’ 방법으로 깁 형제들과 소통을 했다. 당대 인기 가수들의 리메이크가 바로 그것이다. 로비 윌리엄스(Robbie Williams)가 재직했던 테이크 댓(Take That)이 1996년에 커버한 ‘How deep is your love''(국내에서는 1995년 미국 흑인 4인조 포트레이트(Portrait)의 버전으로 유명하다)를 비롯하여, 같은 해 영국 댄스 팝 그룹 엔 트랜스(N-Trance)의 ‘Stayin'' alive'', 1999년 보이존(Boyzone)의 ‘Words'' 등 젊은 후배 뮤지션들이 트리오의 명곡들을 재해석하여 높은 인기를 얻었다. 또한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가 주연한 영화 < 노팅 힐(Notting Hill) >에 담겨졌던 알 그린(Al Green)의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도 원래는 1971년 비지스의 넘버원 히트곡이다. 때문에 신세대 팬들 역시 비록 원 곡은 모를지라도 비지스의 이름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도1999년 이명세 감독의 영화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에 ‘Holiday''가 삽입되면서 잠깐이나마 비지스 특수(特需)를 누렸다. 노래는 비 내리는 40계단에서 안성기의 살인 장면과 안성기와 박중훈의 마지막 결투 장면에서 은근히 흘러나오며 ‘비장미’를 잔뜩 머금은 비지스 사운드의 위력을 뽐내기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그룹이 계속적으로 대중들에게 회자(膾炙)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후배 가수들이 그저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비지스의 고전들을 재해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지스 음악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의 발로에서 출발했다. 지난해 발표한 새 앨범 < WYSIWYG >에서 삼 형제의 초기 명곡 ‘New york mining disaster 1941''을 리메이크 했던 ‘선동 밴드’ 첨바왐바(Chumbawamba)의 기타리스트 보프(Boff)의 코멘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노래는 마치 정치적 가사를 내포한 포크송 같았고, 아주 아름다운 곡이었다. 우리는 반드시 이 곡을 커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디스코 이전의 비지스 곡들이 많이 잊혀졌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에 이끌려 망각 속으로 사라졌던 선배들의 빛나는 음악 스펙트럼을 재조명하고자 하는 것이 무정부주의자들의 목표였다. ‘Independent women pt. 1''으로 최고의 상한가를 기록하는 있는 ‘미녀 삼총사’ 데스티니스 차일드(Destiny''s Child) 또한 올 상반기에 내놓을 예정인 신작 앨범 < Survivor >에 비지스가 작곡하고 사만다 생(Samantha Sang)이 1978년에 불러 큰 인기를 얻은 곡 ‘Emotion''을 삽입할 예정이라고 최근 공식 발표했다. 그들은 “어쿠스틱 기타와 곡의 가사, 그리고 편곡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 지를 보여준 대단한 작품”이라며 깁 형제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했다. 뒤늦게나마 비지스의 음악적 영향력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비지스의 음악은 부챗살처럼 여러 갈래로 펼쳐져 있다. 단지 부드러운 발라드와 경쾌한 디스코만을 노래하고 연주하는 팀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삼 형제의 절묘한 하모니와 뛰어난 멜로디를 주무기로 그들은 록, 포크, 클래시컬 팝, 펑크(Funk), 디스코, 리듬 앤 블루스, 일렉트로닉 등 다채로운 장르를 표현해냈다. 음악계에 금자탑으로 새긴 많은 상기 명곡들에서 잘 나타난다. 이를 바탕으로 밴드는 대중 음악사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비틀즈(Beatles),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폴 매카트니(Paul MaCartney)와 함께 1억장 이상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하며 상업적으로 최고봉에 올랐으며, 1994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을 시작으로, 1997년에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에서 ‘인터내셔널 아티스트 상’, 브릿 어워즈에서 ‘최고 공로상’, 월드 뮤직 어워즈에서 ‘평생 공로상’을 연거푸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역시 같은 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당당히 헌액되어 명실공히 거장의 반열에 등극했다. 이뿐이 아니다. 비지스는 영국에서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각 시대마다 차트 1위 곡을 쏘아 올렸고(1990년대는 테이크 댓이 리메이크한 ‘How deep is your love''로 정상을 차지했다), 자신들이 작곡한 다섯 곡을 동시에 빌보드 톱 텐 차트로 발진시키기도 했다. 또한 그래미 시상식에 열 여섯 번이나 노미네이트됐으며, 일곱 번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기념비적인 음반 판매량과 화려한 수상 경력에서 알 수 있듯 비지스는 위대한 팝 그룹이다. 물론 상업적인 측면이 예술가의 잣대를 판단하는 완벽한 바로미터는 아니지만, 오늘날까지 지구촌 팝 팬들의 큰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은 그들이 세계 팝 음악계에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결정적 요인임은 부인할 수 없다. ‘예비 스타’ Brothers Gibb 깁 형제들의 음악 이력은 영국 맨체스터에서 1947년 9월 1일 태어난 맏형 배리(Barry Gibb)와 1949년 12월 22일에 태어난 쌍둥이 동생들인 로빈(Robin Gibb)과 모리스(Maurice Gibb)가 어린 시절 침대 위에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서로 내비치면서 기지개를 켰다. 삼 형제는 처음 부모님으로부터 음악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휴(Hugh Gibb)는 빅 밴드의 리더였고, 어머니 바바라(Babara)는 전직 가수였다. 아버지는 형제들의 공연 모습을 보고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미국 흑인 보컬 그룹 밀스 브라더스(Mills Brothers)의 축소판이라며 자식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트리오는 1957년 맨체스터에 있는 극장에서 인기 가수들의 히트곡을 부르며 최초로 대중들 앞에 얼굴을 비쳤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깁 형제들은 직접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립싱크를 하는 ‘재롱 잔치’를 펼쳤다. 팝 역사상 최고의 하모니 그룹으로 평가받는 비지스의 출발점이었다. 이듬해 부모님을 따라 호주 시드니로 이민을 간 삼 형제는 래틀스네이크스(Rattlesnakes), 블루캣츠(Bluecats)라는 그룹명으로 클럽과 극장 등지에서 공연을 하며 만만찮은 잠재력을 과시했다. 1960년 형제들을 눈여겨본 경마업자 빌 굿(Bill Good)이 라디오 DJ인 친구 빌 게이츠(Bill Gates)에게 그들을 소개시킴으로써 트리오는 이름을 떨칠 확실한 발판을 마련했다.(굿은 자신과 게이츠의 이니셜을 따서 형제들을 B.G''s라고 불렀다. 하지만 Brothers Gibb에서 그룹명을 얻은 것으로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다. 모두 맞다!.) 얼마 후 비지스로 명칭을 바꾼 그룹은 TV 방송과 투어를 하며 잔잔한 반응을 얻어갔다. 특히 1962년에는 ‘트위스트 스타’ 처비 체커(Chubby Checker)의 시드니 스타디움 공연에 게스트로 초청되며 호주의 아이돌 스타로 자리잡았다. ‘Three kisses of love'', ‘Wine and women'', ‘Spicks and specks'' 등이 차트에서도 호조를 보이며 인기를 모았다. 특히 모리스의 피아노가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Spicks and specks''는 정상을 차지했으며, 깁 형제들의 초창기 명곡으로 지금까지도 기억되어 진다. 이러한 호주에서의 활동 기록은 1968년과 1970년에 발표된 앨범 < Rare Precious & Beautiful Vol 1 >과 < Rare Precious & Beautiful Vol 2 >에 각각 실려있다. Roll Over The Beatles 비지스는 그러나 호주에서의 찬란한 영광시대를 뒤로하고 더 넓은 세계로 진출하기 위해 1967년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모험을 강행했다. 결과는 대성공. 거물 프로듀서 로버트 스틱우드(Robert Stigwood)의 눈에 들어 전격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비상을 위한 탄탄한 밑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이 당시 로버트 스틱우드는 ‘비틀즈의 제 5멤버’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과 넘스(Nems) 엔터테인먼트라는 매니지먼트사에서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스틱우드는 비틀즈라는 빅 밴드를 거느리고 있는 엡스타인을 항상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제2의 비틀즈를 키우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바로 이때 찾아온 이가 깁 형제들이었다. 로버트 스틱우드는 비지스의 탄탄한 작곡 실력과 경지에 이른 하모니가 비틀즈만큼 대중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고 보고 계약을 성사시킨 것이다. 