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하고 투명한 묘사로 그려내는 세상의 정경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
점차 비인간화되어가는 세계의 섬뜩함이나 돌이킬 수 없는 삶의 회한들이 이 소설집에 종종 등장한다. 현대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낚시하는 소녀」에 등장하는 주인공 소녀는 아이답지 않게 영악스럽고, 병든 몸으로 매춘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소녀의 엄마는 어른답지 않게 어리숙하다.
소리들은 서로 몸을 섞지 않는다. 멀고 가깝고, 높고 낮고 간에 소리들은 저마다 고유하다. 붉은 물감에 노란 물감을 섞으면 주황이 되고, 파란 물감을 섞으면 보라가 되지만 소리는 섞여도 다른 소리가 되지 않는다. 지저귀는 새소리는 고양이 울음소리와 섞이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나는 웃음소리는 엄마가 웃는 소리와 섞이지 않는다. 여러 소리가 동시에 일어도 소리들은 양파처럼 겹을 이룬 채 제 모양을 흩뜨리지 않는다. 아이가 느끼기에 모든 소리들은 표정과 감정을 갖고 있다. 엄마가 웃을 때 손가락을 물어뜯거나 가슴을 치고 있을 때도 있다. (「낚시하는 소녀)」 74면)
미래와 생에 대한 불안으로 일찍 철들어버린 딸과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엄마가 간신히 누리는 작은 평화가 실은 얼마나 위태롭고 허약한 토대 위에서 지탱되는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존재케 하고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연민임을 작가는 담담한 어조로 말하며 넓고 깊은 여운을 남긴다. 천형처럼 짊어진 모녀의 비극을 가슴 시리게 다루고 있음에도 한편으로 이 소설이 아름다운 동화처럼 그려지는 까닭은 소외된 이들을 대하는 따뜻하고 넉넉한 작가의 시선 덕분일 것이다.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첫사랑을 시작하는 소년의 성장기를 그린「소녀들은 자라고 오빠들은 즐겁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죽은 낯선 남자를 좋아하는 「국화를 안고」, 심한 과대망상증을 앓고 있는 아들에 대한 진한 부정(父情)이 담긴 「지워진 풍경」, 불법체류 중인 한 외국인노동자의 출국을 돕는 「배웅」, 간첩과 무장공비들이 묻혀 있는 적군묘지를 돌보는 한 퇴역 군인의 이야기를 그린「성묘」, 실향민 노인들이 안고 있는 해묵은 갈등과 화해를 그린 「망향의 집」 등의 소설에도 궁핍하고 불안한 삶이 지속될수록 더욱 소중해지는 관계에 천착하려는 작가의 시선이 잘 드러난다. 특히 「국화를 안고」와 「지워진 풍경」은 광주 5?18, 「성묘」와 「망향의 집」은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특정한 테제에 치우치지 않고 넉넉한 정서로 소재를 수용하며 질곡 많은 현대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내면을 애잔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낸다.
“뭐, 어쩔 수 없는 세상 아니었나. 못난 시절에 못난 사람들이 산 거지.” (「망향의 집)」 220면)
삶은 늘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전성태의 이름으로 갱신되고 넓어지는 한국소설의 리얼리즘
“나는 말예요, 차 나를 때 절대 손님을 사람으로 안 보거든요. 내 열아홉에 어쩌다가 쟁반을 들게 됐는데 그때 살고 싶은 마음 하나도 없었어요. 아, 옛날 생각하니까 꿀꿀해지네. 뭐 지금도 역시 손님을 사람으로 안 봐요. 그런다고 돈으로 보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짐승으로도 안 봐요. 그냥 사람으로 안 볼 뿐이에요. 뭐라고 그래야 될까. 암튼 그냥 나는 찻잔을 나르는 거거든요. 배달 많은 날은 하루에도 사백잔을 날라요. 뭔 맘이 있겠어요.” (「영접(迎接)」 180면)
해학적 문체로 소외된 사회현실을 탁월하게 묘파한 첫번째 소설집 『매향』을 펴낸 전성태는 이후에도 방언, 풍자 등이 두드러진 문체로 공동체와 삶에 깊이 뿌리박은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다. 최근의 많은 소설들이 날로 독백적으로 되어가면서 작가의 목소리가 서술을 넘어 묘사와 대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경우에 비해 볼 때 전성태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말과 행동에 관한 묘사는 그와 같은 경향과는 방법론적으로 구별된다.
「영접(迎接)」, 「밥그릇」, 「로동신문」등의 작품에서 시종일관 쓰이는 생생한 언어는 이 작품들의 가장 큰 특장이라 할 수 있다. 비루하고 비극적인 현실을 다루고 있음에도 이 이야기들이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속도감 있고 흥미롭게 읽히는 가장 큰 연유는 바로 이러한 우리말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집념에서 기인한다. 또한 해학과 풍자 이면에는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회한과 연민이 자리하고 있다.
어머니를 보고 있노라면 기억은 아주 물리적인 경계들에 쌓여 있는 것 같다. 구월의 기억이 지워지고 팔월의 기억이 지워졌다. 칠십세의 기억이 지워지고 육십세의 기억이 사라졌다. 어미로서의 기억이 사라지고 신부의 기억이 사라진 후 친정의 기억마저 지워졌다.(「이야기를 돌려드리다」 307면)
「소풍」과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는 이번 소설집에서 각각 처음과 끝에 수록된 작품이다. 한 작가가 쓰는 모든 이야기가 자신의 삶과 연관 있는 것이겠지만 이 두 작품은 작가 자전적 삶에 더욱 밀착해 있다. 치매에 걸려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돌보며 작가는 시간과 존재의 근원에 대한 깊은 사유에 잠긴다. 그리고 곧 작가는 근원이란 기억을 통해서 연결되는 것이고 기억은 결국 이야기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는 “주인공을 잃어버린 소설”(「작가의 말」 326면)이 되었지만 전성태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 우리의 삶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