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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재즈 황금 시대의 여성 보컬 모음집 (Toppi's Ladies)

[ 2CD 양장본 / 55p 삽화 및 가사 수록 ]
Nina Simone, Gloria Lynne, Nancy Wilson, Annie Ross, Chris Connor 노래 외 36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굿인터내셔널 | 2020년 06월 29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62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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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황금 시대의 여성 보컬 모음집 (Toppi's Ladies)

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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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20년 06월 29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Ladies in the fities & six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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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2 [Sweethearts of the roaring twen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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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41명)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줄리 런던(Julie London), 사라 본(Sarah Vaughan),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과 함께 최고의 여성재즈가수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디바 니나 시몬(Nina Simone). 음지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바깥세상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다. 통한과 슬픔, 분노와 격정 그리고 발산하고 싶어도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어 떠도는 영혼들에게 그녀는 구원의 손짓을 보낸다. 어둡고 습한 곳에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말고 잘못된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라고. 화를 내고, 하고 싶은 소리를 외치라고. 이제 너의 주장을 펴고 권리를 찾을 때라고. 속삭이듯 한탄하듯 때론 비단처럼 윤기 나게 때론 벨벳처럼 부드럽게 노래에 실어 전언한다. 본명은 유니스 웨이몬(Eunice Waymon), 가수 니나 시몬(Nina Siomone)으로 대중음악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트라이온에서 가난한 집안의 여섯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4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피아노신동으로 불린 그는 ‘유니스 웨이몬 기금’(Eunice Waymon Fund)을 설립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음악선생님의 도움으로 음악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고 뉴욕 소재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가정을 지탱하기위해, 그는 피아노반주자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1954년 여름 그는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있는 아일랜드 바의 연주자로 직업을 잡았는데, 바 주인은 그에게 노래도 잘하길 요구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을 해왔던 유니스 웨이몬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연예사업으로 들어섰다. 그는 이름을 니나(리틀 원)시몬으로 바꿨다.(1950년대 할리우드의 쟁쟁한 여배우들과 어깨를 겨룬 프랑스의 여배우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의 이름을 차용) 1950년대 후반, 니나 시몬은 베들레헴 레이블에서 최초의 트랙들을 녹음했다. 이 곡들에서 피아니스트, 가수, 편곡과 작곡가로서 그의 비범한 재능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Plain gold ring’, ’Don’t smoke in bed’, ’Little girl blue’와 같은 노래들은 곧 그의 상연목록에서 스탠더드가 되었다. 오페라 (Porgy and Bess)의 곡 중 하나인 ‘I love you, Porgy’가 타운 홀, 카네기 홀 그리고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불리고 히트를 기록하면서 나이트클럽 가수였던 그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재즈스탠더드, 가스펠, 흑인영가, 클래식음악, 유래가 다양한 포크음악, 블루스, 팝, 뮤지컬과 오페라 송, 아프리카의 영창 게다가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까지, 이미 음악활동의 시작부터 창대했던 그는 준비된 스타였다. 