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아날로그 감성에 목말라한다. 하루 24시간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기술의 발달로 전에 없는 편리한 생활을 누리지만 주말만 되면 등산을 가고 올레 길을 걸으며 차에 텐트를 싣고 캠핑을 떠난다. 몇십만 년에 달하는 인류의 역사에서 문명의 시기는 고작 몇천 년이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따뜻한 햇살 아래 두 발로 흙길을 걸을 때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충만감은 우리의 DNA에 각인된 야생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웨덴의 쿵스레덴을 걷다―‘왕의 길’에서 띄우는 대자연의 메시지』는 여행작가 김효선이 지난 2011년 7월 1일부터 19일 동안 쿵스레덴(총 구간 430km 중 약 260km)을 걸은 기록이다. 감성적이면서도 모던한 디자인과 교육과 복지 강국으로 알려진 북유럽. 이 책은 북유럽 가운데서도 스웨덴의 대자연에 펼쳐진 트레일 코스, 쿵스레덴의 풍광과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얘기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담았다.
쿵스레덴의 유래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스웨덴 관광협회 총재 로우이스 아멘(Louis Ameen)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러시아 황제에 의해 개통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에 놓인 기차 철로를 보고 영감을 얻어 고국에도 이러한 길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하여 스웨덴관광협회(이하 STF)는 스웨덴 북부 아비스코에서 크비크요크 사이의 가장 아름다운 지역에 철도노선처럼 트레일 코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나는 길의 늪지나 덤불숲과 돌길 위에는 두꺼운 자작나무 널빤지를 철길처럼 깔아놓았다. 중간중간 오두막을 지어 여행자를 위한 숙소를 마련하고 트레일 코스 사이사이에 있는 수많은 호수를 건널 수 있는 선착장과 배도 준비했다. 길은 점점 확장돼 북쪽의 아비스코에서 크비크요크를 지나 남쪽의 헤마반까지 430km에 이르게 되었다.(본문 10~11쪽 참조) ‘왕의 길’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트레일 코스, 쿵스(kungs) 레덴(leden)의 시작이다.
대자연의 숨 막히는 절경과 야생에서 생활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쿵스레덴은 유럽에서는 널리 알려진 트레일 코스이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장소다. 저자는 이미 여러 차례 산티아고 길과 일본 시코쿠 순례길을 걷고 돌아와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유럽을 만나다』 외 4권의 책을 집필한 베테랑 도보여행자이지만, 역시 처음 쿵스레덴에 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야생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으로 밤잠을 설쳤다. 뉴욕에 사는 딸이 구해준 가이드북과 인터넷 정보, 구글 위성지도를 토대로 몇 달간 준비를 마친 그가 맞닥뜨린 북유럽 스웨덴의 야생은 어떠했을까. 이 책은 자신이 주인공인 인생 제3막을 살고자 하는 중년의 여성이 대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길을 걸으며 온전한 자신과 마주한 보석 같은 시간을 기록한 18박 19일의 야생 일기다.
쿵스레덴의 트레이드마크, 자작나무 널빤지 길
쿵스레덴에서 저자는 20kg 배낭을 메고 하루 평균 7~8시간씩 걸었다. 오전에 출발해 빠르면 오후, 늦어도 저녁 무렵에는 숙소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쿵스레덴 코스 중간중간 위치한 숙소들은 규모가 크고 웬만한 편의시설은 갖춘 STF 마운틴 스테이션에서부터 그보다는 규모가 작은 오두막과 호스텔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빠질 수 또 하나의 숙소가 바로 텐트다. 이 텐트는 쿵스레덴에서 벤츠와 맞먹는다. 주로 숙소 앞마당이나 근처 야영장에 텐트를 칠 수 있는데, 하루 종일 걸어 피곤한 몸을 뉘며 혼자만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장소로 이만한 게 없으니 벤츠에 비교될 만하다.
“쿵스레덴의 대자연 속을 거닐며
살짝 물먹은 촉촉한 바람결이 얼굴을 스칠 때면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날아갈 듯 행복했다.”
쿵스레덴은 대체로 경사가 완만한 트레일 코스로 보통 시간당 3km 속도로 걷는다. 스웨덴어로 스팽이라 부르는 자작나무 널빤지 길은 쿵스레덴의 트레이드마크인데, 습한 곳이나 덤불숲 그리고 험한 돌길 위에 놓여 있다. 이 길은 빨간 X표의 이정표와 어울려 철길 같은 분위기를 낸다. 긴 장대 끝에 매달려 있는 빨간 X표는 겨울코스를, 나무나 돌에 오렌지색을 칠하거나 돌무덤을 만들어놓은 것은 여름코스를 의미한다. 곰, 여우, 늑대 등이 산다는 유럽의 마지막 야생 황무지에 대한 두려움은 첩첩산중에 사람의 발길로 잘 다져진 소로를 따라 걷다보면 까맣게 잊기 쉽다. 상쾌한 공기, 촉촉하게 얼굴을 스치는 바람, 물소리, 새소리와 함께 걷는 길에는 점점 가빠지는 호흡까지도 음악으로 들린다.