그는 나아가 기타리스트 빈스 멜로니(Vince Melouney)와 드러머 콜린 피터슨(Colin Peterson)을 정규 멤버로 영입하여 5인조 편성으로 그룹의 라인업을 재편했다(멤버 숫자상에서도 비틀즈보다 많다!). 비지스의 무한질주는 시작됐다. 그들은 1967년에 ‘Holyday'', ‘New york mining disaster 1941'', ‘To love somebody'' 같은 싱글들을 연속히트 시켰고, 같은 해 발매된 데뷔작 < The Bee Gee''s 1st >도 빌보드 앨범차트 7위로 성큼 올라서며 지구촌 정복을 향한 첫 테이프를 순조롭게 끊었다. 밴드는 계속해서 이듬해 ‘Massachusetts''와 ’World''가 수록되어 있는 두 번째 앨범 < Horizontal >, 영국에서는 1위, 미국에서는 8위를 차지한 ‘I''ve gotta get a message to you''와 미국 차트 6위의 ‘I started a joke''가 들어있는 < Idea >를 내놓으며 인기바람을 탔다. 하지만 외적인 성공과는 달리 그룹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합병증을 앓고 있었다. 로빈은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음악 생활을 갈망했고, 빈스 멜로니와 콜린 피터슨은 밴드의 실권을 쥐고있는 배리의 음악 노선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1969년 3월 로빈은 독립선언을 했고, 그 때를 전후하여 빈스와 콜린도 팀을 떠났다.(로빈은 그해 8월 데뷔 싱글 ‘Saved by the bell''을 영국 차트 2위에 올려놓으며 솔로 전향에 성공했다.) 그러나 배리와 모리스는 그룹을 존속시키기로 결정하고 1970년에 앨범 < Cucumber Castle >를 발표했다(데뷔작의 수록곡과 타이틀이 같다). 이 음반은 1969년에 두 형제가 제작하고 출연한 동명 타이틀 영화의 사운드 트랙으로 만들어졌다.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불후의 명곡 ‘Don''t forget to remember''가 실려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존재가치를 부여받고 있다. Bee Gees Fever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 8개월간 외도를 했던 로빈은 1971년 1월 형제들과 다시 합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그는 < 타임 >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만약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다면 비지스에 복귀할 생각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며 핏줄의 자연스런 당김을 인정했다. 삼 형제의 재결합 싱글인 ‘Lonely days''는 미국 차트 3위, 후속곡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는 정상을 차지하는 등 비지스는 잠시 접었던 날개를 다시 활짝 폈다. 영국을 주무대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해나가던 깁 형제들은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으로 옮겨가 새 둥지를 틀었다. 영국의 달라진 음악 환경이 이유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국은 레드 제플린(Led Zepplin)의 < Led Zepplin Ⅳ >,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의 < Paranoid > 등 헤비메탈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 앨범들이 잇달아 터져 나오면서 하드록과 헤비메탈의 아지트로 탈바꿈했다. 또한 T. 렉스(T. Rex)와 데이빗 보위(David Bowie)로 대변되는 글램 록 센세이션도 직격탄을 날렸다. 때문에 서정적인 발라드를 강조하는 비지스의 사운드 메커니즘은 앰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출력 사운드로 인해 발붙일 곳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트리오는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적 지평을 한껏 넓혔다. 그들은 뉴욕의 클럽 등지(‘디스코의 메카’ 스튜디오 54가 가장 유명하다)를 중심으로 흑인 펑크(Funk) 키드들에 의해 전해지던 디스코의 영향을 받았다. 1975년 앨범 < Main Course >와 이듬해 발표한 < Children Of The World >에 각각 수록되어 차트 1위에 우뚝 올라선 ‘Jive talkin'', ‘You should be dancing''가 웅변한다. 이를 계기로 애호가들 사이에서만 맴돌았던 디스코는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기 시작했다. 게이 바(Bar), 흑인 클럽 같은 은둔지에서 벗어나 일상의 삶과 거리로 나온 것이다. 그 정점은 1977년 발표된 영화 < 토요일 밤의 열기 > 사운드 트랙이었다.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4,0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음반은 ‘Stayin'' alive'', ‘Night fever'', ‘How deep is your love''의 연이은 정상 등극으로 지구촌에 디스코 열풍을 휘몰아치게 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 주인공 토니 마네로로 분한 존 트레볼타의 흰 양복과 팔을 높이 쳐들고 언제라도 춤출 준비가 된 자세, 그리고 ‘Stayin'' alive''에서 배리 깁의 가성(Faasetto)은 디스코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디스코의 충격파는 기성 아티스트들에게도 매우 컸다. 1978년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의 차트 1위 곡 ‘Do ya think I''m sexy''를 시발점으로,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의 ‘Some girls'', ‘고! 디스코(Go! Disco)’외치며 디스코에 투신한 블론디(Blondie)의 ‘Heart of glass'', ‘Call me'' 등 유명 뮤지션들도 디스코의 우산 아래로 해체 모여했다. 또한 전혀 디스코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메탈 그룹 키스(Kiss)도 1979년 앨범 < Dynasty >에 디스코 넘버 ‘I was made for loving you''를 집어넣으며 트렌드에 편승했다. 비지스가 막을 연 디스코는 그러나 비평가들로부터 “대량 소비시대의 저급한 통조림상품”이라며 혹평을 받아야만 했다. 멜로디를 배제하고 연속적 비트를 강조하는 디스코는 특유의 단순성과 간결함으로 ‘쉽게 만들고 쉽게 팔 수 있다’는 상업주의 전략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삼 형제 역시 ‘흑인 음악을 백인들이 판다’는 절대 진리(?)를 다시금 입증시키며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작곡가로도 명성을 날린 배리 깁 선풍적인 디스코 열기와 함께 비지스는 로버트 스틱우드의 바램대로 비틀즈를 능가하는 최고의 인기 밴드로 자리 매김 했다. 이와 동시에 그룹의 음악 컨덕터인 맏형 배리 깁은 자신의 작곡 실력도 만방에 떨쳤다. 첫 포문은 삼 형제의 동생인 앤디 깁(Andy Gibb)이 열었다. 앤디는 형의 도움을 받아 1977년 데뷔 싱글 ‘I just want to be your everything''을 포함하여, ‘(Love is) Thicker than water'', ‘Shadow dancing''을 연달아 1위에 등극시키며 세계적인 지명도를 얻었다.(하지만 앤디는 갑작스런 인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술과 마약으로 인해 1988년 3월 사망했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뒤를 이어 사운드 트랙 < Saturday Night Fever >에 수록되어 있는 이본느 엘리만(Yvonne Elliman)의 ‘If I can''t have you'', 같은 해 영화 < Grease >에 삽입됐던 프랭키 밸리(Franky Valli)의 ‘Grease''가 정상을 차지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배리가 쓴 곡들은 차트에서 반짝 반짝 빛을 발했다. 1980년 바브라 스트라이젠드(Barbra Streisand)의 ‘Woman in love'', 1982년 디온 워익(Dionne Warwick)의 ‘Heartbreaker'', 케니 로저스(Kenny Rogers)와 돌리 파튼(Dolly Parton)이 함께 부른 ‘Islands in the stream'', 그리고 1986년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의 ‘Chain reaction''같은 명곡들이 모두 배리의 작품들이다. 그러나 배리의 승승장구와는 다르게 음악 구심점을 잃어버린 비지스는 1980년대에 몇 장의 음반들을 발표하지만 그룹의 음악 본령을 찾지 못했다. 이후 깁 형제들은 1989년 < One >, 1991년 < High Civilization >, 1993년 < Size Isn''t Everything >을 내놓으며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갔다. 이어 4년 후 발매한 작품 < Still Waters >가 미국에서 플래티넘을 차지하고 싱글 ‘Alone''이 차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트리오는 기사회생했다. 뿌리로 돌아간 신보 < This Is where I Came In > “< This Is Where I Came In >은 정말 우리 자신에 대한 음반입니다. 이 앨범은 매우 정직하고, 지난 30년 동안 우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에 대한 느낌을 담았습니다.” 비지스의 이번 새 앨범은 타이틀이 암시하듯 자신들의 음악 원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1960년대 사운드로 회귀한 것이다. 