기회는 당연한 만찬이었다. 클래식의 대위법, 재즈의 즉흥연주, 블루스의 변조 등 다방면의 음악요소를 결합해내는 시몬의 재능은 더 이상 무시될 수 없는 발군의 실력이었다. 독자적인 타이밍, 고요함의 음악적 극대화, 몇몇 코드로만 곡을 진행시키는 피아노연주 등의 방식으로 절제미가 돋보이는 자신만의 공연분위기를 주조해내는 실력은 가히 범접을 불허할 정도로 특징적이었으며 그의 여러 작품들에 녹아들었다. 때로 그의 목소리는 어둡고 가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것에서부터 부드럽고 달콤한 것까지 변화무쌍한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잠시의 휴지와 반복 속에 그의 목소리는 외치고 속삭이고 또 한탄했다. 가끔은 피아노, 노래 소리, 몸짓이 따로 노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의 결정체로 모아졌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는 청중들에게 주문을 걸었다. 여러 가지 주문 중 하나에만 걸려도 니나 시몬이 비교불허의 아티스트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에 청중들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1963년 버밍햄의 교회에서 터진 폭파사건으로 네 명의 흑인아이들이 사망하자, 니나는 미국에서 동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비통함과 격노를 금치 못했고 곧 규탄의 의미를 담은 ‘Mississippi Goddam’(빌어먹을 미시시피)을 썼다. 이 노래의 강력한 호소력과 필립스 레코드에서 처음 녹음 발표한 < Nina Simone in Concert >에 실린 노래들은 그녀의 또 다른 예술적 지평을 보여주었다. 예술적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자신만의 음색과 세심한 피아노연주에 심혈을 기울인 그는 사랑, 증오, 슬픔, 기쁨, 외로움 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노래에 실어 분명하게 전해주었다. 한때 커트 웨일(Kurt Weill)과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가 작곡한 노래 ‘Pirate Jenny’를 부르며 여배우로서 대극장을 순회하기도 했던 그는 프랑스에서 자끄 브렐(Jacques Brel)의 연약한 사랑노래 ’날 떠나지 말아요’(Ne me quitte pas)를 부르기로 했다. 니나는 ‘소울의 여대사제’로 불리며 팬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신비로운 인물로 존경받음과 동시에 거의 종교계인사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했다. 1966년 흑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시선을 네 명의 흑인여성들의 비애로 써낸 ‘네 여인들’(Four women)을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흑인들에게 모욕적이라는 이유로 필라델피아와 뉴욕 라디오방송에서 금지되었다. 여대사제는 말씀전파에 적당한 음악을 찾기 위해 다른 길을 걸어갔다. RCA레이블로 옮겨 발표한 첫 앨범 < Nina Simone Sings The Blues >에 실린 ‘I want a little sugar in my bowl’, ’Do I move you?’, ’My man’s gone now’ 그리고 랭스톤 휴스(Langston Hughes)가 그녀를 위해 써준 시를 토대로 한 저항가요 ‘Backlash blues’를 포함해 더 많은 공민권운동가요를 불러 자신의 노선을 확증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의 비극을 노래한 ‘Why?(The King of Love is Dead)’을 위시해 ’Brown baby’, ’Images’(워링 쿠니의 시에 근거한), ‘Go limp’, ’Old Jim Crow’, ’To be Young, Gifted and Black’ 등의 노래들은 미국에서 흑인국민적인 찬가가 되었다. 그녀는 홀로 외롭게 노래하고 연주한 앨범 < Nina Simone and Piano ! >(1970)로 열성적인 팬들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환생, 죽음, 고독 그리고 사랑에 대한 내성적인 노래들로 채운 모음집은 그녀의 녹음경력에 변함없는 하이라이트였다. 노래들에 새롭고 더 깊은 차원의 선물을 담아냈다. ‘Ain’t got no/I got life’(뮤지컬 “헤어”에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Suzanne’, ‘To love somebody’와 같은 비지스의 노래들, 봉고연주로 두 배의 속도감을 붙인 클래식 ’My way’, ‘Just like Thumb’s blues’ 그리고 네 곡의 밥 딜런의 노래들의 주목할 만한 버전들에는 더 새롭고 깊은 차원의 재능을 담아냈다. < Emergency Ward >는 절정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조지 해리슨이 쓴 두 곡 ’My sweet lord’와 ‘Isn’t it a pity’의 긴 버전을 연주하면서 환각과 도피성을 배제한 분위기로 꾸몄다. 니나는 그러나 어쨌든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이 조종당해 왔다고 느꼈고, 음반회사, 연예사업, 인종차별주의에 넌더리가 났다. 1974년 미국을 떠나 바바도스(Barbados)로 향한 그녀는 이듬해 리베리아, 스위스, 파리,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남부에 안착했다. 1978년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의 ‘My father’를 정확한 해석으로 다시 부른 버전과 최면술을 거는 ’Everything must change’가 실린 새 앨범 < Baltimore >을 오랜만에 내놓았다. 