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감상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도쿄, 파리, 피렌체, 마드리드, 런던, 바티칸 ―
6개 도시 대표 미술관 11곳 ‘발로 쓴 순례기’
지난 6월 9일 80세를 일기로 별세한 최영도 변호사의 유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보정판)가 출간되었다. 고인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 참여연대 공동대표, 국가인권위원장 등을 지냈고 이른바 ‘인권변호사’ 1세대로 꼽히는 인물. 그가 별세하자 변호사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올린 추모 글에서 고인을 ‘선배님’이라 부르며 “좋은 법률가를 뛰어넘는 훌륭한 인격, 저도 본받고 싶었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였습니다”라고 고백했다.
문 대통령이 같은 글에서 “제가 선배님을 더욱 닮고 싶었고 존경했던 것은 클래식음악과 미술에 대한 깊은 소양과 안목”이라고 할 정도로, 생전의 최 변호사는 본업 못지않게 음악, 미술, 문화재 등 문화 전반에 조예 깊은 것으로 유명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 외에 클래식음악 에세이 1권, 아시아 문화유산 답사기 3권을 냈고, 선친부터 2대에 걸쳐 수집한 조선 토기 1,700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해 ‘최영도 기증실’이 있을 정도이다.
생전에 40여 회에 걸쳐 6개 대륙 52개국, 310여 개 도시와 유적지를 돌아봤다는 저자는 그중 아시아대륙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총결산한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기파랑 刊, 624쪽)를 2017년 가을에 펴낸 바 있다. 이번 [아는 만큼 보이고...] 보정판은 저자 평생에 걸친 문화유산 순례 여정의 서양미술편 총결산에 해당한다. 2011년에 같은 제목으로 냈던 372쪽 분량의 초판(기파랑 刊)을 대폭 보완하고, 새로 런던 내셔널 갤러리와 바티칸 미술관을 더하여 2권으로 분권했다. 저자는 이 보정판을 준비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한 가운데 5월말 병석에서 육필 서문과 함께 원고를 탈고하고 일주일여 만에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
명작엔 ‘문화와 사람’의 향기가
저자에게 서양미술 하면 무엇보다 르네상스 이래의 ‘유럽, 근대’ 미술이다. 명작에는 작가의 삶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문화의 정신세계까지 오롯이 담겨 있다는 저자의 믿음과도 부합하는 미술이다. 책의 부제가 ‘유럽 미술 기행’인 이유다.
책은 도쿄, 파리(5곳), 피렌체(2곳), 바르셀로나, 런던, 바티칸 등 6개 도시 11개 미술관의 소장품과 관련 작품들까지 200여 점을 엄선해, 생생한 컬러 도판과 함께 소개한다. 저자의 말대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에르미타주) 박물관을 제외한 유럽의 대형 미술관들은 다 섭렵한 셈”(5쪽)이다. 서양미술을 다루는 책에 이례적으로 도쿄(도쿄국립미술관 내 ‘마쓰카타 컬렉션’)가 포함된 것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프랑스 근대미술작품을 다량 수집한 한 일본 기업인의 흥미진진한 수집기와, 그 결과 탄생한 컬렉션의 퀄리티가 남다르기 때문.
(제1권 - 도쿄, 파리)
I 마쓰카타 컬렉션 -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II 루브르 박물관 - 세계 최대 최고의 박물관
III 오르세 미술관 - 프랑스 국립근대미술관
IV 파리 국립 로댕 미술관 - 애욕은 짧고 미술은 길다
V 오랑주리 미술관 - [수련]의, [수련]을 위한
VI 마르모탕 미술관 - ‘기증의 선순환’의 모범
(제2권 - 피렌체, 마드리드, 런던, 바티칸)
VII 피티 미술관 - 성모의 모델을 찾아
VIII 우피치 미술관 - 르네상스 미술의 보물창고
IX 프라도 미술관 - 세계 최고의 회화관
X 런던 내셔널 갤러리 - 강국은 미술관도 강하다
XI 바티칸 미술관 - 유럽 미술 여행의 종착역
서양미술 감상기를 책으로 엮기로 결심한 계기가 된 것은 엉뚱하게도 1998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인권선언 50주년 기념행사였다. 당시 한국 민변 회장 자격으로 기념행사에 초청받은 필자는 기간중 매일 아침과 낮에 파리 소재 미술관들을 답사하고, 오후 늦게부터는 공식 행사에 참석하는 강행군을 했다. “큰 미술관이라 하더라도 20점 이내의 작품만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6-7쪽)이라는 평소 지론대로, 가기 전에 작품을 정하고 자료를 훑으며 예습하고, 가서는 작품을 보며 꼼꼼하게 메모하고, 돌아와 보충학습한 결과가 이 책의 제1권, 파리 기행을 겸한 5개 미술관 감상기다.
화려함 뒤에서 ‘인간’을 묻다
감탄하며 작품을 보면서도 변호사로서, 천주교와 개신교를 오간 기독교인으로서 저자의 의식이 언뜻언뜻 드러나기도 한다.
“이 그림(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앞에 서면 나는 4.19, 5.18, 6.10 등 한국의 민주화투쟁을 상기하며 그날의 감격과 비탄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 _2장 루브르 박물관, 106쪽
“하느님의 집은 과연 이렇게 장엄하고 화려해야만 했을까? 예수의 생애와 사상에 장엄이나 화려라는 단어는 없다. 문제는 번드르르한 외양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고매한 정신, 즉 ‘사랑’ 아니겠는가. _11장 바티칸 미술관, 561쪽
무엇보다, 미술 애호가라면 방대한 박물관.미술관과 컬렉션들을 가진 나라들이 부러울 것은 당연지사. 바티칸에서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추기경들이 갇혀 지내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콘클라베’를 소개하며 “나도 한번 며칠 갇혀서 시스티나의 그림들을 실컷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611)는 저자다. 그러나 그보다 몇 배 더 부러운 건, 문화선진국들의 ‘돈 쓸 줄 아는 부자’들의 미술품 수집과 기증 풍토다. 일본 도쿄 국립서양미술관 내 ‘마쓰카타 컬렉션’(1장)의 탄생 비화를 소개하면서 “왜 한국에는 마쓰카타 같은 거인이 없을까”(43쪽)라며 한탄하고, 프랑스 탄광재벌 마르모탕 부자, 의사 벨리오 부녀, 화가 모네의 아들, 화상(畵商) 조르주 부자 등의 ‘기증의 선(善)순환’이 빚어 낸 최고의 모네 컬렉션 마르모탕 미술관(6장)을 둘러보면서 “참으로 멋지고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271)고 탄식한다. 그런 부러움이 저자 자신 2대에 걸쳐 모은 우리나라 원삼국~조선시대 토기 1,700여 점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최영도기증실’을 만들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 추모글 -
선배님을 더욱 닮고 싶었고 존경했던 것은 클래식음악과 미술에 대한 깊은 소양과 안목이었습니다. 좋은 법률가를 뛰어넘는 훌륭한 인격, 저도 본받고 싶었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였습니다. _문재인(변호사, 대통령. 페이스북 추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