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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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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

허균 선집

정길수 | 돌베개 | 2012년 04월 10일 리뷰 총점8.0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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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2년 04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320쪽 | 402g | 153*224*30mm
ISBN13 9788971994825
ISBN10 897199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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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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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저자 소개 (1명)

조선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구운몽 다시 읽기』, 『17세기 한국소설사』, 『한국 고전장편소설의 형성 과정』이 있고, 논문으로 「〈광한루기〉 평비評批 분석」, 「〈운영전〉의 메시지」 등이 있으며, 편역서로 『길 위의 노래-김시습 선집』,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 선집』, 『사랑의 죽음』(천년의 우리소설 1), 『창선감의록』(천년의 우리소설 13)』 등이 있다. 한국 고전소설과 조선시대... 조선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구운몽 다시 읽기』, 『17세기 한국소설사』, 『한국 고전장편소설의 형성 과정』이 있고, 논문으로 「〈광한루기〉 평비評批 분석」, 「〈운영전〉의 메시지」 등이 있으며, 편역서로 『길 위의 노래-김시습 선집』,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 선집』, 『사랑의 죽음』(천년의 우리소설 1), 『창선감의록』(천년의 우리소설 13)』 등이 있다. 한국 고전소설과 조선시대 한문 산문 비평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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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조선 최대의 문제적 인물, 허균의 시문(詩文) 정선(精選)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이자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의 한 사람인 허균(許筠, 1569~1618)은 정치와 사상의 측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라고도 하고, 겉과 속이 다른 소인배라고도 한다. 문학의 측면에서는 자신의 정(情)을 개성적으로 표현하여 자기 시대의 문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혁신주의자로 평가되는가 하면, 과거의 문학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는 복고주의자의 자장 안에서 허균의 문학을 조명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이처럼 허균은 400년 뒤의 독자에게까지 수많은 논란거리를 던져 주는 문제적 인물이다.

현재 허균의 글로 남아 있는 것은 「성소부부고」(惺所覆?藁)와 시집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뿐이다. 「성소부부고」는 1981년부터 1985년 사이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완역 형태로 나왔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에게 대표적으로 읽히는 책은 허균의 대표작인 「홍길동전」과 「성소부부고」에 수록된 「한정록」뿐이다. 허균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글들은 일반 독자들이 찾아 읽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은 허균의 남아 있는 글 중에서 허균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글들을 정선하여 쉬운 우리말로 풀었다.

천지 사이의 한 괴물
― 조선 시대가 품지 못한 풍운아 허균


허균(許筠, 1569~1618)은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이자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의 한 사람이었다. 권필(權?)?이안눌(李安訥)과 어깨를 나란히 한 최고의 시인이었고, 현실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통찰이 돋보이는 논설뿐 아니라 고도의 문학 기교가 발휘된 예술 산문에도 능했던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당대 제일의 비평가요 박학가였다.

관리로서 허균의 삶은 일생 내내 탄핵과 파직, 재기용의 연속이었다. 허균만큼 정치적 부침이 잦았던 이를 찾기도 쉽지 않다. 거듭된 파직의 원인은 허균의 돌출 행동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균은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문학적 역량과 박학 덕택에 파직 이후 어김없이 재기용되었다. 특히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자리에서 고금의 역사와 문학을 논하고 짧은 시간에 수준 높은 시를 짓는 일로는 허균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한편 거듭된 탄핵의 사유는 실로 다양하다. 부임지에 기녀를 데리고 가 살았다거나, 상중에 주색을 즐겼다거나, 서얼 무리와 어울려 지내며 무도한 일을 벌였다거나, 불교를 숭상했다는 등 사대부 사회에서는 모두 아연실색할 사건들이다. 정적(政敵)들의 과장 섞인 음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허균은 이에 대해 일일이 변명하는 대신, 인간이 만든 예교(禮敎)로 자유를 구속할 수 없다며 자신은 하늘이 내려준 정(情)에 따라 살겠다고 일갈했다. 당대인들은 이런 허균을 두고 ‘천지 사이의 한 괴물’(天地間一怪物)이라 규정했다.