하지만 원숙함과 노련함이 더해져 세련되게 꾸며졌다. 부드러운 팝 사운드가 지배적이었던 전작 < Still Waters >와는 상당한 음악적 차이를 보인다. 어쿠스틱 기타의 울림이 깊은 첫 싱글 ‘This is where I came in'', 비틀즈식 흥겨움이 물씬 풍기는 ‘She keeps on coming''에서 잘 나타난다. 트리오의 데뷔작 < The Bee Gee''s 1st >와 맥을 같이한다. 배리는 “우리는 실제로 1960년대 후반에 했던 녹음 방식으로 돌아갔다. 피아노, 베이스, 드럼이 있는 무대로 말이다. 우리는 라이브의 느낌을 원했다.”며 뿌리 찾기를 강조했다. 그는 또한 “오프닝 곡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라이브 연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프로그래밍 음악에 반대하여 직접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회귀하는 것이다”라며 컴퓨터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음악을 하는 요즘 현실을 꼬집었다. 깁 형제들은 또한 함께 곡을 만들고 녹음했던 이전까지의 작업패턴에서 벗어나 ‘따로 또 같이’를 지향했다. 각자 몇 소절씩 부분 완성한 것을 녹음실에 모여 하나의 곡으로 탄생시키고 녹음하는 방식을 택했다. 때문에 곡마다 느낌이 다양하게 전달된다. 초기 스탠더드 팝 스타일의 ‘Technicolor dreams''와 배리의 부드럽게 흐느끼듯 호소하는 창법이 인상적인 리듬 앤 블루스의 ‘The extra mile''같은 곡들이 대변한다. ‘The extra mile''은 원래 이 작품을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지난해 열렸던 시드니 올림픽을 위해 만들어 놓았던 노래라고 한다. 록의 색깔을 짙게 표현한 ‘Voice in the wilderness'', 배리와 로빈의 서로 주고받는 보컬이 애잔한 감성으로 젖어드는 ‘Wedding day'', 뉴 웨이브 향기가 강렬히 풍기는 ‘Deja vu''도 주목할 만한 트랙들이다. 비지스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단상은 형제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하모니와 주옥같은 멜로디이다. 그들은 각종 음악 장르가 활개치는 소리의 진열장 속에서도 이런 강점을 밑거름으로 서정의 속살을 드러내며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왔다. 그들이 40년 넘게 다양하게 펼쳐냈던 로큰롤, 소프트 팝, 리듬 앤 블루스, 디스코 속에도 항상 트리오 특유의 화음과 선율이 생동감 있게 흐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룹 또한 이 점을 잘 알기에 그들은 묵묵히 전진하고 진화했다. 그게 바로 깁 형제들에게 주어진 음악길이다.
도어스라는 밴드를 얘기한다는 것은 한 밴드의 음악에 대한 얘기라기보다는 격동하던 1960년대의 미국사회와 그것을 온몸으로 체화하고 표현한 짐 모리슨이라는 인간에 대한 얘기라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오른손으로 리드 키보드를 왼손으로는 펜더 키보드 베이스를 연주하던 밴드의 음악적 구심점 레이 만자렉과 다른 멤버들이 만들어 낸 음악만으로도 물론 도어스라는 밴드는 음악사에서 지워질 수 없겠지만 그것을 프론트에서 표출... 도어스라는 밴드를 얘기한다는 것은 한 밴드의 음악에 대한 얘기라기보다는 격동하던 1960년대의 미국사회와 그것을 온몸으로 체화하고 표현한 짐 모리슨이라는 인간에 대한 얘기라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오른손으로 리드 키보드를 왼손으로는 펜더 키보드 베이스를 연주하던 밴드의 음악적 구심점 레이 만자렉과 다른 멤버들이 만들어 낸 음악만으로도 물론 도어스라는 밴드는 음악사에서 지워질 수 없겠지만 그것을 프론트에서 표출하던 짐 모리슨은 마치 영혼을 불러내듯 도어스의 음악을 대중들에게 흡입시키는 샤먼이었다. # 1960년대 War & Peace & Love & LSD의 나날 도어스가 등장했던 1960년대는 미국 사회에서 잊혀질 수 없는 격동의 시기였다. 1960년의 쿠바에 대한 수출 금지 조항 제안과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LA 흑인 빈민들이 거주하던 와트시에서의 폭동으로 수백 명이 사상된 사건, 그리고 무엇보다도 1967년부터 거대해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들. 1968년 흑인 인권 운동을 이끌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등 1960년대는 미국 전 후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을 위해 처절하게 시달리고 있던 그야말로 격변하는 역사의 한 중간에 있던 시기였다. 그 속에서 등장한 도어스는 (짐과 레이는 미국 대학 문화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말해지는 UCLA에서 만났다) 당시 그 (특히 젊은이들이 느꼈을)분열과 혼란을 음악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투영해낸 밴드였다. 이 시기는 미국 젊은이들의 음악이 거대한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했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후 침체됐던 분위기를 다시 띄워준 것은 미국이 아닌 영국 밴드 비틀스였다. 그 해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비틀스는 락 음악의 역사에서 ‘영국 침공(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리는 미국 시장 점거를 성공했고, 비틀스는 미국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이어 많은 영국 밴드들이 속속들이 비틀스가 열어 놓은 미국이라는 황금 시장으로 진출하면서 청교도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던 미국의 젊은이들은 자유를 부르짖는 락큰롤의 물결에 휩쓸릴 수 밖에 없었다. 반전의 분위기 속에서 국민 가수의 위치에 오른 밥 딜런은 어쿠스틱 사운드에서 일어나 일렉 기타를 들고서 포크 락이라는 음악으로 저항성을 더욱 극대화시켰다. 딜런은 그저 가수가 아니라 저항의 기수였고, 전쟁 영웅이었으며 또한 시인이었다. 그리고 비치 보이스가 ‘서프 음악’이라고 불리는 걱정 없는 행복한 음악으로 등장한 후 캘리포아는 젊은이들의 상징적인 낙원이 되었고, 그곳에 기반한 많은 밴드들이 등장한다. ‘California dreaming’을 부른 마마스 앤 파파스, ‘Happy together’의 터틀즈, 버팔로 스프링필즈, 버즈 등이 캘리포니아를 근거지로 활동하며 수많은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의 음악을 대변하고 1960년대 음악에 있어 가장 많은 현상을 만들어 낸 도시는 누가 뭐래도 샌프란시스코였다. 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 등 LSD(1966년까지 미국에서 LSD는 합법적인 약물이었다)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이키델릭을 모티브로 인간의 정신과 내면을 노래하던 샌프란시스코의 밴드들은 사랑의 종족인 히피들과 함께 사이키델릭 트립(psychedelic trip)이라고 불리던 공연을 통해 교감을 이루었고, 이렇게 공동체적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샌프란시스코의 음악적 분위기는 LA의 밴드들과 비교할 때 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가 히피와 밴드들과의 (정신적인) ‘무브먼트’의 분위기였다면, LA의 분위기는 일정한 구심점이 없이 개개인의 영감이 중요시되는 분위기였다. LA에서 활동하던 밴드로는 프랑크 자파, 캡틴 빕하트(Captain Beefheart), 캔드 히트, 러브 등을 들 수 있는데, 도어스 역시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밴드였다. # Short Trace Of Doors 1965년 릭 & 레이븐스라는 밴드에서 블루스를 연주하던 레이 만자렉은 UCLA의 필름 스쿨에서 함께 공부하던 짐 모리슨을 베니스에서 우연히 만난다. 당시 자신의 동생인 릭 만자렉, 짐 만자렉과 밴드를 하고 있던 레이 만자렉은 시를 쓰듯 노래하는 짐 모리슨에게 함께 음악을 할 것을 권했고, 당시 LSD와 히피에 영향 받은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시와 산문으로 노래를 만들고 싶어하던 짐 모리슨은 바로 레이 만자렉의 제안을 받아들여 함께 음악을 시작하게 된다. 여기에 마하리쉬 요기의 명상회에서 만난 존 덴스모어(사이키델릭 레인저스라는 밴드에서 재즈를 연주하던) 가 가담하고 로비 크루거가 들어오면서 레이의 동생들은 팀을 떠나게 되고, 윌리엄 블레이크와 알도 헉슬리의 작품 < 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 >에서 영감을 얻어 도어스라는 이름의 팀이 만들어진다. 몇 번의 오디션을 보고 런던 포그라는 클럽에 처음 선 도어스는 베이시스트 없이 레이 만자렉이 왼손으로 펜더 키보드 베이스를 연주하며 오른손으로 리드 건반을 연주하는 독특한 사운드로 공연을 시작한다. 정통 블루스와 락의 고전들을 카피하는 것으로 공연을 시작한 도어스는 다분히 실험적인 자신들의 사운드를 만들어 나갔다. 처음 도어스의 공연에서 짐 모리슨은 관객을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 용기를 내서 관객쪽으로 돌아선 짐 모리슨은 멈추려 하지 않았다고. 해서 멤버들은 짐 모리슨이 쏟아대는 처음 듣는 시에 맞춰 즉흥연주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짐 모리슨은 공연 중 노래가 아닌 그때 떠오르는 것들을 쉬지 않고 무대에서 토해냈고, 멤버들은 그에 맞추어 맘껏 즉흥연주를 했다고. 얼마 후 그들은 자신들의 노래로도 유명한 클럽 ‘위스키 어 고고(Whisky A Go Go)’에서 연주를 하게 되면서 조금씩 자신들의 팬을 만들어 갔고, 당대의 유명한 밴드였던 러브, 뎀(Them), 터틀즈, 시즈(Seeds) 등과 같은 무대에 서며 짧은 시간에 짐 모리슨의 카리스마와 도어스의 새로운 사운드는 많은 지지자들을 만들었다. 