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의 생각과 언어가 바뀌는 만큼 고전 또한 시대에 따라 다시 번역되고 쓰여야 한다. 하나의 고정된 정전이 있지 않은 그리스 신화는 오랫동안 많은 작가들의 펜 끝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토머스 벌핀치 버전, 이디스 해밀턴 버전, 이윤기 버전, 젊은 세대라면 만화로 그리스 신화를 접했을지도 모른다. 만화를 제외하고 보면, 한국 독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도 출간된 지 20여 년이 지났다. 새로운 세대에게는 새 시대의 언어로 쓰인 이야기가 필요하다. 프라이는 이런 독자들의 요구에 발맞추어 현대적인 시각과 언어로 그리스 신화를 다시 써냈고, 그의 두 책은 전 세계 독자들과 언론들에게 큰 찬사를 받았다. 우리 시대의 가치관을 반영한 서술로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었고, 해설에 집중한 다른 그리스 신화 책과 달리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즐거웠다”라는 리뷰를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독자 반응을 증명하듯 영국 아마존에서는 종이책과 전자책, 오디오북 모두 베스트셀러 순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 최대 서점 반스 앤드 노블의 2019년 올해의 책 최종 후보 8권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21세기 버전의 그리스 신화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은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신들의 시대가 가고 영웅들의 시대가 찾아오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들은 자신들이 만든 세상에서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바야흐로 신들의 시대가 가고 인간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바로 이때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신이 물러가는 과도기에 나타난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가치들인 용기와 지혜, 기지, 이성을 지녔다. 자신의 능력으로 고난을 헤쳐가며 괴물들을 물리치고, 신이 내린 과업을 수행하고, 타고난 운명에 맞선다. 영웅들의 삶은 탄생부터 죽는 순간까지 운명의 주관 아래 있지만, 그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해 신 없이도 인간이 번영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낸다.
최초의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카드모스 이후 그리스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했다. 이 책에서는 보는 사람을 모두 돌로 만든다는 메두사의 머리를 베어낸 페르세우스를 시작으로 영웅들의 모험담이 펼쳐진다. 네메아의 사자, 레르나의 히드라, 에리만토스의 멧돼지 등 수많은 괴물들을 물리치고 저승에서 케르베로스를 데려오며, 인간과 신, 삶과 죽음의 영역을 넘나드는 헤라클레스의 모험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찾아 미궁을 헤매는 장면에는 숨을 죽이고 볼 수밖에 없는 긴장감이 흐른다.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를 타고 세상을 누볐지만 오만함으로 제우스의 벼락을 맞은 벨레로폰의 추락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자신을 무시하는 남자들을 제치고 칼리돈의 멧돼지를 공격한 아탈란타의 기상은 벅찬 감동을 느끼게 한다.
괴물을 물리치는 무력만이 영웅의 조건이 아니다. 육체적인 힘이 아니더라도 각자 자신만이 가진 능력으로 영웅이 되기도 한다. 오르페우스는 천상의 음악으로 지상과 저승 세계의 신, 요정, 인간, 괴물 모두를 사로잡는다. 가혹한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는 여러 시련에도 이성과 논리로 테베를 번영시킨다. 이아손은 지도자적 자질을 발휘해 아르고호 원정대를 조직하고 다양한 능력을 지닌 영웅들과 함께 그리스 밖의 세계를 탐험한다.
사람들은 영웅의 삶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또 다른 자신을 꿈꾼다. 역경을 딛고 과업을 완수하는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위대하던 이가 한순간에 절망에 빠지는 과정을 통해 교훈을 얻는다. 영웅의 이야기가 더욱 매혹적인 것은 그들이 인간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영웅은 평범한 인간들이 쉽게 할 수 없는 모험을 하지만, 그들이 보이는 용기와 기지는 또한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잠재된 능력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영웅의 행적을 따라가며 자기 안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고전, 프라이의 연극으로 다시 태어나다!
