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은 누가 어떻게 이용하고 오염시키는가?
상품과 광고, 방송과 연예인 가십에 등장하는 멋지고 재미있는 페미니즘은 일반적으로 ‘팝 페미니즘’이나 ‘달콤한 페미니즘’으로 불린다. 페미니즘은 브라를 태우는 드센 여자들, 남자를 혐오하는 성질 고약한 여자들, 진부하고 매력 없는 여자들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있다. 매력적이지만 위협적이지는 않고, 섹시하지만 과도하게 야하지는 않는 페미니스트라는 이미지가 새롭게 등장했다. 저자는 이런 페미니즘을 상업화된 페미니즘이라는 의미에서 ‘시장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정치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과 확실히 구별된다.
시장 페미니즘은 개인적 차원에서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여성 해방을 의미하는 여성용 담배를 피우거나 독신여성의 성공을 찬양하는 비혼 반지를 선택할 수 있다. 소녀들에게 자존감을 북돋아주는 광고로 유명한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페미니스트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거나 성적 주도권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섹시한 속옷을 입을 수 있다. 시장 페미니즘에서는 무엇을 하든 페미니즘적 선택이라고 간주하기만 한다면 모든 선택이 여성해방을 위한 실천이 된다. 이런 배경에서는 제모를 하거나 하이힐을 신는 것까지 페미니즘을 위한 정치적인 행동이 된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페미니즘보다 자본주의에 가깝다고 말한다. 광고의 목표는 매출 증대다. 기업은 사회 정의가 아니라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 기업들은 페미니즘을 상품에 이용하지만, 상품과 실제 페미니즘을 결합하지는 않는다. 상품에 판매 가치가 높은 페미니즘의 색깔을 살짝 입혀 소비자가 상품을 구입함으로써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광고도 소비자의 낮은 자존감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마케팅 수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멋진 패션과 브래지어, 운동화를 통해 자존심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꾸밀 뿐이다.
또한 시장 페미니즘은 영화와 TV 프로그램, 소설 등 대중매체에 강력한 여성이 등장하는 것은 여권이 신장된 현실을 반영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여성 친화적인 작품이 흥행하는 현상이 여성의 영향력 증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낙관하게 한다. 그러나 현실은 여성 제작자의 작품이 흥행하면 작품성 때문이 아닌 운이 좋은 것으로 치부하고, 단지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이 없거나 강력한 여성인물이 등장하기만 해도 페미니즘 영화라고 칭송한다. 이것은 내용이 아닌 페미니즘을 상품성의 일부로 여기는 풍조 때문이다. 여성 작가 또는 감독이 참여한 영화라고 해서 페미니즘 영화가 되는 건 아니다.
‘연예인 페미니즘’은 커다란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사회적 현안은 주변 사람의 백 마디 말보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한 마디로 관심이 쏠린다. 엠마 왓슨이 유엔에서 페미니즘에 관한 연설을 하고, 무대에 선 비욘세가 페미니스트 네온 조명 아래에서 노래를 부름으로써 페미니즘은 아픈 역사와 부정적인 이미지를 버리고 당당하고, 매력적이고, 힘차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변모했다. 연예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조장하던 대중매체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지만, 연예인의 발언과 노래 가사, 패션을 두고 페미니즘적이냐 아니냐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우리의 주의를 돌린다. 논쟁은 그마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벼운 유행처럼 금방 지나가버린다. 연예인 페미니즘은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을지라도 성평등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보다도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선언하고 페미니즘 운동 자체를 인정받는 데서 그친다. 때로는 여권 신장을 강조하는 연예인의 발언은 여성을 착취하는 영화업계, 방송업계, 연예 산업계의 관행을 은폐하기도 한다.