음악은 독특했지만 실험적이고 거친 무대 매너 때문에 쉽게 계약을 하지 못하던 중 짐 모리슨의 거침없는 무대를 보고 이끌린 잭 홀츠만의 눈에 띄어 도어스는 당시엔 소규모 레이블이었던 엘렉트라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1967년 1월 첫 앨범 < The Doors >를 발표한다. 첫 번 째 음반으로 락 계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도어스는 같은 해 두 번째 앨범 < Strange Days >를 발매하고 도어스와 엘렉트라 레코드는 함께 거물 밴드와 메이저 레코드 회사로 급성장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골치 아픈 녀석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천재적인 영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본능적으로 끓어오르는 그 무언가를 그들의 음악 속에 가지고 있었어요. 뜨겁고 무서운 그 무언가가 그들에게 있었어요"라는 당시 엘렉트라 레코드 회사 관계자의 말과도 같이 당시 반전 분위기와 히피 문화 속에서 도어스의 음악은 다른 사이키델릭 밴드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그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마치 새로운 구세주인양 그들을 따르는 팬들의 숫자도 불같이 퍼져 나갔다. 밴드와 공연의 규모가 커지면서 무대 위에서의 거침없고 즉흥적인 짐 모리슨의 행동 또한 많은 이슈를 만들어 냈다. 1967년 12월 코네티컷 주에서 짐 모리슨은 공연 중 외설적인 말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체포되기도 했다. 점점 커져 가는 밴드의 명성과 쉴 새 없는 공연 등 거대해진 도어스의 덩치에서 오는 정신적인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는지 짐 모리슨의 약물 복용과 술마시기는 더욱 심해졌고, 술에 취한 채 무대에 오르는 일도 빈번했다. 그런 도어스의 무대에는 항상 경찰들이 함께 했다. 자신들의 팬들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으나 국가에서 보기에는 거의 정신 나간 폭도들에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런 중 1968년, 세 번째 앨범 < Waiting For The Sun >을 발표했고, 짐 모리슨의 광기는 점점 심해져만 갔다. 일반 관객들의 상식을 훨씬 뛰어 넘는 무대 위에서의 난폭함과 외설적인 모습에 일부 팬들조차 도어스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할 정도로 짐 모리슨의 거침없는 광기는 날로 더해갔다. 그리고 1969년, < The Soft Parade >의 발매 후 가장 많은 팬들을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다. 마이애미 사건이라고 말해지는 이 일은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에서 공연 도중 지미가 관객들 앞에서 옷을 벗은 일이다. 이 일로 인해 외설죄로 체포된 짐 모리슨은 재판에 회부되고 결국 보석으로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이후 미국 여러 도시에서는 외설적인 행동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일정이 잡혀 있던 많은 공연이 최소 됐고, 이 일은 짐 모리슨에게는 정신적인 압박이었고, 다른 멤버들에게는 짐에 대한 불만을 쌓이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1970년, < Morrison Hotel >을 발매하고 이어 같은 해 7월 짐 모리슨의 카리스마와 도어스의 즉흥적인 연주의 느낌이 살아 있는 라이브 앨범 < Absolutely Live >를 발매하며 쉽게 멈추지 않는 라이브 밴드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다음 해인 1971년의 < LA Woman > 발매 후, 끊이지 않는 마약 복용과 쉬지 않고 마셔 대는 술 때문에 자기 파괴 속으로 가라앉아만 가던 짐 모리슨은 결국 팀을 나와 자신의 애인 파멜라와 파리로 떠난다. 그 곳에서 짐 모리슨은 자신이 바라던 시인의 모습으로 시작 활동을 하며 < The Lizard >와 < The New Creatures >라는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한다. 그리고 짐 모리슨의 시를 좋아하며 그를 시인으로 사랑하던 여인 파멜라와 파리에서 지내던 짐 모리슨은 < LA Woman >과, 두 권의 시집이 발표된 그 해 7월, 자신의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그의 사인은 그와 함께 1960년대의 3J로 불리는 제니스 조플린과 지미 헨드릭스과 마찬가지로 약물에 의한 심장마비였다. 그의 사망 이후 나머지 멤버들은 짐 모리슨 없이 < Other Voice >, < First Circle >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영적 매개체인 샤먼이 없어진 도어스의 음악은 더 이상 이전처럼 관객들에게 흡입될 수 없었다. 결국 도어스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레이의 제의로 도어스는 해체했다. 비록 6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가장 많은 사건과 변화가 끓어 넘치던 그 시기에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도어즈의 음악은 당시의 정신을 가장 잘 표상화한 음악이자 철학이었고 하나의 종교였다. 그리고 짐 모리슨에게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그에게 있어 시와 음악은 종교였고, LSD와 알콜은 성수였으며, 그 자신은 그것을 이끄는 샤먼이었던 것이다.
밴드 : Electric Light Orchestra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O.)
1968년 영국 임페리얼 대학의 학생이었던 브라이언 메이(Brian May)와 팀 스타펠(Tim Staffell)은 밴드를 만들기로 결의했고, 학교 게시판 광고를 보고 찾아온 젊은 의학도 로저 테일러(Roger Talyor)와 함께 스마일(Smile)이라는 트리오를 결성했다. 그러나 레코드사의 지원 부족으로 1970년에 스마일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전부터 스마일의 멤버들과 친했던 프레디 벌서라(Freddie Bu... 1968년 영국 임페리얼 대학의 학생이었던 브라이언 메이(Brian May)와 팀 스타펠(Tim Staffell)은 밴드를 만들기로 결의했고, 학교 게시판 광고를 보고 찾아온 젊은 의학도 로저 테일러(Roger Talyor)와 함께 스마일(Smile)이라는 트리오를 결성했다. 그러나 레코드사의 지원 부족으로 1970년에 스마일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전부터 스마일의 멤버들과 친했던 프레디 벌서라(Freddie Bulsara)는 로저, 브라이언과 함께 새 밴드를 만들기로 하고 그의 이름을 머큐리(Mercury)로, 밴드의 이름을 퀸(Queen)으로 바꾸었다. 세 명의 베이스주자가 퀸을 거쳐 갔고, 1971년 2월, 존 디콘(John Deacon)은 퀸의 네 번째 멤버가 되었다. 1972년에는 트라이던트(Trident)와 계약을 맺었고, 낮은 수당만을 받으며 스튜디오가 비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녹음한 첫 앨범을 1973년 7월 발매하였다. 퀸의 첫 메이저 투어는 모트 더 후플(Mott The Hoople)의 서포트 밴드 자격으로 1973년 11월 영국 리즈(Leeds)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74년 3월, 재킷의 인쇄 문제를 수정하라는 밴드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예정보다 늦게 2집 < Queen II >가 발매되었다. 1974년 3월, 밴드는 자신들이 주인공인 첫 번째 영국 투어에 착수했고, 4월에는 ‘모트 더 후플’의 서포트 밴드로서 첫 미국 투어에 들어갔다. 5월에 간염으로 쓰러졌던 브라이언이 휴식과 녹음을 병행하며 참여해 만들어낸 세번째 앨범 < Sheer Heart Attack >이 발매된 것은 그 해 11월이었다. 앨범은 유럽과 북미 양쪽에서 엄청나게 히트했고, 사람들은 퀸이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이 되어버렸음을 알아차렸다. 싱글로 발표된 ‘Killer Queen’은 영국차트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이듬해에는 미국 팝 차트에도 진출, 12위라는 호성적을 기록했다. 1975년 1월, 퀸은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미국 투어에 나서, 1일2회 공연해도 매진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4월에는 최초로 일본 방문길에 올랐으며, 공항에는 3천명의 팬이 몰려 나와 열광적으로 그들을 환영해 밴드를 놀라게 했다. 6월에는 새 앨범 < A Night At The Opera >의 작업에 착수, 불공정한 트라이던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존 레이드(John Reid)와 새로운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다. 사람들은 신곡 ‘Bohemian rhapsody’는 너무 길어 히트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으나, 곡에 매료된 디제이 케니 에버릿(Kenny Everett)이 프레디에게 개인적으로 받은 홍보용 싱글을 이틀 동안 열네 번 방송에 내보냈다. 곡은 어마어마한 히트를 했고, 퀸을 정상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곡의 홍보를 위한 뮤직비디오는, 이후 뮤직비디오 대유행의 효시로 간주되었다. 싱글은 9주 동안이나 영국차트 1위에 머물렀다. < A Night At The Opera >의 제작비는 당시 최고 수준이었고, 1975년 11월에 발매가 되자 큰 히트를 기록하여 퀸에게 최초의 플래티넘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표지에는 프레디가 첫 앨범을 위해 만들었던 퀸 로고를 재 작업하여 사용하였다. 