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우리 아직은 괜찮다고 느끼던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
팬데믹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어떤 이들은 참고 참다가 마침내 인내심을 잃어버렸다. 세상엔 점점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듯하고, 사람들은 끝없이 경계를 가르고 서로를 경계한다. 하지만 정여울 작가는 타인 혹은 나와 다른 집단에 라벨을 붙여 왕따시키는 사람은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다름과 독특함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마치 겁에 질린 듯 사람을 내친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나와 비슷한 부류에 다정해지기는 쉽다. 그러나 나와 다른 것,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을 환대하고 보살피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의 1부 ‘따스하고 복잡하며 구슬픈 당신에게’에서는 우리 내면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감정들을 짚어보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무너진 마음을 일으킬 만한 조각들을 찾는다. 아마도 우리가 가장 환대하기 어려운 존재는 가족과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노부모와 크게 다투고 돌아서는 길, 왜 내 부모는 내 마음 같지 않을까 원망스러워지고 괴로울 때 그가 선택한 하나의 길은 마음을 울린다. 또한 32년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다정했던 벗이자 스승 황광수 선생이 돌아가신 뒤,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뚝뚝 눈물을 떨구며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그의 마음을 열어주었던 인연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영영 잃어버렸거나 스스로 망쳐버렸다고 느낄 때, 우리를 늪에서 건져낼 이야기가 여기 있다.
2부 ‘가장 아픈 시간은 끝났다’는 인생에서 우리를 수시로 주저앉히는 지나간 시절의 상처와 트라우마로부터 나 자신을 토닥이는 법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정여울 작가는 이 에세이의 원고를 넘기며 편집자에게 ‘에세이의 끝까지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마음 바닥에 눌러둔 내밀한 상처를 먼저 열어 보이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보살피는 에세이의 끝’으로 점차 나아간다. 학생이 아닌 선생으로부터 먼저 따돌림을 바랐던 어린 시절의 충격, 부모의 큰 기대를 배신할 수 없어 괴로워했던 모범생의 힘겨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겪은 모욕과 차별, 지금까지도 수많은 역할과 책임 중 그 무엇도 쉽게 거절하거나 내려놓지 못하고 스스로를 온 힘을 다해 지탱하며 하루하루 위태롭게 버텨내고 있는 과로의 나날들에 대하여. 그러나 상처를 스승으로 여기는 정여울 작가는 알고 있다. 그 어떤 아픈 시간도 결국은 ‘끝’이 있음을. 그리고 상처와 아픔을 비정상적이고 불행한 상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트라우마가 폭풍처럼 지나간 뒤의 어느 안온한 날에 잠시 미소 지으며, 행복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결국 삶의 진실에 가닿는 길임을 그는 써내려간다.
그림자를 품어 안는 삶의 아름다움은 ‘빛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겸허함’에서 시작된다. 뉴욕의 브로드웨이 극장가에서 팬데믹의 기나긴 터널을 뚫고 마침내 2년 만에 첫 공연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한 배우가 이렇게 말했다. “더이상 이 무대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평소에는 매일매일 출연할 수 있었던 바로 그 무대가 때로는 지긋지긋했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아무리 서고 싶어도 결코 무대 위에 설 수 없었던 2년’이 그들에게 무대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그림자를 극복해낸 사람만이 빛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때로는 당신의 그림자가 당신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당신의 콤플렉스, 트라우마, 슬픈 기억이 인생의 발목을 잡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끝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림자를 품어안는 용기, 그림자를 극복하는 희망, 그림자로 인해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우리의 사랑이다. (148쪽, 「그림자로 인해 더욱 아름다운 빛」 중에서)
“세상이 날 받아주지 않더라도, 이것만 있다면 괜찮아요.
모든 날이 끝내 괜찮답니다.”
3부 ‘우리가 서로를 돌볼 수만 있다면’에서 그는 팬데믹의 시대를 지나며 우리에게 새삼 소중해진 것들, 그리고 비대면으로도 주고받을 수 있는 연결의 감각들에 대해 말한다. 그는 어느 날 학원도 안 가고 게임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선언하는 조카를 보며 자신은 한 번도 내어보지 못한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OTT 드라마들 가운데서도 자신이 사로잡히는 어떤 주제를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리줌(resume),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제2의 인생을 열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는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는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인류의 스토리텔링이다. 꿈과 희망이 다 무너져버린 것 같은 곳에서도 인간은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192쪽)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돌보고 환대할 수 있다.
