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감각을 끌어 모아 빚은 삶과 죽음의 우주적 섭리
우연을, 점 찍다
1965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지금까지 꾸준한 시작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 홍신선이 7년 만에 새 시집 『우연을 점 찍다』(문학과지성사, 2009)를 발간했다. 총 3부 61편의 시들로 꾸려진 이번 시집은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이다. 1991년부터 발표한 「마음經」연작의 대미(3부)가 포함되어 있는 이번 시집은 그간 시인이 걸어온 시적 행보를 일단락한다. 다른 한편, 이번 시집은 40여 년간의 시들을 망라한 『홍신선 시전집』(산맥, 2004) 발간 이후 첫 시집이기도 하다. 2008년, 오랜 세월 걸어온 교육자의 길에서 벗어난 시인이 삶 속 죽음의 허무를 지나 발견한 시에 대한 ‘초심’으로 쓴 ‘새로운’ 시들은, ‘지금까지의 시’들과 차이를 이룬다. 새로운 시 세계를 열어젖히는 시집 『우연을 점 찍다』는, 그러므로 “홍신선이 자신의 모든 경험과 사유와 감각을 끌어모아 빚은/빚을 ‘홍신선 시’의” 새로운 “서시(序詩)에 해당하는 시집”이라 할 수 있다.
1996년에 발표한 시집 『황사바람 속에서』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김춘식은 홍신선의 시 안에서의 “죽음은 운명이 아니라 하나의 ‘의지’이자 ‘선택’이고 ‘지향점’이며” 그러므로 “시인은 ‘죽음’을 욕망의 틀로부터 해방되는 한 과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시인은 자서를 통해 “싱싱한 탄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자신의 행보에 늙음이 급제동을 밟는다”고 말하면서 그 끝에 “이제 생도 시간 앞에 고개 숙이는 법을 배운다”고 말했다. 나와 다른 개체인 죽음을 안기 위한 시인의 이러한 노력은 “목숨 밖의 깨달음으로까지 연결”되며, 죽음을 통해 삶을 성찰하고 시로 재탄생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홍신선의 노력은 죽음을 당연시하여 받아들이고 정면으로 바라봄으로써 삶/죽음을 아우르는 ‘생의 전체’를 꿰뚫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죽음 껴안기’는 그 이후 계속된 「마음經」 연작 등의 작업을 통해, 13년이라는 더딘 시간을 견디며, 섬세하게 다듬어져 일곱번째 시집 『우연을 점 찍다』에 이른다.
다시, 시의 광야에서
시집 『우연을 점 찍다』의 첫 시인 「나의 시」는 다소 노골적인 그 제목 그대로 이번 시집을 묶는 홍신선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준다. 마치 응축되어 있는 가스처럼 터지기 직전의 ‘시’는 그 어디를 향한,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목소리가 아닌, 견디고 견디다 “필생의 결단처럼 양손 가볍게 놓아 버”리고 “수백 수십 길 곧추 떨어”질 듯 위태롭다가, 기어이 “대명한 하늘땅 사이/먹먹한 목청 큰 사자후 한 방”으로 터져 나온다. 이렇게 터져 나올 시에 대한 각오이자 일종의 예고는 지금의 것이 아닌 미래의 것이며 이 시집을 다 읽고 났을 때 알게 되는, 직시하는 자에게 돌아올 “빛나는 포상”이다.
홍신선에게 “빛나는 포상”이 될 사자후의 시는 오랫동안 몸 담았던 교직 생활(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로부터의 은퇴에서 기인한다. 시인인 그가 다시 시인으로 돌아온 이 기묘하고, 일견 모순된 정황은 그의 시를 다시 처음으로, 하지만 아주 처음과는 같지 않은 자리로 되돌아가게 한다. 시인 본인이 직접 뒤표지 글에 밝힌 것과 같이 다시 광야로 돌아간 초인은 이제 목청을 놓아 ‘사자후’를 부릴 것이다. 그 ‘사자후’는 이전의 것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시’는 과거형도 현재형도 아닌 미래형이며 다짐 섞인 명령형이다. 이 시들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며, 첫 시가 되는 「나의 시」 이후로부터 찾아오는 모든 시라고 할 수 있다.
