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도덕철학과 실험철학의 대립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윤리학적 실험들로 인해 전통적인 도덕철학이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일부 전통적 도덕철학자들은 도덕의 영역이 과학 분야와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과학으로 인해 도덕적 추론의 권위가 흔들린다고도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 행동의 다양한 실험과 심리적 연구들이 윤리학을 보다 풍요롭게 하며, 윤리학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저자 애피아는 자연주의의 비전을 정교하게 발전시킨다. 그는 이 책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실험철학’ 분야의 지적 계보를 추적한다. 그리고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갈수록 그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여러 실험 연구에 대해 명쾌하고 균형 잡힌 설명을 제공한다. 동시에 고전적 전통의 윤리학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도 제시한다.
애피아는 종종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는 실험철학과 전통적 도덕철학의 관계를 경쟁이 아닌 대화의 차원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촉구한다. 또한 실험철학이 새롭게 등장한 학문이 아니라 전통 철학 그 자체만큼이나 역사가 길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심리학과 윤리학, 직관과 이론 간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조명하는 차원을 넘어 이 책은 윤리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성격에 대한 고정관념을 의심하라!
만일 누군가가 ‘윤리적인 사람’, 혹은 ‘덕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의 행동은 윤리적이고 덕 있는 행동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덕 있는 행동을 했을 때, “그 사람은 덕을 갖춘 사람이야”라는 말이 그의 행동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즉 성격이나 성향이 그 사람의 행위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몇몇 실험심리학자들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성격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예를 들어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는 건제품 가게 옆에 있을 때보다 향기로운 빵집 앞에서 잔돈을 바꿔주는 친절을 베풀 확률이 훨씬 높다든지, 공중전화의 동전 반환구에서 동전을 습득한 사람이 자신의 앞에서 서류를 떨어뜨린 사람을 도와줄 확률이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 들을 실험으로 밝혀낸 것이다(51쪽). 하지만 피실험자들에게 왜 친절을 베풀었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누구도 “동전을 주었기 때문에”라든지, “향기로운 빵 냄새 때문에”라고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친절을 베푸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라든지 “그렇게 하는 것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 때문에”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누군가가 친절을 베푸는 것이 단순히 빵 냄새나 동전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배경적 상황이 피실험자의 판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애피아는 이러한 실험들을 근거로 상황주의자들의 실험철학이 기존의 도덕철학 이론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충실히 보완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윤리적 직관을 의심하라!
천문학자들에게는 별이 있고, 지질학자들에게는 돌이 있는 것처럼 도덕 이론가들에게도 도덕적 직관이라는 연구 대상이 있다. 대부분의 도덕 이론은 이러한 직관을 설명하고 또 그로부터 제약을 받는다. 하지만 이 도덕적 연구 대상인 직관이 과연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과 에이모스 트버스키는 “아시아에 독감이 닥친다는 가정”을 전제로 실험을 했다. 아시아에 독감이 닥칠 텐데,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망 인구는 600명에 달할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그룹을 정해 다른 선택지를 제시한다. 제1그룹은 정책 A와 B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정책 A는 600명의 사망하게 될 사람 중 200명을 생명을 구하는 것이고, 정책 B는 600명 모두를 구할 가능성이 1/3이고, 아무도 구하지 못할 가능성이 2/3이다. 제2그룹은 정책 C와 D 두 가지의 선택지를 받는데, 정책 C는 이 정책으로 400명이 사망하게 되며, 정책 D는 아무도 죽지 않을 가능성이 1/3, 600명 모두 죽을 가능성이 2/3이다.
