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암호의 서, 《크립토노미콘》
사이버펑크 장르의 문을 연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 이후 최고의 작가라 평가받는 닐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의 《크립토노미콘Cryptonomicon》(전4권)이 책세상 메피스토 시리즈 6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스노 크래쉬Snow Crash》로 국내에 첫선을 보였던 스티븐슨은 이 책을 통해 멀티미디어, 인터넷, 컴퓨터, 광섬유, 가상현실 등 현대를 규정하는 핵심 키워드를 제시한 바 있고, 현재 인터넷상에서 널리 호응을 얻고 있는 ‘아바타’라는 개념도 만들어냈다. 《스노 크래쉬》 출간 이후 컬트 집단이라 해도 좋을 만큼 열광적인 독자들을 거느리기 시작한 그는 인터넷과 과학적 지식에 바탕을 둔 예리한 통찰력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 사회까지 아우르는 야심찬 작품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최신작 《크립토노미콘》 또한 과학소설의 진수를 보여줌과 동시에 장르를 넘나드는 방대한 스케일과 깊이로 첨단 기술의 미래상에 대한 비전을 펼쳐 보인다.
‘암호의 서(書)’라는 뜻을 담고 있는 《크립토노미콘》은 정보의 흐름이 역사를 형성하는 방식에 대한 소설적 탐구이다. 20세기에는 무기 혹은 과학기술이 인간 세계를 지배했다면, 21세기 나아가 미래 세계는 정보가 지배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수, 암호, 사이클 등 얽히고 설킨 관계망을 통해 ‘황금’을 찾아가는 물욕적 인간 세계를 파헤치며 미래 사회에 대한 메타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2. 수수께끼, 에니그마, 암호
1999년에 출간된 《크립토노미콘》은 출간되기도 전에 인터넷 서점 아마존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드는 진기록을 세웠고, 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에서도 출간되어 열렬한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암호 해독에 관한 다차원적이고 계시적 명상으로 가득 찬 이 책을 이제는 우리말로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내년에는 닐 스티븐슨의 이전 작품 《황도―생태 스릴러Zodiac : The Eco-Thriller》와 《다이아몬드 시대Diamond Age》가 국내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라 기대를 모은다. 원서 918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 《크립토노미콘》은 1권 ‘에니그마 코드’, 2권‘암호의 서’, 3권‘크리스마스’, 4권‘귀환’이라는 부제 아래 전4권으로 분권하여 선보인다.
책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암호의 서라 불러도 무방한 《크립토노미콘》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해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황금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 또 데이터 항구를 구축해 황금을 벌어들이려는 사람들의 얘기를 다차원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 복잡다단한 얘기를 통해 닐 스티븐슨은 다음과 같은 전망을 내놓는다. 이제 황금은 실제 은행이 아니라 가상 세계의 정보 은행을 통해 집결될 것이며, 그때의 황금은 독점 형태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공유물이 될 것이라는 점. 무력 충돌로 점철된 인간 역사의 폐허를 통과해온 자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이 절실하게 가져보는 마지막 보루처럼 인류 모두를 위한 데이터 항구의 전초 기지가 펼쳐지는 모습을 긴장감 속에서 지켜볼 수 있다.
3. 2차 세계대전과 현대 기술세계를 오가는 흥미진진한 암호 풀기 게임
과거와 현대, 미국과 영국과 동남아시아 등 시공간을 숨가쁘게 넘나들며 사건의 전모를 드러내는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당시로 돌아가 출발한다. 전쟁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는 1942년, 수학 천재이자 미 해군 대령인 워터하우스가 2702 함대로 파견된다. 이 함대의 존재는 처칠이나 루스벨트 등 소수의 사람만이 알 정도로 극비에 부쳐지고 있다. 보비 샤프토가 이끄는 2702 함대는 연합군의 정보기관이 나치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치로 하여금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는 은밀한 임무를 부여받고, 워터하우스와 그의 독일 출신 동료가 적대 상황 아래 암호 게임을 벌이면서 전쟁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한편 현대 시점에서는 워터하우스의 손자이자 암호 해커인 랜디가 해독된 정보를 제재와 감시 없이 저장하고 교환할 수 있는‘데이터 항구’를 구축하려고 필리핀으로 날아간다. 여러 국가 정부들의 견제와 방해 속에서도 데이터 항구를 세우려는 랜디는 샤프토의 손녀인 에이미와 힘을 합쳐 나치의 침몰된 잠수함을 건져내려 한다. 이 잠수함은 독일과 일본 사이에 오갔던 전쟁금을 실었던 잠수함으로서 데이터 항구를 구축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 그러나 작업을 해나감에 따라 2702 함대의 거대한 음모가 드러나고 ‘아레수사’라 불리는 나치의 풀리지 않는 암호를 발견하게 된다. 이 암호는 상상을 불허하는 부와 개인의 미래, 그리고 우주적인 전제주의의 재탄생으로 향하는 매우 위험한 길을 내포하고 있는데…….
4. 《크립토노미콘》을 읽는 특별한 재미
암호와 정보, 인간 역사에 관한 장대한 이야기 《크립토노미콘》은 암호 해독가, 군인, 해커 등 다양한 인물군이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등장인물들의 지식을 기반으로 한 아이러니와 풍자, 편집증적 태도들은 끔찍한 순간, 감동적인 순간, 우스꽝스러운 순간 모두를 덤덤하고 경쾌하게 받아들이도록 해준다. 그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초연한 말투와 행동을 보이는 그들에게는 일종의 쓴웃음, 비틀린 미소 등이 감춰져 있는데, 이는 이 장대한 소설에 인간적 흥취를 불어넣는다.
한편 작가가 묘사하는 정밀하고 화려한 기술세계는 전문가들이나 마니아들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또한 유닉스 체계, 에니그마 바퀴 등으로 세상을 비유하고, 소설 속 콰글름인들의 일정한 규칙이 없는 언어를 보여줌으로써 의사소통의 한계를 보여주면서‘암호crypto’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작가의 특장도 간과할 수 없다. 그에게 암호란“의사소통을 차단하는 벽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정형화된 해커에서 벗어나 진정 해커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면도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5. 해커들의 헤밍웨이, 닐 스티븐슨
해커들의 헤밍웨이라 불리는 닐 스티븐슨은 컴퓨터광들을 애독자로 거느리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어느 간부는 자사에서 그의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까지 말했다. 《크립토노미콘》은 닐 스티븐슨의 박학다식함과 지적 사유를 엿볼 수 있는 대작이다. 이 책을 통해 그는 현대 세계에서 정보를 바탕으로 한 가상현실은 무력 충돌을 수반했던 과거와는 달리 일종의 긍정적 출구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암호와 컴퓨터로 대표되는 테크놀로지의 힘을 믿고, 그 힘으로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인류의 평등은 가상현실에서나 실현 가능하다는 일종의 비극적 인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현대는 가상현실 건설에 몰두하고 있다. 프라이버시가 보호받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인류가 찾는 공동의 황금이 놓여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더 강한 무력을 갖추고 있는가로 권력이 재편되었던 세계는 이제 누가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가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시기에 굵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닐 스티븐슨의 소설적 비판과 전망은 단순히 장르 문학에만 머물지 않는다. 소설을 통해 현대 사회의 메타 버전을 구축하고 또 미래 사회를 건설해나가는 그의 고도의 작업은 현실과 물질에 대한 매우 탄탄한 역사적 인식을 기반으로 전개되고 있어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