그리고 1982년 미국으로부터 자진 “망명”을 선언한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표시한 앨범 < Fodder On My Wings >을 파리에서 녹음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여느 때보다도 잘 담긴 앨범이었다. 니나는 곡을 쓰고 개작하고 편곡했다. 피아노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며 영어와 프랑스어로 노래했다. 이 앨범은 1988년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추억)하는 노래 ‘Alone again naturally’의 특별버전을 포함한 몇몇 보너스트랙이 더해져 CD로 재발매 되었다. 1984년, 런던의 로니 스콧(Ronnie Scott)에서 열린 그녀의 콘서트실황을 담은 필름이 매혹적인 비디오로 발매되었다. 드럼에 폴 로빈슨(Paul Robinson)이 찬조 출연한 이 비디오에는 그녀의 첫 레코드에서 발췌한 노래 ‘My baby just cares for me’가 포함돼 큰 인기를 누렸다. 다음 해 < Nina’s Back >(니나의 귀환)이란 제목의 새 앨범을 발표한 그녀는 전 세계를 누비는 콘서트에 나섰다. 1989년 그녀는 피트 타운젠트(Pete Townsend)의 뮤지컬 < The Iron Man >에 공헌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과 1991년 브라질 팝가수 마리아 베사니아(Maria Bethania)와 아프리카음악의 세계화에 앞장선 유명 여성보컬리스트 마리암 마케바(Mariam Makeba)와 함께 녹음했다. 1991년엔 또한 자서전 < I Put A Spell On You >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어 번역본으로도 출판되었다. 1993년 스튜디오에서 만든 새 앨범 < A Single Woman >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로드 맥퀸(Rod McKuen)의 노래들, 자신의 노래 ‘Marry me’, 프랑스의 스탠더드를 자기버전으로 부른 ’Il n’y a pas d’amour heureux’, 매우 감동적인 ‘Papa, can you hear me?’가 수록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영화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레퍼토리 중 5곡이 사운드트랙에 들어간 1993년 영화 (Point Of No Return, The Assassin, code name: Nina로도 불린다)를 위시해 (1996)에 사용된 ‘I wish I knew how it would feel to be free’, (1996)에 삽입된 ’My baby just cares for me’ 그리고 (1997)의 ‘Exactly like you’까지 그의 목소리는 영화와 함께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월은 흘러도 그녀의 음악은 변함없이 새롭고 젊은 청취자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Ain’t got no/I got life’는 1988년 네덜란드에서 대형히트를 기록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절친한 반주자들, 퍼커션의 레폴도 플레밍(Lepoldo Fleming), 베이스의 토니 존스(Tony Jones), 드럼의 폴 로빈슨(Paul Robinson), 키보드의 하비에르 콜라도스(Xavier Collados) 그리고 기타리스트 겸 그녀의 음악 감독 알 섀크만(Al Schackman)과 함께 세계 순회공연을 펼치며 청중들과 함께 여전히 흥분의 순간을 맛봤다. 1997년 런던에 바비칸(Barbican) 극장에서 그는 공민권운동, 형제애를 위해 미국의 첫 번째이자 주요한 리더들 중 한사람에게 헌정하는 의미의 노래 ’Every Time I Feel The Spirit’을 불렀다. ‘Reached down and got my soul’, ’The blood done changed my name’, ’When I see the blood’와 같이 더욱 영가(Spiritual)적이고 생명과 같은 노래들이 뒤를 이었다. 니나는 1997년 프랑스에서 열린 니스 재즈 페스티벌(Nice Jazz Festival), 1998년 그리스의 의 데살로니가 재즈 페스티벌(Thessalonica Jazz Festival)의 하이라이트였다. 1999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기네스 블루스 페스티벌에서는 그녀의 딸 리사 첼레스테(Lisa Celeste)와 함께 몇몇 곡을 듀엣으로 합창해 모녀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몬은 라틴 수퍼스타 라파엘(Rafael)과 함께 노래하고 두 번의 디즈니 연극 워크숍에 참여, 의 타이틀 역과 의 날라 역을 맡아 공연하면서 세계 투어를 했다. 1998년 7월 24일, 니나 시몬은 넬슨 만델라의 80회 생일파티에 특별손님으로 초대됐다. 1999년 10월 7일 그녀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음악시상식에서 평생업적을 기리는 공로상을 품에 안았다. 2000년에 들어 그녀는 5월 26일 애틀랜타 명예 시민권을 수여받았다. 6월 9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협회로부터 다이아몬드 상을 수상한데 이어 8월 7일에는 프랑스에서 명예로운 총사상을 수상했다. 닥터. 시몬은 2003년 4월 21일 프랑스 남부 까리-르-루에에 그녀의 별장에서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소망대로 유해는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 뿌려졌다. 매사추세츠대학으로부터 음악과 인류애에 대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바로 최후의 전승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역사적 지위를 얻었다. 최고의 여류시인, 우리시대의 음악작가로 그는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재즈 보컬리스트 재즈 보컬리스트