실질적으로 1그룹과 2그룹에 제공되는 선택지는 같다. 즉, 정책 A와 C가 같고, 정책 B와 D가 같다. 표현만 다를 뿐이다. 하지만 제1그룹의 경우에는 정책 A를 선택한 사람이 많았던 반면, 제2그룹에서는 정책 D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는 그 유명한 ‘틀 효과(프레임 효과)’의 많은 사례 중 하나다. 이 외에도 ‘광차 실험’을 비롯해 기존에 제시된 다양한 실험 연구를 통해 애피아는 윤리적 직관이 얼마나 맹점이 많은지를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도덕적 인식의 분류 체계, 모듈
인간의 도덕성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실험적 도덕심리학은 최근 문헌을 통해 인간의 도덕적 감정의 기저를 이루는 반응 양식을 5~6개의 근본적인 항목으로 나누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중 애피아는 이 책에서 조너선 하이트와 그의 동료 학자들이 풀어낸 체계를 기준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최근 이러한 마음의 기능적 하위 체계의 가설을 일반적으로 ‘모듈’이라고 일컫는다. 그렇다면 도덕적 인식의 모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조너선 하이트와 그의 동료들에 따르면 다음의 다섯 개의 모듈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1. 동정심
동정심은 가장 명백하고 우선적인 도덕 모듈이다. 특히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정심은 명백히 도덕적 숙고의 전통을 형성한다. 숀 니콜스는 소위 ‘염려 메커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메커니즘은 여러 가지 고통을 받아들여 결과물로 이타심을 자극할 수 있는 감정을 낳는다고 보았다.
2. 상호주의
두 번째 도덕 모듈은 공정성 또는 상호주의다. 이 모듈은 상호 간의 이익이 상충되지 않고 공정한가 아닌가에 집중된다. 즉 이 모듈은 “불공정함에 의해 촉발되고, 무엇보다도 먼저 분노의 감정을 낳는다. 여기서 분한 감정은 다른 사람으로 인한 위해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초래된 위해 때문에 발생한다.”(158쪽)
3. 위계
세 번째 모듈은 사회적 위계(지위와 계급)와 관련 있다. 위계가 이끌어내는 평가는 우리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 집단 안에서 차지하는 우리의 지위에 따라 다른 감정을 가진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즉 인간의 존엄성이나 명예 등의 요소가 도덕성을 이끌어내는 모듈이 되는 것이다.
4. 순수
이는 역겨움, 혹은 혐오감과 관련이 있는 모듈이다. 예를 들어, 자연사한 동물을 먹는 행위, 근친상간과 수간, 자해 등 우리가 반응하는 혐오감 역시 도덕적 모듈이 될 수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무해한 금기의 위반’ 즉, 기르던 개가 교통사고로 죽자 그 유해를 먹는다든가, 한 남자가 죽은 닭을 상대로 성행위를 한 뒤 저녁으로 요리해 먹는다는 설정에서 대학생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응답자들은 역겹다는 반응은 보였지만 도덕적으로 절대 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응답한 반면, 사회적 지위나 교육 수준이 낮은 응답자들은 이러한 행동들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응답했다.
5. 외부인과 성자(내집단과 외집단)
따돌림을 받는 사람을 의미하는 이 다섯 번째 모듈은 편파성과 관련이 있다. 즉, 내가 속해 있는 집단, 혹은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메커니즘을 말한다. 내집단과 외집단 구분이 놀라울 정도로 잔혹한 행동을 허가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데이비드 “흄이 언급했듯이 가족 구성원에서 이웃 주민, 같은 나라 국민, 전 세계 이방인들로 범위가 확대될수록 연민의 정도 점차 줄어”(168쪽)들기 때문이다.
인간의 직관과 행위를 연구하는 다양한 실험들
이 책에는 인간의 직관과 행위에 대한 다양한 실험들이 등장한다. 물론 저자인 애피아가 직접 실험한 연구들은 아니다. 20세기 중후반 이후 활발히 전개되어온 상황주의적·실험철학적 연구들이 소개된다. 이러한 연구들은 우리의 윤리학적 사고와 직관, 그리고 에우다이모니아(인류의 번영 혹은 행복)와 관련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윤리학적 실험들이 어떤 결과를 창출했고, 이러한 결과는 윤리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보이는지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