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는가? 흔들리는 청춘에게 던지는 철학의 질문
“분위기에 휩쓸려 무작정 따라 할 때 가치의 전도가 발생한다. 세상이 말하는 자기계발의 지침이 주가 되고 내 삶이 거기에 종속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얘기다. 내 삶의 주인으로 우뚝 서지 못한 사람들, 그들을 마이너리거라고 부르려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20대의 삶을 대표하는 단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아마도 ‘자기계발’ 또는 ‘스펙 쌓기’라는 단어가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꼽히지 않을까. 만성적 경기침체, 특히 높은 청년 실업률로 인한 위기감은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마저 ‘스펙’에 목매달게 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0대가 자조 섞인 말투로 자칭하는 단어(’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에는 이들이 인식하는 자기 삶의 양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시류를 좇아 스펙 쌓기에 몰두한다고 이 불안감이 해소될까? 유감스럽게도 소위 말하는 고스펙을 갖춘 사람들 역시 이 질문에 쉽게 예, 라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제한된 ‘성공’의 자리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몰리다보니, 고스펙의 범주 역시 더 높은 학점, 더 높은 토익 점수를 요구하는 식으로 점점 더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기계발 과정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몰아붙임으로써 피로와 불안이 누적되고, 본래 자신을 잃고 정체성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현실을 돌파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도전과 상처의 악순환을 낳는 자기계발 담론이나 ‘아픈 거 안다, 힘내라’는 식의 위로만으로는 오늘의 20대가 짊어진 짐을 결코 덜어줄 수 없다. 철학자 최준호는 흔들리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철학 산행’을 권한다. 철학이라는 산을 오른다는 것은 삶의 가치를 스펙이나 성공 같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두라는 인식 전환에 대한 요구이며, 또한 그 질문을 치열하게 대면하는 ‘철학하기’로써 지혜의 근육을 키워 자기 삶의 진정한 ‘메이저리거’가 되라는 조언이다. 이 쉽지만은 않은 산행의 안내자로 8명의 철학자(니체, 스토아학파, 프로타고라스, 칸트, 데카르트, 아도르노, 데리다, 루소)가 나섰다. 질문하기가 특기인 이 철학자들은 취업·진로에 대한 불안감, 자신의 몫과 역할에 대한 혼란 등 강의실에서 젊은이들에게 직접 들은 청춘의 고뇌를 화두로 삼아 주인 되는 삶을 위한 철학의 길을 안내한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허상에 현혹되거나 일시적인 마취제에 취하는 대신 진정한 자기 모습과 진짜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와 마주하라고 말한다.
“운명적 사랑을 꿈꾼다면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라.” _니체의 운명애
“미래의 삶이 불안한가, 감정을 최적화하라.” _스토아학파의 무정념
“몸짱의 주술에서 빠져나와 내 몸에 노동하는 모습을 아로새기라.” _아도르노의 행복의 약속
“진정 행복하고 싶다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마라.” _루소의 동정심
……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 때문에, 또 정체성에 대한 혼란 때문에 남이 가는 대로 따라가는 것은 노예로 사는 것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여덟 갈래 산행로는 노예의 삶을 넘어 오롯이 자신과 마주하도록,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답을 찾으라고 격려하는 ‘우리 시대의 청춘을 위한 철학의 질문’이다.
철학은 삶을 이해하기 위한 훌륭한 보조 텍스트다
“이 산행로는 일차적으로 내가 강의실에서 늘 접하는 학생들이 겪고 있다고 직접 말한 심각한 문제들을 긴 호흡으로 대처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위주로 마련했다.”
흔히 ‘철학’이라고 하면 절경을 자랑하기는 하지만 오르기는 매우 힘든 험준한 산처럼 생각되곤 한다.그리고 이러한 편견은 대개 철학이 일상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마이너리거를 위한 철학 여행》은 철학이 삶과 괴리된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되어야 한다고, 즉 구체적인 삶과 그 속의 고민들을 이해하기 위한 충실한 보조 텍스트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철학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철학자들의 ‘위대한’ 사상들을 죽 나열한 상찬에 그치지 않는다. 대신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고민들, 여기서는 특히 20대 대학생들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직접 다가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좋은 대학과 학과에 진학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졸업 후 진로에 대한 불안, 자기 역할과 가치에 대한 혼란 등의 고민들은 우리 시대를 사는 20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음직한 것들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고민들을 가진 이들이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그 원인을 하나하나 되짚으면서 문제의 본질적 해결을 돕는다.