재즈 가수 재즈 가수
노래 : Etta James (에타 제임스)
재즈 소울 블루스 보컬 재즈 소울 블루스 보컬
사라 본(Sarah Vaughan)은 과거 재즈 연주에 부산물 정도로만 여겨지던 재즈 보컬의 위상을 한껏 드높인 인물이다. 4옥타브(지금은 7옥타브도 있지만)를 자유자제로 넘나드는 폭넓은 음역과 오페라의 디바를 연상시키는 극적인 표현력은 재즈 보컬 연주의 즉흥성과 예술성을 한 차원 높였다. 국내에선 영화 ’접속’의 삽입 곡 ’A lover’s concerto’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재즈 보컬이다. 빌리 ... 사라 본(Sarah Vaughan)은 과거 재즈 연주에 부산물 정도로만 여겨지던 재즈 보컬의 위상을 한껏 드높인 인물이다. 4옥타브(지금은 7옥타브도 있지만)를 자유자제로 넘나드는 폭넓은 음역과 오페라의 디바를 연상시키는 극적인 표현력은 재즈 보컬 연주의 즉흥성과 예술성을 한 차원 높였다. 국내에선 영화 ’접속’의 삽입 곡 ’A lover’s concerto’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재즈 보컬이다. 빌리 홀리데이, 엘라 핏 제럴드와 함께 재즈 보컬의 3성(星)으로 추앙 받는 그의 목소리는 1940년대 비밥으로 대변되는 모던 재즈시대의 만개와 함께 ’목소리로 연주하는 비밥’의 전형을 제시함으로써 30-40년대 스윙 보컬의 달콤함을 뛰어 넘어 한층 세련되고 스케일이 느껴지는 보컬의 느낌을 창조해냈다. 1924년 3월 27일 미국 뉴저지주의 뉴워크에서 태어난 그녀는 다른 흑인 가정과는 달리 목사인 아버지 덕에 7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침례교 교회에선 성가대로 활동한다. 빌리 홀리데이와 엘라 핏제럴드와는 달리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사라 본은 이후 음악 학교에 진학해 정규 음악 교육을 받는다. 가수가 되기 위해 그녀는 1942년 뉴욕 할렘에 소재한 아폴로 극장에서 열린 아마추어 재즈 콘테스트에 출전, 우승 트로피를 안으며 과거 엘라 핏 제럴드가 그랬던 것처럼 프로 가수로서 입문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얼마 후 그녀는 당시 촉망받던 젊은 재즈 트럼펫 주자 빌리 엑스타인(Billy Ecstein)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1944년 얼 하인즈 빅 밴드의 단원으로 입단하며 정식으로 재즈 계에 입문한다. 당시 얼 하인즈 밴드에 소속된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와 같은 비밥 재즈의 기린아들의 연주에 맞춰 그녀는 노래를 했고, 이런 분위기에서 그녀는 비밥의 음악 문법을 자신의 목소리에 담아내는 훈련을 쌓아간다. 얼 하인즈 밴드를 탈퇴한 빌리 엑스타인을 따라 사라 본은 그의 밴드에 합류해 음악 생활을 해나갔고, 1944년 빌리 엑스타인 밴드의 이름으로 발표된 앨범 < I’ll Wait And Pray >의 보컬 주자로 참여한다. 이 앨범은 ’최초의 모던 재즈 보컬 레코딩’으로 재즈 사에 기록된다. 이듬해인 1945년 빌리 엑스타인과 결별하며 사라 본은 솔로로 나선다. 1945-1948년까지 그녀는 뮤직 크래프트 사를 통해 ’If you could see me now’ , ’Tenderly’ ,’It’s magic’과 같은 보컬 곡들을 통해 비밥의 느낌이 우러나는 독보적인 보컬 연주를 펼치며 히트차트에 그녀의 이름을 올려놓는다. 1949-1953년까지 콜럼비아 레코드사에 소속이 되어 그녀는 지미 존슨 밴드와 함께 활동하게 되고, 당시 무명이었던 마일즈 데이비스도 그녀와 함께 일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명반 < Sarah Vaughn In Hi-Fi >(1949-1953)는 비밥의 문법에 팝 적인 감성이 우러나는 그녀의 목소리 변화를 느끼게 해준다. 1954년 소속사를 머큐리(Mercury)로 옮기며, 그녀의 대표작이자 재즈 보컬의 백미로 추앙 받는 앨범< Sarah Vaughan With Clifford Brown >(1954)을 시작으로 1967년까지 머큐리, 엠알시, 롤렛 레코드를 통해 기량이 뛰어난 가수에서 독보적인 음색과 분위기를 연출하는 아티스트의 반열에 오른다. 이 시기부터 사라 본 음악엔 약간의 굴곡이 느껴진다. 소규모 편성의 세션들과 함께 한 모던재즈 보컬 음반은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지만, 이따금씩 발표한 팝-크로스오버 앨범은 대중적으로는 환영받았지만 평론가들로부터는 외면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깊고, 힘이 넘치는 목소리를 통해 모던 재즈의 고급스러움과 발라드로 대변되는 팝의 편안함에까지 자신의 음악 영역을 넓혀 나간다. 근대 음악의 아버지 바하(Bach)가 작곡한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협주곡’의 테마가 들리는 ’A lover’s concerto’(1966)는 여전히 힘이 느껴지는 그녀의 풍부한 성량이 대중적인 클래식 선율과 만나면서 재즈 보컬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친숙해질 수 있게 해준 대표적인 곡이다. 70년대 들어 그녀는 메인 스트림, 파블로 레이블을 통해 앨범을 발표했고,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얘기되는 < How Long Has This Been >(1978)은 오스카 피터슨, 조 패스, 루이 벨슨, 레이 브라이언트와 같은 재즈 계의 거물급 스타들과 함께 긴밀한 호흡을 보여주며 그녀의 후반기 대표작으로 기억된다. 80년대 들어 이렇다 할 연주 활동이 없었던 사라 본은 말년인 1989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는다. 우리나라에도 뒤늦게 그녀가 소개되며 그의 1956년 앨범 < In The Land If Hi-Fi >가 1990년 폴리그램에서 발매되었다. 1990년 4월 3일 사라 본은 폐암으로 사망했다.
