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못 볼 기남자, 백동수
무예인이 10년간의 노력으로 완성한 한 조선 무사의 일대기.
협(俠)이라는 글자 하나에 온 생을 걸었던 조선 사내.《무예도보통지》편찬과 북학파 탄생의 숨은 산파.
정조 대왕이 아끼고, 박지원과 이덕무가 사랑한 선비 백동수. 사라진 전통 무예의 맥을 되살린 무예가.
다시 쓰는 《조선의 협객 백동수》
이 책의 초판이 2002년에 나왔으니 햇수로는 10년이 흘렀다. 10년 전에는 감히 접근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비롯한 귀중한 사료를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수정 증보판으로 내게 된 것도 《승정원일기》와 《어영청등록》《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등에서 백동수에 관한 몇 가지 귀중한 사실을 새롭게 찾아냈기 때문이다.
첫째, 1785년 봄 이율ㆍ홍복영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때, 백동수가 정조의 밀명을 받고 선전관 신홍주와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신선과 이인을 찾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일어난 기이한 일화를 소개했다. 백동수가 1788년에 첫 벼슬길에 나선 것으로 보았으나, 이미 3년 전인 1785년에 선전관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이 확인되었다.
둘째, 지리산에 다녀 온 뒤 선전관으로 일하다 궁궐 수비를 담당하는 어영청 소속의 집춘영 초관으로 복무하다가 1789년에 장용영 초관에 임명되어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맡았으며, 이후 훈련원에서 훈련주부, 훈련판관을 거쳐 종4품의 훈련첨정으로 일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넷째, 1796년 장흥고 주부로 재직하던 중 어명을 받아 유득공, 서호수, 이서구와 함께 《무경칠서(武經七書)》 주해를 달아 편찬하는 사업에 감독으로 참여했다. 서호수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이전에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는 서호수의 아우 서형수와 작업을 함께 했던 특별한 인연이 있다.
다섯째, 1802년 1월 백동수가 박천군수에 임명되었을 때는 장용영이 혁파되기 10일 전이었다. 장용영이 혁파되면서 장용영 직할에서 이조로 소속이 바뀌게 될 정도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끝으로 백동수 말년의 일인데, 박천군수로 재직할 때 뇌물을 받은 혐의로 탄핵을 받아 1806년 6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9달 동안 경상도 단성현에서 유배를 살았던 사실과 순조가 세 차례(1810, 1813, 1816)나 종3품의 군기시 부정에 제수했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았던 사실도 새롭게 추가했다. 큰 틀은 바꾸지 않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새롭게 발굴된 사료를 최대한 반영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전체의 틀은 그대로 두고 작업했기에 크고 작은 문제가 여럿 있어 바로 잡았다.
무예인이 쓴 조선 무사의 일대기
《조선의 협객 백동수》는 전문 연구자나 집필자가 아닌 무예인이 쓴 책이다. 우리의 전통 무예를 접한 뒤 인생 행로를 바꾸고, 그것도 모자라 잊혀진 우리 무예의 역사를 되살려놓겠다고 덤벼든 젊은 무예인의 10년 노력이 만들어낸 책이 바로 《조선의 협객 백동수》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무예도보통지》 편찬 총감독을 맡아 조선 무의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백동수란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과 애정이 첫째요, 한국 무예의 역사와 조선 무사 이야기를 만들어내고픈 욕심이 둘째다. 그리고 우리 나라 역사가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배제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18세기 조선 무(武)의 역사를 찾아서
사실 우리 나라 역사가 문(文)에 치우치고 무(武)에 인색한 역사였다는 비판은 어제오늘 나온 얘기가 아니다. 우리 역사 중에서도 특히 조선시대가 이러한 지적을 많이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설을 뒤엎을 만한 증거나, 이런 비판을 수용하는 움직임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은 문약한 나라요, 무사가 천시받던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우리 나라 역사가 결코 무에 인색한 역사가 아니었다’고 선언하는 책이다. 이 책에 담긴 조선 무사 백동수의 생애와 《무예도보통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에게도 자랑할 만한 무의 역사와 무예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뻐근해진다.