허균의 만년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허균은 광해군 집권 중반기에 별안간 집권세력의 핵심인물로 부상하여 정국을 주도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는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허균은 역모의 수괴로 지목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허균의 진면목
― 보고 싶은 대로 평가되는 허균


허균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 조선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격변기를 살다 간 인물이다. 정치가로서의 허균은 허다한 추문 속에 살다 마침내 반역죄로 처형당한 ‘괴물’로 남고 말았다. 반면 문학가로서의 허균은 조선 한문학사의 보배로운 존재였다. 당대 최고 수준의 시인이자 문장가로 꼽혔을 뿐 아니라 특히 문학적 감식안에 대해서만큼은 허균에 대해 반감을 품은 이들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조선 제일의 비평가였다.

그러나 허균 사후(死後)의 조선 사회에서 허균의 문학은 금단의 영역에 가까웠다. 허균은 경박한 반항아, 음험한 반역자의 표상으로 일컬어질 뿐 허균 문학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藁) 원고는 허균이 죽기 직전 사위인 이사성(李士星)에게 맡겨 비밀리에 보관되었고, 이후에도 공식적으로 간행할 수 없어 필사본으로만 전해졌다. 오늘날 완질로 전하는 필사본도 규장각 소장 2종을 포함하여 대여섯 종에 불과하다. 고려대 소장본의 표제가 ‘간죽’(看竹)으로 되어 있듯, 「성소부부고」는 본래의 이름 대신 「간죽집」(看竹集)이라는 제목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간죽’(看竹)은 당나라 왕유(王維)의 시 「봄날 배적(裴迪)과 함께 신창리(新昌里)를 지나다가 여일인(呂逸人)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다」(春日與裴迪過新昌里, 訪呂逸人, 不遇)라는 시 중의 “대나무를 봤으면 됐지 주인은 찾아 무엇 하나?”(看竹何須問主人)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그저 작품만 볼 일이지 작자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조선 후기 문인들이 허균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했던지 짐작하게 한다.
근대로 접어들어 허균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정(情)을 긍정하고 자유를 외친 허균의 강렬한 시문이 눈에 들어왔고, 처형당한 반역자의 형상은 서얼 등용을 주장했던 생전의 주장과 「홍길동전」에 힘입어 어느덧 중세를 거부하고 평등에 입각한 새로운 세계질서를 꿈꾸었던, 날개 꺾인 혁명가의 이미지로 바뀌었다.
허균의 참모습은 어느 쪽에 가까운가.

나는 나의 법(法)을 따르겠다
― 허균의 삶과 문학


개인의 문학과 삶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허균 또한 예외가 아니니, 영화로운 어린 시절과 연이어 가족을 잃은 슬픔, 바쁜 벼슬길, 잦은 파직 등이 그의 시와 산문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급진적인 면이 많았지만, 한편으론 서정성 짙은 글을 많이 적기도 했다. 분명 홍길동적인 면도 있고, 백성을 중시하는 호민(豪民) 주장 또한 파격적이지만, 먼저 간 아내를 그리는 지아비의 슬픔, 관리로서의 힘든 삶을 토로한 글들을 읽다 보면, 허균의 전체 모습을 한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남겨진 글을 통해 본 허균은 세속에 휘둘리지 않는 강한 자의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주변의 비판을 의식하고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끝내 본인의 하고자 하는 바를 관철시키는 모습 속에서 홍길동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호민론(豪民論)이 또 다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허균의 삶을 보면 그의 명성만큼 형제들의 명성 또한 높았다. 허균의 두 형 허성(許筬, 1548~1612)과 허봉(許?, 1551~1588), 손위누이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역시 한 시대의 인물들이었다. 「선조실록」에서는 허균의 가문이 조선에서 가장 흥성한 가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고 기록했다. 허균은 조선의 대표적인 명문가의 막내 귀공자로 태어났던 것이다.

