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절망의 풍경에 스며 있는 온기 ― 양귀자 첫 소설집,『원미동 사람들』의 원형을 읽다
1985년에 출간되었다 절판된 양귀자의 첫 작품집『귀머거리새』를 새로운 편집, 젊은 평론가(차미령)의 새 해설과 함께 새로이 펴냈다. 우리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첫 작품집 복간 시리즈인 ‘소설 르네상스’의 스물네 번째 권이다. 작가의 뜻에 따라 초판에 실린 작품 중〈희망〉을 제외한 열네 편의 단편과 중편〈좁고 어두운 거리〉를 작가의 교정을 거쳐서 실었다. 작가가 1980년대라는 어두운 시대를 20대에 관통하며 쓴 소설들을 수록한 이 작품집은 이후 양귀자가 구축하게 되는 작품 세계와 슬프지만 따스한 작가 특유의 시선의 출발점을 보여주고 있다.
주로 주변부에 위치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풍경을 현실 그대로 그려내면서도 그 안에서 희망을 놓지 않는 따뜻한 작품들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양귀자의 첫 소설집『귀머거리새』는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작품 세계의 원형을 접하게 한다. 초판〈작가 후기〉에서 작가가 자신의 소설은 “대개가 봉급생활자와 도시 변두리 사람들의 삶을 그려놓은 것”이며 “희망이 배제된 삽화투성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귀머거리새』는 도시 변두리의 하위 계급, 혹은 중심으로 편입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변인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의 삶을 조명한다. 이런 주변인들의 삶을 묘사함으로써 작가는 “폭력과 암투가 하도 어지러워 도처에 눈물과 상처가 난무했던” 1980년대 사회의 암울한 절망의 풍경을 보여준다. 사회라는 집단 안에서 잘 적응해 살아가는 자와 그로부터 소외당하는 약한 자 사이의 대립 구조 속에서, 작가는 소외된 쪽 사람들의 나약함과 막막함, 절망에 주목하지만, 이들을 향한 시선에는 애정 또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작품집을 통해, 20대를 서성이던 작가가 담아낸 변두리의 암울한 현실과 이를 견뎌내는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슬프지만 희망이 서려 있는 양귀자의 대표작『원미동 사람들』로 성장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원 버스거나 출퇴근 전철 속의 그 특징 없는 얼굴, 살아가기 위해 진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이웃들이 나로 하여금 이런 소설을 쓰게 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드러내놓고 말할 만한 명분도, 마음 든든한 동료도, 그럴싸한 미래도 없이 주어진 하루를 살아간다. 나는 그들의 삶이 소설 속에서나마 그 나름의 사연들로 빛나기를 바란다.”
―〈작가 후기〉(1985) 중에서
2. 무엇이 이들을 병들게 하는가 ― 소시민의 암울한 절망의 풍경
『귀머거리새』 속 인물들의 거처는 양귀자 초기 소설의 특징을 투영하고 있다.『귀머거리새』의 인물들은 대부분 산꼭대기 전셋집, 난방은 고사하고 물조차 나오지 않는 셋집, 여덟 명이 함께 사는 하숙집, 변두리 연립 등에서 살아간다. 이런 배경의 주인공들은 사회 혹은 직장이라는 집단에 몸담고 있으나 그로부터 소외된 혹은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는 무력한 직장인(〈갑(匣)〉,〈쥐〉,〈유빙〉,〈녹〉)과 이들의 아내(〈의치〉,〈덩굴풀〉),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가난한 소시민(〈이웃들〉,〈유빙〉), 바깥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채 무의미 속에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맞는 나이 든 퇴직자(〈귀머거리새〉) 등이다.
이 중 남성 샐러리맨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러 소설은 조직으로부터 내키지 않는 명령을 부여받고 그것을 완수해야 할 처지에 놓인 회사원들의 일상적인 곤경을 포착해낸다. 여기서 인물들은 유능하지 못할 뿐 아니라 대개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 상사의 멸시와 동료들의 냉대는 이들의 소외감을 극대화하며, 이들의 어깨는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짓눌려 있다. 그 과정에서 양귀자의 인물들은 서서히 병들어간다. 샐러리맨들은 사소한 습관이나 육체적 질환, 알 수 없는 환영 등을 겪으며 병적인 증상을 보인다.
