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과 철학, 문화사 전반을 가로지르는 곰브리치 미술사 연구의 결정판
“어떤 예술가도 자신의 모든 관례적 기법을 버리고 ‘그가 보는 대로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박한 지식과 명료하고 정확한 서술로 유명한,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서양미술사』에서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다소 독단적으로 들리는 이 주장을 좀더 명확히 하고 구체화하기 위해 곰브리치는 지각이론 자체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책 『예술과 환영』은 바로 그 재검토의 기록이다.
곰브리치(E. H. Gombrich, 1909-2001)는 우리에게 『서양미술사』로 잘 알려져 있지만, 미술에 관한 그의 입장과 학문적 업적이 집약된 책을 꼽으라면 단연 이 책 『예술과 환영(Art and Illusion)』(1960)을 들 수 있다. 『서양미술사』가 청소년들을 위한 미술교양서로서 간결한 문체와 풍부한 비유로 흥미롭게 씌어진 것이라면, 『예술과 환영』은 ‘회화적 재현의 심리학적 연구’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사적 업적들, 특히 회화적 재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전개되어 왔는지를 철학과 심리학 그리고 문화사 전반을 가로지르며 파헤친 역저라 할 수 있다.
‘회화적 재현’의 심리학적 연구
‘왜 재현에도 역사가 있어야 하는가.’ ‘왜 실물과 닮은 환영을 창조하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왜 자신의 시각에 충실하고자 했던 컨스터블 같은 미술가도 결국 관습과 화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시인해야 했는가.’ 곰브리치는 이러한 질문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이 책은 모두 열한 개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미술가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람자 양쪽을 오가며,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캐리커처와 드로잉, 광고용 포스터, 책의 표지화 등 다양한 시각 이미지를 예로 들어 가며, 그리고 특히 최근의 심리학적 연구 성과를 동원하여 재현의 역사를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찰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미술가들이 사용하는 관습적 표현법, 즉 보는 방법 전부를 통괄하는 ‘도식과 수정(schema and correction)’, 그리고 이미지를 보고 그 재현이 정확하다고 믿는 관람자들이 익숙한 관습에 기대어 그러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정신적 반응을 뜻하는 ‘정신적 반응기제(mental set)’라는 개념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개념을 토대로, 심미적 목적을 갖는 미술의 탄생을 불러 온 ‘그리스 혁명’, 그리스 혁명 이래 정확한 재현을 목적으로 했던 미술가들이 고안해낸 가장 주된 방편인 ‘원근법’, 예술을 과학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도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실험을 계속 전개해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준 ‘컨스터블’의 등장, 이렇게 재현의 역사에서 중요한 세 단계를 집중적으로 검토해 나간다. 이는 서양미술사에서 일관된 흐름으로 보이는 재현의 역사를 좀더 깊이 파고든 것인데, 그 결과 이집트와 중세 미술가들의 미술은 그들이 단지 미숙했기 때문이 아니라 재현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었음을 상기시키고, ‘눈으로 본 것을 그린다’는 생각은 르네상스 시기에 들어서야 싹트기 시작해 과학적 원근법, 스푸마토 등의 새로운 기법을 통해 전개되어 나가게 된 것임을 알게 한다.
무엇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미술사’를 만들어냈나
곰브리치는 미술가가 객관적으로 그려냈다고 생각한 재현 역시 그들이 알고 있는 재현적 관습과 기법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관람자는 자신의 시각적 기대를 통해 그 재현을 인식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로써 미술에서 재현의 역사란 이전 시대의 재현적 고안들이 쌓여서 구성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재현이 각 시대별 미술이 담당하던 상이한 목적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밝힘으로써, 미술의 역사가 단순한 진보 단계를 밟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시대의 양식적 관습을 통해 암묵적으로 동의한 결과물, 즉 ‘도식과 수정’을 통한 실험과 시행착오의 과정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술비평가 케네스 클라크는 이 책 『예술과 환영』에 대해 “이제껏 내가 본 미술비평 서적 중 가장 뛰어난 책”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책은 화가들의 계보와 양식 전개를 통해 보여주었던 표면적인 ‘미술사’ 기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각적 이미지의 생산과 수용 과정의 역사적 전개와 그 원동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사의 이면을 깊이있게 들여다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저자 곰브리치는 재현의 역사를 검토하면서 그것을 창조하는 미술가 외에 그 이미지를 보고 자신의 시각적 기대감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재구성하는 관람자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관람자의 몫이 더욱 확대된 오늘날의 미술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956년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의 ‘미술에 관한 멜런 강좌’에서 행한 ‘가시적 세계와 미술의 언어’라는 강연이 계기가 되어 씌어진 이 책은, 1960년 초판 발행되어 과학과 인문학, 과학과 미술 사이의 접점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훌륭한 고전으로 꾸준히 읽혀 왔는데, 저자 곰브리치는 세상을 떠나기 전 해인 2000년 제6판을 펴내며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이미지와 기호에 관한 십여 페이지에 달하는 서문을 새롭게 추가하는 등 이 책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재현의 문제는 미술사에서 근본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 책은 예술을 이해하는 데 흥미가 있는 누구에게라도 결정적인 책이 될 것이다. 전문적인 미술사 연구자들은 물론, 연대기적으로 그리고 사실과 흥미 위주의 양식(樣式)의 역사로 서술되고 있는 ‘서양미술사’류의 책을 이미 섭렵한 일반 독자들이라면, 미술사 이면의 좀더 근본적인 문제의 세계인 이 책 『예술과 환영』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