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요약
1949년 5월 18일 국회가 열리기 직전 이문원을 비롯한 국회의원 3명이 구속되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에는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7명이 구속되고, 이어 8월에 5명의 국회의원이 더 구속되었다. 구속된 국회의원은 모두 국회 내 소장파였다. 이들의 혐의는 남로당 지령으로 국회 안에 공산당 세포(프락치)를 만들고 외군 철수 등 대한민국 전복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구속된 국회의원의 수사는 헌병대가 맡은 뒤 검찰에 이첩되었는데, 오제도 검사는 국회의원 13명을 포함해 모두 15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기소했다. 1950년 3월 14일 주심재판관인 사광욱 판사는 국회의원 전원에게 최고 10년에서 최하 3년까지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피고인들이 불복해 항소심이 계류된 가운데 한국전쟁이 터졌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이들 중 서용길 의원 한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9·28 서울 수복 전에 자의든 타의든 북으로 사라졌고, 이들은 남로당 프락치로 치부된 채 이 사건은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미국의 선구적인 한국정치 전문가 그레고리 헨더슨은 이 사건이야말로 신생 대한민국에서 갓 태어난 의회주의와 민주주의 실험이 실패해 나락으로 떨어진 분수령으로 보았다. 또한 헨더슨은 이 사건을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국회에 대한 테러요 반대당에 대한 쿠데타라고 규정하고, 여기에 미국 대한정책의 ‘무대응(inaction)’, 또는 ‘우유부단(indecision)’이 야합했다고 비판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 사회적 담론에서 거의 잊힌 1949년 5월의 국회프락치사건을 주제로 이 사건이 한국의 의회주의와 정치 발전에 갖는 의미를 파헤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뒤 1년도 못 되어 일어난 이 사건은 지금도 의문에 싸여 있다.
기획 의도 및 출간 의의
그레고리 헨더슨은 하버드대학 재학 중이던 당시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참전했으며 그후 미 국무부 외교관으로 처음엔 일본에서, 다음에는 한국에서 근무했다. 한국을 깊이 사랑한 그는 이후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가치를 호소해왔다. 그가 쓴 「회오리의 한국 정치」(1968, 번역서명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는 한국 정치에 관한 고전이 되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주목한 사건이 바로 국회프락치사건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정기 교수는 헨더슨의 관점에서 국회프락치사건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재발견’하고, 그의 정치적 담론의 틀에서 이 사건의 의미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헨더슨이 1988년 10월 불의의 사고로 죽기 직전까지 저자가 그와의 교유관계를 통해 국회프락치사건에 관해 연구하던 모든 자료를 넘겨받아 이 연구를 완성시킨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저자는 “지난 3년간 헨더슨이 넘겨준 자료를 바탕으로 하버드-옌칭 도서관을 비롯해 국내외 자료원을 탐방해 이 책을 완성했다. 올해가 마침 헨더슨 타계 20주년이어서 이를 계기로 그가 한국에 천착한 행적과 그의 정치이론을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헨더슨은 「회오리의 한국정치」가 나온 지 20년이 지난 1988년 전면 수정한 개정판을 쓰고 그 원고를 김정기 교수에게 넘겼다. 그 뒤 10월 16일 보스턴 외곽 웨스트 메드포드 자택 지붕에 올라가 가지치기를 하다 떨어져 향년 66세에 죽음을 맞는다. 그는 수정판 원고에서 “한국인들은 모든 권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다. 이런 조건이 지속되는 한 한국 정치는 타협의 부재에 허덕일 것이다. 그 독소는 한국인들의 정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승자 독식의 중앙 집중(winner-take-all centralization)’에 있는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그 뒤 한국 정치에 이 승자 독식의 중앙집중현상이 완화했다는 증좌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의 정치 담론은 여전히 약발이 다하지 않은 처방전인 셈이다(2권 263~370쪽).