깊은 호흡과 지혜의 근육을 기르기 위해 마련된 산행로
“정말 자기 삶의 주인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 여기에 꾸며놓은 산행로를 디딤돌 삼아 자기만의 산행로를 만들어 그 길을 따라 트레킹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된 고민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저자는 어떤 ‘정답’이나 기준을 찾는 행위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보편적으로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정답이나 기준 같은 것은 없으며, 만약 있다면 언제나 그것에서 소외된 ‘마이너리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 마련된 8개의 철학 산행로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정답’이 있다는 거짓 환상을 심어주거나, 문제의 본질적 해결을 외면한 채 일시적인 마취제나 진통제의 역할에 그치는 것을 거부한다. 대신 산행에 나선 이가 당장은 피로를 느낄 수도 있지만, 산행을 마치고 나면 한층 깊어진 호흡과 단단한 근육으로 삶을 직시하고 삶의 문제와 대면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이 책은 ‘필로소피 트레킹’을 내세운 많은 책들이 짧은 호흡으로 많은 주제를 소개하는 것과 달리, 핵심적인 몇 가지 주제를 깊이 파고드는 방식을 택했다. 즉 산행로 하나하나를 30여 쪽의 묵직한 분량으로 구성해 독자들이 긴 호흡으로 치열한 사유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첫 번째 산행 코스 ― 자기 삶의 주인이 돼라
“시종일관 ‘다른 사람의 삶’의 언저리를 맴돌며 흉내만 내며 살 것인가, 아니면 과감히 그런 삶의 굴레를 박차고 나아가 힘들고 어렵더라도 진정성이 담긴 자기 삶을 일구어낼 것인가?”
니체, 스토아학파, 프로타고라스, 칸트의 네 산행로로 구성된 첫 번째 산행 코스의 이름은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이다. 20대에게 있어 가장 곤혹스럽고 또 그만큼 커다랗게 느껴지는 문제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바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 혼란일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대부분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어떻게 해서든 높은 시험 점수를 얻어 (남들이 그렇게 말하는)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진학하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살 것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든 그렇지 못하든 곧바로 또 다른 의문과 걱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은 열등감에 사로잡히기 쉽지만, 그렇다고 정작 그러한 대학과 학과에 진학한 학생들 역시 불안과 혼란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학 여부(대학을 진학하든 안 하든, 또 진학한 대학이 이른바 명문대든 아니든 간에)와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해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 진학 여부를 통해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다시 받아든 많은 20대들은 자연스럽게 대안이라고 말해지는 ‘자기계발 담론’ 그리고 ‘위로와 공감’ 사이를 서성이게 된다.
하지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해결책을 찾아야만 한다. 불안의 근본적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스토아학파는 그러한 불안이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요소가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주관적 요소에 있다고 말한다. 즉, 불안의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진학과 취업, 즉 미래가 불안정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불안에 사로잡혀 현재를, 그리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면 어떨까? 과연 문제가 해결될까? 스토아학파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미래의 불안, 즉 정념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말한다(스토아학파의 무정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현재의 삶을 방치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 당장 해야 할 것,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현재에 충실한 삶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Sapere Aude!(과감히 알려고 하라)”라는 말처럼 용기와 책임감을 가지고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꾸려가는 삶이자(칸트의 계몽), 삶의 과정에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삶의 척도로 삼는 삶이다(프로타고라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다고 떠드는 것이라 할지라도 스스로가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자기 삶과 행복의 척도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정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는 오직 자유와 자유를 추구하는 용기만이 필요하다. 만약 이러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자기 앞에 주어진 ‘현재(지금 이 순간)’의 삶을, 설령 그것이 똑같은 모습으로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후회 없이 사랑하며 살아간다면(니체의 운명애), 우리는 비로소 행복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산행 코스 ―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이름으로 묶인 두 번째 산행 코스는 데카르트, 아도르노, 데리다, 루소라는 4개의 산행로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들은 결코 혼자서 고립된 채 살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사회 곧 타인들과의 관계 맺음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갈 때 타인들과 보다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
“박지성의 발은 삶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보여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행복한 삶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투박하기 짝이 없는 그의 발이, 그런 발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몸이 행복한 삶의 출발점이라는 말이다.”
