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는가
그의 소설에는 황량하고 폭력적인 현실과 떨쳐지지 않는 죄의식, 그리고 소설쓰기에 대한 자의식이 팽배하다. 표제작 「오래된 일기」의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얼음과자를 사먹기 위해 아버지의 지갑에서 천원짜리 한 장을 훔쳤”던 어린시절의 그는 무의식적으로 “아버지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그런데 정말로 그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죽은 것은 그가 아버지가 사라져버리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아닐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이승우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떨쳐지지 않는 죄의식을 떨치기 위한 방편으로 소설쓰기를 택한다. 그래서, 그것으로 그 죄의식이 떨쳐질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은 것이 그의 소설이다. 아버지를 잃은 「오래된 일기」의 주인공은 큰집에서 사촌인 규와 함께 자라게 되는데, 모범생이던 그와 달리 규는 일찍부터 문학을 꿈꾸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규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그는 대학에 진학했다. 규는 소설가가 되지 못했고, 정작 소설가가 된 것은 그였다. 소설가가 되기를 포기한 규는 신산한 세월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이제 병상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병상 앞에서 그는 규가 지금껏 자기 소설을 빼놓지 않고 읽어왔음을 알게 되고, 그런 규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그가 무슨 짓인가를 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자문하고 있다. 그렇게 자문하는 그 앞에서 그의 소설쓰기가 죄가 아니라고 누가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우리의 말문을 틀어막는 것이 이승우의 소설이다.
이런 죄의식 또는 윤리의식은 그의 많은 소설들이 그러하듯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무슨 일이든, 아무 일도」의 상규는 당연하리만큼 만연한 세상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갱생원에 가두어지다시피 해 결국 하루종일 방바닥에 가만히 엎드려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택한다. 그런 그를 누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그저 짐짝처럼 여길 뿐이다. 그의 누나만이 그를 자신에게 짐지워진 운명으로 여기고 그 운명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그를 돌본다. 그런 그의 누나만이, 아버지가 “저놈은 내 십자가다, 하며 혀를 차”는 그가 어쩌면 오히려 “십자가형을 받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늘 방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는 그가 어쩌면 오히려 가족과 온 세상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하지만 다시 현실에서 가족들은, 그의 누나를 포함해, 지리멸렬한 욕망에 이끌려 지리멸렬한 생활을 반복할 뿐이다. “무슨 일이든 일어났지만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지리멸렬한 욕망과 죄야말로 이승우 소설이 제기하는 종교적 물음의 바탕을 이룬다.
일상의 집은 얼마나 위태로운가
무슨 일인가 일어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우리는 이해할 수도 대처할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그 세계는 지금껏 그의 소설이 자주 보여주었듯 충분히 카프카적이고, 그런 한에서 때로 어느정도 희극적인 분위기를 풍기기까지 한다. 그것이 이번 소설집에서는 더욱 현실적인 생활의 색채를 더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방」의 주인공은 큰어머니를 대신 모시는 문제 때문에 아내와 다투다 아내가 상의도 없이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버려 졸지에 원하지도 않은 기러기아빠 처지가 되고, 살던 집까지 팔아 아내에게 돈을 부치고는 원룸 생활자가 된다. 오기를 부리듯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살 작정으로 예전에 살던, 지금은 빈집이 된 집에 작업실을 마련한 그는 그제야 이제껏 익숙하게만 여겼던 공간이 가리고 있던 또다른 휑한 공간과 맞닥뜨리게 된다.
「타인의 집」의 주인공 역시 아내와의 불화를 빌미로 그의 아파트를 가로챈 장인 때문에 졸지에 찜질방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고, 그러다 우연히 육년 전 헤어진 애인이 한동안 비운 집에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그가 발견하는 것 또한 그 공간을 가득 채운 부재-죽음의 기운이다.
이렇게 현실과 비현실이 한몸을 이룸으로써 비현실감은 더욱 배?되며, 구체적인 생활의 지점에서 제기되는 윤리의 문제는 그래서 더욱 문제적이다. 「실종 사례」는 몇해 전에 있었던 지하철 방화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주인공은 아파트 중도금으로 마련한 돈을 친한 이웃의 사업자금으로 빌려주었다가 그들이 잠적해버려 돈을 떼이고 마는데, 그 와중에 담보격으로 강원도 산간의 45만원짜리 땅을 받았던 것이 몇 년이 지나 1억 5천만원으로 값이 뛰어 충분하고도 남은 보상을 받는다. 그후로 그들 부부를 잊고 살던 그는 어느날 남쪽 도시의 지하철 방화사건을 전하는 뉴스 화면에서 오열하는 그 아내의 모습을 발견한다. 어떻게 해야겠는가. ?는 찜찜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봉투에 얼마를 넣을 것인지 망설이며, 그 도시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그의 부채의식은 뜻밖의 진실을 만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해소되는 듯하지만, 사실 이승우의 소설을 이끌어가는 부채감은 결코 손쉬운 문제는 아니다.
