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 40년, 깊게 멀리 퍼지는 치명적인 걸작들!
약관의 나이에 시단에 나와 올해로 시력 40년이 되는 이시영 시인의 시선집 『긴 노래, 짧은 시』가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에는 그의 등단 4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가까운 후배 문인들인 김정환 고형렬 김사인 하종오 시인이 기획하고 엮은이로 참여했다. 시인은 1969년 등단한 이래 첫시집 『만월』(1976)에서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2007)까지 모두 11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엮은이들은 각 권당 6~8편씩을 엄선하여 총 80편의 작품을 이 시집에 묶었다. 제1부(김사인 정선)는 1970,80년대 시집에서 24편, 제2부(고형렬 김정환 정선)는 1990년대 시집에서 28편, 그리고 제3부(김정환 하종오 정선)는 2천년대 시집에서 28편을 수록해 이시영 시의 정수를 선사한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이시영은 중요하면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 시선집은 그의 시세계를 한눈에 감상하고 이해하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삶의 희로애락을 담은 이야기시, 문단의 산 역사와 시대정신을 담은 산문시뿐만 아니라 시인 특유의 서정이 담긴 여백과 행간 넓은 단시들까지 다채롭게 빛을 발한다. 「만월」 「후꾸도」 「정님이」 「공사장 끝에」 등 초기 대표시부터 「내가 언제」 「마음의 고향4」 「마음의 고향6」 「화살」 등 중기시, 그리고 「골짜기」 「푸른 제복」 「형제」 「봄날」 등 후기시까지 그야말로 이시영 시의 명편들이 장관을 연출한다.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정성껏 삼을 삼더니/동지섣달 긴긴밤 베틀에 고개 숙여/달그당잘그당 무명을 잘도 짜더니/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영등포 색싯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용산역전 밤 열한시 반/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정님이」 부분
“지금 부셔버릴까”/“안돼, 오늘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안돼, 오늘밤은 오늘밤은이 벌써 며칠째야? 소장이 알면……”/“그래도 안돼……”/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여 들려오는/루핑집 안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것들을/불빛인 듯 덮어주고는/가만히 일어나 앉아/칠흑처럼 깜깜한 밖을 내다본다 -「공사장 끝에」 전문
「정님이」는 「후꾸도」와 함께 이야기시의 전범을 보여주는 대표작 중 하나이다. 근대화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농촌의 풍경과 공동체의 몰락을 이 두 시는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두 시 모두에서 엿보이는 ‘~는지 몰라’라는 의문과 추측의 종결어는 감정의 적절한 통제를 동반하면서 회한과 애절한 추억을 환기시키는 효과로 감동을 배가한다. 이처럼 추억과 생의 아름다운 순간과 비극적인 순간을 동시에 포착하는 힘은 그의 초기시부터 이미 내재되어 있다. 「공사장 끝에」 역시 산업화에 따른 우리 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절개해서 보여주는 수작이다. 철거반원의 짤막하나 인간미 넘치는 대화를 통해, 그리고 루핑집 안의 간단한 묘사만으로 이 시는 산업화가 가져온 절망의 풍경을 압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미시적인 풍경 속에 근대화와 산업화의 상처를 그 어떤 꾸밈없이 통째로 느끼고 감흥토록 하는 것이 이시영 시의 값지고 소중한 힘이다.
‘긴 노래, 짧은 시’라는 시집 제목은 어쩌면 이시영 시세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지 모른다. 분명 그의 짧은 시에는 행간에 수많은 이야기가 스며 있고, 한편의 서사가 담긴 긴 시에는 압축적인 묘사가 적절하고도 효과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신경림 시인의 말을 빌리면 “꿀과 침을 동시에 가진 촌철살인의 에피그램”과 “냉혹한 카메라로 포착한 유머러스하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순간의 서사(敍事)”를 동시에 껴안고 있다. 그의 시가 “잠시도 늦추지 않는 언어의 절차탁마”를 동반하는 동시에 “한순간 한순간의 삶에 치열했던 결과”(신경림 추천사)라는 것을 읽어낼 때 비로소 우리는 작품을 온전히 체감하고 감흥할 수 있는 것이다.
