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혁명의 폐기’가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혁명’을 창안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자본의 지구화가 한창 진행 중인 오늘날이야말로 반자본주의 운동이 혁명을 꿈꿀 때이다. 이 책은 이 꿈의 내용이 바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임을 일관되게 주장한다. 때문에 이 책은 우리에게 존엄 속에서 정직하고 진지한 삶을 살도록 상기시킨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를 위한 투쟁은 노동의 사회적 자율을 둘러싼 투쟁이다. 사회적 노동의 생산물이 인간에 의해 통제되기보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현실이 부정되고 이 모든 것들은 인간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사빠띠스따 운동의 전 지구적인 유통이 제기하는 새로움은 혁명을 흡수하는 것이 민족국가 범주라는 점이다. 역사의 발전은 민족국가형태를 넘어서는 것이 혁명이 아님을 보여준다. 정확하게 혁명을 흡수하는 것이 바로 민족국가이다. 민족국가는 혁명에 기생하며 혁명을 체제내화하는 포획기계이다. 따라서 국가 없는 혁명, 혁명정당 없는 혁명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오늘날 혁명의 문제로, 혁명의 수단으로서 사용될 수 없는 국가를 공동화시키는 사회적 자율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을 제기한다. 이 책은 사회적?정치적 변화에 대한 정통적 설명이 드러내는 약점을 설명하면서 레닌주의에 대해 좌익공산주의자들이 가했던 비판을 시의적절하게 재평가하는 한편 그것의 현대적 연관성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하나의 ‘진정한 계급투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사이에 계급의식을 창출할 전문가들(당)의 조직이 있어야만 한다. 노동계급은 이러한 전문가들의 조직이 없으면 의식적으로 혁명적인 행동을 생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외부로부터’ (당으로부터) 노동계급에게 가져와질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비록 의미화의 특정한 색조들이 생략되긴 하겠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에 포함된 고찰들은 이 중심적인 논점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 계급의식은 ‘외부로부터’ 노동운동 속으로 온다는 의견뿐만 아니라 ‘진정한’ 계급투쟁은 당에 집중된다는 생각은 객체로부터 주체를 분리시키는, 그리하여 자본을 사물로서 생각하게 되는, 요컨대 계급투쟁에 대한 물화된 관념을 생산하는 이론화에 속한다.”(288~9쪽)
“…오늘날 우리는 국가 이론에 상응하는 조직 이론에 의해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생각할 수 없다. ‘복종함으로써 지배하는’ 사빠띠스따는 그러한 급진적 사회변화를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 이것은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레닌주의 정치이론의 핵심으로부터 단절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정치이론에 대한 비판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혁명의 미래는, 그러므로, 자본에 전형적인 분리와 파편화의 탁월한 결정(結晶)으로서의 정치의 폐지, 달리 말해 물신화되었고 또 물신화하고 있는 권력 형식으로서의 정치의 폐지일 것이다”(294쪽)
“우리는, 민족국가형태를 넘어서는 것이 혁명인 것이 아니라 혁명을 흡수하는 것이 민족국가 범주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296쪽)
이 책은 결코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다. “지역적이고 지구적인 투쟁들을 지속적으로 연결하는 사빠띠스따”의 물으면서 걷기처럼,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물으면서 걷는다. 해답은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씨애틀에서 뽀르또 알레그레를 거쳐 제노바로 들불처럼 확산되는 것을 본 바 있는, 새로운 전 지구적 반자본주의 운동은 이 점에서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개시하고 있다. 전 지구적 노동은 불복종의 동학을 통해 그 자신을 전 지구적 자본의 적대자로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새로운 해답들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있다.”(219쪽)
의회주의와 선거에 던지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메시지
우리는 '해방운동이 선거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와 대면해야만 한다. 이 책은 당과 선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녹색당은 ‘반당적 당’으로, 그리고 정치체제에 대한 급진적 대안으로 출범했다. 그 당은 체제로 통합되면서 매우 짧은 시간 동안에 ‘체제화’했다. 즉 체제 내부에서 체제를 바꾸기보다 그들 자신이 제도화해서 초기에 자신이 거부했던 그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316쪽)
“오늘날 보통선거권의 통합적이고 비해방적인 성격은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그것이 해방을 위해 아무리 불가결하다고 해도, 부르주아적 입헌국가에서 자유로운 보통선거는 합의구축을 위한 메커니즘 이상의 것이 결코 아니다.”(324쪽)
그렇다면 단순히 이것은 선거 보이콧을 요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침묵은 동의와 같기 때문이다.’ 선거들의 이러한 딜레마에 제도정치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는 힘으로 국가와 자본을 매개하지 않고 투쟁을 전 지구적으로 유통시키는 ‘사회적 자율’을 선언한다. 이 사회적 자율이 맑스가 주장한 인간해방의 실천적 힘이라고 주장한다.