18세기 조선을 보여주는 다양한 인물군
이 책의 또 다른 내용상 미덕은 백동수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통해 18세기 당시 문ㆍ무 양면에서 활약했던 수많은 지식인 선비들의 생생한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니, 백동수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는 데 참가한 청장관 이덕무, 정유 박제가 등은 백동수라는 인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였다. 그뿐인가. 이 책이 그려낸 《무예도보통지》의 제작 과정 속에서 편찬의 중심 인물은 물론, 역사에 미처 기록되지 못한 이들까지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백동수와 함께 무예를 정리한 여종주와 김명숙, 책의 교정과 교열에 참여한 서형수, 그림을 그린 화원과 판각을 담당한 각수 등이 그들이다. 여기에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백동수 같은 서자들에게까지 벼슬길을 열어준 중흥 군주 정조대왕도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풍부한 그림과 정보 자료
이 책의 형식상 장점은 18세기 조선 무사ㆍ선비와 관련한 그림과 기타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독자들이 자료만 보고도 흥미를 느낄 수 있게 편집했다는 것이다. 저자의 고백대로 200년 전 인물들을 되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무관이자 서얼 신분이었던 이 책의 주인공 백동수에 대한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저자가 18세기 조선 자료를 모두 탐독한다는 각오로 이 책을 준비했다고 한 말은 결코 엄살이 아니다. 《무예도보통지》 속의 총도를 비롯하여 총 200여 장에 가까운 그림 자료를 책의 요소 요소에 편집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백동수가 사귄 선비들의 초상과 글씨, 백동수가 보았다는 책, 사용했다는 무기, 그가 무예를 연습했다는 장소를 그린 그림……. 이 모든 자료는 백동수가 활약한 시대상을 그려보고, 그의 모습과 사상을 짐작하는 데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당시 ‘글씨와 그림에 뛰어난 무인들’로는 누가 있었는지, 백동수가 맡았던 ‘좌사 후초의 구성원과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기예의 종목과 규정’은 어떠했는지 등 내용과 관련한 정보를 별도로 편집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정조 시대 무예를 재현한 별도 화보
앞에서도 밝혔다시피 조선 후기의 무예 훈련 교범서인 《무예도보통지》는 백동수란 인물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책이다. 특히 백동수가 정리한 스물네 가지 무예, 곧 ‘지상무예 18기’와 ‘마상무예 6기’는 《무예도보통지》의 핵심이다. 이 무예 24기의 도보와 중요 내용을 보기 쉽게 정리해놓은 것도 이 책의 장점 가운데 하나이다. 장창과 기창은 어떻게 사용하고, 등패와 편곤은 어떻게 생겼는지 이 책만 보아도 능히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책 중간에는 2001년 6월 수원 화성에서 열린 ‘정조시대 전통무예전’ 화보를 16쪽에 걸쳐 실어서 《무예도보통지》 속의 무예 장면과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백동수가 그 맥을 잇기 위해 애쓴 우리 전통 무예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그려볼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 _백동수는 누구인가?
역사 속의 백동수
절개 있는 무장의 후손, 서자의 신분, 진정한 협객을 꿈꾼 선비.
사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백동수가 스물아홉 살에 무과에 급제하고, 마흔다섯에 국왕 호위부대인 장용영 초관에 임명되어 정조의 특명으로 《무예도보통지》 편찬 총감독을 맡아 이덕무ㆍ박제가와 함께 이 임무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애 후반에는 비인현감, 박천군수로 재직하다가 1816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북학파 인사들과의 관계
백동수는 이덕무, 박제가와는 어릴 적부터 죽을 때까지 형제처럼 지낸 사이였고, 박지원에게는 연암골을 소개해주고, 홍국영의 탄압을 미리 알려 몸을 피하게 도와준 평생 친구였으며, 북학파를 있게 한 원형이라 할 백탑시사의 중심 인물이었다.
지식인 백동수
백동수는 무관이었지만 시와 글씨, 그림에 이르기까지 빼어난 솜씨를 가진 지식인이기도 했다. 박제가는 그를 일러 “경사와 《사기》를 능히 논할 만하다”고 했고, 성대중은 “무로써 문을 이룬 사람”이라고 평했다. 박지원은 백동수가 “전서와 예서에 뛰어나다”고 했으며, 이덕무는 백동수에게 자기 글에 대한 평을 부탁했으며, 당대의 화가 김홍도와는 화법에 대해 토론했다.
백동수의 성격
백동수의 성격은 그의 호‘야뇌’가 말해준다. 들 야에, 주릴 뇌. 백동수는 들사람처럼 굶주리더라도 타고난 대로 거침없이 살고자 했다. 권력에 얽매이고 비굴해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했던 탓에, 무과에 급제하고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농사짓는 것을 택할 정도였다. 이렇듯 고집 세고 불 같은 성격과 행동 탓에 한 친구에게 “고삐로 묶어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 아호를 ‘인제’라 하여 벗들에게 포용성 있는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는 배포도 있었다.
백동수의 희망
정조가 서거한 뒤 장용영이 혁파되고, 개혁 인사들이 탄압 받는 와중에 백동수도 벼슬에서 쫓겨나 유배를 갔다. 그러나 백동수는 젊은 청년들과 어울리며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죽어 땅에 묻혔을 때, 성해응이라는 학자는 “내 평생에 다시 못 볼 기남자였다”고 아쉬워했다.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 그의 희망은 전통 무예의 맥을 되살려 후대까지 올바로 전수되게 하고, 외적의 침략을 막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고, 박천군수로 재직할 때에는 백성들과 함께 박천을 상무의 고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듯 백동수는 천상 무인이었고, 끝없이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