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의 8년.
우연의 부재 속 그 땅에서 치열하게 적응하고 살아온, 서툰 자아의 기록
건축, 여행, 음식 이야기가 담긴 일상, 무심한 듯 다정하게 더듬어
8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저자 이용재는 이 책 『일상을 지나가다』에서 그 땅에서의 일상을 밀도 높은 글쓰기로 섬세하게 펼쳐 보인다. 업으로 삼았고 이제는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 건축과 낯선 땅에서 위로가 필요할 때 훌쩍 떠나는 여행,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인 음식 만들기 등 그 땅에서의 아주 사소한 일상의 에피소드를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문체로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어색했지만 나름 잘해내고 있다고 여기며 조금씩 책임감마저 느끼며 회사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어제까지만 해도 잘 들어갔던 회사의 이메일 서버에 갑자기 접속을 할 수가 없게 되고 뜻밖의 정리해고를 당하는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책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구조를 띠며 8년간의 일상을 무심한 듯하지만 다정하게 더듬고, 돌아오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는 것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그냥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 뱀이 허물을 스르륵 벗어놓고 자기 것도 아니라는 양 시치미를 데며 슬금슬금 사라지듯. 그러나 나는 그, 막 벗어 아직 따끈따끈할 허물까지 입에 물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마치 이 땅에 몸담은 적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른 호흡을 유지하며 흐르고, 정리해고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도 유유하다. 저자는 은밀한 부분까지도 요란스럽지 않게 드러내고 보는 사람이 도리어 머쓱해질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척 거리를 둔다. 봉사활동, 멘토링, 매주 치르는 의식 같은 장보기, 10분 만에 점심을 해결하고 산책하기, 일요병을 달래기 위한 서점 나들이, 마라톤, 토요일 아침마다 극장에 가 화장실 유머가 가득한 미국 코미디 영화 보기 등 일상을 세세하게 탐색하면서도 글을 관통하는 감정이 하나의 선처럼 이어져 독특한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마치 문학 작품을 읽는 듯, 텍스트에 힘이 담긴 드문 에세이다. 각 꼭지마다 붙어 있는 키워드와 본문을 함께 연결시켜 읽는 재미도 크다. 또한 그가 직접 찍어 온 사진들이 눈길을 끄는데, 가식 없이 담백한 감각이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듯 인상적이다.
익숙한 것들, 익숙하지 않은 것들, 혹은 그 무엇과의 거리Distance
매 순간을 진정으로 살되 마음은 두지 않는 것. 남의 눈이나 세상은 의식하지 않기
저자는 이 책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기만의 세상을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의 이목에 부대껴가며 불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남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디자인하고 살아낸다. 의식할 것이 너무 많고 신경 쓸 것도 차고 넘친 요즘 세상에서 조금은 시니컬한 듯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는 저자의 스타일은 눈에 띄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농밀한 글솜씨와 함께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당기는 부분이 바로, 저자의 세상을 향한 ‘거리 두기’의 시선이다. 세밀한 감정의 켜를 가진 저자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어떤 것, 자신의 눈길이 닿는 모든 것, 자신을 둘러싼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두고 관망한다. 심지어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의 감정에서마저 한 발짝 떨어져 있다.
한양대학교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한 뒤 애틀랜타의 조지아 공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공학도인 저자는, 멀고 낯선 땅으로 옮겨 간 후 “사람이든 관계든 그 무엇이든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숙하게 만들며 살아왔고 한편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익숙했던 것을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고, 그 땅에서의 일상이 녹록치 않았음을 고백한다. 겉만 보아서는 속을 절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모국어처럼 툭툭 튀어나오지 않는 데다가 절대 틀리고 싶지도 않은 영어로 대화를 하는 것 자체부터가 신경이 매우 쓰이는 일이었다는 것.
체력이 달리는 것도 아니었고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아주 딱히 어렵다고 할 만한 상황도 아니기는 했는데, 때로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보면 옷을 다 벗고 무리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착각과 그 착각이 낳는 불안에 시달리곤 했다. 모든 스위치를 내리고 점심을 혼자 먹고 산책을 하며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면 오전의 불안감은 떨어져나가고, 또 나는 오후의 불안감을 새롭게 쌓으면서 남은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감정적인 의지를 허락하지도 않고 손톱만큼의 기대도 품지 못하게 했던 그 땅에서 저자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또한 의도적으로 ‘혼자’를 경험하고 익숙해진다. 예민하게 촉수를 곤두세운 일상에 지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라도 시원히 풀어놓고 가벼워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그가 선택한 것이다.
아주 절박퇇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면 혼자서라도 당연히 할 수 있다는 것을. 그게 무엇이든 정말 혼자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면 같이할 사람이 있고 없는지의 여부는 한없이 사소해져버린다. 하고 싶으면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거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을 붙이려는 건, 사실 그 무엇보다 사람을 더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매 순간을 진정으로 살되 마음은 두지 않는 것. 자기 자신 앞에서만큼은 치열하게 인생의 순간순간을 살지만 남의 눈이나 세상은 의식하지 않기. 책을 관통하는 독특한 분위기는 바로 저자가 자신을, 자신의 일상을 대하고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 즉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닮았다.
이 책 『일상을 지나가다』는 총 5부로 구성되었다. 1부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숙하게에는, 어느 밤의 교통사고, 홧김에 신청한 자원봉사, 실패로 끝난 멘토링 등 기억에 깊게 남은 찰나의 에피소드를 담았다. 2부 거기와 여기, 그리고 우연의 부재에서는 딱히 반갑지는 않지만 살아내야 했던 순간 혹은 지속된 일상-장보기, 마라톤, 토요일의 요리, 일요일의 서점 나들이 등-을 다루었다. 3장 나는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에는 졸업여행, 낮술의 세느강, 여름이면 습관처럼 찾던 바다 등, 깊은 기억을 가진 여행의 순간을 담았다. 4부 품에 안고 있고 싶었던 것들에서는 쿠키에 얽힌 위로의 이야기, 추석 때 타지에서 혼자 만들어 먹는 송편 등 음식과 음식에 얽힌 추억을 담은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5부 익숙했던 것을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에는 그 땅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이삿짐을 싸고 집을 떠나는 과정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