세속성에 대한 통찰
『우연을 점 찍다』의 60여 편의 시들은 모두 “세속성에 대한 통찰”에서 시작된다. 벚꽃이 떨어지는 벚나무 아래서, 11월 설악산을 올려다보며 쓰는 것뿐 아니라, 퇴직을 하여 자신의 빈 자리애서, 재개발을 위해 허문 성인용품점에서, 연탄불을 갈면서 찾아내는 평범하고 의외인 순간에 시는 터져 나온다. 어쩌면 홍신선만이 구축할 수 있는 이러한 세계는 속/성, 삶/죽음, 시/비(非)시 사이에 위치하며, 한몸이라 할 수 있는 이 ‘차이’를 본질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시화(詩化)한다.
이러한 홍신선만의 ‘시화’의 한 축은 불교적 언어관의 적극적 차용이다. 이는 단순한 불교적 세계관이 아니다. 홍신선은 이를 시적 장치로 이용함으로써 일상을 시로 옮겨온다. 삶과 죽음이라는 원환적 세계관은 불교의 세계관과 매우 닮았다. 특히, 일상에서 찾아내는 시는 불교에서의 선(禪)과 흡사하다. 그러나 홍신선의 삶에서 바라보는 죽음은 무심으로부터의 종착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여 일상에 녹여버린다. ‘초인’의 목적은 시이지, 깨달음이나 깨우침이 아니다. 이 둘은 시와 닮았으나, 다르다. 특히 홍신선의 오랜 화두인 삶과 죽음에 대퇇 천착은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겨누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여기의 생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김수이는 『우연을 점 찍다』를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시인의 삶에 대한 사랑과 회한, 깨달음과 각오의 말들로 가득 차 있”는 시집이라고 평하면서 시인의 “죽음 자체에 있지 않으며, 죽음이 삶에 간섭하는 방식과 그것을 수용하는 존재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에 주목한다. 특히, “기필코 오고야 말 완전한 죽음을” “시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맞이하는” 홍신선의 시적 태도는 “진정한 ‘나의 시’를 완성하는 시인에게만 허락된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삶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삶을 지고 죽음 안으로 들어가 죽음을 살아버리는 시인에게만 허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음經
1991년부터 발표되어온 「마음經」의 대단원도 이번 시집을 주목하게 만든다. 연작시는 각 개별의 시들 묶어 한 편의 시로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 20여 년간 한 제목으로 연작시를 쓴다는 것은 보통 역량의 일이 아니다. 마음의 풍경이면서 일상의 풍경인 「마음經」은 그러므로, 홍신선 시 세계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마음經」을 “몸이 경험하는 숱한 유동과 이합집산, 생명 충전과 죽음의 과정을 대자연(우주)의 경전을 베끼는 “사경(寫經)”의 행위”로 규정짓는 평론가 김수이는 “대자연의 경전은 실물과 언어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지만, “없는 경전을 베끼는 “사경”이란” 무상한 일인 동시에 “한존재가 그의 삶의 일부이자 외부를 이루고 있는 ‘사경(死境)’을 끊임없이 살아내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처럼 「마음經」은 시인 본연의 삶/죽음의 풍경이며 그것은 대자연의 모습을 닮은/같은 시의 몸인 것이다.
시작이면서 끝인 시집 『우연을 점 찍다』는 경계의 시집이다. 그 경계에는 늘 ‘시적 찰라’가 존재하고, 그 ‘찰라’에서 시인은 어디에서든 시를 발견해낸다. 그러나 그 찰나가 놀라운 현상이 되고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사자후가 되는 것은 오직 진정한 ‘나의 시’를 완성하는 ‘시집’에게만 허락되는 일이다. 홍신선의 시집 『우연을 점 찍다』가 단순히 시인의 약력에 더해지는 한 권이 아닌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