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문화 대 반문화
문희준이 그토록 많은 안티팬을 거느린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를 로커라 불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의 비난이 쏟아진다. 같은 대중음악 시장을 두고 경쟁하는 로커에게 가장 큰 비난은 ‘상업적’이라는 딱지다. 왜 댄스가수는 괜찮은데 로커가 문제인가? 1960년대 이후 록 음악이 단지 음악 장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반문화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비단 록음악뿐 아니라, 주류 대중문화와 반문화라는 대립쌍은 알게 모르게 우리 문화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들이다. 또 이를 통해서 한 개인의 취향과 정체성을 가장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네스카페보다 스타벅스가, 나이키보다 컨버스가, 포드보다는 폴크스바겐이, 맥도날드보다 서브웨이가 더 쿨하고 더 윤리적인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이미 주류문화-반문화라는 도식 속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신화화,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 쏟아진 극찬, 유나바머 같은 특이한 테러리스트의 출현 속에도 ‘반문화’가 똬리를 틀고 있다.
반문화라는 허구
캐나다 출신 철학도인 저자들에 따르면 한 사회의 갈등이 충돌하는 전선이 바리케이드가 쳐진 거리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옮겨오게 되면서 반문화라는 개념이 부상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마르크스의 계급이론과 프로이트의 욕망과 심리에 대한 분석이 합쳐지고, 여기에 20세기 중반 끔찍한 파시즘과 냉전의 경험이 더해지자, 문화전반이 억압의 기제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졌다는 것이 저자들의 진단이다. 여기까지가 상투적인 사회 비판서라면, 저자들은 여기에서 크게 한걸음을 내딛는다. 애초부터 반문화는 허구라는 것이다. 커트 코베인은 자신이 얼터너티브 정신을 ‘배신’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다 자살을 선택했지만, 애초부터 배신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 저자들이 주장이다. “60년대 이후 좌파 정치를 지배해온 반문화 정치는 혁명적인 독트린이 아니라 지난 40년 동안 소비 자본주의를 추진해온 주요 동력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또 “우리는 이 책에서 수십 년에 걸친 반문화 반란이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것은 반문화 사상이 기대는 사회이론이 허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6쪽)
반문화는 후기자본주의의 최대 히트상품
반문화가 진정한 반란이 아니라 소비 자본주의를 이끌어온 동력이었다는 저자들의 도발적인 주장은 반문화라는 딱지가 시장에서 성공을 약속하는 보증수표였다는 사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대량생산, 대량소비되는 사회에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추구해야 할 으뜸 덕목이 되었고, 반문화가 이를 충족시켜준 것이다. 지난 50년 동안 불온한 것으로 취급받은 항목들을 살펴보면 더욱 명백하다. 담배 피기, 남성의 장발, 여성의 짧은 머리, 턱수염, 미니스커트, 비키니, 헤로인, 재즈, 록, 펑크, 레게, 랩, 문신, 서핑, 스쿠터, 피어싱, 노브라, 동성애, 대마초, 헤어젤, 피임. 이 모든 것을 지금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3분짜리 뮤직비디오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190쪽) 대량생산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된 포드 승용차에 대한 대항으로 추켜세워진 폴크스바겐의 비틀, 히피가 노래까지 지어 받치며 칭송했던 SUV가 과연 세상을 구원했을까? 또 다른 소비를 부추겼을까? 이 뻔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반문화 이론가들의 주장은 60년대 히피의 논리에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비문화가 그야말로 스펙터클이 되었다면, 반문화 상품이라는 ‘다른’ 소비를 통해서는 결코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저자들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남들과 같은 것은 무조건 피해라
교복,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어디서나 같은 음식을 먹게 만드는 프랜차이즈 등은 사회비판의 손쉬운 먹잇감이다. 획일화를 통한 파시즘이 가져온 엄청난 충격과 심리적 외상은 획일화와 동질화는 어떻게든 피해야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대량 생산 체제로 발생한 동일한 소비재들의 ‘잉여분’을 처분하기 위해 동질적인 욕망체계를 창출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순응을 요구한다는 것이 반문화 이론가들의 설명이다. 여기에 저자들은 동질화, 특히 자발적 동질화가 진정으로 나쁘기만 한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빈곤 축소와 동질성 축소 사이에서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획일적인 집합주택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을 해소하는 쪽을 택할 것이며, 그 선택이 자발적일 때 심미적으로 취향에 들지 않는다고 이를 비판하기 힘들다는 것이다.(287쪽) 이를 두고 박정희의 악령만을 떠올리면 저자들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동질화의 경향은 아주 복잡한 일련의 요인들이 만들어낸 산물이지 이런 효과를 유발하고 작동시키는 ‘체제’의 작용으로 단순화시켜 이해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다. 동질화는 일부는 소비자 선호의 반영이고(프랜차이즈 선호) 일부는 규모의 경제 때문이며(대기업 아파트의 품질우수) 일부는 시장의 왜곡에 의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314-315쪽)
우리가 현재 직면한 위기는 무엇인가
박학다식을 뽐내며 수많은 사례를 통해 다소 도발적인 주장들을 거리낌 없이 펼치는 저자들의 수사학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끈은 반문화가 주도적인 비판이론으로 등장한 60년대와는 현재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는 인식이다. 말하자면 전선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서양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파시스트 독재가 나타날 시나리오와 시장 자유화 확대와 무제한적인 세계무역으로 사회가 점점 홉스가 말한 자연 상태로 회귀할 것이라는 시나리오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인가?” 만약 두 번째 시나리오의 가능성이 더 높다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규칙이지 규칙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는 저자들의 주장(404쪽)에 귀 기울여 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외부적 규제에 대한 필요성은 등한시한 채, 개별 소비자의 행동에 기대를 거는 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개인주의가 단순히 더 ‘고급’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어떤 타협이 불가피하고 어떤 타협은 피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 답을 추구하는 일은 “반문화보다 재미는 덜 할지 몰라도 훨씬 더 유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