데카르트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먼저 ‘의심의 항해’를 떠나볼 것을 권유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스마트 시대’라는 말을 새삼 꺼내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넘쳐나는 정보들로 가득하다. 누구나 손가락만 몇 번 두드리면 길을 걸어가는 도중에도 손쉽게 많은 정보들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무수히 많은 정보들은 과연 모두 믿을 만한 것인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이러한 질문에 쉽게 예, 라고 대답하지 말고 자신에게 들어오는 정보들을 하나하나 철저하게 의심해 보라고 말한다. 예컨대 그러한 의심의 대상은 우리 사회를 강타한 ‘몸짱 열풍’이나 ‘꿈은 이루어진다’와 같은 표어에도 해당된다. 오늘날 우리는 TV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너무도 쉽게 S라인과 식스팩을 가진 이들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전 국민적인 열풍이다. 연예인 뺨치는 몸맵시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 누구라도 그걸 부러워하면서 아, 나도 저런 몸매를 가져야지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정말 모두가 똑같이 그런 몸매를 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아도르노는 S라인과 식스팩 신드롬이 ‘진정한 몸’이 아니라 ‘거짓된 몸’을 조장한다고 말한다. 즉, 그런 몸에는 개인의 삶이 배제되어 있고, 문화산업에 의해 정량화된 수단으로서의 몸만 남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조장된 신드롬이 인간을 ‘동일성의 논리’에 의해 객체화하고 소외시킨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몸은 바로 우리 존재와 삶이 묻어나오는 ‘노동하는 몸’이라고 말한다. 삶의, 노동의 고통이 오롯이 아로새겨진 축구선수 박지성의 발처럼 말이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은 또 어떤가? 우리는 대개 이 표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꿈이 이루어질 그날까지 자신을 채찍질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말에서 정작 중요한 부분에 대한 고민이 빠졌다고 지적한다. 즉, 우리가 이루어진다고 믿으면서 달려갈 꿈이란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우리는 흔히 우리가 쓰는 말이 사전에 나오는 것처럼 명징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데리다는 그것이 분명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완전히 뒤바뀔 수 있음을 지적한다. 즉, 말 그리고 삶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미끄러지는 것이다(차연). 이렇게 생각하면 꿈은 사람마다 다르며, 그것은 이루어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저자는 우리가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배제하고 있는 이러한 현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쓸데없는 자책이나 가능성 없는 희망의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 자기와 똑같은 존재가 있어서, 그가 괴로워하는 것은 다른 모두도 똑같이 괴로워하고, 그가 느끼는 고통 역시 모두 느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타인을 배제하는 무한 경쟁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아파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크게 이슈화되었던 것 중 하나로 ○○녀, ○○남으로 불리는 소위 ‘무개념’한 사람들을 들 수 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을 지탄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언제든 그러한 ‘무개념 남녀’가 될 수 있다면 어떨까? 저자는 만약 모두가 타인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한 채 자기 자신만을 돌본다면, 우리 역시 언제든지 ‘무개념 남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무개념이란 결국 자기 삶에서 타인을 배제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이기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근원적인 이기심, 그러니까 자기보존을 신경 쓸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타인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루소는 자연 상태의 인간이 이기심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즉, 이러한 본성을 간직하는 한, 사회는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각박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를 하는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철학 산행을 마치며 ― 자기 삶의 메이저리거가 돼라
지금까지 모두 8개의 산행로를 소개했지만, 사실 철학 산행에 반드시 어떤 봉우리를 먼저 또 어떤 코스로 오르고, 다른 봉우리는 나중에 올라야 한다는 식의 명확하게 정해진 방법이나 순서는 없다. 또 정해진 코스만을 달달 외우면서 올라야 할 필요도 없다. 계속해서 산행을 다니다 보면 어느새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았던 새로운 아름다운 경치를 찾을 수도 있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장소를 발견할 수도 있으며, 또 자신만의 산행로를 만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꾸며진 산행로들은 다만, 산행을 처음 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초심자 코스’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공을 들여 세심하게 꾸민 산행로를 따라 때로는 조금 가파른 길을 걷기도 하고, 또 때로는 쉼터에서 쉬기도 하면서 한 봉우리 한 봉우리 등산을 마지다 보면, 어느새 지혜의 근육이 튼튼하게 단련된 것이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의 삶이 아닌 자기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당당하고 행복하게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