이 앨범에선 미국 차트 9위에 오른 ‘Bohemian Rhapsody’에 이어 존 디콘이 쓴 ‘You’re my best friend’(영국 7위, 미국 16위)가 히트했고 국내에서는 두 곡 외에도 프레디 머큐리가 쓴 아름다운 발라드 ‘Love of my life’가 폭발적으로 애청되었으며 브라이언 메이 작품인 ‘39’도 줄기차게 전파를 탔다. ‘Love of my life’가 퀸의 한국 최고 레퍼토리가 된 데는 ‘Bohemian rhapsody’가 공륜으로부터 허무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처분을 받아 라이선스 앨범에 수록되지 못한 덕(?)도 작용했다. 1976년 1월, 프레디는 ‘Bohemian Rhapsody’로 아이버 노벨로(Ivor Novello)상을 ‘Killer Queen’에 이어 다시 한번 수상했다. 또한 밴드는 세 번째 미국 투어를 시작하여 3월에 끝내고 향일(向日), 다시 열광적인 환대를 받았다. 당시 넉 장의 퀸 앨범 모두가 영국차트 20위권에 머물러 있었고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대규모 일본 투어를 끝내고 호주로 가서 < Down Under(호주) >라는 제목의 순회공연을 벌였다. 다음 앨범인 < A Day At The Races >의 작업에 들어가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녹음을 중단하고 짧은 영국 투어에 착수했다. 1976년 9월18일, 퀸은 팬들을 향한 감사의 뜻으로 런던의 유명한 하이드파크에서 대규모 무료공연을 열었다. 청중은 15만-20만 명 사이로 추산되어 현재까지도 하이드파크에서 열린 공연의 최다 관객동원기록으로 남아 있다. 밴드는 9월부터 새 앨범작업에 열성적으로 임해, < A Day At The Races >는 12월에 발매되었다. 앨범의 홍보를 위해서 특별 경마가 열리기도 하였다. 발매되기 닷새 전에 < A Day At The Races >의 예약주문은 50만장을 넘어섰고, 그것은 당시 EMI 음반사 초유의 쾌거였다. 이 앨범의 싱글은 ‘Somebody to love’(영국 2위, 미국 13위), ‘Tie your mother down’(영국 31위, 미국 49위) 그리고 첫 EP의 리드트랙이었던 ‘An old-fashioned lover boy’(영국 17위) 등이었지만 국내에서는 ‘Bo rap’을 연상시키는 ‘Millionaire waltz’를 비롯해 ‘You take my breath away’, ‘You and I’도 애청되었다. 1977년 초반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투어를 했다. 그 즈음에 로저는 자비로 솔로 싱글을 녹음하기로 결심하고 ‘I wanna testify’를 8월에 발매하였다. 그해 5월에는 대규모 유럽 투어를 시작하기 위해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날아갔다. 런던 얼스 코트(Earls Court)에서의 콘서트에는 초대형 왕관모양의 조명이 등장했다. 폭 54피트, 높이 26피트, 무게 5천 파운드로 제작비는 무려 5만 파운드였다. 그해 10월, 팬클럽 멤버들은 처음으로 퀸의 뮤직 비디오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We are the champions’의 촬영이 끝난 후, 출연해준 팬들을 위해 즉흥 공연을 벌였다. 같은 달인 10월, ’Bohemian Rhapsody’로 52년부터 77년까지 발표된 영국 싱글 가운데 최우수 싱글에 주어지는 브리태니어 상(Britannia Award)을 ‘A whiter shade of pale’의 프로콜 하럼(Procol Harum)과 공동 수상했다. 그달 28일 ‘We are the champions’가 수록된 신보 < News Of The World >가 나왔다. 로저는 한 과학소설 삽화가의 작품을 앨범 표지로 사용해도 되는지 물어보았고, 작가는 흔쾌히 승낙하고 수정까지 해주었다. 재정상태가 좋아져 자가용 비행기를 구입해서 그해의 두 번째 투어를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12주 동안 프랑스 차트 1위를 점령한 ‘We are the champions’에 이어 ‘We will rock you’가 1위 행진을 시작했다. ‘We are the champions’는 영국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미국에서는 ‘We will rock you’와 함께 더블 A면 싱글로 발표되어 밴드 최초의 플래티넘(100만장판매) 영광을 안으며 4위에 올랐다. 이 무렵 한국에서 퀸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해 앨범 < News Of The World >에서 ‘We will rock you’와 ‘We are the champions’ 외에 ‘Spread your wings’ ‘All dead all dead’ ‘Who needs you’ ‘My melancholy blues’ 등 다수 트랙이 음악다방을 완전히 잠식할 정도였다. 1978년 2월, 퀸은 그들 스스로의 매니지먼트 체계를 갖추기로 결정하고 존 레이드와의 계약을 종료했다. 퀸의 기준에서 보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유럽 투어가 1978년 4월에, 이번에도 스톡홀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7월에는 새 앨범 작업에 착수했는데, 처음으로 영국이 아닌 스위스 몬트뢰(Montreux)와 프랑스에서 작업하였다. 신곡 ‘Bicycle race’의 홍보를 위해 밴드는 윔블던 스타디움(Wimbledon Stadium)을 빌렸고, 50명의 나체 여성이 자전거 경주를 벌였다. 싱글의 오리지널 커버에는 경주에 나온 한 여성의 뒷모습이 나와 있었는데, 일부 국가에서는 사람들의 항의로 말미암아 팬티를 그려 넣어야 했다. 그해 11월 신보 < Jazz >를 발매했다(영국 2위). 재킷에는 나체 자전거경주 포스터가 들어 있었다. 미국에서는 반대에 부딪혀서, 신청서를 대신 넣어 우편으로 포스터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밴드는 앨범 발매 축하파티에 EMI와 일렉트라(Electra) 두 음반회사의 중역들을 동시에 초대했는데, 양측은 서로 세를 과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파티는 진흙탕 레슬러, 난장이, 반라의 웨이트레스가 등장하는 기괴한 스타일이었다. 이 앨범에선 더블 A 싱글 ‘Bicycle race/ Fat bottomed girls’(영국 11위, 미국 24위)와 지금도 라디오전파를 수놓는 ‘Don’t stop me’(영국 9위, 미국 86위)가 크게 히트했다. 12월 북미 투어가 끝나고 영국으로 돌아간 퀸은 이듬해 첫 달부터 유럽 투어에 들어갔고 이를 끝마치자마자 라이브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부틀렉이 유통되는 등 대중적인 수요 때문에 미룰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1979년 6월 마침내 첫 라이브 앨범 < Live Killers >가 발매되었다. 일본 투어와 영국 투어를 끝낸 그들은 그 해 크리스마스 다음날 밤 캄보디아를 돕기 위한 자선 콘서트를 하였다. 1980년 6월 퀸 최초로 신디사이저를 사용한 < The Game >이 발매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로커빌리 싱글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가 최초로 빌보드 정상을 점령했다. 이어 펑키한 리듬이 특징적인 두 번째 싱글 ‘Another one bites the dust’도 빌보드 차트의 팝을 위시해 소울, 디스코, 록 차트에서 모두 1위에 오르는 일대 기염을 토하며 앨범의 세계적 폭풍을 이끌었다. 12월에는 영화 사운드트랙인 < Flash Gordon >이 발매되었고, 그 해까지 퀸이 전세계에 판매한 앨범 수는 4천 5백만 장으로 기록되었다. 1981년에는 남미 투어를 감행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8일 동안 다섯 차례나 거대한 스타디움 공연을 매진시켰고, 이어 브라질에서는 하룻밤에 13만 명, 이틀 동안 25만 명이 넘는 유료관객을 동원했다. 이것은 단독밴드로서는 당시 최고 기록이었다. 투어 내내 아르헨티나 차트에는 퀸의 모든 앨범이 10위권에 들어 있었다. 퀸이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남미에서의 스타디움 투어를 처음으로 해내자, 이후 딴 밴드들의 남미 순회공연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한편, 로저는 첫 솔로 앨범 < Fun In Space >를 발매하였다. 세계 최초의 프로모션 비디오 모음집인 < Greatest Flix >와 사진집 < Greatest Pix >, 히트곡 모음 앨범 < Greatest Hits >가 동시에 발매되었는데, < Greatest Hits >는 발매 이래 영국 차트 밖으로 밀려난 적이 거의 없을 만큼 스테디셀러를 기록했다. 1982년에는 유럽 투어 도중에 12번째 앨범 < Hot Space >를 발매했고, 이 무렵 일본에서는 스마일의 < Gettin’ Smile >이라는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다. 12월에는 가장 급료가 높은 경영자로 기네스북에 올라 화제가 되었다. 1983년 1월, 프레디와 로저는 각각 첫 번째와 두 번째 솔로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브라이언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에드워드 밴 헤일런을 비롯한 친구들과 모여 잼 세션을 했는데, 그것을 정리해서 < Star Fleet Project >라는 미니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8월부터는 다음 앨범 녹음작업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하였는데, 미국에서 녹음한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 1984년 2월, 13번째 앨범인 < The Works >를 발매하였고 첫 싱글 ‘Radio ga ga’는 19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영국 2위, 미국 16위). 뮤직 비디오에 팬클럽 회원들이 출연하였고 여기서 보여준 박수치는 동작은 각국의 퀸 공연에서 재연되었다. 두 번째 싱글 ‘I want to break free’의 뮤직 비디오는 영국의 유명한 드라마를 패러디했는데, 멤버 모두가 우스꽝스런 여장을 하고 등장했다. 곡은 영국 3위, 미국 45위를 기록했다. 