프라이는 다양한 그리스 고전 문학들을 그 나름의 시각으로 재해석해 자신만의 입담으로 새롭게 풀어낸다.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그의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옷을 입었다.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와 『메데이아』,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의 『아르고호 이야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등 다른 주요 그리스 고전들을 역시 프라이의 손끝에서 현대적으로 재탄생했다. 그리스 신화는 다양한 버전이 전해지기 때문에 판본에 따라 각 인물들의 관계가 서로 모순되고 사건의 선후 관계가 달라지기도 한다. 프라이는 여러 갈래의 서술 중에서 충돌이 서로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를 선택해 그런 모순점들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 이상으로 인물들의 극적인 삶을 그려내는 데도 집중해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 이 책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목표를 충실하게 수행해낸다.
본업이 배우인 프라이는 연극을 사랑한 고대 그리스 작가들처럼 자신의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연극을 만들었다. 『스티븐 프라이의 그리스 신화』 1권을 출간한 뒤 프라이는 이 책을 기반으로 [그리스 신화 3부작] 극본을 집필해 직접 연극 무대에 올랐다. ‘신, 영웅, 인간’ 세 편으로 구성된 이 일인극은 캐나다에서 처음 막을 올려 2019년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포함한 영국 투어로 이어졌다. 프라이는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 테세우스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두 번째 공연인 ‘영웅’을 기반으로 내용을 추가해 이 책을 집필했다. 트로이 전쟁과 그 이후의 이야기는 시리즈의 마지막 권에서 다루어질 예정이다.
폭넓고도 방대한 지식과 탁월한 통찰력
작가 스티븐 프라이는 영문학을 전공하기도 했지만 어휘와 표현력, 유머 감각이 뛰어나 오스카 와일드에 자주 비유된다. 이러한 재능을 바탕으로 영국의 인기 퀴즈쇼 [QI]를 10년 이상 진행했는데, 이 쇼는 정답을 맞히는 사람이 아닌 가장 신선하고 흥미로운 대답을 하는 사람에게 점수를 주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능란하게 문제들을 다루며 출연자들과의 대화를 재치 있게 이끌어가는 그의 진행 덕택에 자연스럽게 견문이 넓어지고 창의성이 높아진다는 평을 받은 프로그램이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알려주는 많은 지식들을 습득하게 된다. 각 인물의 이름이 지닌 의미는 신화의 내용과 연관이 있다. 아탈란타의 이름에는 ‘무게가 동등한’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여성인 그녀가 다른 남성 영웅들과 대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나타낸다. 그리스 이름의 의미들이 다른 형태로 살아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기도 한다. 페르세우스에게 당한 세 노파인 그라이아이 중 데이노의 이름은 ‘무서운’이라는 의미를 지녔는데, ‘무서운 도마뱀(공룡)’을 뜻하는 영어 단어 ‘다이노소어(dinosaur)’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에는 이런 언어적 지식 외에도 가축을 중시한 고대 그리스 사회에 대한 설명, 지중해를 ‘대해’라고 불렀던 당대 사람들의 지리 인식, 아서왕 이야기와 그리스 신화의 공통점 등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지식들이 담겨 있다. 한편 독자들을 돕기 위해 다른 부록도 마련되어 있다. 그리스 영웅들의 족보는 올림포스 신들의 것만큼이나 매우 복잡하다. 이야기는 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전개되지만, 그래도 각 인물들의 관계가 궁금한 독자들은 등장인물 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이들이 다른 영웅이나 신과 어떤 관계인지, 앞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깜빡했다면 부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아손의 여로를 설명하는 지도와 올림포스 신들의 계보도도 참고할 만하다.
이 책에는 독자의 이해를 돕는 36점의 도판도 실려 있다. 메두사를 무찌르는 페르세우스,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지하세계에 간 오르페우스,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 추락하는 이카로스를 생생하게 묘사한 회화는 물론이고, 옛 그리스의 도자기에 그려진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의 과업도 볼 수 있다. 이 명화들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좀 더 생생하게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할 것이다. 이렇게 『스티븐 프라이의 그리스 신화』는 재담가가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홀려 있다 보면 다방면의 지식은 물론이고, 그 이야기가 현대에 갖는 의의까지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책이다. 물론 저자 자신은 이 책의 목표를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한정했지만, 실제로 이 책이 담아낸 폭과 깊이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독자들에게는 즐겁고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