시장 페미니즘이든 연예인 페미니즘이든 어찌 됐든 페미니즘이 주류로 부상해 대중의 관심을 받는 것 자체가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상품이 아닌 캠페인이고, 한때 반짝이다 지나가버릴 유행이 아니라 성평등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관철해야 할 사회 운동이며, 의제를 다루고 변화를 촉구하는 정치 운동이다. 체제를 바꾸려 하는 페미니즘은 개인을 우선시하는 브랜드화된 페미니즘, 시장 페미니즘, 연예인 페미니즘과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신자유주의의 조력자인 시장 페미니즘은 체제의 문제를 개인의 능력과 문제로 돌리고 개인들을 위한 상업적인 해결책을 나눠준다. 여성이 학교에서, 직장에서, 연애에서 벽에 부딪힌다면 그건 성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감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시장 페미니즘은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고, 선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여성은 낙태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닌 ‘선택’을 갖는다. 여성은 언제든지 회사를 그만두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자진해서 섹시한 말과 행동을 함으로써 성적 대상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과 ‘권리’는 동일하지 않다. 합법적인 낙태 시술을 받을 여건이 안 되는 여성에겐 낙태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다. 오직 아기를 낳아 입양을 보내는 ‘선택’만 남는다. 육아휴직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여성은 퇴사라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살펴보자면 최고위직에 오르는 여성이 극히 드문 이유는 여성이 그 자리를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둘 경제적 여유가 없다면 퇴직을 선택할 수조차 없다. 이렇게 선택이라는 단어는 불평등을 은폐한다. 시장 페미니즘은 불평등한 토대 위에서 권리를 누리던 남자들에게 아무런 권리도 박탈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는, 공격성을 제거하고 정중하고 듣기 좋은 말로는 사회의 거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시장 페미니즘 덕분에 언론과 대중문화가 점점 더 다양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꼬집는 긍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곧 페미니즘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소수의 여성이 권리를 누리는 동안 대부분의 여성은 여전히 성범죄에 노출되거나 여성성을 강요받거나 임금격차나 승진 등의 불평등한 처우를 받는다. 여성 폭력이나 보육, 재생산의 자유, 불평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그런 일은 남자들에게도 일어나는데”라든가 “모든 남자들이 그러는 건 아니에요!”라는 반응이 즉각적으로 되돌아온다.
저자는 광고, 영화, 텔레비전, 패션에 담긴 여성들의 모습에 대해 논하고, 페미니즘이라는 급진적인 이념이 주류 문화에 편입되면서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지 빈틈없이 분석한다. 다양한 사례를 통해 페미니즘이 활용되고 오용되는 과정을 참신하고 예리하게 고찰하고, 페미니즘이 유행어처럼 불리는 동안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을 되짚어본다. 페미니즘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고 있다. 현재는 여성해방이 완성되었으니 페미니즘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왜 아직도 페미니즘이 필요한지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기형적인 상태이다. 자자는 이런 현실을 지적하면서 페미니즘이 더 많은 여성들을 위해 의미 있는 문화를 만들어내기를 촉구한다.
▣ 달콤한 페미니즘(시장 페미니즘)이 말하지 않는 것들
비욘세, 베네딕트 컴버배치, 메릴 스트립 등 연예인들의 페미니스트 선언
: 페미니즘이 세련된 이미지로 변신하는 동안 임금 차별, 성희롱, 출산의 자유 등의 문제도 같이 논의되는가?
[매드 맥스] [델마와 루이스] [에일리언] 같은 페미니스트 영화들
: 영화 속 강한 여성들의 모습은 실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하는가?
여성용 담배, 독신 반지, 소방관 바비인형 등 페미니즘의 가치를 표방하는 상품들
: 단순히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성차별이 사라지고 여성의 삶이 바뀌는가?
남성들에게 페미니즘 동참을 권유하는 엠마 왓슨의 유엔 연설
: 평등과 자유의 권리가 아니라 페미니즘 자체를 인정받는 데 그친 것은 아닌가?
셰릴 샌드버그의 『린 인』
: 여성들이 잠재력을 발휘하기에 앞서 불평등한 기업 문화를 바꿔야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