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통독한 노학자의 지혜와 정이 갈피마다 배어난다!
우리 시조의 가락을 입은 깊고 그윽한 우리 한시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꽃이 한 송이씩 피어난다!
이 책의 저자 손종섭 선생은 1918년생으로 올해 아흔여덟의 나이다. 100세를 바라보는 지금 선생에게 “인생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우리 한문학 유산을 우리말로 풀어내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각 권이 600페이지에 달하는 선생의 저서 《옛 시정을 더듬어 上, 下》를 보면 선생은 유독 사람 사이의 정情에 천착하고 있다. 흔히 한문학자라고 하면 고루한 이미지처럼 인륜이나 도리에 대해 말할 법한데도 선생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오직 마음밭을 가꾸는 일로서만 가능하다”며 그 첫 번째 조건으로 ‘정’을 꼽는다. 이 책의 표제이기도 한 이제현의 [손끝에 남은 향기(小藥府 濟危寶)]의 번역과 해설을 보면 선생의 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손끝에 남은 향기
이제현
수양버들 시냇가에 비단 빨래 하노라니
흰 말 탄 선비님이 손잡으며 정을 주네.
손끝에 남은 향기야 차마 어이 씻으리?
浣紗溪上傍垂柳 執手論心白馬郎
縱有連?三月雨 指頭何忍洗餘香
〈小藥府 濟危寶〉
손끝에 배어 있는 정겨운 선비님의 향기로운 체취! 그 향내가 아무리 진하기로서니, 굳이 씻고자 한다면야, 봄철의 처마물과 같은 좋은 세제가 없는 바도 아니니, 못 씻을 것도 없지마는, 차마 잊혀지지 않는 그 연연한 그리움을 지워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부정不貞한 사련邪戀에 대한 윤리적 죄책감과, 차마 잊을 수 없는 연연한 그 그리움과의, 갈등과 방황과 고뇌를 토로吐露한, 한 여인의 진솔 대담한 고백이다.
윤리보다 앞서는 그리움과 사랑, 이것이 인간의 진솔한 본성이다. 선생은 이 책에서 우리 한시 280수를 사랑, 이별, 기다림, 그리움, 회고, 연민, 무상, 정한 등 18가지 주제로 나누어 묶었다. 놀라운 것은 한문의 두터운 옷을 입고 있던 우리 한시를 옛 시조의 아름다운 가락으로 번역한 것이다. 시의 풍미를 더해주는 따스하고 유려한 촌평을 읽는 멋도 이채롭다. 그렇다고 해서 아름다운 감상만을 풀어놓은 것은 아니다. 인간 사이의 정을 그리도 중히 여기는 선생이기에, 인간이 인간 됨을 방해하는 무참한 전쟁에 대한 격노를 드러내기도 한다.
임란 후 고향에 돌아와서
장현광
고향 생각 못 견디어 전나귀 채쳐 천 리를 왔네.
철은 옛날인 양 봄빛 가득하다마는
마을은 인기척 없는 폐허일 뿐이어라!
산하엔 비바람, 해달도 막혔던 터라,
번화턴 옛 자취는 여지없이 다 찢기어
천지의 개벽 당초가 이랬을까 싶구나!
不堪鄕國戀 千里策蹇驢
節古春光滿 人消境落虛
山河風雨後 日月悔塞餘
剝盡繁華跡 渾如開闢初
〈亂後歸故山〉
임진왜란 칠 년을 치르고 난 고향의 몰골이다. 봄이라 꽃은 예나 같고 산천도 퍼렇게 초목은 무성하다마는, 사람 없는 빈 마을은 그저 적막하기만 하다. 집도 세간도 다 부셔졌으니, 고향이라 돌아와도 몸 붙일 데가 없다. 앞으로 몇 사람이나 살아 돌아올 것이랴? 저 몹쓸 침략자여! 호전자여! 영원히 저주받을진저! 영원히, 영원히….
이러한 선생의 염전厭戰 사상에는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사상의 대립과 분단의 아픔이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선생은 한 인터뷰에서 해방 이후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처신의 어려움과 비인간적 사상들에 대한 환멸을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선생의 인간 됨에 대한 추구는 집요하다 할 정도로 굳건하다. 누구나 우국충정의 단심丹心으로 읽었던 이순신의 시에서 선생은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진솔한 고뇌를 끄집어낸다.