허균의 둘째형 허봉은 천재였다고 한다. 선조(宣祖) 앞에서 극언을 마다하지 않다가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탄핵한 일로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유배 갔고, 2년 뒤 유배지에서 풀려났음에도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금지될 정도로 선조로서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십대의 허균은 유배지에서 풀려나 백운산(白雲山)에 머물러 있던 허봉에게 고문(古文)과 당시(唐詩)를 배웠다. 유년기부터 허봉과 그 주변 인물들 간의 문학 토론을 곁에서 지켜본 일 또한 허균에게는 중요한 문학 수업이었고, 허균이 문단의 저명한 인물들과 교유하게 된 것도 주로 허봉을 통해서였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피난길에 올랐다. 함경도 단천(端川)에서 첫아들을 얻었으나, 산후조리도 못한 채 급히 피난길을 재촉하다 사흘 뒤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었다. 결혼 7년 만의 일이었다. 과거급제도 못한 때이니 아내 안동 김씨는 아무런 영화도 못 누리고 스물둘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하필 아들의 생일이 7월 7일이라 1년 뒤 칠석에는 직녀성을 바라보며 죽은 아내와 아들 생각에 눈물 흘렸다(「그리운 아내」).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609년 허균이 정3품 형조참의에 오르면서 조강지처 안동 김씨에게도 ‘숙부인’(淑夫人)의 직첩이 내려졌다. 이때에야 비로소 허균은 아내의 행장(行狀)을 쓰며 젊은 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곤궁하던 시절에 나는 당신과 마주 앉아 작은 등불을 켜 밤을 밝히며 책을 읽었다. 그러다 내가 조금 게으름을 피울 것 같으면 당신은 그때마다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
“게으름 부리시면 내 부인첩(夫人帖)이 그만큼 늦어집니다.”
그때야 어찌 알았겠는가, 18년 뒤에 이 부질없는 문서 한 장을 당신의 영전에 바치게 될 줄을! 그 영예를 누릴 사람은 조강지처 당신이 아니니, 당신이 이 일을 안다면 필시 한숨 쉬며 서글퍼할 테지. 아아, 슬프다!
―「아내」 중에서

1594년 문과에 급제한 허균에게 가장 많이 부여된 직무는 명나라 사진의 접대였다.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서는 고금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하고 짧은 시간 동안 시를 지어 주고받기도 해야 하는데, 허균이야말로 그 적임자였다. 쉴 틈 없는 벼슬길, 특히 중국에 사신으로 가거나 의주로 사신 접대의 임무를 맡아 떠나는 등 외지에 머문 일이 많던 허균은 늘 자신을 ‘나그네’라 부르며 안식처를 희구했다.

젊은 시절 화려한 옷 입고 장유(壯遊)를 노래했거늘
거듭 오니 어느새 머리에 흰 눈 덮였네.
고향은 멀리 삼천리 너머
지난 열아홉 해를 회상하네.
내 몸은 영예에도 치욕에도 편안하니
기쁨도 근심도 마음에 두지 않네.
집에 돌아가도 나그네인 건 나의 운명
오직 하늘에 거취를 맡길 뿐.
―「언제나 나그네」 중에서

벼슬길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벼슬을 끊고 은거지에서 유유자적 살아가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허균은 “집에 돌아가도 나그네인 건 나의 운명”이라고 했다.
불교에 경도되었다는 이유로 삼척부사에서 파직당한 허균은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밤에 불경 읽어
집착하는 마음은 없으나
아내도 있고
고기도 먹는다네.
출세의 푸른 꿈 이미 버렸거늘
탄핵이 빗발친들 무슨 근심 있겠나.
내 운명 편안히 여기나니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고픈 꿈은 여전하다오.

예교(禮敎)로 어찌 자유를 구속하리
부침을 오직 정(情)에 맡길 뿐.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따르라
나는 내 삶을 살아가리니.
벗은 찾아와 위로하고
처자식은 마음이 안 좋구나.
그래도 얻은 게 있어 기쁘다오
이백과 두보처럼 이름을 나란히 했으니.
―「내 삶을 살아가리니」

허균의 거침없는 언행은 당대 사대부 사회의 먹잇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행실도 없고 수치도 없는 사람이거늘 오직 문장 재주 하나로 세상에 용납되었는데, 식자들은 조정에 함께 서는 것을 부끄러워했다.”(1599년 5월 25일, 황해도 도사에 임명된 데 대한 사신의 평)

허균이 생을 마친 1618년에 이르면 이제 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天地間一怪物, 1618년 윤4월 29일, 사헌부와 사간원이 광해군에게 공동으로 올린 글), ‘하늘이 낸 괴물’(1618년 8월 22일, 홍문관 관원들이 광해군에게 공동으로 올린 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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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우수작 [15-39] 조선 사회의 이단아, 허균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YES마니아 : 로얄 스타블로거 : 골드스타 w******f | 2015-10-21

허균(許筠). 그는 누구인가

 

교산 (蛟山) 허균(許筠, 1569~1618)하면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가 떠오른다. 때문에 그에게는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 혹은 혁신주의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그는 정말 혁명가였을까?

