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 라고 막연한 생각을 갖고 읽기 시작했다. 최근에 읽은 책들이 엄청난 사회의 변화 안에서도 개인의 삶은 계속되는 이야기들이었고, 이런 류의 책들을 읽으면서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사람들은 '일상'을 영위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말한다. 세상이 너무 울적하고 답이 안나올 것 같아도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 웃는 일을 계속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당연히 세상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매몰되기보다는 그러면서도 내 삶을 살아가는 것, 루틴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말로만 들었을 때에는 그게 무엇일까,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고 내일 당장 전쟁이 날 것 같을 때에도 오늘 내가 출근을 하는게 중요할까? 라는 생각을 종종 했는데, '토지'나 '나목'을 읽으면서 일상 생활의 영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경이는 전쟁 중에 오빠를 잃고, 하루아침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 삶을 살고 있다. 미군 px에서 일을 하며 미국 군인들이 가족이나 연인들에게 선물로 보낼 초상화를 주문받는 일을 한다. 이 부분도 참 놀랍다.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인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낼 초상화를 주문하고 그림을 그리고 선물을 보내고. 전쟁을 하러 외국에 나와있는 상황에서도 플러팅을 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 이걸 참.. 낭만적이라고 해야하나.

사실 경이의 대화만 보면 전쟁중이라는 것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px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갈 때, 폭격으로 부서진 고택을 마주할 때 지금이 전쟁중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어둡고 컴컴한 집, 색을 잃은 집, 아들을 잃은 엄마도 회색으로 존재하는 어두운 집.

-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전쟁이 몇 번이고 되풀이될 테고 그 사이에 전쟁은 사람들에게 재난을 골고루 나누리라고. 나는 다만 재난의 분배를 먼저 받았을 뿐이라고.

내가 지금 이렇게 불행한 것은 재난의 분배를 먼저 받았을 뿐이라고, 너희도 조만간 이 불행을 받을거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경이. 이 문장에서 경이의 성격이 잘 보여진다고 생각한다. 나 혼자만 이렇게 힘든건 아니야, 너네도 지금 괜찮아 보이지만 곧 안좋아질 수 있어. 웃을 수 있을 때 웃어둬, 이런 어리고 냉소적인 경이의 마음이 보여지는 문장이었다.

...

경이가 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고목이 아닌 나목이 되어 꽃을 피웠으면 좋겠다. 좀 더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비극은 비극대로 놔두고,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경이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