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아버지는 정말이지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기품 있는 전투를 해왔어.“
필립 로스의 아버지 허먼 로스는 여든여섯이 되던 해에 뇌졸중 판정을 받는다.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이민자로서 강인한 인내심을 갖고 한 가정을 이끌어온 그는, 메트로폴리탄생명에서 보험 판매원으로 시작해 근면함만을 무기로 지점장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필립은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깊은 절망에 빠지고, 뇌를 점령한 종양으로 인해 이미 얼굴의 절반이 마비된 아버지는 빠른 속도로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우연히 찾아가게 된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신이 결국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그리고 그 일을 결코 간단히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으로부터 두 달 후에 아버지는 요양원에 있을 거고 간신히 숟가락을 들어올려 시리얼이나 떠먹을 수 있을 거야. 지금으로부터 두 달 후에 아버지는 어딘가 침대에서 좀비가 되어 정맥 급식을 받고 있을 거고, 나는 한때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 옆에 앉아 있었듯이 아버지 옆에 무력하게 앉아 있을 거야. 지금으로부터 두 달 후에 아버지는 오늘 아침에 내가 가보게 된 묘지에 있을 거야.’ (76~77쪽)
『아버지의 유산』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아들 필립이 노인이 된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이야기이다. 여러 의사를 찾아가 검사를 받은 아버지는 끔찍한 수술을 견뎌내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수술을 한다고 해도 살아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한 상황이다. 그러나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삶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잃지 않는다. 그는 고통스러운 검사 과정과 수술 방법에 대해 들으면서도 그것에서 도망치려 하지 않고 똑바로 자신의 상태를 마주한다. 그것은 허먼 로스라는 사람이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보였던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 자신의 흐트러짐을 허락하지 않은 엄중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게 치열한 삶을 살아온 한 사람이 죽음에 대항해 격렬히 투쟁하는 모습은 자못 숭고하기까지 하다. 지인들은 물론 의사마저도 아버지가 살 만큼 살았다고, 이제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필립을 위로하지만 필립은 아버지의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통해, 죽음이란 이십대의 젊은이에게나 여든여섯의 노인에게나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것임을, 같은 크기의 두려움과 같은 크기의 절망을 감내해야 하는 일임을 깨닫는다. 죽음은 무자비하지만, 그만큼 또 누구에게나 공정한 것임을.
아버지는 뇌졸중에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유대인 공동체인 Y에 다니며 일상을 유지한다. 아내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리며 깊은 슬픔을 느끼는 한편, 새로운 사랑을 만나기도 하고, 내성적인 친구를 변화시키려 노력하기도 한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노인을 보살피기도 하고, 같은 병실에 입원한 중국인을 보고 마음을 다해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최선을 다해 생생한 삶을 이어간다.
“왜,” 아버지는 그에게 물을 것이다. “인간은 도대체 죽어야 하는 거요?” 물론 아버지는 그렇게 물어 마땅할 것이다. 그것은 좋은 질문이었다. (158~159쪽)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은 멈추지 않고 다가온다. 인간성을 완전히 파괴해버릴 수도 있는 수술을 결국 거부하기로 결정한 아버지를 보며, 필립은 괴로워한다. 한편 그는 아버지가 떨어트린 틀니를 맨손으로 집어들면서, 화장실 전체에 흩뿌려진 아버지의 똥을 치우면서, 그제야 오랜 세월 벌어졌던 아버지와 자신 사이의 거리감을 극복한다. 그는 자신이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아버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필립 로스에게 아버지는 가장 강렬한 증오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가장 깊은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물건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사람, 그가 살아온 삶의 방식,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의 아버지는 그냥 여느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존재에게서 미워할 모든 것을 갖추고 사랑할 모든 것을 갖춘 바로 그런 아버지였다. (215쪽)
평생 동안 자신의 의무를 묵묵히 수행하며 살아온 아버지는, 마치 해야 하는 일을 완수하는 것처럼 죽음을 맞이한다. 견뎌야 할 절망을 견뎌내고, 겪어야 할 수치를 겪어내고, 참아야 할 고통을 참아낸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일꾼처럼, 죽음이라는 숙제를 끝마친 후 세상을 떠난다. 탄생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이 글을 읽는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숙명이며, 마땅히 치러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버지의 유산』은 한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모두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고, 또 나름의 방식으로 이 세상을 떠날 모든 사람에 대한 증언인 셈이다.
“뭐,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땅을 떠나니까.”
“또,” 내가 대꾸했다.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땅에 살죠. 모든 사람의 싸움이 다 다르고 그 싸움은 절대 끝나지 않아요. (76쪽)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에세이에서 만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필립 로스
로스의 자전적 에세이인 『아버지의 유산』은 그동안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필립 로스의 새로운 면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가 지금까지 써온 소설들에서는 등장인물들과 충분히 거리를 둔 채 자조적인 냉소로 인간 삶의 적나라한 진실을 드러내왔다면 『아버지의 유산』에서는 인간과 삶에 대한, 유난스럽지 않지만 분명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연한 유머와 단단한 서사적 전개를 바탕으로, 마음을 울리는 진실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이 글은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 분명하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이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천부적인 이야기꾼의 감각으로 그려낸 이 책은, 가장 뛰어난 에세이가 줄 수 있는 지극히 순수한 형태의 감동을 독자에게 선사할 것이다.
또한 필립 로스의 팬이라면 실제 그가 삶에서 만난 인물들이 소설에서 어떤 식으로 형상화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소설 속에서 만나왔던 장면들을 작가의 삶을 기록한 에세이에서 만나보는 것은 흔치 않은 흥미로운 독서 경험이 아닐까.
나는 처음인 듯 열중해서 그것을 보며 생각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더 오는 것이 없었다, 나 자신에게 아버지가 죽었을 때를 대비해 내 기억 속에 그 모습을 박아놓으라고 일깨우는 것 외에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것이 아버지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로 희박해지는 것을 막을지도 몰랐다. ‘정확하게 기억해야 해.’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없을 때도 나를 창조한 아버지를 재창조할수 있도록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억해야 해.’ 절대 어떤 것도 잊어서는 안 돼. (2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