혹시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빼어난 작품으로 가사 문학의 대가(大家)이자 천재시인으로 알려진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4)처럼 다른 얼굴을 가진 것이 아닐까.

 

먼저 그의 행적을 살펴보자. 탄핵-파직-재임용으로 이어지는 그의 관직생활을 보면, 관아를 자기 집에 설치하고 서울 기녀를 데리고 와 살며 무뢰배를 끌어들여 폐단을 일으켰다[황해도 도사(都事), 1599], 상관에게 무례를 범했다[병조정랑, 1602], 불교 숭상[삼척부사, 1607] 등 다양한 이유로 탄핵1)을 받았다. 여기서 혁명 아니 혁신의 기운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그가 이에 대해 변명하는 대신 남긴 시() <파직당했다는 소식을 듣고[聞罷官作]>에 그 편린(片鱗)이 비칠 뿐이다.

출세의 푸른 꿈 이미 버렸거늘

탄핵이 빗발친들 무슨 근심 있겠나.

        ~ 중략 ~

예교(禮敎)로 어찌 자유를 구속하리

부침은 오직 정()에 맡길 뿐.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따르라

나는 내 삶을 살아가리니.2)

 

여기에 백성 스스로 나라를 바꿀 수도 있다는 민권(民權) 사상의 단초(端初)를 보여준 <호민론(豪民論)>, 적서차별(嫡庶差別)의 철폐 등을 주장하는 <유재론(遺才論)> 등의 내용이 반영된 <홍길동전>의 존재는 그를 혁명가로 바라보게 된다.

이는 그가 역모죄로 처형된 후 조선이 망할 때(1910)까지 복권(復權)이 되지 않았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동인(東人)의 수장이었던 맏형 허성(許筬, 1548~1612)이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보여준 행적이다. 영창대군 지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계축옥사(癸丑獄事)로 그와 친분 있던 서얼들이 처형되자, 당대의 권력자인 대북(大北)의 수장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의 진영으로 투신한다. 이 정도에 그쳤다면 살기 위한 발버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허균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영창대군의 친모인 인목왕후(仁穆王后) 즉각 폐위론을 제기하고, 자신의 딸을 세자 후궁으로 미는 등 적극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는 제목으로 허균의 작품을 엮고 옮긴이[編譯者]는 책 머리에서 “허균은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라고도 일컬어지고, 겉과 속이 다른 간신소인배라고도 불린다.3)”고 표현한 것 같다.

 

 

호민(豪民), 혁명의 선도자(先導者)

 

여전히 허균이 어떤 인간이라고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의 저서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호민론(豪民論)>을 보면,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홍수나 화재, 호랑이나 표범보다 훨씬 두려운 존재인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리니, 대체 무슨 이유에선가?4)”라고 시작한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위정자(爲政者), 즉 권력이나 재산을 가진 기득권자들이 선민의식(選民意識)에 가득 찬 욕심쟁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허균은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윗자리에서 오만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끝없는 욕심을 채우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저들 진()() 이래의 재앙은 당연한 결과지 불행한 일이 아니다.5)”라고 하여 역성혁명을 긍정한다.

 

이는 그가 항상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얽매이며, 순순히 법에 따라  윗사람의 부림을 받는 자 ‘항민(恒民)’집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가져다 (윗사람의) 끝없는 요구에 응하면서 (그저) 한숨을 쉬며 윗사람을 탓하는  ‘원민(怨民)’6)을 이끌어 혁명을 일으키는 자들이 호민(豪民)’이라고 정의한 것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호민(豪民)은 서양에도 존재한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제3계급을 이끌고 세상을 바꾸었던 조르주 당통(Georges Danton, 1759~1794),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e, 1758~1794),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 1743~1793)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점에서 <홍길동전>에서 서얼 출신인 홍길동이 자신을 따르는 이와 함께 율도국을 세워 왕이 되는 것처럼 백성 스스로 나라를 세울 수도 있다는 민권(民權) 사상의 싹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호민(豪民)’이 등장하지 않도록 피지배층에 대한 수탈을 절제하자는 글로 해석하는 경우7)도 있다.

 

그의 속마음은 어느 쪽이었을까?