노래 : Aretha Franklin (아레사 프랭클린)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0세기 문화예술인 20인’을 보자. 여기에는 대중음악인 넷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프랭크 시내트라, 비틀즈, 밥 딜런 그리고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20세기는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놀라운 사실은 로큰롤의 황제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자타가 공인하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빠졌다는 점이다. 두 대중음악사의 거인은 누가 봐도 아레사 프랭클린에 비해서는 대중적 지명도나 후대의 영향력 측면에서 앞선다. 만약 흑인 음악인 한 사람을 꼽았어야 했어도 그 주인공은 마이클 잭슨이 되어야 당연하다. 그런데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아레사 프랭클린이 명단에 오른 이유는 마이클 잭슨을 누른 ‘흑인의 대표성’ 때문으로만 볼 수 없다. 흑백을 떠나서 팝 음악계 전체를 진동시킨 ‘경이로운 가창력’ 때문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42년생 미국 멤피스에서 태어나 1960년대말 스타덤에 오른 왕년의 가수지만 지금도 노래하면 음악관계자들은 만장일치로 그녀를 거명한다. 얼마나 노래를 잘하길래 그런가.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가 1967년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의 지원 아래 어틀랜틱 음반사에서 처음 앨범을 취입했을 때 반주를 해준 사람들. 이른바 세션맨들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노래솜씨에 그만 넋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이런 환상적인 레코딩에 내가 참여한 것이 영광’이라며 어울려 춤을 췄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의 유선방송국VH원이 주최한 ‘디바스 라이브’(음반으로도 나왔다) 공연에서는 관람객 중 한 사람이었던 여배우 사라 제시카 파커가 인상적인 소감을 남겼다. “아레사를 보기 전에 난 스타에 반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난 홀린 기분이다. 아레사가 나한테 ‘옷이 멋져요’ 하길래 난 주저없이 ‘가지세요’라고 했다. 발가벗고 여기를 나가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녀는 옷을 가질만하다!” 지난해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한번 천부적인 가창력으로 사람들의 혼을 뺐다. 그녀는 시상식장에서 노래부르기로 돼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병으로 불참하게 되자 갑작스럽게 대타로 뛰게 되었다. 뒷무대에서 불과 몇분 연습하고 나서 그녀는 거뜬하게 파바로티의 ‘네순 도르마’를 불렀다. 더욱이 72인조 오케스트라에 맞추기 위해 그 곡을 파바로티의 키로 노래했다. 주최측, 오케스트라 단원 그리고 객석 모두가 ‘경외’의 박수를 쳤다. 그녀에 대한 평자들의 찬사와 칭송은 끝이 없다. ‘형언하기 어렵다’(No other description will do)가 대부분이다. 음악평론가 벤 에드먼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난 50년간 우리를 놀라게 하고 겁에 질리게 한 또다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영국의 록잡지 < 모조 >는 지난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을 음악관계자 설문을 통해 선정한 바 있다. 여기서 1위는 말할 것도 없이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모조 >측은 2위와 표차를 엄청나게 내고 그녀가 넘버 원 싱어가 된 것에 놀랐다. 다시금 아레사 프랭클린이 남녀, 흑백, 장르를 통틀어 ‘20세기의 최고 가수’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 그녀는 소울의 영원한 여왕 그녀의 음악은 목소리와 창법의 미학뿐 아니라 시대성이 있다. < 타임 >지가 20세기의 위대한 문화예술인 중 한 사람으로 뽑은 진정한 이유다. 1960년대 후반 아레사 프랭클린이 불러 유명한 곡 ‘존경(Respect)’, ‘체인 오브 풀스(Chain of fools)’, ‘생각해요(Think)‘ 등에는 당시 흑인들의 당당한 의식이 배어 있다. 흑인 민권운동의 불길이 솟아오르던 그 무렵 흑인들은 백인 지배사회에서 결코 흑인들이 열등한 인종이 아니며, 따라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흑인의 영혼을 의미하는 소울(Soul)이었다. 소울 음악은 때문에 목청을 돋워 질러대는 ‘샤우트’를 특징으로 했다. 국내에서도 록의 비조로 불리는 신중현이 소울을 창조적으로 도입해 김추자, 박인수, 펄 시스터즈와 같은 소울 가수가 1970년대 초반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1967년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흑인 폭동이 발발했을 때 성난 흑인 민중들은 백인들에게 존경을 요구하는 의미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의 그해 히트곡 ‘존경’을 시위대의 찬가로 불렀다. 이듬 해 디토로이트 시장 제롬 카바나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날’을 선포하기도 했다. 미국사회가 이때부터 흑인의 음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백인들도 흑인의 레코드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말해 흑인 소울의 존재를 만천하에 고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神)의 조리에 의한 거 같은 지존(至尊)의 가창력으로 그것을 전했으니 그 위력은 더할 나위가 없다. 또 지적하는 바이지만 ‘존경’을 듣고 동료가수 오티스 레딩은 혀를 내둘렀다. 이 곡은 그가 쓴 곡으로 직접 불러 발표한 바도 있는데, 아레사 프랭클린이 완전히 새롭게 그리고 완벽하게 소화한 것을 듣고 질려버린 것이었다. 오티스 레딩의 경탄. “난 내 노래를 잃어버렸어. 저 여자가 내 곡을 빼았아갔어!” 아레사는 조금도 변함없는 ‘소울의 여왕(Queen of soul)’으로 통한다. ‘여성 소울(Lady soul)’이란 별명도 있다. < 디바스 라이브 >에서 아레사 프랭클린과 호흡을 맞춘 머라이어 캐리도 그렇게 호칭하고 있지만 이 호칭들은 영원히 아무도 넘아다볼 수 없을 것 같다.
노래 : Ernestine Anderson (어니스틴 앤더슨 (재즈, 블루스 보컬))
노래 : Carmen McRae (카르멘 맥레이 )
재즈 보컬, 피아노 연주자 재즈 보컬, 피아노 연주자
노래 : Anita O'Day (애니타 오데이,Anita Belle Colton)
재즈 가수 재즈 가수
가수, 배우 가수, 배우
재즈, 팝 가수 재즈, 팝 가수
재즈 보컬 재즈 보컬
노래 : Rosemary Clooney (로즈마리 클루니 )
재즈 가수. 재즈 가수.
