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 『19호실로 가다』,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19호실로 가다』는 2017년 가을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 소개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도리스 레싱의 책이다. 이 책은 정희진, 이다혜, 최은영 등의 학자, 비평가, 소설가 들이 추천한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집이다. 1919년 페르시아(현 이란)에서 태어나 2013년 타계한 여성 작가 도리스 레싱은 『19호실로 가다』를 비롯하여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불안과 억압을 그린 많은 작품을 남겼다.
단편 「19호실로 가다」는 1963년에 처음 발표된 작품으로, 1970년대 이후 좀더 보편적이 될 페미니즘적 사유들을 한발 앞서 예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호실로 가다」와 같은 작품이 여전히 독자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레싱이 1960년대에 발표한 작품 속에서 포착한 삶의 불안, 특히 여성의 불안하고 억압된 삶의 조건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레싱의 작품 중에는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독해가 가능한 작품들이 많기는 하지만, 후기의 레싱은 우주과학, 생물학, 물리학 등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여러 편의 과학소설 및 판타지 소설을 썼고, 제국주의, 식민주의 문제와 오늘날과 같은 고령화 사회에서 누구나 고민할 수밖에 없는 노인에 대한 차별, 특히 자신과 같은 여성 노인의 삶 등 다양한 주제를 열정적으로 탐험했던 작가이다. 그녀가 작품 속에서 다룬 주제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세간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깊이 고민하는 곧은 지성의 힘이 느껴진다. 오늘날까지 레싱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는 이유, 또 나아가 2007년에 레싱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도리스 레싱, 21세기 여성 작가의 도전』이 주목한 도리스 레싱의 얼굴들
도리스 레싱과 우주
오늘날 헐리우드 영화들의 목록을 잠시 훑어보더라도 우리는 우주를 소재로 하거나 판타지 작품이 대세를 이루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소재의 고갈’ 때문일까? ‘오늘날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기’ 때문일까? 도리스 레싱은 일찍이 소설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벽 속 공간’에 무의식 세계가 있다고 상상하여 그 속에 들어가 청소하고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는 『어느 생존자의 비망록』, 우주에 세 제국이 있고 지구는 그 제국의 식민행성이라고 설정하면서 지구가 오늘날 멸망 직전까지 이르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복잡한 관계를 사유한 5부작 『아르고스의 카노푸스 제국』, 유럽 즉 서양문명이 멸망한 미래를 무대로 각양각색의 아프리카인들이 다민족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마라와 댄』 연작, 먼 과거로 돌아가 태초에 여성만이 존재했고 후에 남성이 태어나 여성이 남성에게 주도권을 양도하게 되는 과정을 상상한 『클레프트』, 이렇듯 레싱의 후기(後期) 작품들의 상상력은 독자에게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사유를 선물한다. 그러나 독자들과 비평가들은 레싱이 사실주의 작품에서 판타지나 과학소설로 전향했다고 그녀를 비난하였고, 레싱은 다시 사실주의 작품을 썼다. 하지만 레싱은 그 작품들 『어느 좋은 이웃의 일기』와 『노인이 할 수 있다면』을 이번에는 ‘제인 소머즈’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여 그 작품이 레싱인 것을 눈치채지 못한 출판계와 비평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소위 ‘제인 소머즈 스캔들’이다.
도리스 레싱과 다양한 관계성
우리에게는 모두 부모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또한 자식이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집안마다 상세한 내용은 다르더라도 영원히 풀 수 없는 엉켜진 실타래인 경우가 많다. 도리스 레싱과 어머니의 관계, 레싱과 자식 간의 관계가 그런 경우이다. 전기 작품들보다는 덜하지만 후기 작품들에도 그러한 관계로 인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어느 생존자의 비망록』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레싱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고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주며, 그 결과 『어느 좋은 이웃의 일기』에서는 그것을 노인들, 특히 초고령 여성들에 대한 이해로 확장시키고 있다. 『다섯째 아이』와 『세상 속의 벤』은 어느 가정에 태어난 ‘못난 아이’ 그래서 ‘버려진 아이’ 벤의 삶을 추적하면서 비정한 현대 사회를 폭로한다. 사실 레싱은 자신을 ‘못난 아이’ 그래서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은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레싱은 비평가들로부터 위대한 페미니스트 작가로 평가되어 왔지만 『제3, 4, 5 지대 간의 결혼』과 『클레프트』를 읽어보면 레싱이 여성/남성이라는 이항대립을 넘어서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사유를 전개하는지를 읽어볼 수 있다. 레싱에게 남자와 여자는 다른 존재이며 둘 다 부족하므로 서로 돕고 보완해야 할 존재이다.
