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자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로 들여다본
우리 현대사의 거대한 벽화
어느 날 한 기자가 깡패의 칼에 찔려 죽는다. 과연 누가 그의 죽음을 사주했을까? 작품은 정의를 추구하지만 나약하며 영특하지도 못한 더딘 발자취를 따라 다초점 렌즈를 들이댄 듯 다양한 주변 인물들의 다각적인 관점이 거대한 벽화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이 모여 양파껍질 같은 복합 다층적인 이야기 구조가 한 꺼풀씩 벗겨지며 서서히 권력의 그늘과 음모가 드러난다.
죽은 자가 남긴 금고열쇠와 결승문자로 남긴 암호의 행방을 찾아 나서며 추리소설의 급박한 호흡으로 전개되는 소설은, 점차 기억의 역류를 타고 5월광주와 6월항쟁의 현대사를 파노라마처럼 재현한다. 더 나아가 정?권?언의 유착, 친일·친독재 세력의 변신, 부정부패와 가혹한 민중탄압, 피해자와 가해자의 아픔과 은원(恩怨)이 얽히고 풀리면서 이야기가 굽이친다. 스펙터클한 빠른 장면전환은 독자를 책 두 권 분량의 장대한 스케일의 스토리 속으로 지루할 틈새 없이 빨아들인다.
5.18로부터 한 세대를 건너온 지금. 어느새 역사서 속의 한 줄로 요약돼 버린 우리의 아픈 역사를 후세대들은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그런 의미에서 고광률 작가의 《오래된 뿔》은 반가운 소설이다.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대중소설 기법을 차용하여 현대사를 문학적으로 맛깔나게 요리하고, 그 안에 ‘우리 시대의 지배권력 메커니즘과 그 속에 담긴 부조리’라는 묵직한 주제의식을 담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금빛 뿔을 선연히 세우고
역사의 진실을 향해 내달리는 숨 가쁜 서사!
《오래된 뿔》의 형식이라는 그릇은 드라마틱한 작법에 기초한 미스터리지만, 그 그릇이 담고 있는 내용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작가는 소설을 빌려, 권력의 얼굴을 한 야만을 집요하게 해부하며 역사의 알리바이를 한 치도 용납하지 않는 치열한 필치를 선보인다. 그야말로 제목처럼 황금빛 뿔을 선연히 세우고 역사의 진실을 향해 숨 가쁘게 내달린다.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작가의 철저한 계산과 의도 아래 선택되었다. 장 의원은 정치계와 교육계를, 호서매일 사주인 민 사장은 언론계를 대표함으로써 정교언의 유착을 그린다. 그리고 노조와 시민운동권, 대학생 운동권의 모습을 통해 이권중심적인 민중운동의 모습도 그려진다. 급속한 성장 정책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 경제, 교육, 언론이 사회에서 지대한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각종 비리에 얽혀 있어 문제점이 많았다. 이 작품은 그런 권력을 쥔 사람들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을 탄생시킨 주체는 바로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편, 장 의원이나 민 사장, 죽은 박갑수의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일가의 이야기는, 일제 친일파 세력이 어떻게 여전히 한국사회 권력의 핵심에 서 있는 건지, 일제에 빌붙었던 사람들이 시대가 흘러 어떻게 다시 미제로 갈아탔는지, 왜 힘없는 자들은 핍박받는 삶을 대물림해야 했는지 등의 청산하지 못한 역사 문제를 들춰냄으로써, 현대를 거슬러 올라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의 현대사를 유기적 관점으로 조망하고 반성한다.
“장상구의 십자가를 다 만들었습니다. 매다는 일만 남았어요.”
우명순이 말뜻을 알아들었다. 장상구를 심판할 증거 수집 작업을 마쳤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십자가죠?”
십자가라는 말이 몹시 거슬렸다. 부적합한 용어였다. ‘폭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무덤’이나 ‘관’ 등등, 얼마든지 다른 용어로 부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숭고한 희생의 상징인 십자가를 갖다 붙이다니…….
“죄가 어디 한 사람의 힘만으로 만들어지나요……. 세상이 다 같이 거들어서 만든 것이지.”