한산섬 달 밝은 밤
이순신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歌는 나의 애를 긋나니?
閑山島月明夜 上成樓
撫大刀深愁時
何處一聲羌笛更添愁
〈閑山島歌〉
이는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실려 있는, 윗시조의 한문 표기다. ‘깊은 시름하는 적에’의 ‘시름’을 모두들 ‘우국심憂國心’으로 풀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원시에도 확실하듯이 ‘갱첨수更添愁’, 곧 ‘다시 시름을 보태는고?’ 했으니, 우국심에 덧붙여진 일신상의 시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피리 소리로 말미암아 얻게 된 시름은 개인적인 사사로운 시름, 곧 집에서 애티우고 있을 늙은 어머니며 처자에 대한 시름, 곧 장군 이순신으로서가 아닌, 인간 이순신으로서의 시름인 것이다.
한산도에서의 또 다른 시에서의 ‘시름(憂心)’도 물론 마찬가지다.
바다에 가을 저무니 기러기 떼 높이 떴다.
‘시름겨워’ 뒤척이며 잠 이루지 못하는 밤
싸늘히 지새는 달이 활과 칼을 비추는고!
水國秋光暮 驚寒雁陣高
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
〈閑山島夜吟〉
옛 시에서 사람의 감정을 집어내고 표현해내는 선생의 능력은 한문 해석에서부터 유려한 해설에 이르기까지 매우 수려하다. 이러한 노력은 이건창의 [어린 것이 곡할 줄 몰라(悼亡)]에 대한 해설에서 절정을 맺는 듯하다. “애고 애고” 울음소리를 흉내 내던 아이에게서 진실한 울음이 터지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사람의 가슴, 가장 밑바닥에 닿는다. 다른 어떤 유명한 시인의 시도 아닌, 어린아이의 순수한 울음 앞에서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이성의 외피가 무너지고 인간 본연의 정情에 가 닿는 것이다.
어린 것이 곡할 줄 몰라
이건창
어린 것이 곡할 줄 몰라 글 읽는 듯하더니만,
홀연 터뜨린 아이 울음 목이 메는 서러움에
잇따라 구슬 눈물을 줄줄이 쏟고 있다.
小兒不知哭 哭聲似讀書
忽然啼不住 ??淚連珠
〈悼亡〉
곡이란, ‘애고 애고’나 ‘어이 어이’로 형식화, 규격화한 울음이다. 속에서 북받쳐 나오는 자연성의 울음이 아니라, 예절이란 미명 아래 만들어진 인조 울음이며, 울음처럼 흉내 낸 사이비 울음이다. 슬픈 듯 시늉하는 가짜 울음이요, 슬픔을 과장하는 헛된 울음(虛哭)으로, 심하면 대곡代哭까지 등장하게 되는 광대 울음이기도 하다.
어미 죽은 아이에게 ‘애고 애고…’ 하라 가르쳐준들, 그것이 제 고저대로 목 잡힐 리가 있나? 글 읽을 때의 목 고저로 글 읽듯 하고 있더니, 문득 어느 순간 진짜 울음보가 터지고 만 것이다. 엉엉 목이 메는 진짜 울음! 그것이다. 바로 그 아이 울음!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몸부림치며 우는, 그 진짜 울음 길로 들어선 것이다. 어찌 쉽게 그쳐지랴?
“이 책에서 다룬 작품들은 각계각층이 망라되어 있는 가운데서도, 당시에 설움받던 계층의, 설움에 겨운 목소리들을 더 많이 발굴해서 실었다. 소처럼 서럽게 살다 간 서러운 목소리들! 한평생 하소연할 길 없이 억울하게 살다 간, 그 넋들을 조상弔喪하면서―.” 선생이 쓴 머리말의 말미다. 젊은 날을 병마의 고통으로 보내고 일흔이 넘어서야 건강을 회복한 선생은 그간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한없이 서럽고 고통스러웠던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한문학 유산과 시조 가락으로 풀어냈다. 인생을 통독한 노학자의 지혜와 정이 갈피마다 배어 있다. 독자제현들의 일독을 권한다.