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지물 박물관」
‘레스몰’이라는 축소지향의 디자인 업체를 운영하는 ‘나’는 어느 날 인터넷라디오 방송국의 피디인 ‘메이비’의 방문을 받는다. ‘나’는 ‘메이비’의 목소리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그가 맡겨온 라디오 디자인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만들어진 ‘안테나라디오’는 업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둔다. 이후 ‘나’는 ‘메이비’가 방송하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라디오방송의 ‘무용지물박물관’이라는 코너를 청취하며 디자인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완전한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눈이 저절로 떠지려고 했지만 나는 눈을 더 세게 감았다. 다시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메이비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어둠 속에다 잠수함을 그려보려고 했다. 메이비의 설명과는 전혀 다른, 내가 전에 알고 있던 잠수함이 자꾸 떠올랐다. 나는 눈앞으로 떠오르는 잠수함을 계속 침몰시키고 메이비의 잠수함을 그려보았다. [……] 수십 번을 시도한 끝에 한 대의 잠수함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엔 색이 없었다. 선만 있을 뿐이었다. 메이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우리가 잠수함이 한번 돼볼까요? 제가 자주 하는 놀이인데요. 욕조에 물을 받은 다음 스트로를 입에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에겐 그 스트로가 잠망경인 셈입니다.”
사무실에 욕조 따위는 없다. 하지만 욕조가 있었다고 해도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 눈앞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잠수함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_「무용지물 박물관」중에서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
사진작가인 ‘나’는 ‘싸이파이 매거진’에 발명가 특집 코너의 사진을 담당하며 ‘이눅’이라는 발명가를 만난다. 그는 개념발명가로 별다른 실제 발명품 없이 설계도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세상에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개념들을 생산해내고 있는 ‘이눅’의 발명에 대해서 담당기자와 ‘특이한 사람’ 이라고 여기고 있던 ‘나’는 ‘이눅’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그의 집이 바로 설계도에 있던 도면의 발명품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발명은 베끼는 건데요. 아니다. 전부 다 베끼는 거네. 베끼는 게 아니고 이어 붙이는 건가? 그러니까 세상에 없는 걸 만들면 발명인데, 벌써 다 있잖아요. 이누크가 만든 섬도 사실은 그래서 발명이 아닌 건데 어떻게 저는 그게 발명이라고 보이는 거죠. 세상이 전부 다 없어지면 섬만 살아 있으니까 미래의 발명인가 미리 발명인가, 다 없어지면 새로 생기는 건 전부 다 발명이죠?”
_「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중에서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오차 측량원으로 일하는 ‘나’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지도를 그리며 살아온 인생에 회의를 느낀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오차가 존재하고 완벽한 지도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캐나다에 있는 삼촌으로부터 정체불명의 물건을 소포로 받는다. 그리고 후배의 도움으로 그것이 에스키모 인들의 지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에스키모 인들의 지도라는 ‘나무 지도’의 읽는 법을 배우면서 그는 지도그리기에 천착해온 삶에서 잊고 살았던 어떤 의미를 깨닫는다.
에스키모들은 해변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해변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도를 그리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모두 동원합니다. 소리와 기억으로 지도를 만들지만 그들이 제작한 지도는 항공 사진으로 제작한 지도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에스키모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_「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중에서
「멍청한 유비쿼터스」
해커인 ‘나’는 ‘파이버’와 함께 대기업의 정보망을 해킹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리고 잠입한지 단 일주일 만에 철저한 보안으로 유지된다고 믿어지는 정보망을 해킹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철저하게 안내원 같은 안내원과, 철저하게 경비원 같은 경비원들을 만나며 그들의 관습적인 면모를 이용하여 오히려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너무 쉽게 믿으며 살아가고 있고 ‘나’는 이러한 관습적인 믿음을 이용해 뛰어난 해킹 기술 없이 기업의 정보망을 뚫게 된다.
인간들의 믿음이란 정보를 기반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가 믿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의사는 돈이 많을 것이라는 이미지, 변호사는 말을 잘할 것이라는 이미지, 소설가는 담배를 많이 피울 것이라는 이미지, 해커는 지저분할 것이라는 이미지. 인간들은 그런 이미지를 자신의 머리 속에 차곡차곡 저장해 놓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실이 모여 정보가 된다. 나는 그런 잘못을 정정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그 이미지를 이용할 뿐이다.