한편, 3월에 로저와 존은 관광차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한국에 퀸 팬클럽이 결성되어 수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6월에는 로저의 두 번째 솔로앨범 < Strange Frontier >가 발매되었고, 길드 기타(Guild Guitars)가 브라이언의 기타인 레드 스페셜을 카피한 기타 모델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8월에는 벨기에에서부터 투어를 시작하는데, 10월 보츠와나 공화국의 남아공 백인정부가 건설한 선 시티(Sun City) 공연에 출연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밴드는 자신들은 비정치적 밴드이며 단지 사람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러 간 것일 뿐이라고 항변했으나, 남아공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흑인차별정책)에 대한 세계적 비난여론에도 불구하고 선 시티에 갔다는 맹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9월에는 1981년 몬트리올 공연을 촬영한 비디오 < We Will Rock You >가 발매되었고, 영국 차트 탑 200에 아홉 개의 앨범을 올려두어 여전한 퀸의 인기를 증명했다. 1985년에는 록 인 리오(Rock In Rio)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출연한 모든 밴드의 공연이 방송을 위해 녹화되었으나, 퀸만이 실황 비디오를 발매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프레디의 첫 번째 솔로 앨범인 < Mr. Bad Guy >가 호주 투어 중에 발매되었고, 이어진 일본 투어 중 한 공연이 촬영되어 일본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다. 7월의 라이브 에이드(Live Aid)는 퀸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퀸은 주어진 20분간 완벽한 쇼를 선보였고, 언론과 관객은 전체 공연을 ‘훔친’(stole) 밴드로 퀸을 꼽았다. 밴드는 새로운 활력을 얻었고, 이 때 얻은 영감으로 영화 < 아이언 이글 >(Iron Eagle)의 사운드트랙에 삽입된 곡 ‘One vision’(영국 7위)을 녹음하여 출시하였다. 1986년 3월, 존 디콘은 이모털즈(The Immortals)를 결성하여 영화 < 비글즈 >(Biggles)를 위한 곡 ‘No turning back’을 녹음, 발매한다. 6월에는 불사의 종족에 대한 판타지영화 < 하이랜더 >(Highlander)의 음악을 맡아, 몇 곡을 추가하고 재편곡을 거쳐 < A Kind Of Magic >이라는 제목으로 열네 번째 앨범을 발매하여 영국차트 정상을 밟았다. 6월부터는 유럽투어에 돌입하여 런던의 웸블리(Wembley) 스타디움에서 이틀간 매진을 기록하며 절정의 열기를 과시했다. 촬영된 둘째 날의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은 훗날 영국 전역에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동시에 방송되었다. 7월의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연은 동구권 최초의 메이저 록 밴드 공연이었고, 역시 전석 매진되었다. 헝가리 전역의 35mm 카메라를 징발해 촬영된 공연은, 12월에 부다페스트에서 영화로 상영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유럽 전역에서 백만 명, 영국에서만 40만 명이 관람한 유럽 투어는 12만 명이 운집한 네브워스 파크(Knebworth Park) 공연으로 마무리되었다. 11월에는, 퀸의 전 앨범이 동시에 시디로 발매되었는데, 이 역시 초유의 일이었다. 12월에 발매된 라이브 앨범 < Live Magic >은 영국 차트 3위에 올랐다. 1986년 그해 1년간 퀸이 영국에서 판매한 앨범은 총 1,774,991장이었다. 1987년 2월, 프레디 머큐리는 플래터스(Platters)의 명곡 ‘The great pretender’를 리메이크해 영국차트 4위에 올려놓았다. 3월에 그는 평소 흠모했던 오페라 디바 몽세라 까바예(Montserrat Caballe)를 바르셀로나에서 만나 앨범을 녹음하기로 한다. 9월에 발매된 싱글 ’Barcelona’는 스페인에서 3시간 만에 10000장이 팔려나갔다. 로저는 8월, 퀸의 휴식기에 함께 활동하기 위한 새 밴드 크로스(The Cross)의 멤버를 구하기 위한 광고를 냈다. 12월에는 다큐멘터리 비디오 < The Magic Years >가 발매되어 여러 상을 수상하였다. 1988년 1월이 되자 퀸은 새 앨범 작업에 착수하였고, 한편으로 크로스는 데뷔 앨범 < Shove It >을 발매하였다. 10월 8일 프레디와 몽세라 까바예는, 스페인의 왕과 왕비가 참석한 올림픽 행사에서 이틀 후에 나올 앨범에서 고른 세 곡을 협연하였다. 12월 4일, 크로스는 팬클럽 파티에서 브라이언, 존과 함께 공연을 했다. 1989년 5월 22일에는 < The Miracle >이 발매되어 영국차트 정상에 올랐다. 앨범에 앞선 싱글 ‘I want it all’은 영국차트 3위(미국 50위)에 올랐고 연이어 ‘Breakthru’(영국 7위) ‘The invisible man’(영국 12위) ‘Scandal’(영국 25위)이 차트를 장식했다. 수년간 하지 않았던 합동 인터뷰를 위해 라디오에 출연하는가 하면, ‘인디펜던트 텔레비전’의 시청자 투표에 의해 ‘80년대 최고 밴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11월에는 < The Miracle >의 대성공에 고무된 멤버들이 다음 앨범 작업을 위해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1990년 2월18일에는 영국 음향 산업(British Phonographic Industry, BPI)으로부터 ‘영국 음악에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BPI상을 받았다. 크로스는 3월26일 2집 < Mad: Bad: And Dangerous To Know >를 발매하고 독일에서 공연을 가졌다. 브라이언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고 제작했으며 11월에는 할리우드 레코드사와 계약하여 북미에서 전 앨범을 리마스터해서 재발매하기로 했다. 12월7일에 크로스는 퀸 팬클럽 파티에서 연주하였는데 앙코르무대에서 브라이언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1991년 1월 14일에는 ‘Innuendo’를 싱글로 발매하여 데뷔와 동시에 영국차트 1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동명의 앨범이 2월 4일 발매되어 역시 영국차트 1위를 차지하였다(미국에서는 30위). ‘I’m going slightly mad’ ‘Headlong’ ‘The show must go on’ 등 이어진 싱글들도 영국에서 각각 22위, 14위, 16위에 오르며 분전했다. 3월에는 크로스가 세 번째 앨범작업에 들어갔고 브라이언은 솔로 앨범 제작을 위해 7월에 몬트뢰로 날아갔다. 같은 달에 크로스의 앨범 < Blue Rock >도 완성되어 9월 초에 독일에서만 발매되었다. 퀸은 4월에 런던으로 돌아가 다시 다음 앨범 작업에 돌입했다. 5월30일에는 프레디는 마지막 출연작이 된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였다. 10월에 브라이언은 세빌 기타 레전드(Seville Guitar Legends) 페스티벌에서 누노 베텐코트, 스티브 바이, 조 새트리아니 등과 공연(共演)했다. 같은 달에 < Greatest Hits II >가 발매되었다. 이번에도 비디오 모음집과 사진집을 함께 발매하였다. 앨범과 비디오 모음집은 여지없이 1위에 올랐다. 1991년 11월23일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 환자임을 갑작스럽게 세상에 알렸고, 그 다음날 친구들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세계는 충격에 빠지고 각국의 팬들이 애도의 꽃과 카드를 보냈으며 프레디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조로아스터교 신자인 부모의 뜻에 따라, 프레디의 장례식은 세상을 떠난 지 3일 후에 조용히 화장으로 치러졌다. 4월에는 브라이언이 포드 자동차를 위한 광고음악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고 ‘Driven by you’를 써서 11월25일에 싱글로 발매, 영국차트 6위를 기록했다. 프레디의 마지막 바람이었던 에이즈와의 투쟁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위해 싱글 ‘Bohemian rhapsody/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가 발매되어 5주간 영국차트 1위에 올라 100만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12월에는 퀸의 앨범 10장이 영국 차트 100위권에 랭크되었다. 1992년 2월, 브릿 어워드(BRIT awards)에서는 ‘영국 음악에 크게 공헌’한 바를 인정하는 특별상을 수여하였고,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를 ‘1991년 베스트 싱글’로 선정하였다. 수상식에서 로저와 브라이언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프레디의 삶을 기리기 위한 콘서트를 할 것임을 알렸다. 공연에 누가 나오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다음날 표가 판매되기 시작하였고, 72,000장의 표는 단 6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4월20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는 세계 최고의 스타들이 모여 프레디를 추모했다. 스타디움은 꽉 찼고, 수십억의 사람들이 시청했다. 여름에는 이 공연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머큐리 피닉스 트러스트(The Mercury Phoenix Trust)가 설립되었다. 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의 비디오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발매되었다. 