- 「본문」 중에서
역사의 질곡 속에서 우리가 버린 ‘뿔’의 의미
대한민국 역사를 만든 건 바로 우리들이다!
작가는 모든 등장인물을 작품의 중심에 놓고 주인공적인 관점으로 들여다본다.
5.18때 진압이라는 명분하에 사적 복수를 하려 했던 장 의원의 야심과 콤플렉스, 지방신문사 사장의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욕망과 자격지심, 조폭 두목의 여자가 돼서라도 복수를 하려 했던 여자의 증오심, 조직 내 2인자로 밀리면서 두려움을 느끼는 조폭의 열등감 등 작품은 어느 한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모든 인물이 각자의 스토리를 지닌 채 주인공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모든 주인공들은 각기 욕망과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며 그렇기에 공감할 만한 인간적인 면을 가진다. 심지어 소설의 악역인 장 의원조차도 그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세상이 잘못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작품은 노조나 시민운동권이라고 해서 친절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노조가 ‘해직기자 구명’을 위한 시위를 하는데, 그에 대해 정작 당사자인 해직기자는 노조가 투쟁구실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고 말한다. 대학 내 운동권 수장 또한 자신의 출세를 위해 민주화 운동을 이용하는 정치성이 다분한 인물로 묘사된다.
즉, 이 작품은 대한민국 역사를 만들어 온 바로 우리 모두의 사랑과 분노, 눈물의 이야기이며, 역사의 질곡 속에서 “우리가 버린 뿔이 우리와 ‘그자’들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것인지 되짚어 보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가슴을 관통하는
재미있고 묵직한 역사 미스터리
작품 속에서 의문의 죽음을 추적하던 사람들은 살인교사자를 알게 되지만, 거대한 권력 앞에서 분노의 뿔을 억누른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뿔들이 솟구치는 날, 전쟁이 다시 시작됨을 예고한다. 그리고 종내에 작품은 갖은 핍박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어둠을 뚫고 동터 오는 새벽을 그려 낸다.
집단 윤간으로 임신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오 마담은 아이를 갖게 된다. 4선 의원 장 의원은 민주화의 흐름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과거의 행적이 발가벗겨진다. 살해당한 자의 아들은 살아남아 아버지와 꼭 닮은 모양으로 의젓하게 성장한다. 오랜 억압과 부조리 속에서 우리가 버렸던 ‘오래된 뿔’.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서지 말고 그 뿔을 세워 싸워야 할 때라고 말하는 듯, 작품의 마지막은 양 기자가 장 의원의 에쿠스를 향해 성난 황소처럼 돌진하는 모습을 그리며 끝난다.
검은 하늘에서 아주 오래된 별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별이 진 하늘이 뿌옇게 탈색된 것 같았다. 그는 민우의 품에서 또다시 갑수를 느꼈다. 그때, 엉킨 차량들 틈에서 비비적거리던 검정색 에쿠스가 상향 라이트를 깜빡거리며 슬금슬금 빠져나오고 있었다. 민우가 에쿠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안 돼!”
민우를 낚아챈 양창우가 안간힘을 다해 일어섰다. 그러고는 에쿠스를 향해 힘껏 내달렸다. 성난 황소의 뿔처럼…….
- 「본문」 중에서
이렇듯 작품은 사적인 복수와 역사적 사건을 씨줄과 날줄로 엮고, 현대사회의 질곡이 개인의 일생을 어떻게 폭력적으로 규정하는지 진지하게 파헤치고 있다. 또한 퍼즐을 맞춰 나가듯 결말을 향하여 이야기를 조립해 나가는 논리의 정교함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무겁고 불편한 주제에 대해 대중이 쉽게 몰입해 공감할 수 있도록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그려 냈다는 점이 소설로서 가장 큰 미덕이라 할 것이다.
흥미로운 구성과 치열한 필치로, 현대사의 한 장을 시대의 가슴을 관통하는 재미있고 묵직한 역사 미스터리로 날렵하게 변주하고 있는 《오래된 뿔》. 역사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소설적 재미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우리 시대의 문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