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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0년 01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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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75쪽 | 358g | 170*236*20mm |
ISBN13 | 9788936471835 |
ISBN10 | 893647183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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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완벽하게 남루한 하루"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조금 더 노력하세요.’라는 노래방의 점수를 인정할 수 없는 게 현실인 상황이 있다. 여기서 어떻게 더 노력을 하라는 말인가, 미치도록 달려가고 싶어도 늘 그 자리인 현실 앞에서 무너지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어쩌라는 말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문제는 우리의 삶에서 그런 때가 너무 자주 있다는 것이다. 가난이 가난을 낳고, 대출 이자가 또 이자를 낳는 상황에서 더 나아지는 일 없이 이대로 흘러가기만 해도 다행인 삶에 감사해야할 지경인 지독한 현실. 그 안에 이 여자들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고 낭만이 아닌 현실 그 자체를 눈 뜨고 보기 싫은 이 여자들의 삶을 어떻게 지켜봐야 할 것인가.
이 책 속의 등장하는 여자들은 다른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데 앞으로 나가는 일이 그렇게 힘들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삶의 정석은 노력하면, 열심히 하면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닌 앞으로 나아가는 게 정상인데 이 여자들에게 주어지는 삶의 공식은 제자리걸음이거나 거꾸로 가는 인생인 것이다. 그런데 이 짧은 단편만화들 속에서 내가 경험해야 했던 것은 ‘그녀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들과 함께 하는 나(혹은 우리)’의 이야기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 속에 무수히도 많이 포함된 ‘나’를 발견할 때마다 겪어야 했던 아픔들의 이야기였다.
오래된 연인은 섹스파트너일 뿐 연애의 감정을 느낄만한 대상이 아닌 게 되었고(희정), 대학 진학이 아닌 백화점 근무를 선택한 삶은 아버지와 단둘이 살 방 한 칸 마련이 어려운 인생이 되었다(윤정). 죽음의 순간에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간을 만난 독거노인(김발근례 할머니)의 인생은 또 어떤가. 행복해야 할 결혼생활이 자신을 식모로 아는 시어머니와 우유부단한 남편으로 인해 스스로를 가정부라 여기게 하는 구질구질한 여자(지은), 겉만 좋은 프리랜서이고 당장의 먹고 살 일이 막막한 일러스트레이터(수현)의 삶은 그저 우울할 뿐이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없었다. 생면부지의 남자와 몸을 섞어도, 아들에게 부담주기 싫어 홀로 죽어가던 시간도, 사랑해서 결혼했다 생각했던 순간들도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영원히 회색빛일 것만 같은 현재와 미래 말고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기대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시간 속에 그녀들이 있었다.
만화가 채민이 그런 그녀들의 이야기를, 10편의 시와 함께 들려주고 있었다. 시를 통해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은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고, 그 시와 맞물려 들려왔던 그녀들의 이야기는 구슬펐다. 나 역시도 익숙하게 보고 있는 생생한 현실감에 녹아들어 그녀들의 그러한 삶과 이야기를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에 눈물을 떨어뜨리게 된다. 그런 이야기들이 시와 함께 할 때, 시를 대하면서 느꼈던 운치나 낭만 따위는 감히 접근할 수 없었다. 그녀들의 삶을 옭아매는 것들, 조금의 자유를 원했을 뿐인데 그조차 꿈꿀 수 없게 만드는 것들, 하루하루가 너무 무거워서 다 떨어진 운동화의 뒤축같이 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 삶은 참 고되다. 좋은 가죽으로 만든 새 구두를 신어야만 발이 편한 것일 텐데, 그녀들은 새 구두는커녕 오래 전부터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질질 끌고 다닌 것만 같다. 발에 잘 맞는 구두 하나 사서 신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것처럼 보여줬다. 시와 그녀들의 지독한 삶을 통해.