4월에는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로 아이버 노벨로(Ivor Novello)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92년 9월에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브라이언의 솔로 앨범 < Back To The Light >이 발매되어 영국차트 6위에 오르고 판매량에서 더블 골드를 기록했다. 브라이언은 11월의 남미 투어를 시작으로 북미와 유럽, 일본 등 월드투어를 이듬해까지 지속했다. 1993년에는 영국차트 1위를 차지한 프레디의 ’Living on my own’이 아이버 노벨로 상을 수상하였다. 1994년에는 브라이언 메이 밴드가 브릭스톤 아카데미(Brixton Academy)에서의 실황을 라이브 앨범으로 내놓았다. 같은 해 9월에는 로저가 세 번째 솔로 앨범인 < Happiness? >를 선보였다. 1995년에는 브라이언, 로저, 존이 퀸의 마지막 정규앨범 < Made In Heaven >을 완성하여 전 세계적으로 발매하였다. 1996년 3월, 국내 PC통신 나우누리에 퀸 팬클럽 ‘퀸사모’가 개설되었다. 한국에 개설된 최초의 온라인 퀸 팬클럽이었고, 80년대의 퀸 팬클럽이 1987년 초에 마지막 공식 컨벤션을 개최한 이래 9년만의 일이었다. 1997년에 퀸은 ‘Too much love will kill you’로 아이버 노벨로 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프레디에 대한 세 멤버의 추모곡 ’No one but you’가 수록된 편집 앨범 < Queen Rocks >가 발매되었다. 11월에는 한국 최초의 퀸 전문 커버밴드 ‘영부인’(0vueen)이 서울 신촌에서 첫 공연을 하였다. 1998년에는 브라이언과 로저가 각각 솔로 앨범 < Another World >, < Electric Fire >를 발매했고 1999년에는 < Greatest Hits III >가 발매되었다. 2000년에는 10장의 CD와 2장의 DVD로 제작된 프레디 머큐리 박스세트가 발매되었다. 2002년에는 퀸 뮤지컬 < We Will Rock You >가 선보였고, 높은 인기로 유럽 각국에서 2004년 현재까지도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뮤지컬 개막을 축하하는 깜짝 공연이 브라이언과 로저에 의해 네덜란드에서 열려 큰 화제를 모았다. 또한 브라이언과 로저는 뮤지컬 출연진과 함께 영국여왕 즉위 50주년 기념 공연에 참여하여 ‘God save the Queen’을 비롯한 여러 곡들을 연주하여 열띤 호응을 받았다. 한편, 퀸의 곡들을 테마로 작곡된 교향곡이 톨가 카쉬프(Tolga Kashif)의 지휘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기도 했다. 또한 ’Bohemian Rhapsody’가 기네스북이 주관하여 영국인 310,000명이 참여한 ‘시대를 초월하는 최고 싱글‘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04년 현재 존 디콘은 은퇴하여 언론매체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고, 브라이언과 로저는 함께 공연하거나, 퀸 관련 디브이디를 제작하는 등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본 내용은 영국의 공식 퀸 팬클럽에서 만든 공식 전기 < As It Began > 축약본을 다시 축약해 내용을 일부 추가한 것입니다.
일본의 겐쇼 오누키라는 록 음악 해설가는 이 그룹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런던은 불타고 있다. 60년대 록의 꿈이 타버린 죽음의 거리 런던에 갑자기 불꽃처럼 나타난 펑크록이야말로 옛시대의 레퀴엠이고 도래할 신세계의 찬가이다. 클래시는 이 성전을 위해 태어난 도시 게릴라이다. 그들은 불을 토하지 않는다. 다만 독을 토해낼 뿐이다.” 묘사가 너무 거창해서 조금은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룹 이미지를 ‘독’... 일본의 겐쇼 오누키라는 록 음악 해설가는 이 그룹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런던은 불타고 있다. 60년대 록의 꿈이 타버린 죽음의 거리 런던에 갑자기 불꽃처럼 나타난 펑크록이야말로 옛시대의 레퀴엠이고 도래할 신세계의 찬가이다. 클래시는 이 성전을 위해 태어난 도시 게릴라이다. 그들은 불을 토하지 않는다. 다만 독을 토해낼 뿐이다.” 묘사가 너무 거창해서 조금은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룹 이미지를 ‘독’으로 연결지은 부분이 너무 그럴싸해서 일본인의 표현이라는 막연한 거부감을 덮어두고 인용해 보았다. 사실 그들의 음악을 접해볼 기회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들이 독을 뿜어댔다는 오누키 씨의 의견에 동감을 표시할 것이다. 조 스트러머(보칼), 믹 존스(기타), 니키 히든(드럼), 폴 시모넌(베이스)의 4인조 영국 그룹 클래시(Clash). 이들의 가슴에 독이 고이게 된 배경은 70년대 중반 경기 침체, 높은 실업률, 빈부의 갈등, 사회적 혼란 등 당시 영국의 상황에 기인한다. 영국의 청년들은 그 무렵 직장이 없어 생계 자체를 위협받는 절대적 박탈감에 직면하고 있었고, 국가 기강의 흔들림에 따른 경찰과 갱단 등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따라서 클래시의 독은 섹스 피스톨즈의 독과 같았다. 클래시도 피스톨즈처럼 런던 젊은이들의 분노와 한을, 심층에 내재하는 혼돈된 에너지를 격렬한 펑크 사운드로 전환시켜 놓은 그룹이었다. 탄생 배경만 피스톨즈와 같은 연장선상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클래시의 출발 자체가 피스톨즈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리더인 조 스트러머가 런던에서 섹스 피스톨즈의 공연을 구경하고 그만 ‘감동되어’ 펑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그룹(퍼브록 밴드 101`ers)을 탈퇴하여 믹 존스와 함께 클래시를 결성했다. 그리고 76년 12월에는 그 악명높았던 피스톨즈의 ‘대영제국의 무정부 상태’ 순회공연에 오프닝으로 참가, 펑크 물결 확산에 나섰다. 이처럼 피스톨즈의 덕을 보고, 조금 늦게 출발했지만 클래시는 피스톨즈보다 양질의 펑크 음악을 선보여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영국내에서만 삐까뻔쩍했던 피스톨즈와 달리 세계 무대 진출에 성공, 그 존재가 더 널리 알려졌다. 또한 2년 만에 파산한 피스톨즈보다 훨씬 수명이 길었다. 우선 그들이 토해낸 독을 들어보라. ‘흑인들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벽돌을 던지는 데 주저하지 않지. 백인들은 학교에서 둔해지도록 교육되어 모두 하라는 것만 하지. 아무도 감옥에 가길 원하지 않아. 모든 권력은 부자들 손에 있고 우린 너무 겁쟁이들이라 시도조차 못해보고 거리를 배회하는 거야. 백색의 폭동이 있어야 해. 나같은 백인의 폭동이! 지배할 것인가 아니면 지배당할 것인가. 퇴각할 것인가, 전진할 것인가.’ ‘백색 폭동(White Riot)’ 피스톨즈에 대한 클래시의 상대적 우수성은 이 곡 하나로 증명된다. ‘피스톨즈=대영제국의 무정부 상태’라면 ‘클래시=백색 폭동’이라고 할만큼 이 노래는 크래시의 성격을 대변한다. 록 뮤직 관계자들은 흔히 클래시를 “피스톨즈의 한계였던 허무주의의 굴레를 벗고 현실과 밀착하여 투쟁으로까지 치달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들의 노래에서 피스톨즈적인 니힐리즘은 보이지 않는다. 그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현실에서 목격되고 있는 구체적 문제점들 - 이를테면 경찰의 잔학상, 형평을 잃은 법 집행, 정부의 인권 유린, 미국의 유럽 지배, 실업 등 -을 과감히 지적하고 그것들에 대한 시정을 강력히 요구했다. 따라서 크래시의 노래들에는 저항적 선동적 투쟁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났다. ‘난 미국이 너무너무 지긋지긋해. 양키 달러는 세계의 독재들에게 말하지. 아니 사실은 명령하는 거야. 이제 독재자들은 말 한마디 잘못할 수 없지. TV에는 항상 양키 형사들이 나오지. 미국에는 킬러들이 일주일에 7일간 암약하니까 그래. 스타스키를 움직여, CIA를 위해! 코작을 핥아줘. USA를 위해.’ ‘난 미국이 너무 지긋지긋해(I`m so Bored with the USA)’ 스타스키와 코작은 텔레비젼 수사극에 등장하는 명형사들인데(우리나라에도 방영된 바 있다) 클래시는 여기서 군대와 달러와 대중 문화로 유럽을, 아니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을 꼬집으면서 ‘양키 고우 홈!’의 메시지를 던진다. ‘다수의 땀으로 받쳐지는 체제는 소수를 죽여 없애버리려는 암살자들을 낳지. 어떤 곳을 차지하여 그것을 법정이라고 부르자. 이곳은 판사가 서 있을 곳이 아냐. 모든 법관을 고소하고 서류를 불태워버리자!’ ‘지붕위의 총(Guns on the Roof)’ 그들의 투쟁지향성은 음반 제목만으로도 뚜렷이 목도된다. 78년에 발표한 2집 음반 타이틀은 < 그들에게 충분한 자유를(Give` em Enough Rope) >이었고, 80년에는 미국의 중남미 내정 개입을 비판하려는 취지에서 당시 니카라과의 친미적 콘트라 반군과 싸운 좌익 민족해방전선인 ‘산디니스타’를 음반제목으로 내걸기도 했다. 82년도 음반은 숫제 < 투쟁의 록(Combat Rock) >으로 붙였다. 79년 말에 선보인 걸작 음반 < 런던의 부름(London Calling) >에도 그러한 경향은 유지되었다. 여기 수록된 ‘스페인 전쟁(Spanish Bombs)’이란 곡에서 클래시는 1939년 스페인 내전 당시 독재자 프랑코 대통령과 싸운 대중들을 자유의 전사로 찬양했고 ‘브릭스톤의 총(The Guns of Brixton)’을 통해서는 자메이카 흑인 빈민 지역에 대한 정부의 폭동 진압에 강한 반발을 표출했다. ‘그들이 네 정문을 박차고 들어왔을 때 너흰 어찌할 것인가. 손을 머리에 올리고 항복할 것인가 아니면 총을 쏘며 대항할 것인가. ... 우릴 억누를 수 있어.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어. 하지만 당신네들은 브릭스톤의 총에 응답해야 할 거야.’ ‘브릭스톤의 총’ 이 곡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클래시는 당시 영국에 만연되어 있던 ‘인종차별’을 가장 반민주적인 형태로 규정하고 노래 운동의 전부를 이의 종식에 걸었다. 그리하여 78년 하반기에는 동료 펑크 가수들인 엘비스 코스텔로, 탐 로빈슨 등과 함께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록’(Rock Against Racism) 운동을 주도했다. 