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문제는 우리가 포스트휴먼이 될 것인가가 아니다.
포스트휴먼은 이미 도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포스트휴먼이 되느냐이다.
과연 인간은 이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사고할 수 있는 존재인가?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는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가상 실험을 하나 소개한다.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이 제안한 실험인 〈튜링 테스트〉가 바로 그것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자리에 준비되어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서로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다른 두 개체(하나는 컴퓨터, 다른 쪽은 사람)와 글로만 채팅을 한 뒤 어느 쪽이 사람인지를 알아맞히는 것이다. 현대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최첨단 컴퓨터를 상대로도 정답을 맞히는 일은 아직 간단하다. 그러나 이 실험의 진가는 사람들이 정답을 맞힐 수 없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과연 지성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과 컴퓨터를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튜링은 이는 기계도 사고할 수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지능을 가진 기계와 지능을 가진 인간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기계는 그만큼 지능적으로 사고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한 존재의 〈사고〉 자체가 중요해지고 사고하는 존재의 〈형태〉는 의미를 잃는 게 아닐까? 여기서 논의를 조금 더 발전시키면 위에 언급한 한스 모라벡의 주장에 다다른다. 그의 주장은 기계가 인간 의식의 〈저장소〉가 될 수 있음을, 즉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기계도 인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당신은 사이보그이며 사이보그가 곧 당신이라는 것이다. 유기체와 기계라는 이질적인 두 물질이 융합되고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면서 포스트휴먼은 탄생했다.
〈로보캅〉이 되어야지만 포스트휴먼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포스트휴먼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기계 팔과 인공 심장만 달고 있다면 포스트휴먼인 것일까? 헤일스는 포스트휴먼은 그보다 조금 더 큰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헤일스에 따르면 포스트휴먼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포스트휴먼은 물질적인 모습보다 정보를 중요시한다. 생명이 유기체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은 필연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우연이라는 것이다. 둘째, 서구에서 데카르트가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훨씬 전부터 인간의 정체성은 의식에 있다는 주장은 익숙했지만, 포스트휴먼은 의식이 부수적인 현상이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함에도 갑자기 세력을 얻어서 스스로를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로 내세우려 한다고 간주한다. 셋째, 포스트휴먼에게 신체란 우리가 최초로 조작법을 익히는 인공 기관이며, 따라서 신체를 다른 인공 기관으로 확장, 대체하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과정의 연속일 뿐이라고 여긴다. 넷째로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이 지능을 가진 기계와 매끄럽게 접합될 수 있는 형태가 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포스트휴먼의 관점에서는 신체를 가진 존재와 컴퓨터 시뮬레이션, 사이버네틱스 메커니즘과 생물학적 유기체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나 절대적인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포스트휴먼이 되기 위해서 주체가 반드시 말 그대로 사이보그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즉, 신체의 일부가 기계로 대체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생물학적 변화가 없는 호모사피엔스도 포스트휴먼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뜻이다. 포스트휴먼을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특징은 비생물적 요소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주체성이 구성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사이버네틱스에서 일어난 전통적 인간관의 해체는 인간을 일련의 정보 처리 과정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정보에 있어 그것을 담는 신체는 큰 의미를 갖지 않으므로 사이버네틱스의 이론에서 신체는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닌 것이다. 소설가 윌리엄 깁슨이 포스트휴먼의 신체를 〈살로 만든 데이터〉라고 묘사할 때 이는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헤일스는 신체의 의미가 점점 퇴색해 간다고 보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다. 오히려 전통적 인간관의 해체야말로 현대의 사이버네틱스 주체 논쟁에서 계속 설 자리를 잃어 왔던 신체를 회복시킬 기회라고 말한다.