소개 글을 처음 봤을 때는 시를 읽고 만화와 접목시켰다는 게 어떻게 들려올지 많이 궁금했는데, 다 읽고 나니 알겠더라. 이 책을 통해 들려왔던 그녀들의 이야기 자체가, 시의 한 구절처럼 만화의 한 컷을 장식한 그 구절들이 내내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기형도, 최영미, 신현림, 황지우 등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시인들의 시 구절들이 그녀들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에 젖어 있었다.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가가 그리는 만화라는 표현으로 새롭게 구성한 방식은 독자인 나에게도 의미 있게 다가왔다. 미처 다 알지 못했던 시를 만나게 해주었고, 구질구질한 현실로만 보여서 피해고만 싶었던 이야기를 듣게 해주었다. 시를, 시가 아닌 그 이상의 감정과 느낌으로 듣게 만들고야 말았다. ‘시’라는 단어에서 들려오던 그 낭만 같은 것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현실 속에 함께 하는 우리의 일상처럼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담담한 듯 보이지만 삶의 매 순간은 절박하게 그려지고 있었고, 자신의 삶을 그리고자 애썼던 그녀들의 삶은 출구가 없이 꽉 막힌 공간처럼 답답했다. 그래서 더욱 ‘시’라는 표현과 괴리감을 느끼면서도 너무 닮은 느낌을 동시에 받았던 것 같다. 그녀들의 삶과 ‘시’라는 단어가 주는 낭만은 닮지 않았지만, 작가가 들려주었던 ‘시’가 그녀들의 삶과 너무 닮아있어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소매 끝이 헤져도 그냥 입어야만 하는 티셔츠나, 구멍 난 양말이라도 신어야만 하는, 작아진 신발이라도 발에 꿰어 끌고 나가야만 하는 것들이 그녀들의 삶이었던 것이다. 도착한 지하철역에서 내려야만 하는 문이 아닌 반대쪽으로 나가기를 숨죽여 늘 갈구하면서도 그쪽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그녀들의 지독한 일상을 들려주던 역할을 한 작가는 서른 살에 만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속된말로 밥벌이하기 어려운 직업을 서른이란 나이에 시작한 것을 두고 누군가는 무모한 도전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존에 만화를 그렸던 일을 했더라도 다른 직업으로의 노선변경을 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를 상황인데, 오히려 반대의 시작을 한 작가는 무엇을 꿈꾸고 있었을까. 보이지 않는 한줄기라도 붙잡고 싶은 희망이었을까?
희망을 말하려 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희망적인 것인지를 찾을 수 없다고 작가는 말했다. 그래서 스스로가 알지 못하는 희망가는 부를 수 없었다고 했다. 정직하게 보였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어떻게 불러 줄 것인지 이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헛된 기대감을 품게 만들지 않았다. 보인 스스로가 지금 이렇게 만화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죽어버리지 않고 살아내고 있는 게 희망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작가의 이 말을 듣고 있는 나는 또 어떤 의미의 희망을 부여만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만 할까, 고민하게 만든다. 지금 이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련하게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우산 없이 비오는 거리를 걸을 때, 어김없이 내리는 비를 맞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빗물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젖어간다. 이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누군가에게 뺨을 맞기도 하고, 어딘가에서 뛰어내리기도 한다. 익숙하지만 낯선 삶 속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그게 지금의 우리의 현실이고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이 구슬픈 빗소리 같다. ‘누구’가 아닌 ‘누구나’의 삶일지 모를 이야기에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아홉 편의 시를 다시 만나고 싶어질 때...
가는 비 온다 - 기형도 / 영원의 한쪽 - 박정만 / 그 거리에선 어떤 구두도 발에 맞지 않았다 - 허연 /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 오규원 / 지하철에서2 - 최영미 / 삼십 세 - 최승자 / 시제10호 나비 - 이상 /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日記) - 황지우 / 세상을 빠져나가기에 가장 행복한 때 - 신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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