노래 : Mildred Bailey (밀드레드 베일리)
노래 : Ethel Waters (에델 워터스,Ethel Howard)
재즈 가수 재즈 가수
노래 : Ella Fitzgerald (엘라 피츠제랄드)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께 재즈 음악사에 길이 남는 ‘여인천하’를 이뤄낸 엘라 핏제랄드는 1917년 4월 25일 버지니아주 뉴포트에서 태어났다. 비운의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처럼 엘라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데, 성장기의 대부분을 홈리스(homeless)로 보낼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엘라는 1934년 뉴욕 할렘가에 소재한 아폴로 극장에서 열린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청중의 자격으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던 밴드 리더이자 드러머인 칙 웹(Chick Web)은 이 체구 작은(?) 소녀에게서 가능성을 발견, 자신의 빅 밴드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게 한다. 칙 웹의 도움으로 엘라는 그의 밴드의 리드 싱어 자격으로 대중 앞에 섰고 얼마 후 그녀가 데카(Decca) 레이블에서 처음 녹음한 ‘A-tiskete, A- Taskete’(1938), ’Undecided’(1939)가 공전의 히트를 거두며 가수로서의 순조로운 출발을 한다. 그러나 1939년, 칙 웹의 갑작스런 요절로 인해 엘라는 그 후 2년 간 그가 떠난 밴드의 빈 공간을 메워 나가야 했다. 1942년 솔로로 독립한 그녀는 예전 소녀의 상큼함과 순수함이 느껴지던 데뷔시절과 달리 좀 더 완숙한 목소리로의 변신을 필요로 했다. 잉크 스팟(Ink Spot), 루이스 조던(Louis Jordan)과 같은 R&B 싱어들과 잠시 활동을 같이 하던 엘라였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은 역시 ‘재즈’임을 깨 닳고, 1946년 노먼 그란즈(Norman Granz-훗날 버브 레코드의 사장이 됨)를 새 매니저로 맞이하며 비밥의 거성인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밴드의 리드 싱어로 일하게된다. 디지와의 연주 경험은 엘라가 비밥의 문법을 자기의 목소리로 소화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변화무쌍한 리듬과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파트별 연주에 맞춰 터져 나오는 유창한 스캣 창법은 비밥의 연주와 그녀의 보컬이 어울림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Ray Brown) 트리오의 백업 연주로 녹음된 ‘How high the moon’(1947)같은 곡에서 그녀의 스캣 창법은 악기에 버금가는 애드립이 목격된다. 1955년 버브(Verve)와 전속 계약을 맺은 엘라는 이 때부터 음악 인생의 최고의 황금기를 맞는다. < Songs from Pete Kelly’s blues >(1955)가 앨범 차트 7위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기가도를 질주한다. 이듬해, 구수한 목소리의 트럼펫 주자 루이 암스트롱과의 듀엣 < Ella & Louis >(1956)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쿼텟의 백업 연주로 발표 되 대중적, 비평적 찬사를 얻었으며 두 사람간의 음악적 교분은 < Ella & Louis again >(1957)과 < Porgy & Bess >(1958)로 이어진다. 이 앨범들은 재즈 팬들의 필수 컬렉션 대상들이기도 하다. 같은 해 <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이 재즈 판을 휩쓸며 베스트셀러로 기록되는 성공을 거둔다. 이를 시작으로 엘라는 조지 거쉰(George Gerswin), 제롬 컨(Jerome Kern), 해롤드 알렌(Harold Arlen), 어빙 벌린(Irving Berlin)등 1세대 틴 팬 앨리 작곡가들의 명곡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담아내는 방대한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그녀의 노력은 틴 팬 엘리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와 하트 로렌즈(Hart Lorenz)의 곡으로 꾸며진 실황 앨범 < Ella Fitzgerald Sings The Rodgers And Hart Song >(1957)의 성공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군림하게 된다. 틴 팬 앨리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1958-59년 사이에 녹음해 발표한 조지 & 이라 거쉰(George & Ira Gershwin)의 곡을 집대성한 < The George & Ira Gershwin Song Book >(1959)을 통해 정점에 다다른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엘라는 < Mack The Knife-Ella In Berlin >(1960)을 폴 스미스(Paul Smith) 쿼텟의 연주로 녹음된 라이브 앨범을 공개, ‘How high the moon’, ’Mack the knife’를 히트시킨다. 이후 1963년엔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퀸시 존슨(Quincy Jones)이 편곡으로 연주된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의 협연작 < Ella & Basie! >과 1965년엔 오랫동안 음악적 교분을 쌓아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과 다시 의기투합해 < Ella At Duke Place >를 각각 발표하는 등 스윙의 거장과의 잇단 명작을 공개한다. 캐피톨(Capitol)로 이적해 다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간 엘라는 1969년 그만 백내장으로 인해 잠시 활동을 중단한다. 1973년 연로한 나이에 불구하고 < Ella Fitzgerald At The Carnegie Hall >을 발표했고, 1977년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가해 실황 앨범 < Ella Fitzgerlad With The Tommy Flanagan Trio-Montreux’77 >을 공개하며 예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손색없는 보컬 기량을 선보였다. 1980년대 이르러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예전만큼의 노련함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엘라는 근근히 연주 활동을 지속해나간다. 그러나 나빠진 건강과 시력을 인해 그녀는 1994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2년 후인 1996년 6월 15일 비버리 힐즈에 있는 자신에 집에서 세상을 떠난다.