내용 소개
이 책은 국회프락치사건을 주제로 하여 1권과 2권, 그리고 별책 국회프락치사건 재판 기록(영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서는 제2의 국회프락치사건으로서의 부산 정치파동을 먼저 다루고, 제2권은 원래의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을 다룬다는 시계열상 역순을 밟고 있다. 그것은 지은이가 임의로 구성한 배열로서 독자들이 신생 대한민국의 의회주의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 낭떠러지를 먼저 보게 한 다음, 그 비명을 되새기면서 낭떠러지의 입구에 이르게 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국회프락치사건이라는 단일 사례를 통해 우리나라의 회오리정치를 분석하고, 그 병리를 진단하면서 중간 지대의 정치합작을 정치담론적 처방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제1권은 제2의 국회프락치사건이라고 규정한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을 집중조명하면서 헨더슨이 함께한 한국 현대사의 여정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1949~1950년 국회프락치사건이 포함되지만 이는 제2권의 몫으로 남겨두고 주로 그가 부산에서 만난 한국전쟁, 서울의 비극, 특히 1958년 미국대사관 문정관으로 복귀한 뒤 그가 겪은(혹은 싸운) ‘회오리’ 정치의 사건을 다룬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부분은 헨더슨의 지성사적인 평전(評傳)을 겸했다고 보아도 된다.
이 평전에는 헨더슨이 한가한 서생으로서가 아니라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이승만의 원시 독재, 박정희의 유신 독재, 전두환의 신군부 독재와 싸운 기록이 담겨 있다. 구체적으로 그가 ‘회오리정치의 덫’에 걸린 채 박정희 정권에 의해 기피인물이 되어 축출된 배경, 도자기 사건에 휘말린 이야기, 이영희 사건에 휘말린 에피소드, 그가 준열하게 규탄한 박정희 쿠데타 그룹의 공산주의전력보고서, 프레이저 인권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해 박정희 유신정권과 중앙정보부가 자행한 인권 유린에 관해 증언한 일, 전두환 신군부정권이 자행한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따진 그의 비판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 장은 헨더슨의 정치 담론을 담고 있다. 헨더슨의 한국 정치 담론은 한국 정치가 극복해야 할 일종의 유전병인 회오리정치 현상에 대한 원인 분석, 진단, 그리고 처방에 관한 논리적이고 일관된 주장이다. 그는 이 병리현상이 유전병이긴 하지만 사회의 유전병이지 혈통의 유전병은 아니라면서 따라서 “투병할 수도, 더욱이 고칠 수도 있다”고 진단한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감춰진 부분의 소묘
이 책은 국회프락치사건을 비롯해 1952년 부산 정치파동, 1950년 대한정치공작대 사건, 1980년 광주학살 등 여러 사건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미처 서울을 탈출하지 못한 중간파 지도자들 중 민세 안재홍, 윤기섭, 장건상 등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는 사실(117~120쪽). 헨더슨은 「북한방문기(1981)」에서 민세의 납북된 일자에 관해 프락치사건 피고인으로 북한에 간 최태규의 말을 인용하여 1950년 9월 22일 김규식과 안재홍이 평양에 도착했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천관우가 쓴 ≪민세연보≫에 의해 민세가 9월 21일 북한 정치보위부에 붙잡혀 26일 납북되었다고 알려지고 있었다(118쪽).
*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그리고 그 뒤 1953년 이승만이 주도한 휴전협정 반대 캠페인에 대한 미국의 대응과 관련하여 미국은 이승만의 제거 계획(이른바 에버레디 계획)을 심각하게 고려한 것으로 나와 있다. 지금까지 국내외 연구는 부산정치파동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1952년 6월 4일 국무부-합참 합동회의에서 이승만과 국회를 타협하게 하는 안이었으며, 이는 이승만에게 일방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고 되어 있다. 그 결과 한국의 의회주의는 당시 부산의 라이트너 대리대사가 본 것처럼 “겁에 질린 온순한 의회를 지닌 일당독재의 경찰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6월 4일 타협안이 마련된 뒤 더욱 강경해진 이승만에 대해 미 국무부는 6월 13일 이승만 체제 대체안을 마련했으며 이 대체안은 국무부-합참 합동회의에서 승인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이승만 대체안은 실행단계에서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고 마는데, 이것은 트루먼 행정부 최고위층의 확고한 의지가 결여된 가운데 현지 사령관 클라크 장군이 이 대체안의 실행을 깔아뭉갰기 때문이다(343~360쪽).
* 강원용 목사(2006년 타계)가 1974년부터 실시한 크리스천 아카데미운동 중 중간집단교육은 헨더슨이 중시한 중간매개집단에서 착상을 얻어 실시했지만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 아래 중앙정보부가 강권적으로 탄압하여 중단되었다(476~478쪽).
* 그 밖의 이야깃거리로는 이른바 ‘이영희사건’[당시 합동통신기자 이영희(리영희)기자의 헨더슨 인터뷰에 얽힌 사연]과 헨더슨의 반론(134~149쪽), 헨더슨이 얽혀든 이른바 ‘도자기 사건’의 진상(206~222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