사이버네틱스와 현대 문학의 기묘한 융합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의 한 축은 시대순에 따라 사이버네틱스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이론을 논하는 부분이다. 사이버네틱스는 정보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기능상 서로 대응하는 관계임이 드러나고, 인간의 뇌와 전자계산기의 기능이 닮은 작용을 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인간을 일종의 정보 처리 기계로 여기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책에서 사이버네틱스는 처음으로 학문 분야가 된 순간에서 출발하여 〈2단계 사이버네틱스〉라고 알려진 재형성 시기를 거친 다음,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인공 생명〉 분야를 중심으로 담론이 형성되고 있는 현재에 이른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축은 문학 텍스트에 관한 것이다. 헤일스는 사이버네틱스의 발전에 영향을 받은 문학 작품들을 선정해서 분석한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는, 과학이 문학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낸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가 3차원 가상 현실 이미지 소프트웨어의 개발에 미친 영향이 대표적인 예다. 문학 작품은 한정된 범위의 과학 이론에서 시작하지만 문화적으로 훨씬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과학적 이론과는 다른 문법으로 쓰이는 문학적 텍스트는 과학적 텍스트가 단속적으로만 조명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넘나들며, 여기에는 사이버네틱스 기술의 윤리적, 문화적 영향도 포함된다.
스스로 사지를 잘라 내고 인공 신체를 덧붙여 자신을 사이보그로 만드는 세계의 이야기 『림보』, 포스트휴먼의 다양한 함의가 엉망진창으로 혼재되어 있는 필립 K. 딕의 1962년부터 1966년 사이에 쓴 여러 편의 소설(『당신을 만들어 드립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닥터 블러드머니』, 『유빅』 등), 신경 회로망에서부터 해커, 생물학적으로 변형된 인간, 컴퓨터 시뮬레이션 안에서만 존재하는 개체에 이르기까지 가상성의 시대에 어디까지가 포스트휴먼으로 간주되는지 그 범위를 살피는 『스노 크래시』, 『블러드 뮤직』, 『갈라테이아 2.2』, 『터미널 게임』이 그 작품들이다. 헤일스는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문학과 과학은 서로 다르지만 가지고 있는 상호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문학 텍스트만을 통해서, 혹은 과학 담론만을 통해서 보는 관점은 명백한 한계를 가진다. 문학과 달리 과학적 텍스트는 특정한 사항에 대해 이론적으로, 그리고 인공적으로 접근한다. 또한 과학적 업적과 달리 문학 텍스트는 개념의 변화나 기술 혁신과 관련된 복잡한 문화적, 사회적, 표현적 쟁점을 종종 드러낸다. 이 둘을 함께 보는 접근법은 단순한 문화 연구의 하위 범주나 문학 분야 내의 부차적인 활동 그 이상이다. 헤일스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신체화된 말을 통해서 신체화된 세상을 살아가는 신체화된 존재로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포스트휴먼이 될 것인가가 아니다
포스트휴먼은 이미 도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포스트휴먼이 되느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포스트휴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점점 전통적인 인간관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 인간이 되어 가면서 포스트휴먼이 무엇인지를 놓고 다양한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포스트휴먼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 신체에 보조 장치를 이식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한 관점에서는 인간을 일종의 정보 처리 기계, 특히 지능을 가진 컴퓨터와 근본적으로 유사한 정보 처리 기계로 본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너무 쉽게 실제의 육체와 정보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 버린다. 자신을 구속하는 물질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사람들은 신체를 버릴 수 없으며, 신체와 정신은 별개의 개체가 아닌 〈통일체〉라고 주장하는 관점도 존재한다. 컴퓨터 스크린 안에 존재하든 밖에 존재하든 결코 정보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포스트휴먼이 될 것인가가 아니다. 포스트휴먼은 이미 도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포스트휴먼이 되느냐이다.
이 책은 포스트휴먼의 도래를 시간 순서에 따라 살핀다. 포스트휴먼은 때때로 환영하고 포용해야 할 변화가 아니라 두려워하고 증오해야 할 변화로 제시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반응은 포스트휴먼이 어떻게 구성되고 이해되는가와 전적으로 관련이 있다. 포스트휴먼의 의미를 논의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는 바로 지금, 포스트휴먼의 개념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직 확고하게 자리를 잡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기 위해 다이너마이트 같은 힘이 필요 없는 현재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현재 포스트휴먼의 여러 버전들 중 일부는 반(反)인간적이고 묵시록적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생물학적이든 인공적이든 지구와 우리 자신을 공유하고 있는 다른 생명 형태와 우리 인간의 장기적인 생존에 도움이 되는 또 다른 포스트휴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