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여성이 이끌어가는 세 갈래의 서사,
그 이야기들이 하나로 모이는 지점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재앙, 그리고 고요한 해결
동료 작가 정세랑 소설가는 한 인터뷰에서 “배명훈 작가는 문학 안팎의 젠더에 대해 가장 첨예하게 고민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배명훈의 소설에서 여성은 대상화된 존재이기보다, 인간이기에 범할 수 있는 실수와 한계 속에서도 눈앞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주체로 활약한다. (단편 「예비군 로봇」에 등장하는 은경 씨가 대표적인 예이다.) 『고고심령학자』는 과학소설(SF)의 주인공이 꼭 남성만의 자리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배명훈 식의 답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80년대 인기를 모았던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가 2016년 리메이크 되면서 네 명의 주인공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젠더 교체’가 이루어졌던 것처럼, 배명훈은 『고고심령학자』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들을 모두 여성으로 설정했다. 이 네 명의 지적이며 조용하지만, 한편으로 용맹하고 재바른 등장인물들은 검은 성벽이 출몰한 한강대로와 용산 미군기지, 천오백 년 전에 죽은 어린 혼령이 나타나곤 하던 천문대, 그리고 옛 성벽의 흔적만이 남은 세계의 도시들을 가로지르며 서울이 맞닥뜨린 거대한 위기를 타계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고고심령학자』에는 존중과 인정에 바탕을 둔 관계들, 끈적거리지 않지만 단단하고, 완전하지 않지만 허점들마저도 그저 존재하는 채로 받아들인 온전한 존재들 사이의 깊고 건강한 애정이 있다. 그리고 그런 온전한 존재들은 몇 시간을 걸려 초원을 달리거나, 눈을 함께 맞거나, 벽을 뚫고 어깨를 감싸 안거나, 나란히 서서 코끼리를 마주하거나,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거나, 함께 열반에 든다. 뒤틀리지 않은 사람들. 성벽이 사라지고 어린 혼령이 사라져도 자라나갈 관계들, 살아갈 사람들. 나는 『고고심령학자』 속 인물들의 삶이 이야기 속 어딘가에서 계속되리라고 생각하고, 이 생각에서 깊은 충족감을 느꼈다. _‘정소연 과학소설가의 해설’ 중에서
단편에서 시작된 경이롭고 신선한 발상이
한 편의 장대한 이야기로 무르익기까지
‘고고심령학자’는 배명훈 작가가 2007년 발표한 단편「누군가를 만났어」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고고심령학자』에 등장하는 고고심령학에 대한 정의와 고고심령학자들의 면면은 ‘장편’이라는 서술의 넓은 공간을 얻으며「누군가를 만났어」의 그것과 견주어 한층 더 현실적이고 세밀하게 표현된다. 이를테면 독자적인 박사학위 과정조차 없는 불안정한 학문에 몸담고 있는 학자로서의 번민, 연구 성과를 올리기보다는 정부 지원금을 받아내기에 급급한 이들의 부조리함, 커다란 문제 앞에서 답을 찾기를 멈추지 않는 학자들의 순정한 열정 등이 그것이다.