노래 : Dusty Springfield (더스티 스프링필드)
35년여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 파퓰러 뮤직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여가수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는 백인이 부르는 흑인 소울 이른바 ‘블루 아이드 소울’을 1960년대부터 구사하면서 백인 소울의 영역을 개척한 위대한 여가수로, 흑인에 못지 않은 강렬한 보컬 호소력에 팝의 부드러운 느낌을 동시에 지녔으며, 재즈적 감성까지 구현해 낸 대형 싱어다. 1996년 공전의 반향을 부른 영화 < 접속... 35년여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 파퓰러 뮤직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여가수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는 백인이 부르는 흑인 소울 이른바 ‘블루 아이드 소울’을 1960년대부터 구사하면서 백인 소울의 영역을 개척한 위대한 여가수로, 흑인에 못지 않은 강렬한 보컬 호소력에 팝의 부드러운 느낌을 동시에 지녔으며, 재즈적 감성까지 구현해 낸 대형 싱어다. 1996년 공전의 반향을 부른 영화 < 접속 >에 그녀의 노래 ‘The look of love’가 삽입되어 애청되면서 국내의 신세대 팬들과도 친숙해졌다. 1939년 영국 런던에서 메리 이사벨 캐서린 버나데트 오브리엔(Mary Isabel Catherine Bernadette O’Brien)이란 본명으로 태어나 1958년 3인조 보컬 그룹 라나 시스터스(Lana Sisters)에서 가수활동을 시작했으며 1960년에는 오빠 디온(Dion), 그의 친구 팀 페일드(Tim Feild)와 함께 더 스프링필즈(The Springfields)를 결성,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다. 더스티 스프링필드로 개명하고 오빠 디온도 팀 스프링필드로 이름을 바꾸며 이듬해 ‘Dear John’으로 데뷔한 스프링필즈는 처음에 차트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1961년 <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 독자 선정 영국 최우수 보컬 그룹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1963년 발표한 싱글 ‘Island of dreams’와 ‘Say I won’t be there’가 잇따라 영국 차트 5위에 오르면서 인기 그룹으로 비상한다. 하지만 주가를 올리고 있던 시점에 더스티 스프링필드가 솔로활동을 선언하면서 그룹은 해체를 맞는다. 이미 그룹을 통해 풍부한 음색과 가창력을 대중에게 알린 터라 솔로활동은 순풍에 돛단 듯 시작부터 성공가도를 질주했다. 허스키하면서 소프트한 느낌은 로큰롤 밴드가 맹위를 떨치던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 시대에 드물게 여성 솔로가수로서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고 처음부터 그녀는 단순한 팝이 아닌 ‘미국적인 소울’의 필을 표현했다. 작곡 팀 마이크 호커와 이보르 레이먼드는 미국 흑인음악의 상징인 모타운 식으로 쓴 곡 ‘I only want to be with you’로 그녀에게 차트4위(미국 12위)라는 좋은 성적을 안겼다. 이 곡은 얼마 전 국내 칼라핸드폰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으며 1976년에는 비틀스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영국의 틴 아이돌 그룹 베이 시티 롤러즈(Bay City Rollers)가 리메이크해 친숙해지면서 명곡으로 자리잡았다. 더스티 스프링필드는 이어 역시 호커와 레이먼드 컴비가 써준 ‘Stay awhile’로 차트13위에 올랐으며 틴 팬 앨리 전통을 계승한 전설적 작곡 콤비 버트 바카라크(Burt Bacharach)와 할 데이비드(Hal David)가 만들어준 ‘I just don’t know what to do with myself’와 함께 3위로 다시 상위권을 점령했다. 디온 워릭(Dionne Warwick)을 키워낸 이들은 영국 여가수로서 드물게 스탠더드와 소울 감성을 동시에 간직한 그녀를 높이 평가해 디온 워릭이 취입했던 곡 ‘Wishin’ and hopin’’을 제공, 마침내 미국차트 6위에 올려 미국에서도 통하는 가수로 만들어 냈다. 이 때 더스티는 뉴욕에 건너와 녹음하면서 영미(英美)를 관통하는 명실상부한 대서양 스타로 똬리를 틀기 시작한다. ‘Wishin’ and hopin’’에 이어 ‘All cried out’(41위)은 심지어 미국에서만 싱글로 발표되었다. 1964년이 저물어 가던 겨울 오빠 팀 스프링필드가 쓴 곡 ‘Losing you’으로 영국 차트 9위(미국91위)에 오른 그녀는 1965년과 1966년에도 쾌조를 보여 훗날 팝 보석으로 널리 애청된 ‘In the middle of nowhere’(영국8위)와 명콤비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이 쓴 발라드 ‘Some of your lovin’ (영국8위) 그리고 ‘Little by little’(영국17위) 등을 줄줄이 내놓았다. 