“해방적 부정의 조직은 철저하고 강력하게 조직된 강한 적에 맞서면서 중앙위원회, 소수독재정치, 혹은 위계제 등의 형식이 전혀 없이 작동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조직은 해방의 목표를 예상해야만 하며 이 목표를 기초로 그것의 성격을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는 이론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 그것은 실천적 문제이다.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도, 그리고 또 일상적 삶에서도 실천적 활동 속에서 그리고 실천적 활동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326쪽)
“공산주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회적 자율성을, 즉 사회적 자기결정을 요구한다 … 국가를 사회혁명의 수단으로 보는 국가에 대한 레닌주의적 지지는 사회적 자율성을 국가의 자율성과 혼동한다.”(225~226쪽)
“노동계급은 단지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을 뿐이라는 맑스의 진술은 혁명의 진정한 문제를 제기한다. 문제는 노동의 자기조직화의 문제, 즉 자본주의에 대한 실질적 대안을 제시하며, 그리하여 조직적 수단들 속에서 혁명적 목적들을 반영하는 자기조직화의 문제이다. 요컨대 혁명적 조직화의 위대한 문제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투쟁의 수단과 방법을 발견하는 문제이다. 중무장한 반동들에 항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 삶의 실천에서 권력의 모방에 항거할 수 있는 투쟁의 수단과 방법을 발견하는 문제이다. 혁명적 변형의 첫 번째 원리는 사회의 민주화이다. … 사회의 민주화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필요노동의 민주적 조직화를, 즉 연합한 생산자들 자신에 의한 필요의 영역의 조직화를 의미한다. 강제로부터의 자유 속에서 필요노동을 민주화하는 것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회적 자율을 위한 요구를 수반한다. 자율은 인간적 주권을, 주체로서의 인간적 존엄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을 추상에 의해 지배되는 타락한 존재로 만드는 모든 관계의 폐지를 의미한다. … 그러므로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 권력을 달성하는 문제이다(Holloway, 2002b). 그것의 해결책은 이론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실천적 문제이다.”(253~254쪽)
자본에 대항하는 혁명, 즉 인간해방과 자기결정을 위한 혁명은, 그러므로, 자본의 형식으로 자신의 속박을 창출하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에 대항하는 혁명이어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의 전제 조건이다.
이 책은 결론짓는다. ‘꺼져버려, 자본!’
『사빠띠스따 봉기 십 주년에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백 년 역사를 되짚어본다.
1994년 1월 1일에 멕시코 남부 치아빠스 라깡도나 정글에서 터져 나온 ‘사빠띠스따 봉기’만큼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절실하게 되새기도록 하는 것이 있을까? 봉기 십 주년에 즈음하여 출간되는 이 책은 이제 21세기 초에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문제를, 혁명의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
고전적 혁명 주체로서의 레닌주의적 주체가 붕괴한 상황에서 혁명적 행동을 개시하여 10년이 넘은 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사빠띠스따 사건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며 영감을 제공한다.
“레닌주의적 주체의 위기는 이론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문제이기도 하다. 우선 그것은 역사적 문제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상황과 현재의 ‘힘들의 균형’을 특징짓는 사건들 중의 하나는 ‘레닌주의에 의해 영감을 얻은 혁명’의 패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이론적 문제이다. 왜냐하면 레닌주의와 결부된 주체 개념과 계급투쟁 개념은 이러한 실패의 일부이기 때문이다.”(285~286쪽)
“홀러웨이는 사빠띠스따 경험에서 혁명의 긴급성을, 그러나 더욱 중요하게는, 혁명이 지금까지 사유되고 상상된 고전적 원칙을 깨뜨리면서 그것을 재창안할 필요를 요청하는 열망을 발견한다. 이 작품들의 가장 커다란 기여들 중의 하나는, 그것들이 범주들을, 특히 혁명적 주체의 범주를 확장할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빠띠스따 운동이 적어도 잠재적으로 표현하는 이념을 확장할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285쪽)
20세기를 이끈 레닌과 뜨로쯔끼의 혁명사상을 전면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전 지구를 가로지르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한창 소생하는 가운데 2002년이, 레닌이 1912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 지 백 주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은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지나가 버렸지만, 이 책 『무엇을 할 것인가?』는 레닌의 혁명사상을 전면적이고 비판적으로 재검토하여 혁명정당에 초점을 맞추는 혁명적 기획들을 반성한다.
러시아 혁명의 비극은 단지 지도력의 문제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지도자로부터 권력을 이어 받은 나쁜 지도자에 의해 야기된 비극이 아니다. 뜨로쯔끼가 레닌을 계승했고 그의 지도력이 훌륭하다고 가정할지라도 러시아 혁명을 강제 노동 수용소라는 절망의 지하 감옥에서 구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혁명을 당의 지도력과 등치시키는 것은, 당이 혁명의 이름으로 대중에 대해 가장 엄격한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가능한 모든 방법들과 수단들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의 수단으로서 국가권력이 장악되어야 한다는 레닌주의적 신화에 숨어서 말이다.
“혁명의 이론과 실천은 레닌주의의 유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다르게 할 것인가?’ 등을 의미해야 한다.”(30쪽)
“혁명조직을 당 형태로 보는 레닌주의의 생각과, 혁명의 도구로서 국가권력이 장악되어야 한다는 레닌주의의 국가관은 도전받지 않은 채 남아있다. 혁명이라고 하면 이제까지 레닌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지금 뜨로쯔끼주의라는 온건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 오늘날 혁명정당을 혁명의 조직형식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은, 레닌주의의 도그마 뒤에 숨어서, 스딸린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주의의 ‘왜곡’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레닌주의를 정화하고 그것의 신화를 보존한다.”(28쪽)
“레닌의 이름은 ‘맑스레닌주의’ 이론의 공동 창설자로서 맑스의 이름과 짝을 이루어 왔다. 하지만, 혁명이론의 역할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의 발전에 대한 레닌의 독창적인 이론적 기여는 아주 제한적이었다. 그의 재능은 체르니쉐프스키의 인민주의적 전통에 속해 있는 결연한 혁명가, 탁월한 선전선동가이자 정치적 조직가라는 데 있었다. … 이 논문에서 내가 논증하고 싶은 것은 레닌이 결코 러시아 인민주의의 이론적, 정치적 전통과 단절하지 않았으며, 맑스주의를 인민주의라는 매우 다른 이론적 틀거리와 동화시킴으로써 플레하노프의 기획을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101~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