 

 

허균(許筠)의 개혁안

 

적서차별(嫡庶差別)의 철폐 등을 주장하는 <유재론(遺才論)>을 보면, 

하늘이 인재를 내는 것은 본래 한 시대에 쓰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귀한 신분이라 해서 큰 재주를 내리는 것도 아니요, 천한 신분이라 해서 얕은 재주를 내리는 것도 아니다.

옛 현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인재를 초야에서 구하기도 했고, 병졸들 사이에서 뽑기도 했으며, 싸움에 져서 포로가 된 장수를 발탁하기도 했고, 도적을 등용하거나 창고를 관리하던 선비를 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수에 묻혀 살며 가슴속에 품은 보배를 펼쳐 보이지 못한 사람이 즐비하고, 영웅호걸이 하급 관료로 묻혀 지내다 끝내 자신의 포부를 시험해 보이지 못한 일도 많이 있었다.

(이와 반대로) 우리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가문과 과거로 제한을 두니 항상 인재가 부족한 것을 병으로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8)”고 하여 서얼(庶孼)과 개가(改嫁)한 여인의 자식 등용을 거부하는 조선시대 인재등용제도를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관론(官論)>에서 “우리나라는 관서(官署)와 관리의 수가 지나치게 많고 번다(繁多)해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왕실 친인척을 관리하는 관서(官署)는 종인부(宗人府) 하나면 족하거늘 종친부(宗親府)/의빈부(儀賓府)/종부시(宗簿寺)를 두었고

~ 중략 ~

우리나라는 중국에 비하면 하나의 제후국 규모에 불과하다. 중국의 하나의 성()에 녹봉을 받는 사람이 칠백여 명인데, 우리나라는 관리가 지나치게 많아 수천 명에 이르고, 관서(官署)는 중국의 다섯 배나 되니9)”라고 하여 나라의 규모에 비해 과다한 관서(官署)와 관직을 통폐합하여 축소할 것을 권하고 있다.

 

<병론(兵論)>에서는

태평한 시절이 지속되다 보니 황해도와 평안도의 고을은 연못과 누대를 꾸미고 호사스런 잔치 준비를 해서 중국 사신을 즐겁게 할 궁리나 일삼을 뿐, 변방을 굳건히 하기 위해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성은 허물어져 평지가 되었고 해자는 메워서 쓸모 없게 되었으며, 무기는 썩어 가고 식량 창고는 텅 비어 간다. 백성은 가혹한 세금에 시달려 열에 여덟아홉은 안쪽 땅으로 흘러 들어 왔다. 사정이 이러니 갑자기 위급한 일이 생기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조건이 이미 다 갖추어진 셈이다.10)”라고 후금(後金)의 침략을 경고하면서

그 대책으로

사대부와 천민을 막론하고 젊은이는 군대에 소속시키고 노인과 아이는 그들을 뒷바라지하게 해야 합니다. 지략이 있는 사람을 뽑아 압록강 연안의 고을을 맡기고 두텁게 지원하여 성곽을 수리하도록 독려11)”할 것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를 남기었다.

 

이처럼 그의 개혁안은 실학의 선구자 가운데 하나로 꼽아도 무방할 정도로 현실적이고 실용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권력의 한 축이 되었을 때조차도 자신의 개혁안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이런 예를 보면 확실히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만약을 가정해보는 것이 우습지만 그의 삶에 있어서 전기(轉期)가 된,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없었더라면 허균의 삶과 조선의 미래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최소한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이자 겉과 속이 다른 간신배라는 두 얼굴의 사나이는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옥의 티

p. 282

허균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며 ‘이단(異端) 사설(邪說)의 극치’라고 꾸297짖었다.

⇒ 허균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며 ‘이단(異端) 사설(邪說)의 극치’라고 꾸짖었다. 



1) 허균,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 정길수 편역, (돌베개, 2012), p. 279

2) 허균, 앞의 책, p. 64

3) 허균, 앞의 책, p. 7

4) 허균, 앞의 책, p. 96

5) 허균, 앞의 책, pp. 97~98

6) 허균, 앞의 책, p. 96

7) 허균, 앞의 책, p. 99

8) 허균, 앞의 책, pp. 100~101

9) 허균, 앞의 책, pp. 109~112

10) 허균, 앞의 책, pp. 122~123

11) 허균, 앞의 책, pp.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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