새끼 새 한 마리가 우듬지 끝에서 재주를 넘다가/그만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먼 길을 가던 엄마 새가 온 하늘을 가르며/쏜살같이 급강하한다//세계가 적요하다 -「화살」전문
겨울나무의 찬 가지 위로 올해의 가장/매서운 눈보라가 휩쓸고 지나가자/땅속의 앞 못 보는 애벌레들이 제일 먼저 알고/발그레한 하품을 한다. -「신생(新生)」전문
“시응이 갸가 요지음 놀고 있는갑습디다요……”/“어찌 그까 이……”/“………”/“………”//어느 초라한 무덤가에 빈 소주병 하나/그리고 빗물에 방금 씻긴 듯한 깨끗한 종이컵 하나 -「골짜기」전문
초기시부터 현재까지 이시영 시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영역은 그만이 발성할 수 있는, 그래서 독보적인 ‘단시(短詩)’들이다. 더이상 정제될 수 없을 만큼 압축적인 그의 어법은 자연의 풍경과 삶의 깊이, 일상의 힘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전략으로, 가장 시다운 시의 본령을 일궈냄으로써 자연스레 읽는이의 교감을 이끌어내고 문학의 비경(秘境)을 완성한다. 즉, 압축적인 시인의 발언과 시의 대상과 독자, 이 세 요소가 조화롭게 교감하고 결합되는 오묘한 체험을 그의 시는 선사해준다. 이 교감의 힘 때문에 시인이 ‘적요하다’고 노래하면 “세계가 적요하”고 시인이 ‘하품’을 발성하면 교감된 세계의 모든 군상의 하품은 ‘발그레’해진다. 「골짜기」는 시인의 부모의 무덤가 풍경을 그린 것으로 개인적 체험에서 연유한 작품이지만 보편적 슬픔과 쓸쓸함은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된다. 이 시를 실직한 시인 자신, 즉 성묘하는 자식의 존재를 생략한 상태에서 전지적 시점으로 읽어낼 경우 그 보편적인 쓸쓸한 울림은 더 커지고 오래 남는 것이다.
이시영 시인은 2천년대에 들어 1,2년에 한 권씩 시집을 출간할 만큼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특히 시인 자신의 인생역정이 살아 있는 현대사이자 문단사라 할 만큼 질곡의 사건들을 관통해온 탓에, 이시영만이 써낼 수 있는 현대사의 인물시들은 유머와 슬픔, 운명의 고통과 환희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그는 어쩌면 슬프고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개인과 역사의 운명을 시로 기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후기시로 올수록 단시의 아름다움과 냉철한 시대정신을 놓지 않는 산문시로 전쟁과 평화, 이주노동자, 철거민 등 다각적인 문제들을 천착하고 시화해냈다. 등단 40주년이 되어도 끊임없이 긴장하고 변화해가는 도상에 있는 것은 이시영의 시정신이자 흉내낼 수 없는 강점이다.
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전신을 떨 듯이/나는 나의 언어가/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마구 떨리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불씨처럼/아니 온몸의 사랑의 첫 발성처럼 -「시(詩)」전문
이 시처럼 이시영의 시에 대한 열정과 고민은 여전히 “떨리면서 깊어”지고 있으며, “불씨처럼” “온몸의 사랑의 첫 발성처럼” 떨리면서도 뜨겁고 감동적인 순간의 연속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정환 시인에 따르면 시인 이시영은 매순간 “이시영을 극복한 이시영의 경지를 열었다.” 그리고 한국 현대시에서 “이시영 시의 ‘모던’에 미달하는 작품은 아무리 서정적이라도 서정시가 될 수 없고, 이시영 시의 서정에 미달하는 작품은 아무리 현대적이라도 현대시가 될 수 없다.”(김정환 해설) 이러한 발언은 애정 넘치는 헌사이자 시인과, 그의 시에 대한 아주 적확한 평가이다. 시력 40년, 앞으로도 그의 절창들은 읽는이에게 깊고도 멀리 울려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