4부 ‘사랑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에서는 인문, 심리, 여행, 문학, 평론 등의 장르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글쟁이답게 영화와 드라마, 고전 문학작품과 최신간 베스트셀러를 오가며 아무리 힘겨운 순간에도 우리에게 미소를 잃지 않게 하는 온기를 지닌 작품과 사람들을 벗 삼아 어려운 날을 지나가는 법을 일러준다. 준열한 르포작품으로 알려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사실은 커다란 ‘듣는 귀’로 독자들의 마음을 여는 인류애로 가득한 작가임을 소개하고, 바로 그 ‘듣는 귀’가 환대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한 무명작가가 머나먼 타국의 책방 주인과 거래하며 나누기 시작한 편지가 국경을 초월하는 우정으로 이어진 기록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언급하면서는 “이제는 만나지 못하는 친구를, 혹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까지도 영원히 사랑하는 법”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저 이미 쓰인 사랑과 환대의 이야기들을 읽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서사를 기록함으로써 ‘글쓰는 사람’으로, 자신의 삶과 상처를 돌보고 살피는 사람으로 살 것을 제안한다. 정여울의 문장은 그렇게 읽는 사람을 쓰는 사람으로 만든다.
“친절하라. 당신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 있으니.”
이 책에서는 정여울 작가와 오랫동안 책작업뿐만 아니라 삶을 함께한 동반자 사진작가 이승원의 사진들도 눈여겨봐야 한다. 책 앞부분에서는 온전히 흑백사진이 흘러가다가 맨 마지막에 이르러 돌연 창문이 열려 햇살이 쏟아져들어오듯 찬란한 빛깔의 컬러사진들이 빛을 뿜는다. 마치 흑백사진처럼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듯한 날들에도 미소와 발견, 더없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몸짓과 표정이 있고, 컬러사진 같은 행복은 인생이나 책 전체로 따져보면 몇 페이지 안 될지 모르나, 잊지 못할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언제 어디서 왜 찍었느냐가 중요한 사진이 아니라, 언제여도 좋고 어디여도 좋은 한순간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어여쁜 얼굴과 모습들을 포착한 이 사진들 또한 큰 주제는 ‘다정과 환대’일 것이다.
어려운 시절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여기저기 닳고 긁히며 마음의 여유를 잃어간다. 그러나 지독한 슬픔과 분노가 우리를 덮칠 때에도 정여울 작가는 증오와 복수로 그에 응답할 것이 아니라, 그 슬픔과 분노를 나에게 안긴 이의 마음과 고뇌를 응시하는 노력과 용기를 주문한다. 왜냐하면 나를 박대하고 비난하는 그 사람도 나만큼이나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 있을 것이기에. 증오와 편견, 혐오와 갈라치기의 시대, 결국 우리를 구원하고 보듬는 것은 단 한 사람의 다정과 이해, 환대이다.
슬픔과 분노가 가슴 저 밑바닥부터 마그마처럼 끓어오를 때, 떠올리는 문장이 있다. “친절하라. 당신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 있으니.(Be kind. For everyone you meet is fighting a hard battle.)” 플라톤의 문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출처가 확실치는 않다. 특히 너무 화가 나서 타인에게 미소 지을 마음의 여유 자체가 깡그리 사라져버릴 때, 이 문장을 가만히 되뇌며 스스로를 토닥인다. 나에게 상처 준 바로 그 사람도 오늘, 아니 평생 쉴새없이, 자기 나름의 힘겨운 전투를 치러왔을 거라고. 나를 비난하고 박대하며 증오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 문장을 내 식으로 바꾸어 스스로를 토닥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하자.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은 내게 드러낸 저 적개심보다 천배는 더 쓰라린 남모를 고통을 견뎠겠지. 이 문장과 쌍둥이처럼 닮은 문장을 파리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 만났다. “낯선 사람을 박대하지 말라. 어쩌면 그는 변장한 천사일지도 모르니.(Be not inhospitable to strangers, lest they be angels in disguise.)” 부디 온 세상이 증오와 편견으로 가득차 있을지라도, 우리 가 타인을 아무 조건 없이 반가이 맞아줄 수 있는 따스한 미소만은 잃지 않기를. (41~42쪽, 「내게는 결코 친절하지 않은 당신에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