이처럼『귀머거리새』의 주인공들은 대부분이 이 세상이라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서 거북해하고, 또 세상에 훼손당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이들은 세상의 냉혹함에 저항하고 분노하기보다는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며 소외를 받아들임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다. 이들은 이런 소극성으로 인해 자신이 까닭 없이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강인하고 차가운 세상 앞에서 자그마한 사랑, 자그마한 위안을 갈구하지만, 항상 그 가능성은 가슴 서늘하게 하는 쓸쓸함을 남긴 채 사라진다. 소외된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그 모습은 흡사 뒷걸음치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첫 소설집인『귀머거리새』에 소외된 남성 직장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 다수라는 점은 한편으로는 양귀자가 도시 샐러리맨의 일상에 착목할 만큼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일러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른 성gender의 인물을 능란하게 다룰 정도로 타고난 관찰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 직장인들이 하나같이 가부장적 구조가 그대로 관철되는 조직 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후의『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같은 양귀자식 페미니즘 소설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3. 연민과 한숨으로 80년대를 살아내다
양귀자는 새로 쓴〈작가의 말〉에서 1980년대 당시에 “연민과 한숨”이라는 자기 방식의 소설 쓰기로 성실하게 시대에 복무했다고 말한다. 1980년대의 많은 소설들이 암울한 시대를 즉각적으로 변화시키려 한 데 비해, 양귀자는 당장의 변화가 일어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오히려 그 현실 속 눈물과 상처에 천착한다.『귀머거리새』에서 희망이 배제되어 있는 것은 그만큼 작가가 시대에 충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귀머거리새』의 적지 않은 소설들은 실종의 문제를 다룬다. 데모에 참여해 학교에서 쫓겨난 후 소외된 사람들의 현장에 뛰어들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규석을 찾아다니는〈좁고 어두운 거리〉, “이상한 사고”로 인한 형의 죽음과 친구의 실종으로부터 주인공이 부채감을 짊어지게 되는〈얼룩〉 같은 소설 속에서 측근들에게 부채감을 안겨주는 사건들의 시대적 원체험은 80년 5월일 것이다. 80년대를 지배한 군부는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기에 인권을 유린하는 극악한 폭력을 다양하게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밤의 일기〉에서 남편의 실종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밤의 일기〉는 모든 사태의 책임을 자신을 제외한 타인에게로 돌리는 대신 스스로를 성찰하는 반성적 시선을 작동시킨다.
〈밤의 일기〉에는 느닷없이 증발되었다가 고문 후유증을 안고 돌아온 남편의 고통, 강도를 당해 이웃에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한 옆집 여자의 고통이 겹쳐지며 소설의 화자와 그 주변을 피해자로 조명하는 듯해 보인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서 주인공은 지하도에서 야바위꾼들에게 사기를 당해 항의하던 처녀가 그들에게 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면서도 그냥 지나쳐감으로써, 폭력에 의해 삶을 유린당한 자들에 대한 책임은 소설의 화자에게도 부메랑처럼 날아든다. 폭력 앞의 많은 방관자들도 결국은 폭력의 공범이라는 인식, 나아가 이런 폭력이 지속될 것이라는 뼈아픈 자각은 여운을 남긴다. 여기서 우리는 양귀자의 명편〈원미동 시인〉의 밑그림이 되는 작가적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 개개인에 대한 시대의 냉정함과 무관심 앞에 절망을 예고하면서도 소외된 이들을 감싸던 양귀자의 따뜻한 시선은 점차 삶의 구석구석으로, 자신의 내부로, 또 사회의 강자와 약자의 이쪽저쪽을 넘나들면서 그 작품 세계를 한결 깊고 넓게 확장시키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이후 양귀자의 작품 세계의 “서글픈 현실과 희망에의 믿음, 절망적 비애와 희망적 낙관, 어둠과 밝음, 한숨과 가슴 저미는 훈훈함”(황도경)으로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