_「멍청한 유비쿼터스」중에서
「회색 괴물」
‘나’는 어느 날 매우 독특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타자기를 갖게 된다. 타자기가 고장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자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타자기를 수리할 방법을 찾는다. 우여곡절 끝에 타자기의 전 주인을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 타자기를 수리한다. 타자기의 전 주인은 그 타자기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물건이며 필요한 물건인지,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물건인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생명체라고 느낀다며 타자기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나’는 타자기를 그에게 주고나서 그와 헤어진다. 그리고 타자기를 소중히 들고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사물과 인간이 밀착되어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나는 팬티만 입은 채 다시 타자기 앞에 앉았다. 타자기에 종이를 끼우고 뭔가 쓰고 싶어졌다. 아니, 치고 싶어졌다. 말려 있던 종이를 꺼내고 프린트 용지함에서 A4종이 한 장을 꺼내 타자기에다 말아 넣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녀는, 이라고 시작해야 할까. 나는, 나는, 이라고 쳤다. 글씨는 거의 보이질 않았다. 나는 낭비하고 있다, 고 쳐보았다. 역시 보이지 않는다.
_「회색 괴물」중에서
「바나나 주식회사」
자전거를 좋아하던 ‘B’는 죽기 전에 ‘나’에게 암호 같은 메시지를 남긴다. ‘나’는 암호가 암시하는 어느 장소로 가기 위해 자전거 박물관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찾아간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 끝에 결국 ‘B’가 암시했던 장소를 찾아내고 그곳에서 ‘B’의 아버지일 것으로 짐작되는 노인과 만난다. 노인은 ‘나’에게 ‘어디에도 아무것도 짓지 말라’는 모토를 실천했던 ‘바나나 주식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진화가 가능한 현명한 존재로 만들 작정이었다면 삶을 한 번만 주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 거지. 삶이 두 번 주어진다면 실수도 줄어들 테고 만회할 여유도 생기겠지만 아쉽게도 기회는 딱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야. 그리고 그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어.”
_「바나나 주식회사」중에서
「사백 미터 마라톤」
‘나’는 오직 ‘사백 미터’ 달리기만 할 수 있는 ‘녀석’의 매니저이다. ‘나’는 사백 미터 달리기야 말로 다른 종목들 보다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녀석’은 사백 미터 외에는 달릴 수 없는 특이한 선수이다. 사백 미터가 넘으면 그는 멈춰버린다. 어느 날 ‘녀석’은 ‘나’에게 사백 미터에서 벗어나 마라톤에 함께 도전해 볼 것을 권한다. 내키지 않던 ‘나’는 결국 응낙하지만 어쩐 일인지 막상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리듬과 비트, 속도에 눈뜨면서 결국 발걸음을 떼게 된다.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렸다. 굉음 때문에 귀가 멍했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얼굴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오토바이의 운전대를 잡은 아이는 나를 돌아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네 스피드는 선물이야’라고. [……] 분노와 스피드는 닮은 데가 있다. 분노 때문에 스피드를 즐기기도 하니까. 그리고 분노와 스피드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 ‘과잉’의 느낌이 포함되어 있다. 제어가 불가능한 어떤 것 말이다.
_「사백 미터 마라톤」중에서
「펭귄뉴스」
세상은 전쟁 중이다. ‘나’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리고 여자친구 소희와 룸메이트인 찬기를 친구로 두고 있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마음에 꼭 드는 음성을 가진 여자의 방송을 듣게 되고 그 음성에 매혹된다. ‘나’는 ‘나’ 때문에 위험에 빠진 그녀를 구해주고 그녀와 함께 ‘비트 해방 전선’에서 일하게 되며 찬기는 군대에 가게 된다. ‘나’는 그녀의 도움으로 비트의 세계에 대해서 알아가고 그녀를 도와 해방운동을 벌이던 중 찬기의 동료가 쏜 총에 그녀를 잃는다.
나 역시 중독되고 싶어, 라고 그녀의 눈을 향해 속삭였다. 그녀는 P를 만나게 해줄게, 라고 낮게 중얼거렸다. P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안아주었기 때문이다. [……] 그녀의 가슴에서 쿵쿵쾅, 쿵쿵쾅, 하는 떨림이 전해져왔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트는 어쩔 수 없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비트는 그녀의 가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의 입술에서도, 그녀의 다리에서도, 그녀의 허벅지에서도, 그녀의 무릎에서도, 그녀의 깊은 곳에서도 비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몸 전체는 비트 그 자체였다. 비트뿐이었다. 오직 비트.
_「펭귄뉴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