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매혹과 현실의 우울
― 《형제》의 특징 1
위화 소설에는 어려운 문장이 없다. 모든 정보가 즉시 이해되고 모든 묘사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묘사, 한없이 직설에 가까운 서술. 이것이 위화 소설의 표정이다. 그의 소설에는 아무런 비밀도 없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를 향한 위장전술도, 인물에 바르는 보호색도 위화 소설에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위화 소설의 저력이다. 아무런 비밀이 없지만 모든 비밀을 누설한다. 간소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문장들 뒤로 거대한 중국 사회의 은밀한 꿈틀거림이 남김없이 드러난다.
《형제》 1권이 문화대혁명 시대의 중국 사회를 보여준다면, 2, 3권은 문화대혁명 이후의 현대 중국 사회에 대한 강렬한 풍자를 담고 있다. 위화는 문화대혁명도 현대 사회도 불편해한다. 이런 불편함이 담긴 《형제》는 ‘중국 사회의 판도라 상자를 열었다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위화는 ‘모든 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책임이 있고, 그 사회의 온갖 폐해에 대해 일말의 책임이 있다.’라는 입센의 말을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중국 사회의 거대한 병폐에 대해 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나는 총체적으로 병든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병자’라고 느꼈다. 그것이 내가 《형제》를 쓴 이유다.”
소설을 쓰기 전에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의식적으로 고민하지는 않는다. 인물과 함께 소설 속에서 숨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 자신도 모르게 변화하게 된다. 나의 소설관이 바뀐 것처럼 보인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 이광두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
작가의 입장에서는 이광두라는 인물을 무척 좋아한다. 선악의 기준으로 그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복잡하고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광두의 가장 큰 특징은 악하고 선한 면이 동시에 공존한다는 점이다. 굉장히 선하면서도 굉장히 악한 면을 동시에 가진 캐릭터이기에 이광두에 대해서는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다. 이광두라는 인물은 소설을 쓰는 사람조차 재미있게 해주는 캐릭터다.”
―《위화의 형제 작가 노트》〈위화 인터뷰〉에서
극단적인 희극과 비극의 파노라마
― 《형제》의 특징 2
《형제》는 문화대혁명부터 자본주의 중국까지를 다룬 세계 최초의 소설이다. 위화는 《형제》는 기존의 위화 소설과 무척 다르다. 위화라는 작가의 소설관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1권은 정신의 광기, 본능을 억압하한 처참한 운명의 시대이고, 2?3권은 윤리가 전복되고 경박한 욕정을 추구하는 만물군상의 시대. 이 극단의 시대를 한 중국인이 겪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40년이었다. 이 두 시대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이광두’와 ‘송강’이라는 배다른 형제이다.
위화는 글쓰기에도, 일상생활에도 지혜가 담긴 유머를 좋아한다.특히 장편소설을 쓸 때 비극과 희극을 동시에 표현해내려 한다. 《허삼관 매혈기》에 희극과 비극이 다 들어있지만 극단적이지는 않다.
위화는 《형제》에서 마침내 극단적인 희극과 비극을 시도했다. 비참한 비극과 광란의 희극을 결합시켰다. 남녀 구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재래식 화장실에서 여자 엉덩이를 훔쳐보는 것이 이광두의 어린 시절이고, 문화대혁명 이전 시대 중국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더럽고 촌스러운’ 시기는 곧 연애편지조차 떳떳하게 주고받지 못하던 천진한 사람들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광두의 어머니 이란 같은 일편단심 민들레형 여성은 2, 3권에서 찾아볼 수 없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아버지 송범평 같은 인물도 2, 3권에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송강처럼 순수하고 여린 인물은 2, 3권에 묘사된 문화대혁명 이후의 극도로 통속화된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친 이후, 중국 사회는 그 더러움과 촌스러움조차도 사라진 황폐하고 세속화된 모습으로 가득 차게 된다. 문화대혁명 이전과 이후, 1권과 2, 3권은 그렇게 나뉘고 1권과 2, 3권의 분위기도 그렇게 극단적인 비극과 희극으로 갈라지고 있다. 이렇듯 형제의 이야기는 중국 사회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치부를, 치명적인 환부를 드러내버렸다.
위화의 형제 작가 노트를 발간하다
― 《형제》의 특징 3
위화는 자신의 작품 이야기를 글로 쓰거나 말하지 않는다. 소설가는 오직 소설로, 이야기로 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그의 말이 ‘위화가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고, 작품을 어떻게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가’ 하는 점을 더욱더 궁금하게 한다.
휴머니스트는 한 작가의 문학과 서사의 세계를 조명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하며 작가 노트를 만들고자 했다. 이 작가 노트는 위화의 우정에 응답하는 선물이며, 위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드리는 선물이기도 하다.
위화가 2007년 5월 말에서 6월 초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문학평론가 정여울 선생이 두 시간 정도의 인터뷰를 가졌고, 연세대학교, 서강대학교에서 열린 두 차례의 문학 강연에 참석해 내용을 정리했다. 그리고 늦은 시간 술잔을 기울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위화는 우정과 예의, 그리고 열정이 있는 작가였다. 무척 소탈하고 꾸밈이 없는 그의 이야기는 긴 여운을 남기며 오랫동안 그의 세계를 열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이야기의 힘을 아는 사람이었고, 평범한 인물을 극적인 캐릭터로 창조하는 능력을 지닌 작가라고 생각한다.
1980년대 중국에서는 어떤 직업이든 간에 다 가난하였다. 의사도 가난하고 작가도 가난했다. 그런데 치과 의사는 고생하는 가난한 사람이고, 작가는 자유로운 가난한 사람이었다. 사실, 치과 의사가 무척 싫었다. 매번 남의 벌린 입을 보아야 한다. 가장 보기 흉한 곳이다.
1980년대에 중국에서는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가 없었다. 국가에서 일률적으로 배정해주었다. 친구들 중에는 노동자로 배정을 받은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치과 의사가 되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병원은 시내 중심에 있었는데 자주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문화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날마다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왜 당신들은 일을 안 하고 돌아다니기만 하느냐고. 그랬더니 자기들은 거리를 이렇게 걸어다니는 것이 바로 자기들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그 직업을 좋아하기로 했고, 문화관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화관에 들어가려면 어떤 실적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를 시작한 목적은 문화관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런 뒤 1983년 연말에 영광스럽게도 베이징에서 온 전화를 한 통 받게 되었다. 한 문학잡지 편집인이 내게 원고를 좀 손질해달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바로 나는 기차에 뛰어올랐다. 한 달 동안 그 일을 해주고 고향 시골마을에 돌아왔더니 난리가 났다. 우리 동네에서 베이징에 가서 글을 고쳐준 것이 내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곳 정부와 당 지도자들이 보더니 ‘이 녀석이 재주가 있구나.’하고 생각하고는 이 뽑지 말고 문화관으로 가라고 했다.……
20여 년 전에 내가 처음 읽은 외국 작가의 작품은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川德康成)의 작품이었다. 치과 레지던트를 하던 때였다. 처음 읽은 게 그의 단편소설 〈이즈의 무희〉였는데, 그 매력에 빠져 3년가량 읽었다. 세부적인 묘사를 아주 정확하고 풍부하게 한다는 점이 좋았다. 그는 내 창작을 튼튼하게 해준 나의 문학 스승이다. 나의 소설에서 세부 묘사는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카프카다.……
― 《위화의 형제 작가 노트》 〈위화의 작가 데뷔 이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