이 운동은 60년대 록 음악의 정신, 이른바 ‘저항 정신의 부활’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담긴 움직임이었다. 클래시는 60년대의 정신이 화석화되지 않고 후대 록 음악인에게 면면히 계승되고 있음을 실증했다. 이들은 이념적으로 좌파의 경향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조 스트러머는 저 유명한 이탈리아의 좌익집단 < 붉은 여단 >의 신파라며 스스로 좌익임을 공언했다. 초창기 공연 때는 ‘레드’라고 쓰인 완장을 착용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클래시의 색깔과 장외의 움직임은 즉각 우익 진영의 궐기를 불렀다. 우익 쪽에서는 영국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여 제모순을 걸고 넘어지고 따라서 민중에게 설득력을 발휘한 클래시를 가장 두려워했다. 그무렵 대표적 극우집단은 신나치 사상을 표방한 < 구국 전선 >(National Front)이었는데 블랙리스트에 첫 번째로 올린 격파 대상이 다름아닌 클래시였다. 이 집단이 발행하는 선전용 책자 『영국의 애국자』는 77년 클래시를 현재 록 그룹 가운데 가장 좌익이라고 분류하여 독자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고는 “그들의 공연 포스터를 깡그리 벽에서 뜯어내 원래 그것들이 있어야 할 곳인 시궁창에 처박자”고 제창했다. 79년에는 우익의 청년들도 덩달아 궐기하여 < 청년 구국전선 >을 결성, 펑크 진영의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록’운동에 맞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록’운동을 전개했다. 반인종주의가 졸지에 공산주의로 몰린 것이었다. 이런 우익 쪽의 록 밴드로는 ‘벤츠’, ‘칼럼 44’, ‘비극의 정신’ 등이 있었으며 < 백인의 힘 >, < 지배인종 >, < 빨갱이를 몰아내자 > 등과 같이 타이틀만으로도 색깔(?)이 확연히 드러나는 노래를 발표했다. 이처럼 클래시는 적대 집단으로부터 철저히 빨갱이로 취급받았다. 클래시는 또한 이름이 나기 시작한 77년 이후부터 경찰의 교묘한 방해 공작에 낸 시달려야 했다. 첫 순회공연(공연 제목이 < 백색 폭동 >) 때 경찰은 ‘특별한 이유 없이’ 순회공연 버스를 반복해서 가로막았고 호텔 키 반납을 잊어먹었다고 벌금형을 내리기도 했다. 보잘것없는 작은 절도 용의 또는 연습장 주위의 주택으로부터의 소음 고발에도 경찰은 촉각을 곤두세웠고 권총으로 호텔에서 레이스 중인 비둘기를 쏘았다고 해서(분명히 잘못한 것이지만) 헬리콥터가 출동하고 무장경찰이 두 멤버를 체포하는 등 난리 법석을 피운 일도 있었다. 79년에는 경찰이 펑크록의 전당인 ‘사운드홀 뮤지션 협동조합’에 쳐들어와 악기와 음향 시스템을 박살내버린 일이 있었는데, 클래시는 자선공연을 기획해 부서진 물품을 새로 구비하고도 남을 많은 기금을 마련해 피해 공연장에 기증, 팬들로부터 통쾌한 보복이었다는 칭찬을 받았다. 클래시는 어느 그룹보다도 펑크의 정신을 잘 소화했지만 섹스 피스톨즈가 실패했던 ‘해외 음악 보급’이나 펑크가 대체로 놓치기 쉬웠던 ‘음악적 완성도’의 추구에도 발군의 성과를 거두었다. 엄밀히 말해서 클래시는 피스톨즈보다는 음악 보급의 환경에 관한 한 운이 좋았다. 피스톨즈는 메이저 레코드사들에게 연이어 ‘물먹었지만’ 클래시는 첫 음반부터 메이저인 CBS 레코드의 영국지사로부터 20만 불이라는 엄청난 선금을 받고 그 회사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미국의 배급업자들이 너무 조잡하다고 무시하는 바람에 미국 진출에 쉽지는 않았지만 클래시는 끊임없이 미국의 문을 두드렸다. 이러한 자세는 ‘미국이 너무 지긋지긋하다’는 애초의 반미적 경향과는 상반되는 것이어서 의구심을 부르기도 했지만 그들의 입장에는 나름대로 논리가 있었다. 믹 존스의 주장을 들어보자. “우리가 좀더 가지를 뻗치려면 더 많은 사람에게 접근해야 한다. 우린 마침내 똑같은 팬만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많은 10대들이 음반을 듣게 된다면 가사를 읽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그로부터 무언가 배우게 될 것 아닌가.” 이는 곧 자신들의 급진적 메시지를 더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라도 음반 유통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과 직결되었다. 그들의 꾸준한 시도는 마침내 미국의 빗장을 풀어 79년부터 미국에서 클래시의 인기는 급등하기 시작했다. < 타임 >지는 70녀대의 앨범 베스트 10의 하나로 < 그들에게 충분한 자유를 >을 선정했고, < 롤링 스톤 >지는 80년 그들을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음반 판매도 상승국면을 타 82년 < 투쟁의 록 >은 1백만 장 이상이 팔려 플래티넘 음반을 기록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이 음반에서는 또 최초의 미국 싱글 차트 10위권내 진입곡인 ‘카스바를 록으로(Rock the Casbah)’가 나왔다. 음악적 측면에서도 그들은 A학점이었다. 펑크는 신시사이저나 관악기를 쓰지 않고 사운드의 ‘최소주의’를 지향, 시끄럽고 지루한 맛을 주는 약점을 지녀 전세계 대중으로부터 변함없이 사랑받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클래시는 펑크의 공간(時空)적 핸디캡을 해소키 위해 자메이카의 레게를 접목시키는 등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했다. 클래시는 레게 음악이 ‘저항 음악’이라는 점에서 펑크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이해했고 그래서 적극적인 수용 자세를 보였다. 그들의 데뷔 앨범에는 ‘경찰과 도둑(Police and Thieves)’이라는 레게풍의 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노래의 오리지널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인 리 페리는 클래시버전을 듣고 그만 감격해 그들의 사진을 자메이카 스튜디오에 걸어놓았을 정도였다. 당시 레게를 가장 잘 소화한 백인 뮤지션이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클래시가 섹스 피스톨즈의 후발주자였으면서도 장기간 활동하고 더 널리 인정받았던 이유도 바로 이같은 음악적 수준을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실로 피스톨즈가 ‘펑크의 시작’이었다면 클래시는 ‘펑크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세계적 성공을 거둔 82년부터 멤버들 간에 어색한 기류가 맴돌아 그 해 니키 히든이 정치적 견해차를 이유로 그룹을 떠났고 이듬해에는 조 스트러머와 작사 작곡 콤비로 사실상의 기둥이었던 믹 존스가 탈퇴했다. 믹은 클래시 이후 자신의 새 그룹 ‘빅 오디오 다이나마이트’를 결성하여 다이나믹한 활동을 펼쳤으나 날개 한 쪽을 잃은 조 스트러머의 클래시는 추락을 거듭했다. 클래시는 85년 < 컷 더 크랩(Cut the Crap) > 앨범을 발표해 건재를 과시했지만 음반 평가는 빅 오디오 다이나마이트의 작품보다 나빴다. 그룹의 명성은 나날이 퇴조했고 결국 86년에 해산되어버렸다. 스트러머는 믹 존스 탈퇴시 “그는 스튜디오에 오려고 하지도 않고 휴일에는 쉬려고만 하는 등 더 이상 밴드의 이상에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축출하게 됐다”며 불화의 책임을 믹에게 돌렸으나, 86년 클래시 해산 후 영국의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지와의 인터뷰에서 그 책임이 실은 자기에게 있었다고 고백하고 독자들에게 잘못을 공개 사과했다. 그 무렵 조와 믹은 2년간의 적대 감정을 씻고 해후하여 옛날처럼 같이 작품을 쓰는 등 우정을 회복했다. 뒤늦게나마 클래시의 대미를 멋지게 장식한 것이었다. 친구사이는 원래 그런 것이고 또 그렇게 돼야 한다! 10년간을 휘몰아치며 파시즘과 인종주의에 맞서 분연히 투쟁한, 그리고 펑크의 틀을 완성시킨 클래시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클래시의 펑크 정신은 여전히 위력적이며 세계 각국의 청년 록 팬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믹 존스는 자신들의 음악을 ‘계몽’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들은 펑크를 단순한 욕구 분출의 차원에서 하나의 힘으로, ‘사회변동의 유효한 도구’로 끌어올렸다. 그리하여 무수한 젊은이들의 미몽을 깨뜨리는 역할을 해냈다. ‘이 음악은 국가를 휘젓는 거지. 이 음악은 센세이션을 야기시키는 거야. 어머니에게 말해. 아버지에게 말해. 모든 게 잘될 거라고. 이것은 혁명의 록이지. 난 충격의 상태야.’ ‘혁명의 록(Revolution Rock)’ 이 노래처럼 그들의 음악은 계몽이 아니라 실상은 혁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펑크의 팬들은, 클래시의 매니아들은 그렇게 단정하고 싶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 투쟁의 록 >에 수록된 클래시의 골든 레퍼터리 중 하나인 ‘권리를 알라(Know your Right)’를 통해 그들이 젊음을 향해 외친 권리 선언을 들어보자. ‘이것은 기타에 의한 공공방송이다. 제군들은 자신들의 삼권(三權)을 알라. 제1조, 너희는 살해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제2조, 너희는 먹고 돈쓸 권리가 있다! 제3조, 너희는 벙어리가 아닌 한 자유롭게 말할 권리가 있다!’ 노랫말이 아닌 마치 시위대가 피켓에 적어 부르짖는 듯한 내용. 이런 가사를 담은 대중 가요를 그대는 지금껏 들어본 기억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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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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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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