고고심령학이란 가상의 학문 세계를 들여다보는 흥미로움과 동시에 『고고심령학자』를 읽는 또 다른 묘미는 ‘공간’, 특히 ‘도시’와 ‘성벽’에 대한 배명훈 특유의 통찰이 스민 문장을 만나는 일이다.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성벽’을 소재로 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계획을 피력해온 저자는 지난 몇 년간 세계의 여러 도시를 여행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도시의 내력과 그곳에 존재하는 흔적(성벽)을 눈여겨보곤 했다고 한다. 『고고심령학자』는 그와 같은 작가적 포부와 오랜 개념적 구상이 세월을 통과하며 두꺼운 서사의 외피를 갖춰나간 끝에 얻은 한 편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준비 기간이 꽤 길다. 칠 년에서 팔 년 정도 자료를 모으고 생각을 정리한 것 같은데, 너무 일상적으로 준비해서 특별히 무슨 자료를 봤다고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짧은 기간에 공부하듯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서 집필한 것이 아니고,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안테나를 열어놓고 거기에 걸려드는 사소한 정보들을 오랫동안 모아서 만든 이야기인 탓이다. 그동안 벽에 관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는 언급을 한 인터뷰만 해도 대여섯은 될 것 같은데, 이 소설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소설 내용에 빗대어 말하자면 조은수 스타일의 공부가 아니라 김은경 스타일로 한 연구이니, 특이한 자료를 봤다기보다는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들을 오래, 자주 들여다본 결과물 정도로 이해됐으면 좋겠다.” _‘작가의 말’에서
* 주요 인물 소개 *
조은수
“그래도 뭐 어쩌겠어. 현장이 코앞에 있는데 일단 봐야지.”
역사학과 학부를 마칠 무렵 뒤늦게 고고심령학계에 입문했지만, 그 누구보다 침착하고 흔들림 없는 태도로 혼령과 마주하여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해내는 고고심령학도이다. 육 년 동안 사사한 스승이자 한국 고고심령학계의 은둔 고수, 문인지 박사의 서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도심에 출몰한 검은 벽의 배후를 밝힐 단서를 발견한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정의 소유자이지만, 현장에서는 용맹하고 거침없는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김은경
“지금 이 노래는 고고심령학 현상이 분명해. 왜냐하면 그 노래 듣고 눈물 흘린 사람이 너 하나는 아니거든. 애들이 반응해.”
은수의 절친한 고고심령학 동기이자, 검은 벽의 비밀을 함께 풀어나가는 파트너. 혼령의 존재를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인물이지만, 특유의 기민함과 영리함으로 혼령이 나타나는 현장의 아비규환을 수습하고 통제한다. 어디에도 구속되고 싶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처럼 행동하지만, 주관적인 공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고고심령학 현장에서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고 학문으로서 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이끄는 명석한 브레인.
문인지 박사
“조은수 선생 생각은 어때요? 고고심령학이 흥행해서 될 학문 같은가요? 좀 더 비밀결사처럼 풀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한국 고고심령학계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대가이지만, 재야에 묻혀 자신만의 연구에 몰두하다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살아생전 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후 어떤 목적을 가진 이들에 의해 추모 사업이 진행된다. 건축사학자였던 한나 파키노티를 고고심령학계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나 파키노티
“지금 보이는 건 벽이지만 벽 자체에 너무 시선을 뺏기지 않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핵심은, 이게 빙의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일상어에 있는 그 의미는 아니고 고고심령학 용어인데요, 이 혼령의 발생 양상이 ‘출현’이 아니라 ‘빙의’라는 거예요.”
건축사학자이자 고고심령학계의 손꼽히는 세계적인 권위자로 갑작스런 성벽의 출몰을 설명해줄 ‘요새빙의’ 개념을 정립한 인물이다. 온화하며 매사에 여유가 넘치지만, 일을 할 때에는 재바르고 날카롭다. 체스 마니아로서 전 세계를 주유하며 체스의 원형 게임인 차투랑가의 변종을 수집하는 작업을 수행함과 동시에 검은 벽의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은수와 은경을 후방에서 지원한다.
이한철 대표
“그냥 책을 치우라는 게 아니고 발굴하듯 조심스럽게 정리하라는 거야. 현재 상태 그대로 지도를 만들자는 거지. 책이나 자료가 십오 년간 차곡차곡 쌓여간 순서대로.”
한국고고심령학연구소 대표. 공학자 출신으로 고고심령학 측정 장비 개발 분야에서 주로 경력을 쌓고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대중의 이목을 끌 줄 아는 능력이 있고, 이를 이용해 시나 정부 측과 협력관계를 공고히 다져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야심도 넘친다. 은수에게 문인지 박사의 서재를 정리하자는 프로젝트를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