뚜벅뚜벅 걷다보면 어느새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
쿵스레덴을 걷다보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바라보게 되는 절경을 자주 마주친다. 야생에 대한 두려움이 대자연을 향한 경이로움으로 ?뀌는 순간이다. 발음도 힘든 코토쇼카 산 아래 호수는 새들의 낙원이고(66~68쪽), 알레스야우레 오두막은 알리스 계곡과 알리스 강이 굽이굽이 흐르다 내려와 앉아 쉬었다 가는 삼각주가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곳에 위치한다.(70~73쪽) 쿵스레덴 최고의 뷰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셰크티아 계곡은 넓고도 깊은 계곡이 40km 길이로 길게 이어져 있는데 계곡의 오른편으로는 셰크티아 강이 흐르고 양쪽에는 각각 1,470m, 1,700m의 높은 산들이 절벽처럼 버티고 있다.(82~85쪽) 쉬테르 계곡(290~293쪽)을 지날 때에는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걸음까지 한없이 늘어진다. 저자는 아비스코에서 붉은 대문을 통과하며 시작된 쿵스레덴 길이 종착지인 헤마반에 가까워질수록 이곳에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고백한다.
“산책을 즐기려고 텐트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황금빛으로 물든 앞산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이런 장면을 보게 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백야!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선물에 감사를 표한다. 내가 언제 이런 장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테르나셰스투간 오두막에서 사우나를 즐기고 난생 처음 벌거벗고 호수에서 수영을 한 기억 역시 잊히지 않는 순간이다.(254~263쪽) 저자는 서울에서도 거의 매일 수영을 한 뒤 사우나를 하고 찬물에 들어가기를 즐겼지만 장대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이 넓은 호수에 뜨거운 몸으로 뛰어드는 즐거움을 어디 그 작은 욕조통과 비교할 수 있을까.
길에서 만난 작은 돌멩이에도 마음을 담는 사람들
도보여행의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길을 걷다 만나는 사람들과 쌓는 인연이다. 어린 암환자들을 돕기 위해 유럽의 남쪽 에스파냐 끝에서 출발해 북유럽의 노르웨이 끝으로 가는 장장 6,000km의 도보여행을 하는 네덜란드 청년 스테판, 영화배우 같이 멋지고 젊은 아가씨가 관리인이었던 바코타바레 숙소에 예정에 없던 짐을 풀던 슈투트가르트 청년, 지저귀는 새처럼 늘 즐거운 마리아와 그의 가족,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길을 가다 뒤돌아보며 저자가 잘 오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거리만큼만 앞서 갔던 매그너스까지 여행의 빛나는 순간을 함께 만들어준 고마운 친구들이다.
특히 몇백 년 전부터 스웨덴 북부에서 순록을 유목하며 살아온 사미 족 잉에르 헬만과의 우연한 만남은짧지만 강렬했다. 그녀는 본인이 소유한 순록들의 귀에 붙이는 사인을 직접 그려주며 순록을 보지 못해 아쉬워하는 저자에게 순록들이 여름 더위로 서쪽의 높은 산 노르웨이 가까이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친절하게 알려줬다. 또 먼 곳에서 온 낯선 동양 여자가 사미 족에 대해 미리 공부하고 사미박물관을 둘러본 것이 매우 흥미롭다며 사미 족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해주었다.
소르셀레의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첫 만남에서부터 왠지 친해질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던 루스와 브릿마리. 그녀들은 함께 쿵스레덴에 온 일행과 헤어져 혼자 길을 걷기 시작한 저자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자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쿵스레덴 종착지인 헤마반에 도착 3km 전, 저자는 점점 심해진 무릎 통증으로 루스와 브릿마리와 함께 리프트를 타고 내려왔다. 10분만 있으면 쿵스레덴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순간,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왜 그리 서럽게 눈물이 나는지 모를 일이다. 옆에서 토닥여주는 친구들이 있기에 모두! 모두! 고마워요! 라는 인사로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인생 3막, 나를 위한 인생은 이제 시작이다
저자는 나이가 들어감을 즐긴다. 정말로 늙어가는 것도 재미가 있다 생각한다. 비록 몸은 좀 낡아서 고장신호를 보내고 수많은 주름과 처진 피부로 겉모습은 많이 늙었지만 괜찮다. 비록 고대 전쟁사와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며 세계여행을 꿈꾸던 소녀 시절 그리던 멋진 여행자의 모습은 아니지만, 지금의 나를 사랑한다. 세월이 흘렀기에 이렇게 홀가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아이들이 커가는 동안 아내로 엄마로 또 직장인으로 충실하게 살았다. 그러나 이제 저자는 “나를 위해 산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자신들의 삶을 당당히 꾸려가고 있는 아이들과 남편의 배려 덕분이다. 이제 은퇴를 맞이해 인생 3막을 시작하려는 친구들에게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보라 권한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잠 못 이룰 때가 많은 중년이라면 괜찮게 늙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한 걸음 한 걸음 두 발로 길을 걷는 여행은 저자에게 오롯이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을 선물해줬다. 스웨덴 북부 아비스코에서 출발해 헤마반까지 저자는 걷고 또 걸었다. 대자연이 선사하는 경이로운 풍광에 취해서 걸었고 자작나무 숲속 하얀 널빤지 길 위를 새 소리와 바람 소리를 벗 삼아 걸었다. 한밤중 호수에 내려앉은 백야가 빚어낸 황금빛 산 그림자가 너무 아름다워 또 걸었다. 신기하게도 걸으면 걸을수록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무엇이 그렇게 힘들고 서러웠는지 가끔 이유 모를 울음이 터져나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억지로 참지 않았다. 저자 김효선은 베르나르 올리비에나 파울로 코엘료보다 어느 평범한 사람이 쓴 산티아고 여행기를 보고 용기를 얻어 처음 도보여행을 결심했듯이, 이 책을 읽고 쿵스레덴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숙소의 고도와 구간별 거리를 간략한 그래프와 구체적인 숙박정보도 함께 기록한 일정표와 알찬 정보를 부록(383~399쪽)에 자세히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