도리스 레싱과 사변소설
레싱은 정규 교육을 마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죽음과 인종의 멸종, 환생 등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을 원자물리학과 사회생물학 등 현대 과학과 연결 지어 풀어낸다. 그뿐만 아니라 지리학이라는 학문의 단편성을 꼬집고 역사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모든 지식이 상황적 지식임을 증명한다. 레싱의 작품은 이처럼 ‘포스트모던’ 성격을 짙게 보여준다.
본 저서는 고령의 레싱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 고령에 이른 작가이기 때문에 그만큼 시야가 넓고 길다. 또한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에 대한 생각도 깊다. 레싱에 따르면 작가란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해야 하며, 특히 동시대의 문제를 폭로하고 경고해야 한다. 레싱은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과 상상력으로 ‘사변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이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저자 인터뷰 : 『도리스 레싱, 21세기 여성 작가의 도전』 깊이 읽기
Q. 선생님께서는 2004년에 출간한 첫 도리스 레싱 연구서인 『도리스 레싱 : 20세기 여성의 초상』을 위해 연구하신 기간을 포함하여 이번에 출간하는 『도리스 레싱, 21세기 여성 작가의 도전』에 이르기까지 총 24년간 도리스 레싱을 연구해 오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도리스 레싱을 연구하게 되셨는지, 도리스 레싱 연구를 계속해 오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A. 제 박사 논문은 조셉 콘래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콜로니얼리즘, 특히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화 그리고 그에 따른 아프리카인들의 고통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현대소설 강의를 하던 중 레싱의 첫 작품 『풀잎은 노래한다』를 가르치게 되었고, 레싱의 강력한 저항의지, 반항심, 아프리카에 대한 연민, 불의에 대한 분노 등으로 인해 계속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끝까지 레싱을 놓지 않은 이유는 초고령에 다다른 여성작가의 도전 정신을 끝까지 추적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Q.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미투 운동 등 여성인권, 페미니즘 관련 이슈들이 계속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도리스 레싱의 작품들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레싱은 1960년대 질풍노도의 영국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이때에는 오늘날의 한국처럼 영국이 이념대립, 핵무기반대운동, 세대 간의 대립, 여성해방운동, 환경운동으로 거리가 매일 시끄러웠던 시기입니다. 누구보다도 저항심, 반항의식이 컸던 레싱이지만 영국의 소요사태를 겪으면서 저항심과 반항의식을 초월하게 된 듯이 보이며 인간의 기초적인 것, 즉 마음의 평형,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조화 등 다소 동양적인 사상으로 서양의 이항대립적 사고를 뛰어넘으려 하였습니다. 레싱은 이기적인이고 개인적인 자기주장보다는 전체 속에서 부분을 보는 전체론적 사고, 입장을 바꾸어 놓고 사고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Q. 도리스 레싱의 작품들은 아직 국내에 많이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독자들께 꼭 추천하고 싶은 아직 번역되지 않은 작품을 골라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또 그 작품을 고르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다음 작품들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대문의 도시』 는 사실주의 작품에서 사변소설로 진입하는 과정과 이유를 보여주며 레싱의 전체 사상을 보여줍니다. 『제3, 4, 5 지대 간의 결혼』은 남녀관계에 대한 레싱의 사고를 보여줍니다. 『제8행성의 대표만들기』에서는 죽음과 멸종에 관한 레싱의 동양적 사고와 현대 과학의 만남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좋은 이웃의 일기』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한국 사회에 초고령인들을 위한 복지문제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클레프트』는 태초에 여성만 있었고 후에 돌연변이로 남성이 태어났다는 의식 전환의 발상으로 남녀관계를 파헤치고 있으며 신화/역사에 대한 일반적 신뢰를 전복시킵니다.
Q. 레싱이 우주, 과학소설 같은 테마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아프리카에서 밤하늘을 주시하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보면서 하늘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있을지 모르는 어떤 존재를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사고 또한 이때 갖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레싱이 어렸을 때는 영국이 세계 최고의 제국주의적 국가였습니다. 여기에서 사고를 확장하여 지구를 식민행성으로 두고 있는 카노푸스 제국을 상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짐바브웨라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식민자라는 갑의 입장으로 살다가 영국으로 귀화하면서 을의 입장이 되어버린 것 또한 역지사지의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생각합니다.
Q. 사변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대해서 좀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사변소설이란 작가가 갖고 있는 어떤 이념이나 개념을 바탕으로 작품을 구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변증법적 사고를 갖고 있던 레싱이 『제3, 4, 5 지대 간의 결혼』에서 제3지대와 제4지대를 결합시키고 그 후 제4지대와 제5지대를 결합시킨 후 각각의 결과를 다시 결합시키는 것이 그 예입니다. 이념소설과 다른 점은 여기에 판타지, 과학소설 등의 상상적 요소가 첨가된다는 것입니다. 판타지나 과학소설은 현 세계와 다른 세계를 상상하지만 결국에는 현 세계를 비판하고 교정하려는 목적에서 구상된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