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구성, 프로의 문체, 어른의 소설
심사 위원 만장일치! 2008년 제139회 나오키상 수상작
문장이라는 피로 문학의 몸을 다시 숨쉬게 만들었다. 질투가 날 정도다.
_하야시 마리코(나오키상 심사위원)
2008년 제139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이노우에 아레노는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다. 경력에 비해 발표된 작품 수가 많지 않기도 하거니와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된 작품도 단편집 『어쩔 수 없는 물』과 『일곱 빛깔 사랑』에 실린 단편 「돌아올 수 없는 고양이」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녀의 작품을 접해본 사람들은 이번 수상 소식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와다 료의 『노보우의 성』, 야마모토 겐이치의 『천냥 신부』와 함께 결선까지 진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수상자로 선정된 그녀의 작품에 대한 심사위원단의 평가는 “인물의 장점이 잘 드러나 있고 탄탄한 문장력과 치밀한 구성으로 ‘문학의 기본’이 모두 갖춰져 있다.”는 것. 어찌 보면 진부하리만큼 기본적인, 이러한 소설의 조건들을 그녀만큼 충실히 지켜낸 작가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이노우에 아레노의 독자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노우에 아레노는 1989년 에쿠니 가오리와 제1회 페미나상을 공동 수상하며 등단한 경력 20년차 중견 작가이다. 하지만 20년 지기 친구인 이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사뭇 다르다. 에쿠니 가오리가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서의 길을 올곧이 걸어온 반면, 이노우에 아레노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소설을 쓰지 못했다. 결혼 생활과, ‘아버지라면 이런 소설은 쓰지 않을 텐데’ 하는 고민으로 거의 10년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그녀의 아버지는 전후 좌익 문학의 기수라고 불리는 소설가 이노우에 미쓰하루로, 젊은 시절 아레노는 아버지의 글을 옮겨 적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작가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응축되어 온, 작가로서의 자존심과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그녀가 다시 펜을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2000년도에 들어서면서 이노우에 아레노는 2003년 『준이치』로 제11회 시마세 연애 문학상을 수상, 2004년과 2005년 『다리야 산장』과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아내』로 연이어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 후보에 오르는 등 빠른 속도로 일본 문단에서 그 저력을 인정받아 나갔다. 그리고 2007년 『베이컨』으로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고, 다음해인 2008년 『채굴장으로』로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된다. 『채굴장으로』는 근래의 화제작들과는 사뭇 성격을 달리하는 정통 연애 소설로, ‘아버지라면 이런 치밀한 연애 소설은 못 쓰겠지!’ 하고 야심만만하게 쓴 작품이 아버지도 생전에 받아본 적 없는 나오키상을 거머쥐게 한 것이다. 작품의 배경이 된 곳도 아버지의 고향 섬이라고 하니 이노우에 아레노 자신에게는 물론 일본 문학계에게도 여러 모로 기념비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조미료를 넣지 않은 음식처럼, 말초적인 자극에 길든 감각을 정화시켜주는
안타깝도록 섬세한 연애 소설.
『채굴장으로』는 지도 남쪽에 있는 외딴섬을 무대로 한 연애 소설이다. 그것도 남편이 있으면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유부녀가 주인공인 연애 소설. 이쯤 되면 어느 정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통속적인 사건이 있을 법한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보다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다른 남자에게 자꾸 시선이 가고 마음이 끌리는 것을 한없이 억제하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소설의 주를 이룬다. 물론 이렇게 소극적인 주인공과는 대조적으로 유부남과 연애하는 걸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는 동료 교사 쓰키에도 있고, 아흔이 넘은 나이에 음몽(淫夢)을 꾸며 신음하는 시즈카 할머니도 있긴 하지만, 그녀들의 이야기조차 선정적이라기보다는 애틋하고 어딘지 마음을 울리는 구석이 있다.
책의 제목에 쓰인 ‘채굴장(切羽)’은 본래 갱도의 맨 끝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이상 앞으로는 나아갈 수 없는 장소를 뜻한다. 그러니 ‘채굴장으로’라는 제목을 액면 그대로만 해석하자면 뭔가 ‘막장’으로 치닫는 드라마를 예고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일본어 切羽에는 (한 자씩 풀어보면) ‘날개를 자르다’라는 의미 또한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끌림과 그것을 접는 마음의 애절함을 동시에 담고 있는 제목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지에서 이 작품이 출간되었을 때, 자극적인 소재를 내세우지 않고 연애 소설의 백미를 보여준다는 평가와 함께 가장 많이 이야기되었던 것이 담담한 작품 분위기와는 별개로 ‘에로틱하고 관능적인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사랑은, 그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로 충분히 관능적이다.” 라고 답한 바 있는데, 이것이 제목이 시사하는 바를 가장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결말이 그 사랑의 치열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비난하는 사랑에 몸을 던지던 혼자 가슴에 담아두던, 사랑의 그 절절한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결말이 어떻게 되던 간에 그 순간만은 언제나 절박한 채굴장에 선 마음, 그것이 이노우에 아레노가 말하는 모든 사랑의 현장이고, 그것을 최대한 치밀하고 섬세하게 그려내고자 했던 노력이 비로소 결실을 맺은 작품이 바로 이 『채굴장으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노우에 아레노의 소설을 읽으면 이노우에 아레노 병에 걸린다.
_에쿠니 가오리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에게는 『채굴장으로』 속 사랑 이야기가 조미료 안 들어간 음식처럼 밍밍하고 싱거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답답하리만치 은근하고 애가 닳도록 애틋한 그들의 사랑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누군가를 좋아할 때의 그 가슴 저림이 저 먼 곳으로부터 되돌아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책을 덮은 후에도 줄곧 멍해지는 감각, 주인공들의 감정에 공명하여 가슴에 꾹꾹 묻어 두었던 추억들을 떠올리게 되는 열병, 그것이 바로 에쿠니 가오리가 말하는 ‘이노우에 아레노 병’이 아닐까. 파격적인 소재나 숨 가쁘게 뒤를 쫒게 만드는 파국의 결말 없이도 독자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묘한 사랑 이야기, 그녀의 소설에는 분명, 동료 작가 에쿠니 가오리가 평한 대로 ‘이끌리고 취해버리는 매혹적인’ 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