「정남진행(行)」의 주인공은 갑자기 삼년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는다. 그녀는 헤어지던 삼년 전과 똑같이, 마치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남진에 같이 가자고 말한다. 헤어진 마당에 그럴 이유가 없으므로 그는 당연히 그 부탁을 거절하는데, 그러고 나서 며칠 후 그녀의 갑작스러운 부음을 듣는다. 물론, 그와 그녀가 헤어진 것이 그가 정남진에 가지 않았기 때문일 수는 있지만 그녀가 죽은 것이 그가 정남진에 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쩌란 말인가, 하고 씁쓸한 반문을 내뱉는 데서 그칠 법한 그 상황에서, 그러나 그는 무언가에 떠밀리듯 한밤중의 정남진행을 감행한다. 그곳에서 그는 「풍장―정남진행2」의 주인공과 마주칠 것인데, 그 또한 마찬가지로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을 감당하기 위해 고향인 그곳으로 내려오는 길이다.
일기는 어떻게 씌어지는가
이승우의 소설에서 죄의식 또는 윤리의 문제는 소설쓰기의 문제와 겹쳐 드러난다. 소설을 쓰는 일이 곧 죄를 고백하는 일임은 「오래된 일기」에도 이미 선명하게 나타나 있지만, 또 하나 여기에서 선명한 것은 ‘쓰기’와 ‘읽기’의 전도된 듯한 관계이다. 「오래된 일기」의 ‘나’는 그의 소설이 씌어지게 하는 것이 누구인지 분명히 깨닫고 있다.
또다른 작품 「전기수 이야기」에서도 주인공은 “듣는 그를 위해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나를 위해 그가 들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하며 “들음으로써 그가 얻는 것보다 말을 함으로써 내가 얻는 이득이 크다면 누가 누구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라고 묻는다. 나아가 이 작품 자체가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이것은 소설로 씌어진 소설론이기도 하다. 누가 누구에게 누구를 위해 이야기한단 말인가. 또한 소설쓰기가 죄의 고백이라면, 누가 누구에게 누구의 죄를 고백한단 말인가.
여기에 한 가지 더, 「오래된 일기」나 「방」이 소설의 끝이 처음으로 재귀하면서 스스로를 무한반복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이승우의 소설에 대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는 자신의 죄를 되묻는 형식으로 자신의 소설에 대해 되물으며, 자신의 소설에 대해 되묻는 형식으로 자신의 죄를 되묻는다. 그것도 무한히.
소설집의 말미를 장식하는, 다른 소설들과는 퍽 다른 단편 「999」는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 전체의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주인공은 떠돌이 악사의 피리소리를 듣고 그의 뒤를 잇는 악사가 되어 피리에 담긴 세상의 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떠돈다. 그는 운명에 이끌리듯 “우주의 기원과 본질을 사유할 수 있는 이미지”를 찾아 사막 한가운데 있는 신전에 다다르지만, 종국에는 그것을 ‘보는 자’가 아닌 ‘보여주는 자’가 되어 그것을 본 다른 이로 하여금 또 다른 ‘피리 부는 자’가 되어 길을 나서게 만든다. 독자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그가 쓴 ‘오래된 일기’를 읽으며, 독자는 어느새 저마다의 기억 속에 깊숙이 묻어둔 낡은 일기장을 다시 꺼내 읽게 되고, 자신의 근원에 있는 죄의식과 위태로운 지금의 일상을 되묻게 된다. 그래서 “이 불편한 질문들에 더듬거리며 대답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이승우 소설의 최초의 독자이자 자신의 삶의 유일한 저자가 된다.”(문학평론가 진정석) 또 혹자는 “당신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나는 언제나 서성거린다. 당신이 남긴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을 찍으며 나아간다”(소설가 박성원)는 고백처럼 또다른 ‘피리 부는 자’가 되어 길을 나서고 싶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이승우 소설의, 또는 소설 일반의 힘이자 매력이 아니겠는가. 『오래된 일기』가 우리에게 새삼 환기하는 점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