이 시점에 꼭 기억해야 할 곡은 더스티의 것으로서는 가장 많이 팔렸으며 아직까지 라디오를 통해 오랜 사랑을 받고 있는 ‘You don’t have to say you love me’(엘비스 프레슬리가 리메이크하기도 했다)로 이 곡은 영국차트 정상에 이어 미국에서도 4위를 차지했다. 다시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이 준 ‘Goin’ back’(영국10위)과 ‘All I see is you’(영국9위, 미국20위) 두 곡을 더 히트시킨 그녀는 이 두 곡이 담긴 베스트 앨범 < Golden Hits >를 차트에 6개월 동안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으며, 이러한 성공으로 국제적 팝 스타로 도약, 영국 BBC 텔레비전의 음악프로 MC로 뽑히기도 했다. 당시 <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지의 여론조사에서 최우수 영국 여가수와 최우수 국제 여가수에 선정되는 기쁨도 누렸다. 1967년 들어 미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내게 된다. 그녀의 국제적인 명성이 더욱 확산된 가운데 ‘I’ll try anything’(영국13위, 미국40위)이 히트했고, 바카라크와 데이비드 콤비의 곡으로 007영화 < Casino Royale >의 삽입곡인 ‘The look of love’ 또한 미국에서 22위에 올라 변함 없는 인기를 과시했다. 이 곡은 30여 년이 지난 1996년 한국영화 < 접속 >에 삽입되어 천지를 진동시켰다. 1968년에는 팝 명반으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 Dusty in Memphis >를 발표한다. 미국의 소울의 도시 멤피스에서 녹음한 이 앨범은 ‘팝과 소울’의 절묘한 결합으로 빠짐없이 여성 팝 보컬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또한 더스티의 음악을 ‘블루 아이드 소울’로 일컫게 하는데 결정타가 됐던 작품이기도 하다. < Dusty in Memphis >에선 미국 10위를 기록한 ‘Son of a preacher man’를 비롯해 ‘Don’t forget about me/Breakfast in bed’ ‘The windmills of your mind’(스티브 매퀸이 주연한 영화 < Thomas Crown Affair >의 주제곡으로 1999년에 영화가 피어스 브로스넌 주연으로 리메이크되면서 이 곡도 스팅의 노래로 리메이크됐다)가 연속 싱글로 나왔지만 비평적 찬사만큼 상업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1970년 발표한 앨범 < A Brand New Me > 이후 그녀의 활동과 인기는 눈에 띄게 후퇴했으며 1972년 < See All Her Faces >와 이듬해 < Cameo >는 차트에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곧 사라져 버렸다. 이후 긴 휴식기를 마치고 1978년 < It Begins Again >, 1979년 < Living Without Your Love >, 1982년 < White Heat > 앨범을 발표하는 등 다시 왕성한 활동을 펼쳤지만 자신의 앨범보다는 딴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한 곡들에서 인기를 누리는 독특한 양상을 보였다. 1984년에는 스펜서 데이비스(Spencer Davis)와 ‘Private number’를 불러 인기를 얻었고, 1987년에는 카펜터스의 리처드 카펜터(Richard Capenter)의 앨범에서 ‘Something in your eyes’를 불러 건재함을 과시했다. 바로 직전 1987년 펫 샵 보이스(Pet Shop Boys)와 호흡을 고른 곡 ‘What have I done to deserve this’는 그녀의 재기를 몰고 온 기폭제가 됐다. 평소 더스티 스프링필드를 존경해 온 펫 샵 보이즈의 초청으로 참여해 고수(高手)의 멜로디 파트 가창력을 시범한 이 곡은 영국 차트2위를 기록한 데 이어 미국차트도 강타, 역시 2위를 밟았다. 이 곡의 대성공과 함께 다시금 자신의 솔로 히트곡들을 생산, 1989년 역시 펫 샵 보이스가 만들어 준 영화 < Scandal >의 삽입곡 ‘Nothing has been proved’를 영국차트 16위까지 올렸으며, 같은 해 ‘In private’도 14위에 랭크시키며 관록의 힘을 과시한다. 펫 샵 보이스가 4곡을 맡은 1990년 앨범 < Reputation >도 차트38위까지 오르는 히트를 기록했다. 50살 초로(初老)에도 활동의 가속페달을 밟으며 노익장을 과시한 그녀는 1995년에도 < A Very Fine Love >를 발표했지만 얼마 후 유방암으로 투병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병이 호전되어 가던 1999년 3월 그녀는 엘튼 존과 함께 로큰롤 명예전당에 이름을 올린 지 10일 후에 암이 재발하면서 6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노래 : Timi Yuro (티미 유로,Rosemary Timotea Aur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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